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54화 (54/131)

54. 그런 거 아니야!

“넌, 그 아이가 아니더냐?”

헉.

라온은 속으로 마른 신음을 삼켰다.

소양 공주의 곧은 검지가 라온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라온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확신이 없었다.

기연가미연가 하는 표정.

라온은 그 찰나의 동요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서둘러 당황한 기색을 감춘 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공주마마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소인은 잘 모르겠사옵니다.”

“아닌데. 분명히 널 어디서 봤는데. 너무 낯이 익단 말이지.”

그때, 명온 공주가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홍 내관이라면 사신단을 맞이할 때 오라버니 뒤에 줄곧 따라다녔거든. 그러니 낯이 익을 수밖에.”

그새 많이 친해진 것인지, 두 공주는 스스럼이 없이 편히 말을 놓고 있었다.

“아, 그렇구나.”

명온 공주의 설명에 소양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다시 미심쩍은 눈길로 라온을 응시했다.

“우리 혹시 딴 데서 본 적 없어? 궁 밖에서 나와 만난 적 없느냐?”

중추절 밤에 함께 달맞이를 하였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공주마마께서 차려주신 음식을 배부르게 먹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그때의 저는 환관 홍라온이 아니라 여인 홍라온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음이라. 라온은 다시 한 번 시치미를 뚝 떼고 단호히 고갯짓을 했다.

“그럴 리가요. 소인은 줄곧 궁에 있었사옵니다.”

“소양 공주가 잘못 본 것 같은데.”

명온 공주가 말을 이었다.

“홍 내관은 아직 견습하는 소환내시야. 마음대로 궁 밖 출입을 할 수 있는 아이가 아니야.”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이대로 두었다간 끝없는 의심이 이어질 것 같았다. 라온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아참. 깜빡 잊고 있었네.”

그제야 라온을 찾아온 용무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소양 공주는 제 이마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떤 사람과 친해지고 싶은데 도통 방법을 몰라 찾아왔다.”

“네?”

“내가 어떤 사내와 친해지고 싶은데, 그 사내가 좀처럼 내게 곁을 내주지 않아서 말이야. 듣자하니 네가 고민을 해결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하던데.”

“과한 소문이옵니다. 소인은 그저 누군가의 답답한 속내를 들어주었던 것뿐이옵니다. 그러다 어찌어찌 해결책을 찾은 것이 그리 부푼 소문이 되어 공주마마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입니다.”

“그래? 그럼 이번에도 어찌어찌 이 사내와 친해질 수 있는 방도를 찾으면 되겠구나.”

“하온데, 그 사내가 뉘신지 여쭤도 되겠사옵니까?”

물어보나 마나겠지.

아니나 다를까.

“세자저하시다.”

소양공주의 명쾌한 대답이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까 너는 그분 곁에 항상 있었으니까 그분의 취향을 잘 알겠구나. 마침 잘 되었다.”

“네. 마침 잘 되었네요.”

라온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소양 공주의 집요한 질문 공세가 시작되었다.

“그분이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그분은 어떤 여인을 좋아하시지? 그분은 어떤 말투를 쓰는 것을 좋아하시지? 그분은 여인이 어떤 치장을 하시는 걸 좋아하시는지 아느냐?”

“자, 잠깐만요. 공주마마, 하나씩…… 하나씩 물어보십시오. 그러니까 공주마마께서 정녕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옵니까? 세자저하와 친해지고 싶으신 것입니까?”

“아니.”

“그럼 무엇이옵니까?"

방금 전에 그분과 친해지고 싶다질 않으셨습니까?

“난 말이다, 단지 그분과 친해지기 위해 이러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나라의 세자저하와 혼인하길 원한다.”

“지, 지금 혼인이라고 말씀하셨사옵니까? 왜요?”

무람한 물음인 줄은 알면서도 라온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 겨우 얼굴 몇 번 본 사내와 혼인을 하길 원한다니. 그 연유가 무엇일까?

“첫 눈에 반했다.”

소양공주의 직설적인 대답에 라온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 성정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솔직한 분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와중에 소양공주의 말이 이어졌다.

“그분만큼 내 마음을 사로잡는 사내를 만나 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그분을 뵙는 순간 깨달았다. 그분이 바로 나의 인연이라는 것을.”

그 단호하고 명확한 대답에 라온은 소양공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누군가를 저렇게 열렬히 사모해 본 적이 있었던가? 지난 시간을 되짚어 보건대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한 번도 자신의 속내를 내비친 적도 없었다.

