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53화 (53/131)

53. 국경너머의 밤

라온은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은 자선당으로 돌아왔다. 무의식적으로 대들보를 올려다보니 희끄무레한 인영이 보였다.

김 형.

등을 돌린 채 잠들어 있는 그를 깨울까 싶어 라온은 까치발을 들었다. 최대한 숨을 죽인 그녀는 이부자리 속으로 지친 몸을 뉘였다.

이불 속은 마치 누가 일부러 덥혀놓기라도 한 듯 따뜻했다. 덕분에 잔뜩 경직되어 있던 전신이 느른하게 녹아내렸다.

“으…… 좋다.”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리던 라온은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행여 병연이 깼을까 싶어 서둘러 대들보 위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못 들었는지 병연은 아무 미동도 없었다.

“휴.”

낮게 한숨을 내쉬며 라온은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러다 문득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눈앞에 쫙 펼쳐보았다.

영이 깍지를 꼈던 손이다. 그의 열기가 손가락 마디마다 잔향처럼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화초저하께서는 어찌 그리 화를 내신 것일까?

검은 어둠 속에서도 오롯이 희게 보이는 제 손을 들여다보며 라온은 생각에 잠겼다.

저하께서 왜 그리 성화를 내셨던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여인의 마음일랑은 귀신같이 알아내던 천하의 삼놈이도 사내의 마음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라온은 저도 모르게 다시 한 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땅 꺼지겠다.”

대들보 위에서 병연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앗, 김 형. 깨셨습니까?”

“무슨 일이야?”

“네?”

“어울리지 않게 웬 한숨이냔 말이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

아무 일도 아니라는 대답에 병연은 정말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 흔한 헛기침 한 번 흘리지 않았다.

김 형. 예의상이라도 한 번쯤 더 물어보셔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모르는 척 속내도 털어놓지요.

아니면 정말로 별 뜻 없이 지나가는 투로 물어봤던 것이려나? 애초에 내 한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셨나?

어둠 속에서 라온은 눈을 깜빡거리며 뭔가 바라는 눈빛으로 병연을 응시했다.

그 속마음이 전달되기라도 한 것일까?

대들보 위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킨 병연이 라온을 다시 내려다보며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성가신 녀석.”

“…….”

“무슨 일이야? 머리가 땅에 닿기 무섭게 자던 녀석이 오늘은 왜 이리 잠을 못 자?”

라온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제가 안 자는 건 어찌 아셨습니까?”

“너 눈 깜박거리는 소리에 자선당이 들썩거리는 걸 몰라 묻는 거야?”

“김 형도. 허풍이 과하십니다.”

아무렴. 속눈썹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을까?

“성가시게 굴지 말고. 무슨 일인지 털어놔 봐.”

“그게…….”

잠시 말끝을 늘이던 라온은 궁금해 견딜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화초저하 말입니다. 원래 그런 분이십니까?”

“뭐가?”

“원래 대수롭지 않은 일에 그리 버럭 화를 내시는 분이십니까?”

“화를 내? 그분이?”

“네. 아까 제가 청나라에서 온 목 태감의 처소에 갔었거든요. 목 태감께서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해서 갔었는데. 그게 알고 보니 그분께서 남색을 즐기시어…….”

빠직!

말을 하던 라온은 잠시 말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방금 전, 썩은 나무 부러지는 소리 같은 게 들렸는데. 잘못 들었나?

“김 형, 뭔가 부서지는 소리 들리지 않았습니까?”

“아니.”

“아, 역시 제가 잘못 들었나봅니다. 그건 그렇고. 어쨌든 목 태감께서 저한테 이상한 짓을 하려고 했습니다.”

우지직!

“어? 이번에도 이상한 소리가 들렸는데…… 김 형 들으셨습니까?”

“못 들었다고 하질 않아.”

“그, 그렇군요.”

라온은 고개를 좌우로 갸웃했다.

두 번이나 환청을 들었나? 그런데 김 형 목소리는 갑자기 왜 저러실까. 꼭 이를 악물고 말을 하는 것처럼 이상하게 들렸는데…….

