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나는…… 여인이 좋다!
라온은 이른 새벽길을 걷고 있었다.
‘아, 뭔가 봐서는 안 될 걸 본 것만 같단 말이야.’
하룻밤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간밤에 보았던 영과 병연의 모습이 쉬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어디 그뿐일까? 이리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졌다.
화초저하와 김 형처럼 그리 잘난 사내들이 어찌하여…….
라온은 안타까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나저나 소양 공주께는 뭐라고 말씀을 드린다?”
소양 공주께서 아무리 노력을 하신다 한들 세자저하께서는 곁을 내어주시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여인에게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지요……라고는 말 못 하겠고. 대체 어찌한다?
라온이 근심할 때였다.
“홍 내관, 홍 내관.”
라온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도기가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 도 내관님! 태평관으로 가신 이후로 한동안 얼굴을 뵙지 못했는데. 어찌, 잘 지내시옵니까?”
라온이 반색했다.
“난 잘 지낸다네. 그러는 자네는 어찌 지내는가?”
“저도 덕분에 무탈하옵니다.”
“그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소식이 없더라도 무탈하면 그만이지. 그런데 자네, 그 소문 들었는가?”
아! 이 양반. 요 며칠 소식이 없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이상하다 했더니, 궁 안의 소문을 전해주시려고 일부러 찾아다니신 거로구나.
어쩌면 궁 안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문이요? 무슨 소문 말이옵니까?"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도기가 라온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듣자하니 성 내관께서 뉘에게 심하게 맞았다고 하더군. 당분간은 운신도 못 할 정도라고 한다네.”
“성 내관님이요? 어쩌다 그리 되었답니까?”
“낸들 알겠는가.”
“혹여 앙심을 품은 자가 그리 한 것이 아닐까요?”
“그건 아닌 모양일세. 듣자하니, 성 내관님의 품계가 종9품의 상원으로 그 품계가 낮아졌다고 하네. 게다가 말일세. 마종자, 아니 개종자 그놈은 관직을 삭탈 당하여 다시 견습내시가 되었다고 하니. 아무래도 웃전의 노여움을 크게 산 모양이네”
“그런 일이 있었사옵니까?”
“소문으로는 궁에서 쫓겨나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로 큰 죄를 지었다고 하네.”
“정말 큰 죄를 지었나 봅니다.”
“무슨 죄를 지어 그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 속이 후련하네.”
잔뜩 웃음을 짓던 도기가 다시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아이고, 홍 내관에게 이 기쁜 소문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에 너무 지체하였네. 그럼 나는 이만 가 볼 것이니.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만나 하세.”
“네. 살펴 가시옵소서.”
궁이란 이런 곳이구나.
한 발 내딛는 것이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 조심스러운 곳, 자칫 잘못 발을 옮겼다간 천길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칠 수 있는, 그런 무서운 곳이 바로 궁이라는 곳이었다.
새삼, 궁의 두려움을 느낀 라온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설마, 그 두 사람의 불행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 한 채 말이다.
“뭘 그리 중얼거리십니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라온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 깜짝이야.”
라온의 눈앞으로 한 쌍의 새카만 눈동자가 불쑥 다가왔다. 이윽고, 예의 부드럽게 미소 짓는 윤성의 얼굴이 라온의 눈에 들어왔다.
***
“안녕하십니까?”
“참의영감이 아니십니까? 이른 아침부터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어찌 지내는지 궁금하여 와 봤습니다.”
“네? 단지 그것이 궁금하여 여기까지 걸음하셨다는 것입니까?”
“네. 그것이 궁금하여 걸음하였습니다.”
“바쁘지 않으십니까? 전에 보니 처리할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데…….”
“당연히 바쁘지요. 하지만 홍 내관을 만나는 일은 그보다 더 급하답니다. 그래서 만사를 다 제쳐두고 왔습니다. 하하하.”
라온이 빙긋 웃었다.
“무슨 그런 농담도. 짓궂으십니다.”
“농담이 아니에요. 진심입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게 무슨 볼일이십니까?”
