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52화 (52/131)

52. 너는 이제부터 내 사람이니까.

방으로 들어선 영의 모습은 흡사 성난 맹수 같았다.

퍼렇게 날이 선 기운을 사방으로 흩뿌리는 영의 난데없는 등장에 목 태감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세자저하께서 이 밤에 여긴 어인 일이시옵니까?”

이내 표정을 수습한 목 태감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영을 맞이했다. 그런 그를 영이 쏘아보듯 노려보았다.

“왜 그러시옵니까?”

목 태감의 물음에 답을 하는 대신 영은 라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홍라온. 이리 오너라.”

영의 부름에 내내 얼어있던 라온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괜찮으냐?”

“네?”

“괜찮냐고 물었다.”

“네. 괜, 괜찮은 거 같습니다.”

대답과는 달리 라온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아마도 긴장이 풀린 탓이리라.

영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하얗게 질린 라온의 안색과 바르르 떠는 몸짓.

목 태감을 바라보는 영의 눈매가 가늘게 여며졌다. 순식간에 방을 성큼성큼 가로지른 영은 목 태감을 멱살을 와락 움켜쥐었다.

“컥, 세, 세자저하. 왜, 왜 이러시옵니까? 컥!”

숨통이 막힌 목 태감이 발버둥을 쳤지만, 젊은 사내의 힘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영의 눈에는 버둥거리는 목 태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는 목 태감의 목을 질질 끌어 벽에다 거칠게 밀어붙였다. 그리고 송곳처럼 날카로운 눈씨로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목 태감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감히 내 사람을 건든 것이냐?”

목 태감을 죽일 듯 노려보던 영이 별안간 목청을 높였다.

“홍라온!”

“네.”

“어떤 일을 당하였느냐?”

“네? 그것이…… 아직 아무 일도…….”

“정녕 아무 일도 없었느냐?”

“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좀 이상한 일이 있긴 했지만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말을 마친 라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때마침 저하께서 오시기도 하셨고…….”

라온은 자신도 모르게 옷고름을 감싸 쥐었다. 만약, 지금 영이 오지 않았다면, 험한 짓을 당하는 것은 둘째 치고 곤궁한 상황에 처할 뻔했다.

영이 다시 목 태감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사나운 짐승처럼 으르렁 거리듯 말했다.

“저 아이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히 여겨라. 만약, 저 아이의 일신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면 네놈을 가만 두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지금 고, 고작 내시 하나 때문에 저를 이리 욕보이시는 것, 것이옵니까?”

“고작 내시 하나라…….”

고작 내시 하나. 그 말을 곱씹는 영의 표정이 차갑게 일그러졌다.

눈치도 없이 목 태감이 고래고래 목소리를 높였다.

“저하께서 지금 무슨 짓을 하신 것인지 아시옵니까? 저, 저는 청국 황, 황제폐하를 대신하여 조선을 방문한 사신이옵니다. 그런 저를 이리 능멸한 것은 청국의 황제를 능멸한 것과 다름없사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양국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정녕 헤아리지 않으시겠다는 것이옵니까?”

“네놈이 감히 나를 겁박하는 것이냐?”

“겁박이 아니옵니다. 현실을 말씀드리는 것이옵니다. 절 건드리면 청국에서도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나 역시 현실을 말해주랴?”

“네?”

“지금 네놈의 나라가 감히 조선과 전쟁을 치룰 여력이 있다더냐?”

“그 무슨, 말, 말씀이옵니까?”

“조정 대신들은 물론이고 백성들 중 상당수가 아편으로 찌들어 있는 나라가 무슨 여력으로 전쟁을 치른다는 것이더냐? 남의 나라에 제 나라 백성의 아편 치료소를 만들 돈을 구하러 다니는 주제에 감히 뉘에게 현실 운운하는 것이냐?”

“그, 그건…….”

“저깟 환관이라 하였느냐?”

“…….”

“저 아이는 저깟 환관이 아니다. 잘 들어라. 저 아이는…… 내 벗이다.”

영의 어금니 사이로 씹어 뱉는 듯한 한 마디, 한 마디가 새어나왔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그의 목소리에 목 태감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영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나운 살기가 목 태감의 전신을 휘어 감았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그의 살갗을 예리하게 후벼 파는 것만 같았다.

목 태감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다 급하게 다시 눈을 떴다.

눈을 감고 있으니 당장이라도 영이 굶주린 맹수처럼 목덜미를 물어버릴 것만 같았던 것이다.

영을 바라보는 목 태감의 눈에는 두려움을 넘어선 공포가 가득했다.