“김 형. 혹시, 목이라도 아프십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 봐. 그래서 어찌 되었다고?”

“아, 네. 목 태감께서 저한테 이상한 짓을 하려고 했긴 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때마침 화초저하께서 저를 찾으시어 별일 없었습니다.”

라온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병연이 돌연 대들보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어느 틈엔가 라온의 코앞까지 바싹 다가온 그가 세심히 살피는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너……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

“그런데 말입니다. 이리 아무 일도 없었으면 된 것이 아닙니까? 화초저하께선 왜 그리 화를 내신 걸까요? 제가 괜찮다고 몇 번을 말씀드렸는데도 목 태감님을 겁박하시질 않으시나. 급기야는 조선을 떠나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청국의 사신을 어찌 그리 매몰차게 대하시는지……. 나중 일을 어찌하시려고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라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병연이 처소 문을 열었다.

“어? 김 형. 이 밤중에 어디 가십니까?”

라온이 묻자 막 처소를 나서던 병연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갑자기 급한 볼일이 생겼다. 한 며칠 돌아오지 않을 거야.”

“네?”

라온의 물음이 채 귓전에 닿기도 전에 병연은 바람소리와 함께 문밖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

며칠 후,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지대.

청국의 수비를 맡고 있는 원보중은 초조한 기색으로 연신 방 안을 서성거렸다.

“아직이냐?”

그의 신경질 섞인 물음에 곁을 지키던 수하가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목 태감께서 예정보다 일찍 들이닥치시는 바람에. 아직 적당한 아이를 물색하지 못한 듯합니다.”

“서둘러라, 서둘러. 그 지랄 맞은 성미를 몰라 그러느냐.”

황제폐하의 총애를 듬뿍 받는 목 태감이었다. 그간 목 태감이 국경을 드나들 때마다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던가.

원보중은 조만간 궁으로 불러 줄 것이라 호언장담하던 목 태감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원보중은 오늘의 일로 그간의 공든 탑이 무너질까 싶어 전전긍긍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집무실 문이 열렸다.

“드디어 적당한 아이를 찾아냈습니다.”

목 태감의 특별한 취향을 충족시키기 위해 마을로 향했던 수하가 돌아왔다. 원보중의 안색이 그제야 제 혈색을 찾았다.

“어디? 어디에 있느냐?”

그의 물음에 답이라도 하는 듯 열린 문 너머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순, 원보중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저 아인…… 키가 너무 크지 않느냐?”

“키가 조금 큰 게 흠이긴 하지만. 다른 것은 그분의 취향에 꼭 부합하는 자입니다. 그린 듯 선명한 눈매하며, 도도한 듯 차가운 표정까지. 태감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런 아이입니다. 지금까지 그분께 들였던 아이들 중,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습지요.”

수하가 입이 닳도록 데려온 젊은 사내를 칭찬했다.

원보중 역시 보는 눈이 있는지라. 마른 입맛을 다시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내 눈에도 좋아 보이긴 하구나. 어찌 되었든 서둘러라. 조선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분의 심기가 무척이나 언짢아 보였음이야.”

“네. 최대한 빨리 치장시켜 그분의 처소에 들여보내겠습니다.”

원보중의 재촉에 수하는 서둘러 사내를 데리고 밖으로 사라졌다.

***

화려하게 치장된 방 안에 육중한 덩치의 사내가 홀로 앉아 있었다.

“나에게 그런 수모를 안기다니.”

푹신한 침상 한가운데 앉아 있던 목 태감은 씹어뱉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선의 왕세자 이영의 겁박에 그길로 조선을 떠나 국경을 넘었다. 왕세자의 그 서슬 퍼런 눈길을 떠올릴 때면 여전히 머릿속이 송연해지고 등줄기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 이제 한시름 놓게 되자 분통이 치밀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느 누가 감히 나를 이리 겁박할 수 있단 말인가.”

영의 앞에선 고양이 앞의 쥐처럼 꼼짝도 못 하던 목 태감은 분풀이 할 상대를 찾아 연신 두 눈을 번뜩거렸다.

