56. 메마른 땅에 핀 꽃
청명한 가을 하늘 끝자락으로 붉은 가을 산이 비단처럼 펼쳐졌다. 수자를 놓은 듯 물든 빛깔이 계절의 깊이를 더해주었다.
열린 덧창으로 제법 싸늘한 바람이 스며들었다.
“이제 곧 겨울이겠구나.”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던 윤성은 귓전을 두드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황금빛 아침 햇살이 가득한 사랑채에는 묵향기가 진동했다. 영안부원군 김조순이 먹물을 머금은 붓을 한쪽으로 갈무리하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난 한 그루가 화선지를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굵고 길게 뻗어나간 잎사귀가 강직하고 고집스러워 보인다.
가늘고 연약하면서도 대쪽 같은 풍미를 즐기는 것이 난을 그리는 멋이거늘.
윤성의 미간이 보일 듯 말 듯 찡그려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표정을 지워낸 채 할아버지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난 치는 데 집중하던 부원군 김조순이 윤성을 향해 시선을 들어올렸다.
“지난 밤, 대전의 윤 내관이 다녀갔다.”
“그랬습니까?”
윤성이 예의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사람의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깃들지 않은 가면 같은 웃음이었다.
그러나 그 웃음을 바라보는 김조순의 눈빛에는 흡족함이 서려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영민하기가 왕세자 이영과 견주어도 나무랄 데가 없는 손자였다. 그러기에 거는 기대도 컸다.
“요 며칠, 주상전하의 행동이 심상치가 않다고 하더구나.”
윤성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른 아침부터 사랑채로 불러 무슨 일인가 궁금하던 차였다. 난까지 치시는 걸 보니 심각한 일일 거라 어림짐작만 하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할아버지는 주상전하에 대한 일을 입에 올렸다.
윤성이 감정이 깃들지 않은 목소리로 제 생각을 아뢰었다.
“심약하신 분께서 가배 연회로 인해 충격을 받으신 듯합니다. 중신들의 행동이 그분께는 상처가 되었겠지요.”
“조정대신들이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일이 어찌 중신들의 잘못이겠느냐. 섣부른 치기로 우리들을 길들이려 했던 무모하신 세자로 인해 생긴 일이거늘.”
“이 일로 주상전하께서 새로운 마음을 잡으신다고 하셔도 이상할 것은 없겠지요.”
“새로운 마음이라…….”
김조순이 홀연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부원군은 이내 하얀 화선지 한 장을 새로 깔고 다시 붓에 먹물을 찍었다.
곧게 세운 붓이 물이 흐르듯 종이 위로 미끄러졌다. 이윽고 백지를 검게 물들이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마리의 잉어다.
“세상의 모든 것은 타고난 그릇이 있는 법. 난은 제가 태어난 바위틈을 떠나지 못하고, 잉어는 물을 벗어나지 못하는 법이다.”
“주상전하께서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주상전하께오선 현명하신 분이지. 자신의 그릇이 어떤지 잘 알고 계시니까 말이야. 무릇 성군이란 항시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보면 주상전하께오선 성군 중에서도 성군이시다. 지금의 태평성대 또한 그분의 덕이라 할 수 있으니.”
윤성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명백했다.
무릇 군주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이른바 허수아비가 되어야 성군이 된다는 의미였다.
또한, 그래야만 임금의 그늘에 앉은 할아버지께서 천하를 경영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세자저하께선 참으로 부족한 분이시지.”
김조순의 말에 윤성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세자저하를 부족하다 말하시는 분은 아마 할아버님이 유일하실 것이옵니다.”
“허허허. 물론, 재능이야 차고도 넘치는 분이시지. 아니아니. 오히려 지나친 면도 없지 않아. 그래서 문제라는 게다. 무릇 그릇이라는 것은 오목한 부분이 있어야 무언가를 담을 것인데, 세자저하께오선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담고 계시니. 불룩 튀어나온 그릇에는 더 이상 담을 게 없단 뜻이기도 하지. 그래서 부족하다는 게야. 재능이 넘치면 보지 않아도 될 것도 보고, 보지 말아야 할 것도 보게 되니까 말이다.”
