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51화 (51/131)

51. 자꾸 이러시면 진심으로 뺏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오랫동안 준비했던 가배연회가 어이없이 끝나 버린 후.

진노하신 주상전하께서는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대신들을 대상으로 피의 숙청을 감행하셨다……가 정상적인 행보가 아니려나?

그래, 피의 숙청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조취를 취하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리라.

하지만…… 궁은 평온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신들은 연회 다음날부터 입궐하여 주상전하를 알현하였고 주상전하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들을 대했다.

그렇게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이 이어졌다.

라온 역시 연회 전의 생활로 되돌아갔다.

오늘도 다른 소환내시들과 내시 교육을 받고, 소소한 하루일과를 마친 라온은 저녁 무렵 자선당으로 돌아왔다.

세자저하께서 사신단과 만나지 않는 날이라, 그동안 미뤄뒀던 일을 할 짬이 생긴 터라 라온의 움직임은 다른 때보다 부산했다.

그녀는 서둘러 자선당 벽장에 곱게 넣어둔 작은 보퉁이를 꺼냈다. 윤성이 선물한 비단 치마와 저고리가 들어 있는 보퉁이었다.

언제 또 이런 것을 이런 것을 입어 볼 수 있을까?

하룻밤의 꿈인 듯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며 라온은 아쉬운 미소를 얼굴에 떠올렸다.

그러나 여인으로 사는 것이 자신의 몫이 아니듯이, 이 옷 역시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라온은 보퉁이를 끌어안고 서둘러 자선당을 나섰다.

이윽고 그녀가 향한 곳은 윤성이 있는 예조의 서고였다.

“참의 영감.”

라온이 열린 서고 안으로 빠끔히 고개를 들이밀었다.

“참의 영감, 계십니까?”

여기 계시다고 들었는데. 안 계신 건가?

저녁 빛이 들어찬 실내를 라온은 훑는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평소 윤성이 주로 있던 커다란 탁자 아래까지 살펴보았지만, 윤성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안 계시나 보네.”

라온이 낮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서고 밖으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날 찾아 온 겁니까?”

어깨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라온은 수리 매를 본 노란 병아리처럼 화들짝 놀랐다.

“차, 참의 영감?”

놀래라. 언제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신 거야?

“이런, 제가 놀라게 한 모양이군요. 괜찮습니까?”

“기척이 없어 아무도 안 계신 줄 알았습니다.”

“사실, 홍 내관이 들어오시는 걸 보고 몸을 숨겼습니다.”

“왜요?”

“왜라뇨? 당연히 홍 내관을 놀리려고 그런 것이지요.”

“네?”

라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을 본 윤성이 악동처럼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히 홍 내관은 놀리는 재미가 있는 분이십니다.”

"…….”

당사자 앞에 두고 그런 얘기 너무 당당하게 하시는 거 아니십니까?

라온의 입술이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지켜보던 윤성의 입가에 다시 긴 호선이 그려졌다.

“이것 보십시오. 이렇게 또 반응을 하시니. 제가 어찌 이 즐거움을 놓칠 수가 있겠습니까?”

애써 숨긴다고 숨겼는데. 속내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라온의 표정에 윤성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라온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예까지 무슨 일입니까? 혹여, 제가 보고 싶어 오신 겁니까?”

윤성이 무릎을 굽혀 라온과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다정하게 물어보는 그에게 라온이 품에 안고 있던 보퉁이를 불쑥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지난번에 참의 영감께서 주신 옷입니다.”

“그런데요?”

돌려드리는 겁니다.”

라온과 그녀가 내미는 보퉁이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윤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받지 않겠습니다.”

“왜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선물입니다.”

“부담스러운 선물입니다.”

“이미 준 선물을 되돌려 받을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제겐 쓸모없는 물건입니다.”

“제게도 쓸모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째서요? 여인에게 여인의 옷이 어찌 쓸모가 없다 말하는 겁니까?”

누가 들을세라. 뒷말은 옴쳐드는 목소리로 윤성이 속삭였다.

라온 역시 낮게 대답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지금 여인이 아니라 환관입니다. 이런 제게 이 옷은 그림의 떡입니다. 다시 입을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왜 다시 입을 일이 없다고 단정하는 겁니까? 다음번에 저와 다시 궁 밖으로 나갈 때 입으면 되질 않겠습니까?”

“다시 궁 밖이라고요?”

“네.”

“…….”