라온을 가리켜 벗이라 말하는 영의 모습에 감히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을 건드렸다는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용,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기어이 목 태감의 입에서 용서를 구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영은 여전히 그의 목을 옥죄고 있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숨통이 막힌 목 태감의 얼굴은 붉다 못해 검게 죽어가고 있었다.

보다 못한 라온이 영의 팔을 잡았다.

“저하…….”

라온의 부름에 영이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하십시오.

애써 환하게 웃으며 라온은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그 속내를 읽은 듯 영이 손에서 스르륵 힘을 풀었다.

“커억! 컥! 컥! 컥!”

영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목 태감은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밭은기침을 해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목 태감의 기침소리가 잦아들자, 기다렸다는 듯 그의 목덜미 위로 영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지금 당장 조선을 떠나라. 다시 한 번 내 눈에 띄었다간, 그땐 네놈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매서운 축객령에 목 태감은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한 채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에게서 눈길을 거둔 영이 라온을 향해 돌아섰다.

“그만 가자, 홍라온.”

영이 라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감히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이끌린 듯 라온은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맞잡았다.

영은 맞잡아오는 라온의 손을 힘 있게 확 끌어당겼다.

“저, 저하.”

“어서 가자. 이곳에는 한시도 있고 싶지가 않아.”

영은 서둘러 목 태감의 처소 밖으로 라온을 이끌었다.

잡은 라온의 손을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는 깍지 낀 손에 단단히 힘을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

영에게 손이 잡힌 채로 라온은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태평관을 나와 궁으로 들어온 이후에도 영은 손을 풀지 않았다. 그렇다고 걸음을 멈추고 다정히 돌아봐 주지도 않았다.

무에 단단히 화가 난 듯 그저 걷기만 했다.

“저하, 저하. 왜 이러십니까? 네? 저하.”

라온이 불렀지만 마치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영은 걷고 또 걸었다. 따라 걷던 라온이 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영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무얼?”

“화가 나시지 않으셨습니까? 왜 그리 화가 나신 것입니까?”

“…….”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으니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이리 화를 내고 계시는 것입니까? 저하. 이러시는 건 저하답지 않은 일입니다.”

“나답지 않다?”

“네. 목 태감의 말이 옳습니다. 고작 환관 하나 때문에 이러시면 안 됩니다.”

“뭐라?”

“저하께선 이 나라의 세자저하이질 않습니까? 이 나라의 국본이 아닙니까? 저 역시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싫었습니다. 하지만 참았습니다. 조선과 청나라의 우호를 위해 참은 것입니다. 한낱 환관도 참는데 어찌하여 저하께서 그리 성화를 내시는 것입니까?”

“누가…… 너더러 참으라 하였더냐?”

“그렇지만…….”

“누가 너더러 두 나라의 우호를 생각하라 하였느냐?”

“저하.”

“환관이 무어라고 스스로 위험을 자초해?”

라온의 어깨를 잡쥔 영이 성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그러지 마라. 그리하였다간 내가 널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저하.”

“다른 무언가를 위해 참지 말란 말이다. 알겠느냐?”

“……저하.”

“대답해라. 약조해라. 다시는 참지 않겠다고.”

“……약조하겠습니다.”

라온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영의 사납고도 슬픈 눈빛을 보니,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너와 나. 벗으로서의 약속이니라. 그러니 절대 어겨서는 아니 된다.”

여운처럼 벗과의 약속을 음미한 영은 그제야 라온의 어깨를 풀어주었다.

라온의 양손으로 제 어깨를 감쌌다.

영이 어찌나 세게 잡았던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어깨가 저려왔다. 하지만 그 낙인과도 같은 고통과 통증이 어째선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온기마저 느꼈다.

라온이 조심스레 영을 보았다. 어느새 평정을 찾은 영은 평소와 같은 차분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라온은 그의 눈동자에 일고 있는 작은 파랑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밤의 그는 이상했다. 얼음보다 차가운 이성과 냉정함을 지니신 분이라 생각했는데. 오늘 밤의 세자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체 왜 이러시는 것일까?

“그런데 저하, 왜 이리 화가 나신 것입니까?”

힐끔, 영의 눈치를 살피던 라온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모르겠다.”

“네?”

그의 정직한 대답에 라온은 다시 한 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

나도 정말 모르겠다. 이 마음이 정녕 무엇인지 알 수가 없구나. 네 말대로 왜 화가 나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다.

그런데도 화가 난다. 네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다 하면서도 자꾸만 화가 난다. 어찌 이리 화가 나는 것일까?