영에 대한 김조순의 말은 참으로 의미심장했다.
또한, 서슬 퍼런 날이 서 있었다.
조선의 주인이신 주상전하마저도 어려워하지 않는 부원군이건만, 아직 보위에 오르지 않은 세자저하는 경계가 되었다.
그릇이 넘치고 재능이 과하신 분, 보지 말아야 할 것도 보는 재주를 가지고 있으니. 임금을 대신하여 권력을 휘두르는 김조순으로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김조순이 잉어의 비늘을 그리며 물었다.
“도모하던 일은 어찌 되었느냐?”
“사람을 들이는 일이라 제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군요.”
붓이 움직임을 멎었다.
김조순은 여전히 붓과 잉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별일이 다 있구나.”
“저라고 모든 일이 다 수월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 사람이 하는 일이니, 제 맘 같기만 하지는 않겠지. 한데 말이다.”
김조순이 고개를 들고 윤성을 바라보았다.
“네 표정이 예전과는 다르구나.”
“무엇이 다르다는 말씀이십니까?”
“메마른 땅에 한 그루 꽃이 피었어.”
윤성이 입가를 좌우로 길게 늘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소손은 어리석어 할아버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메마른 땅에 꽃이라니. 무슨 뜻이옵니까?”
정말로 김조순의 말뜻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메마른 땅은 바로 윤성 자신을 말하는 것이고, 꽃은 메마른 땅에 필 수 없는 어떤 것. 즉, 인정(人情)을 뜻하는 것이리라.
김조순은 혹여 인정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 않는지 묻고 있는 것이고, 윤성은 애초에 인정이 무엇이냐고 되묻고 있었다.
“혹여,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물러나 있어라. 그 일은 다른 자에게 맡길 것이니.”
무심하던 김조순의 얼굴에 언뜻 비정함이 서렸다.
윤성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시작한 일이니, 제가 마무리 지을 생각입니다.”
“믿어도 되겠느냐?”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옵니다.”
붓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섬세한 붓끝이 미끄러지듯 움직여 잉어의 지느러미를 그려냈다.
“잊지 말아라. 홍경래의 자손들은 사냥을 위한 사냥개에 불과하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잡아먹는 것처럼, 그들 역시 우리가 도모했던 일이 끝나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윤성의 막힘없는 대답에 김조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되었다. 그만 나가 보거라.”
윤성이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물러났다.
김조순의 마지막 말이 그의 등 뒤에 쐐기처럼 박혀들었다.
“아무리 너라도 실패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행여, 인정에 휩쓸려 대사(大事)를 그르치는 일이 생겨서는 아니 될 게야.”
윤성이 웃는 낯을 한 채 할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다녀오겠습니다.”
문이 닫혔다.
김조순이 화선지 위를 노닐던 붓을 잠시 들었다.
그 사이 먹으로 그린 잉어가 거의 완성되었다. 물 위를 뛰어오르듯 역동적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아직 눈동자만을 그리지 못했을 뿐.
김조순은 붓을 멈추고 자신이 그린 잉어를 내려다보았다.
눈만 그리면 되는데, 이 눈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언제나 그랬다.
모든 것이 완벽한데 딱 한 가지가 부족했다.
“역시 자리가 마땅치 않구나.”
천하를 아우를 권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의 자리는 언제나 임금의 그늘이었다. 뜻과 자리가 걸맞지 않으니 마지막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쯧쯧.”
나직이 혀를 찬 김조순은 끝내 마지막 눈을 그리지 못하고 그림을 구겨버렸다.
“다음에는 눈부터 그려야겠군.”
***
노둣돌 아래로 내려선 윤성은 청명한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일을 서둘러야겠구나.”
할아버지의 재촉이 심상치가 않았다.
때가 무르익었음이라.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을 꼬여내기가 쉽지가 않단 말이야.”