궁 밖으로 나간다는 윤성의 말에 라온은 잠시 멈칫했다. 윤성은 바위에 생긴 균열로 빗물이 스며들듯 라온이 보인 작은 설렘을 비집고 들어갔다.

“정히 그리 부담스러우면 주십시오. 제겐 쓸모없는 물건이니, 버리겠습니다.”

“이 곱고 귀한 것을 어찌 버린다는 말입니까?”

어림짐작해도 열 냥은 족히 넘어 보이는 옷이었다. 아니, 열 냥이 무언가. 값이 더 나가면 더 나갔지 덜하지는 않으리라.

그런 것을 스스럼없이 버린다는 말에 라온은 저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윤성이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홍 내관께서 입으면 되겠습니다.”

“그건 좀…….”

“버릴까요?”

“그것도 좀…….”

어째 말려드는 것 같단 말이지.

“자, 그럼. 이 옷은 홍 내관께서 입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쐐기를 박으며 옷이 보퉁이를 라온의 품으로 되돌려 준 윤성이 지나가듯 물어왔다.

“그런데…… 그날 밤 이후, 저하께선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까?”

“말씀이요? 무슨 말씀이요?”

“아무래도 세자저하의 증상이 생각보다 중증인 모양이군.”

윤성이 턱을 쓰다듬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윤성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윤성이 라온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마음 같아서는 홍 내관과 담소라도 나누고 싶지만, 곧 예조의 회의에 참석해야 합니다.”

“앗, 제가 너무 시간을 많이 빼앗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잠시 쉬려던 참에 홍 내관이 찾아온 겁니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 말씀하시니 고맙습니다. 그럼 일 보십시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겸연쩍은 표정을 짓던 라온은 옷 보퉁이를 안고 예조서고를 나섰다.

“바쁜 일이 끝나면 홍 내관을 찾아가겠습니다. 그땐 그 옷 입고 궁 밖 나들이 한 번 더 하는 겁니다.”

서고 문 밖까지 라온을 배웅 나온 윤성이 말했다.

“그럴 수는…….”

“꼭 그렇게 하는 겁니다.”

윤성이 미소와 함께 문을 닫았다.

라온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물끄러미 품에 안긴 보퉁이를 바라보았다. 끝내 옷을 윤성에게 돌려주지 못했다.

꼭 귀신에 홀린 기분이다.

“이 애물단지를 또 받고 말았구나.”

품에 안긴 보퉁이를 내려다보던 라온은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

윤성은 라온이 사라질 때까지 서고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라온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즈음.

그가 문득 허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난고(蘭皐). 언제까지 거기 있을 셈입니까?”

윤성의 물음이 끝나기 무섭게, 아무도 없는 듯 보였던 담벼락 아래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병연이었다.

윤성이 병연을 향해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냈습니까?”

반색하는 그의 모습에 병연이 미간을 찡그리며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그리 웃지 마라.”

“오랜만에 만난 친우가 아닙니까? 너무 반가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친우?”

“네. 어린 시절 저하와 나, 그리고 난고, 우리 세 사람 얼마나 즐거웠습니까?”

먼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윤성의 말에 병연의 눈매가 깊어졌다.

“한때는 그랬었지. 그러나 이제는 너와 나, 이리 얼굴 보고 웃을 사이는 아니지.”

“그런가요?”

말은 그리하면서도 윤성은 얼굴에 드리운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그런데 난고, 오늘은 무슨 볼일입니까?”

“저 아이…….”

병연이 라온이 사라진 곳을 응시했다.

“저 아이라면? 혹시 홍 내관 말입니까?”

“그 아이에게 접근하지 마라.”

“무슨 말씀인지요? 홍라온에게 접근하지 말라니요?”

“…….”

“원하든 원하지 않던 저와 홍 내관은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조의 일을 홍 내관이 종종 돕는 중이거든요. 게다가 오늘은 제가 아니라 홍 내관이 절 찾아왔지요.”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윤성을 병연이 꿰뚫는 시선으로 응시했다.

잠시 동안 천근보다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그 적막을 깨며 병연이 말했다.

“저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면…… 네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게 될 것이다.”

“하하하, 난고. 그리 말하니 내가 정말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지 않습니까?”

“……내 말 명심해라."

나직한 한 마디를 남긴 채 병연은 가벼운 몸짓으로 예조의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저하에 이어 난고까지. 한 여인에게 왜들 이러십니까?”