“아무래도 제가 저하를 화나게 한 것 같습니다.”

자책하는 라온의 말에 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다. 아무래도 네가 나를 화나게 한 듯하다.”

“그, 그렇습니까?”

그렇다고 대놓고 그리 말씀하십니까?

라온은 조금은 억울한 듯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영이 말했다.

“앞으로는 내 허락 없이는 다른 이를 만나선 안 된다. 알겠느냐?”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 것입니까?”

따지듯 묻는 라온의 말에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던 영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왜냐하면 말이다…….”

“네.”

“너는 이제부터 내 사람이니까.”

“네?”

“오늘부터 너는 진정한 내 사람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내가 하는 말만 듣고 내가 하는 말만 믿어야 할 것이며, 내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반항하는 라온을 향해 영이 눈매를 치켜떴다.

“감히!”

이내 라온이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저에게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마땅히 지켜야 할 법이 있습니다. 아무리 세자저하께서의 명이라 하여도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잊었느냐? 나는 이 나라의 세자다. 이 나라의 세자는 네가 지켜야 할 법과, 명령 위에 군림하는 존재다.”

“하오나 저하.”

라온이 뒷말을 붙이려하자, 영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너를 거기로 데려간 자가 뉘더냐?”

“그것이…….”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라온이 말끝을 길게 늘일 때였다.

“마종자라는 내관이옵니다.”

영과 라온의 등 뒤로 장 내관이 불쑥 나타났다.

“헉!”

라온의 입에서 마른 신음이 새어나왔다.

이 사람,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을까?

“마종자란 말이지.”

장 내관은 낮게 읊조리는 영을 향해 두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느니. 네가 오늘 큰 도움이 되었구나.”

칭찬하는 영의 말에 장 내관의 표정이 물오른 꽃봉오리처럼 환하게 벌어졌다.

“소인, 백골이 진토 될 때까지 저하를 위해 이 한 몸을 바칠 것이옵니다.”

“뭐, 굳이 몸까지 바칠 필요는 없다.”

“아니옵니다. 오직 저하를 위해 이 한 몸 불사르는 것이 지금껏 소인이 살아온 유일한 이유이옵니다.”

“되었느니.”

“아니옵니다. 소인, 저하께서 원하신다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었사옵니다.”

불현듯 두 볼을 발그레 붉히는 장 내관의 모습에 영은 휙 등을 돌렸다.

무에 쫓기는 사람처럼 너른 보폭으로 동궁전으로 사라지는 영의 뒷모습을 장 내관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서서 영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장 내관이 돌연 곁에 있는 라온을 돌아보았다.

“홍 내관, 별 일 없었소?”

“네. 그런데 장 내관께서는 어인 일로…….”

“내 일이 있어 홍 내관을 찾아갔다가 마침, 뜻하지 않게 마 내관과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듣게 되었소. 내가 듣자하니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던데.”

“심상치 않은 분위기라뇨?”

“목 태감, 남색으로 유명한 자라오.”

“그렇습니까?”

어쩐지 이상하다 했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그런데 정녕 아무 일도 없었소? 듣자하니 손버릇도 고약하다 들었소만. 들이는 아이마다 성한 구석 없이 나온다는 소문이 자자하오.”

“처음에는 조금 이상한 기운도 있었지만,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거참, 이상한 일이오. 예쁘장한 사내만 보면 눈이 뒤집힌다고 하던데. 홍 내관처럼 곱디고운 분을 어찌 이리 얌전히 내 보냈을까?”

장 내관은 이상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이내 해맑게 웃어보였다.

“그나저나 다행이오. 아무 일도 없었다니.”

“네. 다행입니다. 그런데 세자저하께 제 얘기를 전하신 분이 장 내관님이옵니까?”

“당연히…….”

장 내관이 허리를 쭈욱 폈다.

“나지요. 내가 아니면 그런 일을 뉘가 하겠소. 아무래도 홍 내관이 고초를 당할 것 같아…… 내, 냉큼 세자저하께 고하러 갔다오.”

“아, 그렇습니까?”

보통은 그런 경우 직접 구해주지 않습니까?

“어쨌든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하하. 이 은혜 잊지 마시오.”

라온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네. 잊지 않겠습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봐야겠소.”

말을 마친 장 내관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장 내관님께서는 왜 날 찾아오셨던 거지?”

심심해서 놀러 오신 건가? 아니면 무슨 중요한 용무가 있었는데, 목 태감 일 때문에 잊어버리신 건 아닐까?

***

“성 내관님! 성 내관님!”