부러웠다.

순수하게 자신의 속내를 내비칠 수 있는 소양공주의 자신만만한 모습이 부러웠다.

“어째 그리 보는 것이냐?”

“아, 송구하옵니다. 일순간, 공주마마께서 너무도 아름다워 보여 무례를 저질렀나이다.”

“무슨 소릴 하는 게냐?”

“그리 당당히 누군가를 연모한다 말씀하시는 공주마마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사옵니다.”

“뭐, 뭐야? 내시 주제에. 누가 네게 그런 소리를 듣고 싶다했느냐?”

당황한 소양공주가 톡 쏘아 말했다. 하지만 표정을 보니 말과 달리 그리 싫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무례하였다면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온데 마마, 어쩌면 왕세자저하께서는 따로 마음에 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양 공주의 고운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그녀는 심기 불편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중추절 전날 밤에 어떤 여인과 만나는 것을 보았다. 혹시 그 여인을 말하는 게냐?"

소양 공주의 말에 명온 공주가 관심을 보였다.

“오라버니에게 여인이 있어?”

“있어. 아주 불여우 같은 계집이지.”

“정말 신기하네. 일 년 내내 전신에 찬바람이 쌩쌩 부는 오라버니 저하께 여인이 있단 말이야?”

“그게 뭐가 이상해? 세자저하처럼 완벽한 사내라면 여인이 줄줄 따르는 것이 정상 아니야?”

“그게 그렇지 않아.”

명온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오라버니를 흠모하는 여인들이야 줄을 섰겠지. 문제는 오라버니야. 도무지 틈을 안 보이시니. 어느 여인이라고 그 곁으로 다가갈 수 있겠어?”

“하긴, 얼음 빙벽을 마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긴 했어.”

내 미인계마저 통하지 않는 사내라니.

소양 공주의 얼굴에 분한 표정이 피어올랐다.

“그런 오라버니에게 여인이 생겼다니까 내가 놀라지 않겠어?”

“꽤 가까워 보이던데. 인파에 휩쓸린 여인을 품에 끌어안을 만큼 말이야.”

명온 공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엄청난 사건인걸.”

명온 공주는 당장에 중궁전이나 대비전으로 달려갈 태세였다.

라온은 서둘러 끼어들었다.

“아마 아닐 겁니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인데 뭐가 아니라는 게냐? 넌, 내 말 못 믿겠다는 거냐?”

“그것이 아니오라 저는 다만, 그날 밤에 보았던 여인은 아닐 거라고 말씀드리는 것이었사옵니다. 그런데 소양 공주님, 세자저하께서는 조금 특별한 취향이 있으신데, 혹여 알고 계시옵니까?”

“특별한 취향? 그것이 무엇이냐?”

소양 공주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그 눈을 보며 차마 화초저하께서는 사내를 좋아합니다……라고는 죽어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소양 공주가 실망하는 것은 둘째 치고 일국의 왕세자께서 여인이 아닌 사내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엔, 걷잡을 수 없이 일이 커지리라.

이건 단순히 여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심각한 문제였다.

“아, 아닙니다.”

“뭔데 그래?”

“정말로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소양공주가 눈을 가늘게 여몄다.

“뭔가 숨기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구나.”

“전 그저 세자저하의 취향에 대해 말씀드리려 한 것이었습니다.”

“취향?”

소양 공주가 라온의 곁으로 바싹 다가섰다.

“아무래도 세자저하께서는 좀 더 현숙하고 차분한 여인을 좋아하시지 않을까요?”

“그래? 현숙하고 차분한 여인? 구체적으로 어떻게 현숙하고 차분한 걸 말하는 게냐?”

잠시간, 라온이 말문이 막혔다.

현숙하고 차분한 여인. 그걸 어떻게 구체적으로 설명을 한다?

이번에도 명온이 나서서 라온을 도왔다.

“조선의 여인들이 바로 현숙하고 차분한, 그야말로 여인다운 여인이라 할 수가 있지.

명온의 말에 소양 공주의 눈가에 마땅치 않은 주름이 그려졌다.

“비도 안 오는데 천 쪼가리를 뒤집어쓰고, 사람이 말을 걸어도 똑바로 보지도 않는, 그런 거? 그런 게 대체 뭐가 좋단 거야? 정말 조선의 사내들은 이해를 못 하겠네.”

“유감스럽게도 오라버니 저하 역시 바로 그 조선의 사내란다.”