농담인지 진심인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던 윤성이 문득 고개를 숙여서 라온의 귓가에 소곤소곤 속삭이듯 물었다.
“음 그런데 홍 내관, 언제가 좋을까요?”
“네?”
귓불을 간질이는 입소리에 라온은 어깨를 움츠려 피하며 반문했다.
“저잣거리 나가는 것 말입니다. 언제가 좋을까요?”
“네? 또 저잣거리로 나가자는 말씀이십니까? 안 됩니다. 저는 너무 바빠 그럴 짬이 없습니다.”
“이 궁에 환관이 몇 명이나 되는 줄 아십니까? 일은 얼마든지 바꿀 수가 있지요. 그러니 말씀해 보십시오. 언제가 좋을지.”
“그래도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아 참! 지난번의 그 옷은 마음에 드셨습니까?”
“네? 예쁘긴 하지만 저에겐 과분한 옷입니다. 입지도 못할 옷입니다. 그러니 돌려드리겠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씀 하지 마십시오.”
속내를 빤히 꿰뚫는 눈빛으로 라온을 바라보며 윤성은 낮게 웃었다. 그러다 이내 웃음을 거두며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리 홍 내관을 찾아온 것은…….”
“좀 전엔 그저 제 안부가 궁금하여 왔다고 하질 않으셨습니까?”
“네. 안부도 궁금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겸사겸사’라고나 할까요?”
“겸사겸사였군요.”
“네.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부탁이라는 윤성의 말에 라온은 펄쩍 뛰었다.
“부탁이라뇨? 저는 이미 참의영감의 소원을 들어드렸습니다. 한 번만 옷을 입어 달라고 소원하셔서 소원대로 여인의 옷을 입어드리지 않았습니까?”
“네. 그리하셨지요. 하지만 정작 그때 저잣거리고 나갔던 본래의 목적은 마치지 못하고 오지 않았습니까? 그때 제가 좋아하는 분께 드릴 선물을 사러 나갔었는데. 끝내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돌아왔던 거 기억나지 않습니까?”
“네?”
설마…… 그 부탁이라는 것이 궁 밖으로 나가자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그러니 한 번 더 궁 밖으로 저와 나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혹시나 하였더니, 역시나였다.
라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더는 궁 밖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홍 내관, 부탁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게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윤성의 부탁을 단호히 거절한 라온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라온의 태도에 윤성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쉽지 않네.”
문득 윤성의 얼굴에 매혹적인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러면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하나?”
***
한편, 윤성과 헤어져 동궁전으로 향하는 라온은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매번 그러시다니. 참의영감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리 말씀하시는 것인지 모르겠다니까. 아무래도 나를 놀리시느라 그러시는 것 같은데. 가만 보면 내 주위에는 날 놀리려는 사람들밖에 없는 것 같단 말이야.”
화초저하도 그러시고, 참의 영감도 그러시고.
라온이 못마땅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나도 나름 바쁜 몸인데 말이야.”
혼잣말을 듣기라도 한 것일까?
동궁전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최 내관이 다가왔다.
“이보게, 홍 내관.”
“최 내관님.”
“서두르시게. 세자저하께서 자네를 찾아계신다네.”
“저하께서 저를요?”
세자께서 라온을 찾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여인과 마주하였을 때.
그러나 막상 영의 처소에 들어갔을 땐, 그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세자저하, 홍 내관 들었사옵니다.”
최 내관의 말에 내내 서책을 들여다보던 영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찾아 계시었사옵니까?”
라온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영을 응시했다.
영이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홍라온.”
“네.”
“궁 밖으로 나갈 것이다. 그러니 채비해라.”
“네? 궁 밖이라고 하셨습니까?”
방금 전, 궁 밖으로는 절대 못 나간다고 거절하고 오는 길입니다만.
***
무슨 영문인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라온은 영을 따라 궁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궁을 나온 영은 라온을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높은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고택 앞에 멈춰 섰다.
미리 언질을 받았는지 늙은 하인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하인은 서둘러 그들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이윽고 두 사람이 안내받은 곳은 휘황찬란하게 꾸며진 내실이었다.
“납시었나이까?”
