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여장이 아니라 여인입니다
희붐한 새벽이 동궁전을 찾아들었다. 푸른 새벽안개 사이로 황금빛 태양이 비스듬히 얼굴을 내비췄다.
연회의 아침.
하지만 영의 일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연회가 시작되기 전까지 그는 서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정작 글은 단 한 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뇌리엔 온통 라온으로 가득 차 있어, 글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던 것이다.
애써 글자에 집중한 것도 잠시, 영은 저도 모르게 간밤의 일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잠시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갔던 정자에서 라온을 만났을 땐 일순,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애초에 여인의 얼굴을 구별하지 못했던 그였다.
하지만 정자에 있던 여인을 보는 순간, 너무도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라온이라는 사실을.
처음 라온을 보았을 땐, 너무 놀란 나머지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어째서 이 아이가 여기에 있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이 아이가 어찌하여 이런 모습일까?
혹여 여장을 한 것은 아닐까 하고, 잠시잠깐 의심도 하였더랬다.
하지만 아니었다. 라온의 모습을 보고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을 이내 깨달았다.
환관 중에는 여인과 흡사한 환관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진짜 여인과는 엄연히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마주한 라온은 분명 여인이었다.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홍라온, 이 아이는 여인이다. 그런데 어째서 환관이 되어 궁에 들어오게 된 것일까? 행여 되고 싶다고 하여도 여인이 환관이 될 수는 없었다.
그래, 만에 하나, 천에 하나 환관으로 선택되었다고 하자. 그래도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으리라.
환관이 될 자라면 으레 치러야 할 신체적인 검사와 과정이 있었을 터.
그 지독하고 엄중한 과정을 거쳐 환관이 된 것이니, 라온이 여인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당연히 여인이 아니라 단정 지었다.
그런데 여인이라니.
어이없고 당황하는 한편, 안도하는 마음도 생겨났다.
그동안 라온을 볼 때마다 이유 없이 마음이 불편했다. 쓸데없이 가슴이 두근거리는가 하면, 괜스레 신경 쓰였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혹여 내가 남색에 빠진 것인가?
라온에게 느꼈던 묘한 감정이 아무렇지도 않았다면 거짓이리라.
그러나 이제야 알겠다.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 녀석이 잘못된 것이었어.
여인의 몸으로 환관이 되다니. 엉뚱한 것도 정도가 있지.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또한,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 그 내막도 궁금하였다.
그런 그에게 윤성이 그녀를 소개해 왔다. 하여,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여기서 아는 척을 하면 라온이 곤란해질지 모르리라. 아니, 그 전에 김윤성, 이자가 이 일을 빌미로 어떤 수작을 부릴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섰다.
적어도 이 밤에는 라온을 모른 척해야겠다는 생각에 영은 내내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풍등으로 인해 벌어진 작은 소동과, 소양공주와의 만남으로 인해 녀석과 할 수 있었던 밤 산책이 떠오르자 이상하게도 심장 언저리가 따뜻해지며 간질거렸다.
묘한 감정, 결코 싫지 않은 두근거림.
그러다 문득 영의 입에서 한탄하는 목소리고 흘러나왔다.
“큰일이구나.”
서책을 보고 있어도 정작 글은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일평생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혼란스러운 감정에 영은 당황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입가의 미소를 잃지 않았다.
미소의 뒤끝엔 아쉬움도 깃들어 있었다.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녀석이 여인으로 치장한 모습을…….
그때였다.
문 밖에서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라온이구나.
영의 입가에 금세 미소가 맺혔다.
그 사이 침소의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러나 영은 모르는 척 서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언제부터일까? 이제는 발소리만 들어도 라온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자신의 모습에 영은 작게 실소를 흘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느새 평소의 무심한 표정으로 되돌아 간 그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늦었구나.”
“송, 송구합니다.”
"간밤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네?”
영의 단순한 물음에 라온은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들킨 건 아닐까 하여 안절부절못하는 것이렷다? 생각하는 게 얼굴로 다 드러나는 녀석이라.
제법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웃을 수는 없었다.
영은 큭큭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책상 아래에 있는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이리 늦은 걸 보니 간밤에 달맞이라도 한 모양이로구나.”
“그, 그렇사옵니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는 라온의 모습.
그 작은 반응마저도 이젠 민감하게 느껴졌다. 예전엔 미처 몰랐던 것들이 이제는 하나하나 새겨지듯 영에게 다가왔다.
그런 그의 모습이 낯설다는 듯 라온이 영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느냐? 왜 그리 뚫어져라 보는 것이냐?”
“아, 아닙니다.”
또 입술을 삐죽거리는구나. 뭐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일까?
영은 라온의 저 작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
‘어떻게 그렇게 까맣게 몰라볼 수가 있으십니까?’