“하긴 그렇구나. 알겠다. 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널 찾아오마.”

여인답지 않은 빠르고 당찬 걸음으로 자선당을 나서던 소양공주가 휙하고 라온을 다시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너. 정말 나 만난 적 없어?”

“없사옵니다.”

저 공주님, 정말 집요하시네.

“그래? 이상하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소양공주는 연신 이상하다는 말을 하며 자선당을 떠났다.

그녀의 뒷모습이 자선당 대문 밖으로 사라지자 라온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다행이다. 들키지 않아 정말 다행이야. 여인복장을 한 것과 지금의 모습이 확연히 달랐는가 보다. 그것 때문에 못 알아보신 것이 틀림없어.

“소양공주와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냐?”

그때, 안도하는 라온의 귓가로 명온 공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양 공주가 자선당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명온 공주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닙니다. 그런데 명온 공주님께서는 소양공주님과 그새 많이 친해지신 모양이옵니다.”

“보니까 나와 맞는 부분이 있고. 고민도 있는 것 같고. 멀리 타국까지 와서 고민이 있는 듯해서 얘길 하다 보니까 친해졌어. 아직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그렇사옵니까?”

“그런데 너, 일전엔 왜 안 왔느냐?”

“네?”

“왜? 장 내관에게 아무 이야기도 못 들었어?”

“무슨 말씀이신지…….”

장 내관께서 무슨 말씀을 하셔야 했나요?

“아? 그래? 그랬구나. 그것도 모르고 내가 괜한 오해를…….”

명온 공주가 고개를 슬쩍 돌리며 주먹을 슬쩍 부르르 떨었다.

“내 장 내관 이 녀석을…….”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니다.”

“혹여 공주마마께서도 고민이 있으셨던 것이옵니까?”

“내가 고민할 것이 무어가 있겠느냐? 그런데 고뿔에 걸렸다더니. 많이 앓았던 게냐? 어찌 얼굴이 이리 해쓱해진 거야?”

“소인의 얼굴이 해쓱해 보이옵니까?”

“명경도 안 보는 게야?”

“송구하옵니다.”

사실, 요즘 가슴 철렁할 일이 여러 번 있었거든요.

그때, 명온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너야말로 무슨 음식을 좋아하느냐?”

“네?”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하나만 말해 봐. 내 아랫것에게 일러 준비하라 할 테니.”

“아니옵니다. 말씀만으로도 황공하옵니다.”

“네가 좋아 그러는 것이 아니야. 그저…… 궁에서 환관하나 제대로 못 먹이냐는 소리 듣고 싶지 않은 것뿐이니까.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이 없으면, 나중에라도 뭘 좋아하는지 말해.”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숨은 저의는 따뜻하기만 했다.

“소인은 정말로 먹고 싶은 것이 없사옵니다. 궁으로 들어온 후, 말로만 듣던 각종 음식들을 맛볼 수 있어서 마치 천상에 온 듯하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라온의 대답이 명온에게는 배척하는 듯 느껴졌다. 새치름한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깃들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수습한 명온은 등을 돌렸다.

“난 이만 가봐야겠다.”

“가시는 것이옵니까?”

“볼 일이 끝났으니 가야지.”

돌아서는 명온의 등 뒤에 대고 라온이 말했다.

“소인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명온 공주가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지만 라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벗과 함께 먹는 음식입니다. 곁에 제가 소중히 생각하는 벗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맛있을 것이옵니다.”

명온의 얼굴에 잠시간 웃음이 맺혔다 사라졌다.

라온은 그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음 지었다.

두 공주로 인해 잠시 북적이던 자선당에 다시 고요가 찾아들었다.

“자, 이제 어쩐다? 그럼 나는 소양공주님의 소소한 궁금증을 풀러 가볼까?”

***

황금빛 햇살이 대지를 뒤덮기 시작했다. 영은 중희당의 이 층 누각에 서서 떠오르는 태양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곁으로 최 내관이 종종 걸음으로 다가왔다.

“저하, 대전에서 전갈이 왔사옵니다. 주상전하께서 곧 성심을 만천하에 공표하실 거라 하옵니다.”

“그래? 그렇구나.”

주상전하의 성심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새로운 날이 밝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곧 새로운 조선이 열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

“한동안은 정신이 없겠구나.”

“네. 그럴 것이옵니다.”

“부원군의 움직임은 어떠하더냐?”

“아직까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사옵니다.”