이른 새벽, 라온을 찾아갔던 것을 떠올리던 윤성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메마른 땅에 핀 꽃이라.”
할아버지답지 않게 별스런 말을 다 하시는군. 그나저나 메마른 땅에 꽃이라…….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러나 만약, 정말로 메마른 땅에 꽃 한 송이가 피어있다면 뽑아버리고 싶진 않으리라.
그 척박한 곳에서 어찌 뿌리를 내리고 사는지 신기하고 또 궁금하니 고이 모셔두고 관찰하고 싶어지리라.
그렇다고 큰 기대는 품지 않을 것이다. 곧 다시 시들고 말 것이니, 메마른 땅에선 결코 꽃은 자랄 수 없는 법이니 말이다.
집을 나선 윤성은 곧장 동궁전으로 향했다. 다시 한 번 라온을 만나 볼 생각이었다.
그러다 동궁전 근처에서 익숙한 인영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동궁전 밖으로 걸어 나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 둘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세자저하가 아니신가?”
복장을 보니 잠행을 나선 것이 틀림없었다. 세자저하의 잠행이야 익히 알고 있는 바, 이상할 것은 없었다.
다만, 그 뒤를 쫓는 작은 사내의 존재가 눈에 거슬렸다.
사내 복장을 한 라온이었다.
두 사람은 곧장 궁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자신에게는 그리 궁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강경하게 거부하던 라온이 영의 뒤를 쫓아 스스럼없이 궁을 나서고 있었다.
지켜보던 윤성의 눈에 일순 뜨거운 기운이 치밀고 올라왔다.
도란도란 영과 대화를 나누며 웃고 있는 라온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이 바늘로 찌르는 듯 따끔거렸다.
“어디로 가는 길인지 궁금하군.”
윤성은 조용히 영과 라온의 뒤를 쫓았다. 처음 의도는 영을 관찰하는 것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시선은 라온에게로 집중되었다.
라온의 해맑은 표정이, 영을 향해 짓는 웃음이 그의 눈동자에 가시처럼 박혀들었다.
그녀와 마주보고 있는 영의 표정도 마음에 걸렸다. 목 밑에 가시라도 박힌 듯 껄끄러웠다.
저 눈빛, 저 표정은 사내를 대하는 눈빛과 표정이 아니었다.
저것은 마치…….
문득 윤성의 눈에 이채가 스며들었다.
“보기보다 음침한 구석이 있는 분이라니까.”
작게 입속말을 중얼거리는 윤성의 뇌리에 어떤 확신이 떠올랐다.
세자께선 눈치를 챈 것이 틀림없었다. 마침내 영이 라온의 정체를 눈치를 챈 것이다.
애초에 윤성이 의도했던 바였다.
며칠 전, 여인의 복색을 한 라온과 영의 의도치 않은 만남 역시, 사실은 윤성이 계획한 것이었다.
라온이 사내가 아닌 여인인 것을 영이 알아야 했다. 그래야 라온을 의심할 터이고, 뒤를 캘 것이며 결국엔 정체를 알아차릴 테니까.
하지만 의도와 달리 영은 라온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때는 여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의 병이 생각보다 심각한 중증이라 생각하고 가볍게 넘어갔다.
그런데 오늘 보니 아니었다.
영은 라온이 여인임을 진즉에 알아봤다. 그럼에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던 것이다.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윤성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그려졌다. 의도한 바대로 되었는데, 어째서인지 마음속으로 찬바람이 불어왔다.
어이하여 이런 것일까? 왜 이런 마음이 되는 거지?
왕세자께서 생각한 바와는 다르게 라온을 내치지 않아서?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시치미 떼는 것 때문에?
그조차도 아니면…… 영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라온 때문일까?
***
윤성은 거리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누각의 이 층에 앉아 영과 라온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더 따라간다 해도 건질 것이 없는 듯했다.
영과 함께 있는 한 라온에게 접근할 방도가 없었던 까닭이다.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나야겠군.”
윤성이 마음을 접고 자리를 뜨려 할 때였다.
하늘이 도우셨던 것일까?