내반원의 집무실로 마종자가 황급히 뛰어들었다.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기에 이리 경거망동이야?”

“들으셨사옵니까? 목 태감이 조선을 떠났다고 하옵니다.”

“목 태감께서? 그분이 갑자기 왜?”

깜짝 놀란 성 내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자저하께서 갑자기 목 태감의 처소로 가시어 목 태감을 쫓아냈다고 하옵니다.”

“뭐라? 어째서 세자저하께서 목 태감의 처소로 찾아가셨단 말이더냐?”

성 내관의 말에 마종자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소인이 말씀드리지 않았사옵니까? 홍라온, 그 녀석을 건드는 게 아니라고 말이옵니다.”

그때였다.

내반원의 문이 벌컥 열리며 동궁전의 무사들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무, 무슨 일이오?”

“환관 마종자를 끌고 오라는 명이오.”

근엄한 명과 함께 마종자의 몸이 오랏줄에 묶였다.

“성 내관님, 어찌하옵니까? 소인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성 내관님. 살려 주시옵소서. 소인을 살려 주시옵소서.”

“걱정하지 마라. 내 곧 그분께 기별을 넣을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입 다물고 있어라. 알겠느냐?”

성 내관은 끌려가는 마종자를 안심시켰다.

행여 저 입에서 쓸데없는 말이 새어나왔다간, 자신뿐만 아니라 줄줄이 굴비로 엮일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사달이 벌어지기 전에 이 일을 덮어야만 했다.

성 내관은 서둘러 환복한 뒤 궁 밖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아무 문제없다,”

그분이 나선다면 다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니 이리 조급해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

***

반 시진 후.

“제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성 내관은 여전히 서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 미동도 없는 사내를 보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저는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가고 있건만, 눈앞의 사내는 유유자적, 한가하기만 했다.

사내가 느긋한 목소리로 다시 물어왔다. 여전히 서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였다.

“마종자가 잡혀갔다? 과연, 큰일이로군요. 그런데 아까 목 태감에게 누구를 보냈다고 했습니까?”

“홍 내관이라는 건방진 녀석이지요.”

“홍 내관이라……. 혹여 홍라온이라는 아이인가.”

“네. 바로 그 녀석입니다.”

성 내관의 대답에 사내가 드디어 읽던 서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이윽고 고개를 드는 사내의 얼굴이 촛불 아래 온전히 드러났다.

가면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사내, 다름 아닌 윤성이었다.

윤성은 잔뜩 기대하고 있는 성 내관을 바라보았다.

“내 오늘에서야 세상에 운이라는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

성 내관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웬 운수 이야기일까?

“그대를 보니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으로 운도 없는 사람이구나.”

말과 함께 윤성은 서책이 놓인 탁자를 한쪽 옆으로 미뤄둔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말씀이온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성 내관의 물음에 윤성은 발길질로 대답을 대신했다.

윤성의 발길질이 성 내관의 가슴팍을 힘껏 내리찍었다. 컥, 외마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성 내관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한껏 몸을 움츠리고 있는 그의 몸 위로 매서운 매질이 쏟아졌다.

불구대천의 원수를 대하듯 윤성의 매질엔 조금의 인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퍽퍽, 퍽퍽!

방 안을 가득 채웠던 둔탁한 소음이 멈췄다.

윤성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소맷자락에서 비단 손수건을 꺼내 들고는 방 안을 천천히 걸으며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꼼꼼하게 피를 지워내자 어느덧 거칠어진 숨결도 한결 차분해졌다.

옷에 묻은 먼지도 털어내고, 흐트러진 옷차림도 가다듬었다. 마지막으로 머리모양까지 정리할 즈음엔 들끓던 성정도 평소의 차분한 모습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윤성은 피범벅이 된 채로 바닥에 고꾸라져 있는 성 내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대가 왜 맞았는지 아시겠습니까?”

“끄, 끄으. 모, 모르겠뜹니다.”

윤성이 자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대는 건들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습니다. 이제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아시겠지요?”

“코, 콩 내콴…….”

“그렇습니다. 홍 내관 바로 그 사람이지요. 제 계획을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니, 앞으로는 절대로 그 사람을 건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제 말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성 내관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로 덜대도 콩 내관으을 근들지 않켔뜹니다.”

성난 매질에 잔뜩 입이 부푼 성 내관이 꾸역꾸역 핏물을 흘려내며 말을 했다.

“이제라도 알아들으셨다니 정말 다행이군요.”

윤성은 성 내관을 향해 티끌 한 점 없이 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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