이번에도 기다리고 있었던 듯 하늘 선녀보다 아름다운 여인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익숙한 태도로 영이 상석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는 엉거주춤 서 있는 라온에게 눈빛을 건넸다.
“뭐하고 서 있는 거야? 여기 와서 앉질 않고.”
톡톡,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영이 말했다.
“저도 앉는 겁니까?”
“네가 앉아야 하는 자리다.”
“네? 제가 앉아야 하는 자리라뇨?”
“너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니. 당연히 네가 앉아야 하는 자리지.”
“노고라 하심은……?”
“며칠 동안 연회다 뭐다 하여 내 곁을 잘 보필한 상으로 내리는 것이니. 그러니 이리 와서 앉아라.”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다.”
“하오나……”
“간밤에 명온이 찾아와 나를 천하의 못난이라고 몰아붙이더구나.”
“명온 공주님께서요?”
“그래. 자기사람에게 끼니도 제대로 안 먹이는 아주 악덕 군주로 말하더구나. 수일 내로 너를 푹푹 살찌우지 않으면 더 이상 가만있지 않겠노라고 엄포를 놓고 돌아갔어.”
아! 명온 공주님께서……. 먹고 싶은 것이 뭐냐고 어제 그리도 집요하게 물으시더니, 결국은 화초저하까지 찾아간 모양이다.
담대하기도 하시지.
감히 일국의 왕세자를 겁박할 수 있는 간 큰 공주님이 세상 천지에 또 있을까?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러니 어서 와서 푹푹 살이 찌도록 먹어라.”
“아,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정말이냐?”
“정말입니다.”
“정말이지? 이번만 묻고 안 물어볼 것이다. 정말 괜찮으냐?”
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온은 냉큼 영의 곁에 자리 잡고 앉았다.
이윽고 정갈하게 놓인 음식접시들이 라온의 앞에 길게 정렬하였다. 끝없이 차려지는 음식을 보며 라온은 문득 불길한 눈빛으로 영을 올려다보았다.
“왜?”
“이거 정말 제가 먹어도 되는 겁니까?”
누굴 위해 차려본 적은 있어도, 이렇듯 오롯하게 제 몫으로 차려진 상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라온은 이 느닷없는 행운이 자꾸만 불안해졌다.
“혹시 이 음식들, 왕실의 특별한 비책으로 만들어진 요리인 건 아니겠지요? 이걸 먹었다는 걸 누가 알기라도 하는 날에 당장에 태형에 처해지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요?”
“음식 앞에 두고 자꾸 이상한 소리 할 테냐? 그냥 다 치워버릴까?”
영이 단호한 음성으로 라온이 불안을 잠식시켰다.
“아, 아닙니다. 치우지 마십시오. 먹습니다. 먹을 겁니다.”
영이 음식을 치울까 싶어 라온은 서둘러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식사는 한참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야말로 음식이 목 밑까지 차 더 이상은 아무것도 먹지 못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제야 수저를 내려놓은 라온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지켜보던 영 역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등 뒤에 시립하고 있는 여인을 돌아보았다.
“준비하라 한 것은 어찌 되었느냐?”
“네. 이미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고개를 조아린 여인이 살며시 문을 열었다.
이윽고 열 명의 여인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 중 다섯은 붉게 옻칠한 패물함을 들고 있었고, 나머지 다섯은 하늘의 장인이 만든 듯한 고운 옷들을 각기 서너 벌씩 들고 있었다.
“마음대로 골라봐라.”
“뭘 고르라는 말씀입니까?”
“말하지 않았느냐? 이 자리는 그간 나를 잘 도와주었던 너의 노고에 대해 치하하는 자리라고. 그러니 여기 있는 것들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골라보아라.”
“정말 그래도 되는 것입니까?”
“왕세자의 명이다.”
이런 명이라면, 열 번, 아니 스무 번도 더 받겠다.
라온의 입가에 어린 아이 같은 행복한 미소가 들어찼다.
그녀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서는 여인들이 들고 있는 옷가지와 패물함을 살펴보았다.