윤성이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곤란하군요. 자꾸 이러시면…… 진심으로 뺏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

자선당으로 돌아온 라온은 뜻밖의 불청객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 내관님이 여긴 어쩐 일이시옵니까?”

자선당 대청마루에 앉아있던 마종자가 한달음에 라온에게로 달려왔다.

“너, 대체 어딜 갔다가 이제 오는 것이냐?”

마종자의 지청구에 라온은 어색하게 웃었다.

“잠시 예조의 서고에 다녀왔습니다.”

라온의 대답에 마종자가 놀란 표정이 되었다.

“예조의 서고에? 무슨 일로 네가 그곳에 다녀온 것이냐?”

“참의영감께 개인적인 볼일이 있었습니다.”

“너 따위가…….”

‘너 따위가 감히 어떻게…….’라고 말하려던 마종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긴히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따라 오너라.”

“제가 할 일이요? 지금 이 시간에 말이옵니까?”

“그래.”

“무슨 일인지 여쭤도 되겠사옵니까?”

해시(亥時: 밤 9시)가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번을 서는 환관이 아니면 특별히 할 일은 없는 것으로 아는데…….

의아한 라온의 귓가에 마종자의 대답이 들려왔다.

“목 태감께서 너를 긴히 보자 하신다.”

“목 태감이라시면? 청국에서 오신 그분 말씀이옵니까?”

“그래. 그 귀한 분께서 너를 찾으신단 말이다.”

“그분이 저를 왜?”

“그, 그것이…… 흠흠. 이 나라 조선의 태평과 성대에 대해 너와 긴히 이야기를 할 것이 있다 하였다.”

“……?”

라온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청국의 태감께서 일개 소환내시와 조선의 태평성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했다고요?”

“뭐야? 그 눈빛은?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것이냐?”

지레 찔린 마종자가 목청을 높였다.

“아니, 딱히 못 믿겠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목 태감께서 정말 그런 연유를 저를 부르신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잔말이 많구나. 그렇다면 그런 줄 알 것이지. 어서 따라오너라.”

라온을 향해 윽박지르듯 눈초리를 사납게 치뜬 마종자가 성큼 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라온은 어쩔 수 없이 앞서 걷는 그의 뒤를 쫓았다.

아, 뭔가 불길한데…….

***

“홍 내관, 여기 있었소? 내가 얼마나 홍 내관을 찾아…….”

자선당 안으로 들어서자 대청마루에 서 있는 라온의 모습이 보였다.

라온을 찾아왔던 장 내관은 반갑게 손을 흔들며 아는 체를 했다. 그러다 그는 이내 주춤주춤 흔들던 손을 내렸다.

“저자는 마 내관…… 아니, 개종자가 아닌가? 저자가 어찌 홍 내관을 찾아왔을꼬? 그런데 대체 무슨 얘기를 저리 심각한 얼굴로 나누는 것인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장 내관은 쓰쓰쓱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치 은신술이라도 쓰는 듯 빠르면서도 은밀한 걸음이었다.

잠시 후, 장 내관은 라온과 마종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바로 근처까지 다가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장 내관의 존재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했다.

장 내관이 두 귀에 손나팔까지 만든 채 그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는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

사위가 캄캄한 어둠으로 뒤덮힐 시각.

태평관의 심처로 두 명의 환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감 어르신, 소인 마종자이옵니다.”

마종자의 고하는 소리에 목 태감의 처소 문이 활짝 열렸다.

“안으로 들게.”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하고 섰느냐? 어서 안으로 들지 않고.”

마종자가 주춤하는 라온을 채근했다.

“저 혼자 들어가는 것이옵니까?”

“태감께서 너를 불렀다질 않았느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종자는 라온을 열린 문 안쪽으로 힘껏 밀어 넣었다.

“어엇!”

외마디 비명소리가 입에서 새어나왔다. 얼결에 라온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탁, 굳게 닫혀 버렸다.

“마 내관님.”

황급히 부르는 라온의 목소리에 대답이라도 하는 듯 문풍지 위로 마종자의 그림자가 그려졌다.

“이 조선의 안위가 너에게 달려 있음이다. 그러니 목 태감의 명 없이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문 밖으로 나와서는 아니 될 것이다.”

마종자의 겁박에 라온은 어리둥절하고 말았다.

“네?”

뭐라는 거야? 조선의 안위가 왜 나한테 달려있는 건데?

그때였다.

“잘 왔다.”

라온의 등 뒤로 낯선 인기척이 들여왔다.