물끄러미 영을 바라보던 라온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여인의 모습을 하고도 영에 들키지 않은 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끝내 못 알아본 영에 대한 아쉬움이 다시금 뭉클 일어났다.
아무리 여인의 얼굴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매일 보는 자신의 얼굴마저도 못 알아보실 수 있단 말인가.
세상에 둘뿐인 벗이라고 하시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씀하실 때는 언제고. 실제로는 별반 관심도 없으셨던 게 아닐까?
라온의 입술이 저도 모르게 뿌루퉁 튀어나왔다.
“벗이라고 하시더니.”
라온은 제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내 서책에 집중하고 있던 영이 관심을 보였다.
“뭐라 하였느냐?”
“아닙니다.”
라온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군.”
이내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서책으로 다시 돌리는 영의 입가에 미소가 새어나왔다.
분명, 조금 전 ‘벗이라고 하시더니’라고 중얼거렸지? 자신의 얼굴을 못 알아본 것이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어쩐다? 실은 알아보았다고 알려줄까?
아니다. 그리할 수는 없었다.
애써 자신의 정체를 숨기던 녀석의 행동으로 보아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것이 분명할 터.
나중에…… 녀석이 직접 제 입을 말할 때까지 기다리자. 그게 벗에 대한…… 그리고 녀석에 대한 예의이리라.
“지각을 한 녀석이 중얼중얼 쓸데없는 말도 많구나.”
“지각한 일을 반성중입니다.”
대답하는 녀석의 목소리가 불퉁스럽다.
영이 불현듯 라온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왜 그러십니까?”
라온이 무릎걸음으로 영의 근처로 다가갔다.
“조금 더 가까이.”
“이만큼 가면 됩니까?”
“어허! 내 곁에서 한 발짝 이상 떨어지지 말라하였다.”
라온이 주춤주춤 다가왔다.
“한 발짝입니다. 이제 되었습니까?”
“맹랑한 녀석.”
물끄러미 라온을 응시하던 영이 손을 들어 올렸다.
라온은 저하께서 뭘 하시려고 그러시나 하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영은 입가에 작은 미소 한 조각을 띠며 한 손으로 라온의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남은 한 손은 자신의 이마에 가져갔다.
그렇게 한 손으로는 제 이마를, 반대편 손으로는 라온의 이마를 짚은 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열은 없는 걸 보니, 어디 아픈 것은 아닌 듯하고…… 그럼 잠이 덜 깬 것이냐? 어찌 낯빛이 이리 안 좋은 것이냐?”
영의 스스럼없는 행동에 화들짝 놀란 라온이 뒤로 쓱 물러났다.
“뭐, 뭐하시는 것입니까?”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니 과연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되짚어 생각해보니 예전에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그동안은 라온이 여인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기에 이상하게만 생각했지, 의심하지는 않았다.
영이 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 발짝.”
영의 경고에 라온이 다시 주섬주섬 다가왔다.
“저하께서 이상한 행동을 하시니, 제가 놀라 그러는 것이 아닙니까.”
“이상한 행동?”
“방금 전에 이상한 행동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방금 전에 내가 무얼 어찌하였다고?”
“저하께서 좀 전에 제 이마를 이렇게 짚으시질 않으셨습니까?”
“그게 무에 이상하다는 것이더냐?”
“네?”
라온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영은 이번에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뗀 채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내가 내 사람의 낯빛을 걱정하는 게 뭐가 이상하다는 말이더냐? 너야말로 별걸 다 이상하게 생각하는구나.”
그때, 문밖에서 헛기침 소리와 함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소인 최 내관이옵니다.”
“무엇이냐?”
“정전으로 납실 시각이옵니다.”
“알았느니.”
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그림자가 문풍지에 그려지기 무섭게 방문이 양 옆으로 스르륵 열렸다. 방문 밖으로 걸음을 떼는 와중에도 영은 한 마디를 잊지 않았다.
“홍라온, 한 발짝이라 하였다. 내 등 뒤에 딱 붙어 있어라.”
***
사시초(巳時初: 아침 9시)를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예정대로라면 연회가 시작되었을 시각.
하지만 거대한 차일이 쳐진 정전 마당에는 쥐 죽은 듯한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높게 쌓아올린 음식이 놓인 단상 위에는 주상전하를 비롯한 왕족들이 앉아 있었고, 정전 한가운데 마련된 무대 위에는 정재를 위한 무희들과 장악원의 악사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흘리지 않았다.
단상 아래.
품계석이 놓인 정전마당을 내려다보는 왕의 눈동자에 참람한 빛이 스며들었다. 문무백관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는 대부분이 비어 있었다.
임금이 주빈인 연회에 신료들이 참석하지 않았다.