산호 노리개, 호박으로 장식된 머리꽂이, 자수정이 박힌 나비를 팔랑거리는 섬세한 나비잠과 금가락지들.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것들을 보고 있자니 눈동자가 팽이처럼 팽팽 돌아갔다.
고운 것이 너무 많아 어떤 걸 골라야 좋을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이나 턱을 괸 채 고민에 빠져 있던 라온이 두 벌의 옷과 소박한 은비녀 하나, 그리고 봉숭아 빛깔의 도투락댕기를 집어 들었다.
“뭐냐? 이게 다인 거냐?”
라온이 고심하여 고른 것을 보며 영이 물었다.
“네. 어머니와 우리 단희를 위한 옷 한 벌씩과, 우리 어머니 비녀 하나, 그리고 우리 단희 댕기 하나면 족합니다.”
라온의 말에 영이 미간을 찡그렸다.
곁눈질로 그의 눈치를 살피던 라온이 슬그머니 손에 들고 있던 도투락댕기를 내려놓았다.
“너무 많습니까? 그렇지요? 제가 너무 욕심을 낸 것이지요?”
말과 함께 은비녀도 제자리에 갖다 놓는다.
“바보 같은 녀석.”
“네?”
“다른 자들은 하나라도 더 좋은 것을 가져가지 못해 안달을 하던데. 이 많은 것들 중에서 고작 골라낸 것들이 이런 것들뿐이냐?”
“그러게 말입니다. 고작 이런 것들뿐이네요.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언제나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분에 넘치는 것을 탐내면 언제가 그 탐욕이 화가 되어 돌아온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네 분수더냐?”
“네. 저는 이것이면 족합니다.”
라온의 소박한 욕심이 영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 것도 한번 골라보아.”
“네? 하지만…… 이것들은 다 여인의 것들인데요.”
라온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화초저하, 아시다시피 저는 환관입니다.
그러나 그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영은 여인들이 들고 있는 옷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여인들이 들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단아하면서도 가장 공을 많이 들인 옷을 하나 들고 라온의 곁을 돌아왔다.
그것은 진작 영이 라온의 몫으로 따로 주문하여 만든 귀한 옷이었다.
“이것도 챙겨라.”
“되었습니다. 제겐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챙겨라.”
네가 입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만들라 명한 옷이란 말이다. 그러니 김윤성, 그 녀석이 준 옷은 입지 마라.
그러나 차마 속내를 말하지 못한 영은 엉뚱한 대답을 입 밖으로 꺼냈다.
“언젠가 마음에 드는 이가 있으면 그 옷을 선물해도 좋을 테지.”
이 옷을 입은 라온은 얼마나 고우려나.
다시 한 번 여인이 된 라온을 보고 싶었지만 당분간은 참아야 한다. 아직 녀석이 제 입으로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으니 말이다.
제 생각보다 과한 선물에 라온은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 사이, 라온이 고른 옷과 패물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이 고른 옷은 들기 좋게 포장되어 다시 라온의 품으로 돌아왔다.
제 품 안에 안긴 것들을 보며 라온은 아이처럼 입을 벌리며 웃었다.
“아무래도 제가 간밤에 용꿈을 꾸었나 봅니다. 아니, 재신(財神)이 넝쿨째 제 품속으로 굴러 들어왔습니다.”
“그리 좋으냐?”
“좋습니다.”
“녀석…….”
영은 너무 좋아 연신 입술을 오므리는 라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영이 사뭇 낮은 목소리로 라온을 불렀다.
“홍라온.”
“네, 저하.”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할 말이요? 무엇입니까?”
영의 진지한 눈빛에 라온 역시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 이윽고 잠시 망설이는 듯한 영의 입술을 뚫고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영의 뜬금없는 말에 라온은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요?”
“그러니까, 간밤에 네가 보았던 그것 말이다.”
“간밤이라면…….”
순간, 라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마치 음식을 보면 침이 고이는 것과 같은 반응이었다.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습니다.”
“아니라니까!”
“괜찮습니다. 남들과 다른 독특한 취미…… 다들 하나씩 가지고 있는 법입니다.”