때마침, 문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밤 태감을 모실 아이옵니다.”

아뢰는 말에 목 태감의 입아귀가 음충하게 비틀어졌다.

“어서 안으로 들여라.”

저 아이에게 그간 쌓인 화기를 모두 풀어내리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부터 기분이 풀어진 듯, 침상에서 일어나는 목 태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잠시 후.

방안으로 큰 키의 사내가 들어왔다. 오늘 밤, 목 태감의 제물이 될 가엾은 사내였다.

“어서 오너라. 내 너를 한참 기다렸느니.”

목 태감은 자신의 취향에 맞춰 곱게 분칠하고 치장한 사내를 방 한가운데로 이끌었다.

이윽고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희미한 등불 아래 드러난 사내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던 까닭이다.

“곱구나. 아주 고와.”

그린 듯 아름다운 눈빛, 오뚝한 콧날, 피를 머금은 듯 붉은 입술.

날렵한 턱 선이 사내다운 듯 강인해 보이면서도 여릿하게 느껴지는 묘한 사내였다.

태어나 이리 아름다운 사내는…… 세 번째로 보았다.

그 첫 번째가 조선의 왕세자 이영이었고, 그 두 번째가 환관 홍라온이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사내의 얼굴 위로 겹쳐 보이자 목 태감은 이를 갈아 물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체머리를 흔들어 보기 싫은 얼굴들을 지워버렸다.

“그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은근한 손길로 사내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목 태감이 물었다.

“…….”

사내는 대답이 없었다.

“오호, 생각보다 입이 무거운 아이로구나. 그래, 이리 입 무거운 것도 마음에 드는구나. 그런데 너…… 조선의 아이더냐?”

그의 물음에 사내가 가볍게 고개를 한번 끄덕거렸다.

“그래? 조선의 사내란 말이지?”

수면 아래로 애써 가라앉혔던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올라왔다.

조선의 왕세자에게 당했던 굴욕을 이 조선의 사내에게 되갚아 주리라는 못된 앙심이 목 태감의 뇌리를 가득 채웠다.

부푼 기대감에 그의 아랫배가 단단해졌다. 심장 박동이 증가하고 열띤 기운이 목 태감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내, 오늘 네게 잊지 못할 밤을 안겨 주겠노라.”

마치 엄청난 은혜를 베풀기라도 하겠다는 표정으로 목 태감은 사내의 옷고름에 손을 올렸다.

***

“허억!”

“으아아아악!”

“컥컥컥! 흐억!”

목 태감의 처소 안에서 연신 억눌린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정작 문 앞을 지키는 무사들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태평한 얼굴로 귀를 후비던 무사가 곁에 있는 동료를 돌아보며 말했다.

“거참, 오늘 밤은 유난스럽구먼.”

“쌓인 게 많으니. 풀려면 꽤나 시끄러울걸세.”

“쌓인 게 많아?”

“못 들었는가? 조선에서도 저 짓거리 하려다 조선의 왕세자께 된통 걸렸다질 뭔가.”

“아, 그래서 내내 씩씩 댔었구먼.”

“그나저나 저 아이. 이 밤에 무사할지 모르겠네, 그려.”

“듣자하니, 저 양반 손속이 그리 모질다던데. 맞는가?”

“맞다 뿐인가. 저 방에 들였던 아이치고 멀쩡하게 제 발로 걸어 나온 아이가 없다네. 그런데 오늘은 심기마저 비뚤어져 있으니. 이거, 산송장 치우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무사는 말을 하며 방 안쪽의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이상하게도 좀 전부터 비명소리가 뚝 끊겼던 것이다.

이러다 정말 멀쩡한 생목숨 하나 맥없이 버리는 거 아닌가?

걱정스러운 기색이 무사의 눈동자에 깃들 무렵.

스륵, 문이 열리고 큰 키의 사내가 모습을 보였다.

목 태감의 처소에 들여보냈던 그 아이였다.

“괜찮은가?”

무사의 말에 사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런 사내의 소맷자락을 무사가 붙잡았다.