고개를 돌리자 청나라 양식으로 꾸며진 방 안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휘장이 내려진 침소와 붉게 옻칠한 가구들. 목 태감은 술상이 차려진 둥근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술 한 잔 하겠느냐?”

기름기가 흘러내리는 양 볼이 말을 할 때마다 파문을 일으켰다.

목 태감은 술이 담긴 술잔을 라온에게 권했다.

“술이요?”

술 한 잔 하겠냐는 목 태감의 물음에 문득 영과 병연이 떠올랐다.

운치 좋은 달밤에 두 사람과 나눴던 기분 좋은 한 잔의 술. 두 벗과 언젠가 다시 한 번 그런 자리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아닌 다른 이와의 술자리는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특히나 지금과 같은 경우라면 더더욱.

“송구하오나 술을 먹을 줄 모르옵니다.”

“그래?”

목 태감은 라온에게 권했던 술을 제 입안에 털어 넣었다.

라온이 오기 전에 제법 마셨는지 불콰한 기운이 얼굴에 가득했다.

“그런데 저는 왜 부르셨는지요?”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했느냐?”

“소인이 불민하여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 하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벽돌을 쌓듯 하나에서 열까지 차근차근 가르치는 맛도 제법 괜찮을 듯하구나.”

게슴츠레 눈매를 가늘게 내리 뜬 목 태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큼성큼 걸음을 떼자 뱃살이 출렁거렸다. 파도처럼 일렁거리는 그것을 보며 라온 역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불과 몇 발짝 물러나기도 전에, 목 태감에 잡히고 말았다.

어느새 라온의 앞으로 바싹 다가온 목 태감이 불현듯 ‘흐흐’ 거북한 웃음을 흘렸다.

왜 웃는 것일까?

라온이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찰나.

탁.

목 태감이 거친 손길로 라온을 벽으로 밀어 붙였다.

“헉.”

라온은 놀란 신음을 서둘러 안으로 삼켰다.

목 태감의 씨근덕거리는 숨소리가 이마를 짓눌렀다. 그의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라온의 전신을 벌레처럼 기어 다녔다.

술기운이 담긴 뜨거운 입김이 볼에 닿았을 때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을 만큼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나 상대는 청국의 태감. 그것도 황제를 대신하여 조선을 찾은 사신단의 수장이었다.

“왜, 왜 이러십니까?”

라온은 목 태감의 얼굴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외로 틀며 소리쳤다.

“내가 왜 이럴 것 같으냐?”

“모, 모르니 묻는 것이 아닙니까?”

“두려워 할 필요 없다. 넌 그저 내가 하는 일을 얌전히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리하면 머잖아 너도 내가 보는 극락을 보게 될 것이니라.”

목 태감은 라온의 귓불에 바싹 입술을 가져가며 속삭였다.

라온의 전신으로 소름이 오싹 끼쳤다. 라온은 본능적으로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그런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목 태감이 라온의 어깨 굴곡을 따라 손을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슬금슬금 안쪽으로 향하는 그의 손길이 라온의 저고리 고름을 막 풀어낼 때였다.

문득 목 태감이 손짓을 멈췄다.

그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한껏 찡그린 표정으로 라온을 노려보았다.

“이상하군.”

“뭐, 뭐가 말입니까?”

“왜 흥분이 되지 않는 거지?”

“네?”

“이런 상황이라면 흥분이 돼야 정상인데, 전혀 흥분이 되질 않는군.”

이런 상황 어디가 정상이야?

마치 따지듯 다그치는 목 태감의 모습에 라온은 어이가 없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목 태감은 뭔가 큰 난제에 봉착한 사람처럼 인상을 썼다.

“대체 왜 이럴까? 대체……왜?”

말을 하던 목 태감이 불현듯 눈빛이 빛냈다.

“혹시 네 녀석…….”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라온을 노려보던 그가 별안간 라온의 옷고름을 풀려고 했다.

“이러면 안 됩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이러지 마십시오.”

“죽고 싶은 것이냐?”

완강히 거부하는 라온의 손을 늙은 태감이 완력으로 제압했다.

바로 그때였다.

쾅!

사위를 진동시키는 소음과 함께 내내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어떤 놈이냐?”

은밀한 유희를 방해받은 목 태감이 핏대를 세웠다.

“나다.”

날카로운 창처럼 짓쳐들어오는 목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이윽고, 적의를 넘어 살의를 품은 영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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