때마침 영이 라온을 남겨둔 채 어딘가로 가는 것이 보였다. 서두르는 모양새를 보니, 무언가 급한 용무가 있는 듯했다.
홀로 남게 된 라온을 본 윤성의 얼굴에 의식하지 않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녀와 만나야 하는 운명인 모양이다.
영과 헤어진 라온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이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귀엽게 느껴졌다.
여인의 모습이었으면 더 보기 좋았을 것을.
한 가닥 아쉬움을 뒤로한 채, 윤성은 라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누구십니까?”
깜짝 놀란 라온이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십니까?”
“참의영감!”
라온의 커다란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라온에게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윤성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너무도 바빠서 궁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실 수 없다던 바로 그 홍 내관이 아니십니까?”
“하하하하.”
라온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어색한 웃음이 밉지가 않았다.
문득,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꽃 이야기가 떠올랐다.
혹, 메마른 땅에 어울리지 않는 꽃 한 송이가 라온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야.
윤성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그럴 리 없어.
***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제가 그리 부탁했을 때는 단호히 거절하신 분이…….”
윤성이 잔뜩 불퉁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라온은 난감한 표정으로 그를 달랬다.
“그런 표정 그만하십시오. 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이해해 달란 말입니다. 그냥 놀러 나온 것처럼 보여도 사실 이건 일입니다, 일.
마음 같아서는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그러나 지은 죄가 있는지라. 라온은 윤성의 마음을 풀어주는 데 급급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니 그만 마음 푸십시오. 제가 이리 나온 것은 일의 연장선입니다. 꼭 필요한 일이라 어쩔 수 없이 나온 겁니다.”
“하아. 정말 홍 내관께 실망하였습니다. 제가 그리 부탁하였는데……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참의영감…….”
“간절한 마음으로 드린 부탁이었습니다. 저도 꼭 필요한 일이었단 말입니다.”
라온의 한숨이 깊어졌다.
이분은 왜 이리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시는 것일까?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라온을 향해 윤성이 다시 물었다.
“일 때문에 나오신 거라 하셨습니까? 대체 그 일이 뭡니까?”
“아, 그러니까…… 아는 분의 일을 조금 돕는 것이었습니다.”
윤성에게 왕세자 영과 나왔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하여, 라온은 그저 아는 분이라는 말로 둘러댔다.
“아는 분이요?”
윤성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시늉을 해보였다.
“어느 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분께서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잠시 어딜 가셨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마침 잘 됐습니다.”
윤성이 손바닥을 마주치며 예의 소년 같은 미소를 지었다.
문득 라온의 등줄기로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윤성의 저 밝은 표정과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 설마…….
“그 부탁, 다시 들어주시겠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윤성의 입에서 예상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라온은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여인의 복색은 절대 안 됩니다.”
“하하하. 이번에는 그런 부탁이 아닙니다. 그저 저와 함께 제가 좋아하는 분을 위해 선물을 골라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잠시 시간이 났을 때, 어머니랑 단희를 보러 가고 싶었는데.
라온은 품에 안고 있는 보퉁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거절하기에는 윤성의 눈빛이 너무도 간절해 보였는지라.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앞장서십시오.”
***
잠시 후.
라온과 윤성은 여인의 장신구를 만들어 파는 공방 앞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다.
공방의 늙은 여주인은 두 사람의 앞에 장신구들을 즐비하게 늘어놓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 나비잠으로 말씀 드리자면 나비 날개에 촘촘하게 박힌 자수정이 특징입지요. 머리에 꽂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비가 마치 날갯짓을 하듯 날개를…….”
“설명은 그쯤하면 되겠소.”
여주인의 말을 끊은 윤성은 대뜸 나비잠을 들어 라온의 머리에 대보며 물었다.
“이건 어떠십니까?”
“네?”
“홍 내관이 보기에 이건 어찌 보이냐 묻고 있습니다. 내가 보기엔 이 나비잠도 예쁘고, 아까 보았던 홍옥 노리개도 고와보입니다. 여기 있는 꽃잠도 예쁘니…… 어느 걸 골라야 할지 도통 갈피가 잡히지 않는군요.”