“그래?”

영의 눈매가 깊어졌다.

“박 판내시부사에게서는 전갈이 왔느냐? 그분께서는 아직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고 하더냐?”

“그 이후로 아직 아무런 전갈을 받지 못하였사옵니다.”

“그래? 알았느니.”

“저하.”

최 내관이 근심 서린 표정으로 조용히 말을 아뢰었다.

“그들이 주상전하의 심중을 알게 되면 마음 편편치 않을 날들이 이어질 것이옵니다. 그러니 잠시만이라도 모든 것을 풀어놓으시고 쉬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그때 저 멀리 동궁전 마당으로 라온이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내내 굳어있던 영의 얼굴에 온기가 들어찼다.

“그래, 그래야겠다. 모든 것을 풀어놓고 잠시만 쉬어야겠다.”

***

타박거리며 동궁전으로 들어오는 라온의 앞으로 영이 불쑥 다가왔다.

“어찌 이리 늦었느냐?”

“잠시 다른 볼일이 생겨서 조금 늦었습니다. 그새 청국의 사신단이 찾아오기라도 한 것입니까?”

혹여 성미 급한 소양공주께서 또 저하를 찾아뵌 것은 아닌가 근심하며 라온이 되물었다.

“그건 아니다.”

“휴, 다행입니다. 그런데 저하께서는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신 것입니까?”

“벗을 기다리고 있었느니.”

가볍게 던진 한 마디에 라온이 굳어진 모습으로 영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냥, 저하처럼 대단하신 분이 저를 벗이라 불러 주시니. 마음이 설렙니다.”

“그러하냐?”

사실, 나도 마음이 설렌다고 하면 너는 믿겠느냐?

언제부터였을까? 이리 너를 볼 때마다 마음이 설렌 것이. 이 아이의 작은 얼굴이, 이 검은 눈동자가 불쑥불쑥 이유도 없이 떠올랐던 것이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물끄러미 라온을 내려다보던 영이 무릎을 굽혀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홍라온.”

참으로 기묘한 얼굴이었다.

라온의 검은 두 눈엔 움트는 봄의 생명이 있었다. 그녀의 콧날에 치열한 여름이, 붉은 입술엔 풍요로운 가을이 존재했다.

그리고 가느다란 목덜미, 저 처연하도록 긴 목덜미에는 시린 겨울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기에 일 년, 사계절 쳐다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영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괜스레 부끄러워진 라온이 고개를 외로 돌렸다. 그러나 이내 영의 손아귀에 잡힌 라온의 얼굴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화초저하.”

“내 허락 없이는 함부로 내게서 고개 돌리지 마라.”

엄하게 말하며 영은 라온을 쳐다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입 안에 단침이 고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라온의 티 없이 맑은 시선 때문에 심장이 뛰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그녀는 환관복을 하고 있건만, 자꾸만 여인의 복색을 하고 있는 라온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다시 한 번 그런 모습을 보고 싶다는 열망, 그리 곱게 치장한 라온을 다시 한 번 품에 안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영의 마음 언저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겠지.

영문을 몰라 순진하게 눈빛을 반짝거리는 라온을 보며 영은 해일처럼 밀려오는 욕망을 애써 잠재웠다.

“얼굴에 무얼 이리 붙이고 다니느냐?”

아무것도 묻어있지 않은 라온의 볼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아,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소맷자락으로 서둘러 제 얼굴을 닦는 라온을 보며 영은 쿡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귀여웠다. 안아주고 싶을 만큼.

동시에 두려웠다.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그러나 그 두려움을 생각의 뒤안길로 밀어낼 만큼 눈앞에 서 있는 라온은 그 어떤 것보다 반짝거렸다.

아침 햇살을 머금은 라온의 모습은 그대로 영의 눈에 각인되었다.

***

붉은 저녁노을이 자선당의 문풍지를 붉게 물들였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는 인기척에 병연이 눈을 떴다. 대들보 위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있던 그가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세자저하께서 여긴 어쩐 일이야?"

“오랜만에 내 벗들과 오붓한 시간을 가지려고 왔다. 그런데 라온이, 이 녀석은 아직 안 돌아온 거야?”

자선당 안으로 들어온 영은 스스럼없이 보료 위에 한쪽 턱을 괴고 누웠다.

“곧 올 거야.”

병연은 영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무 서책이나 뒤적거리던 영이 제 곁에 앉은 병연을 힐끔 돌아보며 물었다.