“고생했네. 그런데 젊은 사람이 생각보다 강단이 있구먼. 저 방에서 제 발로 걸어 나온 사람은 자네가 유일하다네. 그리고 이거…… 얼마 되지 않지만 받아두게나.”

무사는 사내에게 작은 돈주머니를 건넸다. 물끄러미 돈주머니를 내려다보던 사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되었소.”

짧은 한 마디를 남긴 사내는 어둠 속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쯧쯧쯧. 충격이 꽤나 컸었나보군. 허긴, 어느 사내라고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맨정신으로 감당하긴 힘들지, 암. 그런데 저 사내, 어디 사는 뉘라고 하던가?”

무사의 물음에 옆에 서 있던 동료가 턱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잘은 모르겠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떠돌이라지, 아마.”

“떠돌이를 들였단 말인가?”

“워낙에 급하니 어쩔 수없이 들인 모양이네.”

“그럼 이름도 모른다던가?”

“무슨 연이라고 하던데. 명연인가? 병연인가?”

“그래? 그나저나, 이 양반은 왜 이리 조용해?”

무사는 쥐죽은 듯 조용한 처소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잠시 후.

“모, 목 태감님!”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문 앞을 지키고 섰던 무사들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내 그들의 시야에 발가벗겨진 채 바닥을 벌레처럼 나뒹굴고 있는 목 태감의 모습이 들어왔다.

무사들을 본 목 태감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두 손을 싹싹 빌었다.

“히익! 살려주십시오. 다시는 안 하겠습니다. 그러니 살려만 주십시오. 제발. 제발요.”

공포에 전신을 벌벌 떠는 목 태감의 몸은 그야말로 딱 죽지 않을 만큼의 깊이로 베인 칼자국으로 가득했다.

***

제법 서늘해진 새벽바람이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머리맡을 스쳐지나가는 익숙한 바람의 향기에 라온은 눈을 떴다.

“김 형이십니까?”

잠이 묻은 목소리.

습관처럼 대들보를 향하던 병연이 라온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깨운 것이냐?”

“아닙니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김 형…….”

“왜?”

“김 형에게서 좋은 냄새가 납니다.”

“좋은 냄새?”

“네. 이건 마치…… 아, 분내. 맞습니다. 김 형에게서 분내가 납니다.”

“분, 분내……?”

드물게 말을 더듬는 병연의 얼굴에 ‘아차’ 하는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목 태감의 침소에 들어가기 전에 치장했던 분내가 여전히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지워낸다고 했는데, 워낙에 강한 향내였던 탓이었다.

잠시 당황했던 병연은 이내 본래의 안색을 되찾으며 라온의 말을 일축해버렸다.

“자다 꿈이라도 꾼 거야? 분내는 무슨?”

“아닙니다. 분명 분 냄새가 틀림없습니다. 김 형 혹시…….”

라온이 눈매를 가늘게 여미며 병연을 바라보았다.

“혹시 뭐……?”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녀석이 알아차린 것일까?

병연이 긴장하는 찰나, 라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김 형, 혹시 여인과 함께 있다 오신 겁니까? 하긴, 김 형 정도 되시면 여인들이 엮인 굴비처럼 줄줄이 따를 만도 하지요.”

라온이 ‘헤’ 하고 순진하게 웃었다.

“여인은 무슨!”

“뭘 그리 부정하십니까? 잘난 사내에게 여인이 따르는 것은 하늘이 정한 순리입니다. 저는 다 이해합니다.”

“그런 거 아니야.”

“저는 다 이해한다니까요. 같은 사내끼리 뭐 감출 것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그런 거 아니라니까!”

이해한다는 라온의 말에 병연은 급기야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느닷없는 날벼락에 라온은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알겠습니다. 그런 거 아니라고 치겠습니다.”

그런데 뭘, 그리 화까지 내십니까?

아, 요즘 왜들 이러실까? 화초저하도, 김 형도 왜 이리 내게 성화를 내시는 것인지.

정말 마(魔)가 꼈나?