말을 하던 윤성이 이번에는 꽃잠을 라온의 머리에 이리저리 대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황한 라온은 서둘러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왜 자꾸 제게 대보는 것입니까?”
“그럼 누구에게 대보란 말입니까? 그렇다고 제 머리에 꽂아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니 잠시만 가만있어 보십시오. 그냥 모양만 보는 겁니다.”
“그래도…… 사내인 제게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라온은 공방 여주인을 눈치를 살피며 윤성에게 항의하듯 말했다.
그때, 두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여주인이 끼어들었다.
“아이고, 사내면 어떻고 여인이면 또 어떻습니까? 이리 고우신데요.”
“네?”
“참말로 곱습니다요. 무슨 사내가 이리 곱단 말입니까요? 어지간한 계집은 이 도련님 앞에서는 얼굴도 못 내밀겠습니다요.”
여주인의 칭찬에 라온의 얼굴이 붉어졌다.
힐끔, 그 모습을 곁눈질하던 윤성이 여주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하하, 그렇지요? 이 사람이 이리 곱습니다. 이러다 특별한 정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윤성의 농담에 여주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이리 계집 뺨치게 생기신 분이시니. 특별한 정이 생긴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요.”
“하하하, 내 말이 그 말입니다.”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일순, 라온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이 사람들이! 둘 사이에서 엉거주춤 서 있던 라온은 서둘러 자수정이 박힌 나비잠을 집어 들었다.
“제 생각에는 이게 제일 예쁜 것 같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네, 그러니 이걸로 하시고 그만 나가시지요.”
“그럴까요? 이걸로 주시오.”
윤성이 나비잠에 대한 셈을 치루는 사이, 라온은 서둘러 공방을 나섰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만큼 했으니 저도 할 만큼 한 겁니다.
그러나 채 몇 발짝 떼기도 전에, 헐레벌떡 뛰어나온 윤성에게 팔을 붙잡히고 말았다.
“아직 이걸 선물로 하겠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네? 그럼……?”
“이번엔 비단이나 한번 볼까요?”
“또요?”
“공방 주인이 말하는데 저쪽으로 가면 보기 드문 귀한 비단을 파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윤성은 직각으로 꺾어진 골목길을 고갯짓 해보이고는 앞장 서 걷기 시작했다.
마지못해 뒤따르며 라온이 소리쳤다.
“비단까지만 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일이 있어 나온 길이란 말입니다. 술시 전에는 아까 만났던 장소로 돌아가야 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홍 내관께서 진심을 다해 저를 도와주신다면 그전에 일을 끝마칠 수…….”
불현듯 골목 안쪽으로 사라진 윤성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이윽고 느닷없는 침묵이 이어졌다.
불퉁한 얼굴로 뒤쫓던 라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의영감? 참의영감, 무슨 일 있습니까? 왜 이리 조용하신 겁니까?”
그녀의 부름에도 윤성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라? 무슨 일이지?
라온은 서둘러 골목길로 들어갔다.
어두운 골목 안,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다.
윤성이었다.
깜짝 놀란 라온은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둔탁한 소리와 함께 뒤통수로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누군가 묵직한 몽둥이로 그녀의 뒤통수를 후려친 것이다.
느닷없는 일격에 물속을 부유하는 듯 몸이 허청거렸다. 잡을 것을 찾아 허공으로 뻗은 손이 자꾸만 흐릿하게 보였다.
몽롱한 의식 사이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잡았다.”
“어떻게 할까요?”
“그곳으로 옮겨라.”
대체 무슨 일이지?
지금까지 살면서 이리 뒤통수를 맞을 만큼 누군가에게 원한 살 일을 한 적은 없는데…….
물어보고 싶었다.
왜 이러십니까? 혹여, 사람을 잘못 본 것은 아닙니까?
하지만 채 입을 열어 묻기도 전에, 라온의 의식은 급격하게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