“한동안 자선당을 비웠다고?”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개인적인 일? 이상한 일이군.”

“뭐가?”

“지금까지 네가 개인적인 일로 자리를 비운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말이다.”

“…….”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영이었다.

“홍라온, 그 녀석 말이야.”

“…….”

“뭔가 이상한 구석은 없어?”

영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병연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세상사에 무관심한 듯 보이는 얼굴에는 어떤 동요도 일지 않았다.

라온이 여인이라는 것을 아직 모르는 것일까?

“이상한 구석?”

영을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마주보며 병연이 되물었다.

“아, 아니다. 그 녀석, 워낙에 맹랑한 녀석이라. 네게도 이상하게 굴 것 같아서.”

“그 녀석 그런 거야 하루 이틀 된 것도 아닌데 뭐.”

“그런데…… 이건 무엇이냐?”

영의 물음에 병연이 심상한 시선을 돌렸다.

이내, 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며들었다. 영의 손에 월하노인의 팔찌가 들려 있었던 것이다.

병연이 대들보 위에서 뛰어내릴 때 떨어트린 것을 주운 모양이다.

“팔찌처럼 보이는데……?”

“이리 내놔.”

“가만 있어보자, 팔찌라. 네가 팔찌를 찰 리는 없고. 설마 이거, 여인의 것이더냐?”

“이리 줘.”

“정말인가 보네? 뭐야? 아까 말했던 개인적인 일 역시 여인과 관련된 것이더냐? 너, 여인이라도 생긴 것이야?”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면, 이건 뭐냐?”

“아무것도 아니니, 이리 돌려 줘.”

“여인, 여인이라. 네게 여인이 생겼단 말이지. 하하하, 모처럼 좋은 소식이다. 그래, 어떤 여인이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벗 좋다는 것이 무어냐? 우리가 이런 일도 허물없이 터놓지 못할 사이는 아니잖아.”

“…….”

영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는 짓이 영락없이 천진한 개구쟁이였다.

“세자저하, 어린아이처럼 굴지 말고, 그거 내놔.”

“너야말로 지금 첫 연정에 빠진 어린 풋사내처럼 굴고 있는 거 아느냐?”

“이리 달라니까.”

말과 함께 병연이 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영이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질세라 병연은 더욱 영을 압박해 들어갔다.

좁은 공간이라. 미꾸라지처럼 피해 다니던 영은 금세 병연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그거 이리 줘.”

“말해 봐라. 누구냐?”

“…….”

“네 마음을 흔든 여인이 뉘인지, 말해 봐. 언젠가 나와 약조하지 않았느냐? 누군가 마음에 품는다면 내게 가장 먼저 알려주겠다고.”

“…….”

" 네 성정에 이리 팔찌까지 산 것을 보니, 마음을 품어도 단단히 품었을 거고. 말해봐하. 말하지 않으면 돌려주지 않을 게다."

말로는 안 되겠는지 병연은 영의 팔목을 비틀었다. 그러나 어림없다는 듯 영이 손을 틀어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병연이 그 손을 맞잡았다. 덕분에 무게 중심이 흔들린 영은 병연과 한 덩어리가 되어 뒤로 넘어갔다.

“이런!”

영의 뒤통수가 바닥을 세게 두드렸다.

쿵! 제법 큰 파공음이 들려왔다. 갑작스레 당한 일이라.

얼얼하여 잠시 혼란한 틈을 타 병연이 영의 몸을 타고 올랐다. 그는 반 강제로 영의 손에 들려 있던 팔찌를 빼앗았다.

“녀석, 그냥 그 여인이 뉘인지 말하면 곱게 돌려 줄 것을.”

잠시간의 장난으로 숨이 거칠어진 영이 말했다.

“그러게 진작 돌려 줬으면 이런 일도 없잖아.”

조금 거칠게 영을 몰아붙인 것이 미안해진 병연이 얼굴을 붉혔다.

바로 그때였다.

“김 형, 저 왔습니다.”

때마침, 일과를 끝낸 라온이 자선당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위아래로 포개져 있는 영과 병연의 모습에 돌처럼 굳어졌다.

이, 이것은……!

라온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그럼 하던 일마저 하십시오.”

라온은 서둘러 문을 닫았다.

“저 녀석, 왜 저래?”

낮게 중얼거리던 영은 문득 제 몸을 타고 있는 병연을 올려다보았다. 때마침 내려다보는 병연과 두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저희들의 모습을 돌아본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그런 거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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