***

병연이 자선당으로 돌아오고 얼마 후.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위해 라온은 자선당을 나섰다. 그러나 그녀는 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서야 했다.

“장 내관님.”

언제부터 기다린 것일까?

솟을 대문 앞에 쪼그려 앉은 장 내관이 바닥에 연신 무언가를 썼다 지웠다하고 있었다.

“홍 내관, 이제 나오는 거요?”

라온의 부름에 몸을 일으킨 장 내관은 바닥에 썼던 글자를 서둘러 발끝으로 쓱쓱 지웠다.

저런 모습 예전에도 몇 번 봤는데. 글공부라도 새로 시작하신 걸까?

“그런데 아침부터 무슨 일이시옵니까?”

“홍 내관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저를요? 왜요?”

“공주마마께서 홍 내관을 불러 계신다오.”

“왜 저를…….”

“글쎄요. 그건 나도 모르지요. 어쨌든 가십시…….”

“그럴 필요 없다.”

그때 두 사람의 사이로 명온 공주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공주마마!”

장 내관과 라온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명온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하며 라온의 앞에 섰다.

“이리 직접 찾아오지 않으면 도통 너를 만나지 못하겠구나.”

“네? 소인에게 무에 하명하실 일이라도 있으시옵니까?”

“하명(下命)은 아니고, 하문(下問)할 것이 있다.”

하문이면 물어볼 말이 있다는 뜻.

라온은 고개를 더욱 깊숙이 조아렸다.

“말씀만 하시옵소서. 소인이 아는 것이라면 뭐든 대답해 드릴 것이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명온 공주의 질문이다.

궁에서 제일 어려운 사람을 꼽으라면 라온은 첫째도 명온 공주, 둘째도 명온 공주를 꼽으리라.

“듣자하니, 네가 다른 이의 고민을 그리 잘 해결해 준다지?”

"네? 그런 말씀은 대체 어디서 들으셨사옵니까?”

명온은 대답 대신 라온의 곁에 서 있는 장 내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장 내관님.

라온의 소리 없는 부름에 장 내관은 먼 허공으로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부리다가 흘낏 라온을 봤다.

배시시 웃는 모습이 ‘솔직히 잘 해결하시잖소, 홍 내관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라온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거야 범상한 평민들의 이야기고요. 지고하신 왕족의 깊은 속내까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때, 명온 공주의 목소리가 이어져 들려왔다.

“내 동무가 고민이 있다 하여 너를 찾아왔다.”

라온이 반색했다.

공주마마의 고민이라면 어떤 고충이 있을지 알 수가 없어 어려울지 몰라도, 동무라면 어쩌면 괜찮지 않을까?

양반가 규수들의 고민상담은 운종가 시절에 적지 않게 해봤던 경험이 있었다.

“동무시라면…… 누구?”

공주마마께 동무가 계셨던가?

궁금해하는 라온의 앞에 낯익은 얼굴 하나가 불쑥 다가왔다.

“나다.”

오만 도도한 표정의 화려한 미녀.

“소양 공주님?”

라온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중추절 밤에 있었던 일로 한동안 태평관에서 두문불출 하신다 들었는데. 그런 분이 여기엔 어쩐 일이실까?

아니, 그보다 방금 전에 뭐라고 하셨지? 누가 누구의 동무라고?

“설마…….”

명온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소양 공주와 동무가 되었다.”

저, 정말이십니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화원에서 꽃잎과 잎사귀를 날리며 꽃들의 전쟁을 벌이시던 두 분이 진정 동무가 되셨단 말씀이십니까?

세상사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이 오만 도도하신 두 분이 동무가 되실 줄이야.

라온은 멍한 눈으로 명온 공주와 소양 공주를 번갈아보았다.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바로 그때였다.

라온을 가만 바라보던 소양 공주가 불현듯 고운 미간을 찡그렸다.

“이제 보니 너…….”

뭔가를 떠올리는 듯 눈매를 가늘게 여민 채 라온을 뚫어져라 마주보던 그녀가 검지를 곧게 폈다.

“넌, 그 아이가 아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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