“이 맹랑한 녀석.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콩, 아프지 않게 라온의 이마를 쥐어박은 영은 한 자, 한 자 쐐기를 박듯 라온에게 말했다.
“잘 들어라. 나는 결단코 그런 사내가 아니다.”
“그럼 간밤의 일은 어찌…….”
“그것 역시 병연이 그 녀석과 가볍게 장난을 치다가 그리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라.”
영의 필사적인 변명에 라온은 안쓰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아, 가엾은 화초저하. 이리까지 변명하시다니. 하긴, 한 나라의 왕세자께 그런 특별한 취향이 있다는 것을 밝히고 싶진 않으시겠지.
이리까지 말씀하시니, 믿어드리자. 아니, 믿는 척이라도 하자.
“네. 알겠습니다.”
나름 신뢰를 담아 대답했건만, 용케도 라온의 속내를 알아차린 영이 눈매를 치떴다.
“정말이다.”
“네.”
“정말이라니까.”
“믿어드리겠습니다. 아니, 믿겠습니다.”
좀처럼 믿지 않는 라온의 모습에 분개한 듯 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여인이 좋다! 그리고 이미 심중(心中)에 품은 여인도 있고.”
“그렇습니까?”
예의 아무 생각 없이 맞장구치던 라온은 일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초저하,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심중에 품은 여인이 있단 말입니까? 그게 대체 누굽니까?
***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택을 나온 영과 라온은 저잣거리를 구경하며 걸었다.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어린 아우와 형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저하, 이번에는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글쎄. 이번에는 어디로 가면 좋겠느냐?”
“네?”
“어디 가고 싶은 곳은 없느냐? 있으면 말해봐라.”
“말하면 제가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까?”
“그래.”
“저희 집에 가고 싶다고 해도 말입니까?”
“안 될 것은 무어가 있겠느냐.”
흔쾌히 대답한 영이 막 걸음을 옮길 때였다.
그의 곁으로 뒤따르던 호위무사가 빠르게 다가왔다.
“저하.”
호위 무사는 영의 귓가에 낮은 말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이내, 영의 표정이 짙게 흐려졌다.
“홍라온.”
영이 잔뜩 들뜬 라온을 불렀다.
“내가 갑자기 일이 생겼다. 아무래도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구나.”
“아, 그렇습니까? 그럼 저는 이만 궁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입니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채 말하지만 목소리에 깃든 서운함은 지울 길이 없었다.
모처럼 어머니와 단희를 만나는 줄 알았건만.
물끄러미 라온을 바라보던 영이 고개를 저었다.
“기왕 이렇게 나온 것이니, 집에 한번 가보는 게 어떠냐?”
“하오나…….”
“아마도 술시(戌時: 오후7시)쯤이면 일이 끝날 것이니. 그때 맞춰 여기서 다시 만나자꾸나.”
“네!”
금세 화색이 돈 라온이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난번처럼 시간 어기면 안 된다.”
처음으로 궁을 나왔던 라온이 명온에게 붙잡혔던 기억을 떠올리며 영이 말했다.
귀여운 아우에게 하듯 스스럼없이 라온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은 그는 아쉬운 발길을 돌려 저잣거리 끝자락으로 사라졌다.
“아, 다행이다. 모처럼 어머니와 단희를 만날 수 있게 되었어.”
기쁨에 겨워 품에 안고 있던 보퉁이를 꼭 끌어안던 라온은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저하께서는 오늘 왜 나오자고 하신 거지?”
정말로 며칠 동안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나를 이리 데리고 나오신 것일까?
생각에 잠긴 라온이 길을 따라 걷고 있을 때였다.
톡톡톡.
연한 새의 부리로 쪼는 듯 여리게 두드리는 감촉이 등에 전해졌다.
“누구십니까?”
휙, 고개를 돌리는 라온의 귓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참의영감!”
윤성이 라온을 내려다보며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너무도 바빠서 궁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실 수 없다던 바로 그 홍 내관이 아니십니까?”
“하하하하.”
라온이 어색하게 웃었다.
궁 밖으로 함께 나가자 그리 소원하던 윤성을 이리 궁 밖에서 만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