“아바마마, 그만 안으로 듭시옵소서.”
왕세자 영이 왕께 조용한 목소리로 아뢰었다.
“간밤에 뱃놀이를 떠났던 배가 우연한 사고로 발길이 묶였다고 하옵니다. 아무래도 대신들과 사신들은 오늘 연회에 참석이 어려울 듯하옵니다.”
“…….”
“소자가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그만 대전 안으로 듭시옵소서.”
영의 간청에 왕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느니. 허면, 과인은 그만 들어갈 것이니. 뒷일은 세자가 알아서 하라.”
왕께서 자리를 떨치고 일어섰다. 그것을 신호로 내내 불편한 얼굴로 앉아 있던 왕족들도 하나둘 그 뒤를 쫓아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단상 위에 남아 있는 왕족은 영이 유일했다.
그의 등 뒤에 시립하고 있던 라온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영을 바라보았다.
왕께서 베푸시는 연회에 대신들이 참석하지 않는 믿기지 않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것은 명백한 왕권에의 도전이었다.
부원군에서 주최한 뱃놀이가 뜻하지 않은 사고를 만나 벌어진 어쩔 수 없는 없는 일이라 하였지만…….
이것이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는 사실은 어린 아이라도 알 수 있음이었다.
영이 오늘 연회를 위해 제작한 홀기에 반발한 대신들이 이런 식으로 저희들의 뜻을 관철시키려 했던 것이다.
힘의 균형이 왕이 아닌 외척에게로 기울어진 지 오래. 그러나 그것을 막상 눈앞에서 목도하니 영의 너른 등이 처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거대한 성벽처럼 높고 단단해 보였던 그의 뒷모습의 조금은 위태로워 보이는 건 착각이려나?
가장 높은 곳에 계시는 고귀하신 분.
세상에 태어나 단 한번도 상처받지 않으셨던 분이시라. 이런 식의 도발에 분명 마음 다치셨으리라.
화초저하의 마음에 생긴 생채기를 어찌해야 하나?
라온의 눈동자에 뿌옇게 안타까움이 깃들었다.
그때,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는 듯 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단상 아래를 내려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 연회는 이것으로 파하노니. 모두들 돌아가라.”
말하는 영의 얼굴에 잠시잠깐 미소가 깃들었다. 그러나 너무나 순식간에 사라진 미소라. 누구도 본 사람은 없었다.
대신들이 연회에 오지 않은 것은 분명 슬프고 분노할 일이다. 하지만 영은 분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웃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가 뜻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던 까닭이다.
지금 당장은 왕의 위세를 꺾었다 생각하겠지만, 곧 모두가 알게 되리라. 왕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를.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대신들은 스스로가 덫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을 것이다.
순식간에 표정을 갈무리한 영은 예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한 채 동궁전으로 향했다.
그의 뒤를 잔뜩 긴장한 라온이 뒤쫓았다.
***
“괜찮으십니까?”
라온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영에게 물었다.
처소로 돌아온 이후 영은 내내 침묵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실의에 빠진 모습은 아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책을 읽는 모습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어찌 보면 여유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기에 라온은 더더욱 걱정이 되었다.
아마도 속내를 숨기시는 것이 틀림없었다. 괴롭고 노한 감정을 안으로 삭이고 계시리라.
라온은 커다란 눈망울로 연신 영의 안색을 살폈다.
“화초저하…….”
“…….”
영에게서는 아무런 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도통 말이 없는 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온이 불현듯 처소 밖으로 사라졌다. 다시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작은 다담상이 들려 있었다.
“저하.”
조심스레 다담상을 영의 앞에 내려놓은 라온은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서책에서 눈을 뗀 영이 라온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최 내관님께서 그러시는데, 오늘 아침수라도 제대로 젓수지 않으셨다면서요?”
“그런데?”
“한번 드셔보십시오. 조금 전에 만든 떡인데 참으로 맛나다 합니다.”
“되었다.”
“이럴 때일수록 잘 드셔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마음이 헛헛할 땐 속이라도 든든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마음을 다치셨다고 하여 아니 드시면 저하만 손해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든든히 드셔야 합니다.”
라온은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다담상에 놓인 떡 하나를 영에게 권했다.
“자, 아…… 하십시오.”
영은 묘한 시선으로 라온을 응시했다.
“네가 지금…… 나를 걱정해 주는 것이냐?”
“당연하지요.”
“왜?”
“벗이 벗을 걱정하는데 왜라뇨? 그리 말씀하시면 듣는 벗 섭섭합니다.”
“벗이라…….”
평소 자신이 누누이 라온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정작 라온의 입에서 자신을 칭하는 말로 ‘벗’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이상하게도 불편해졌다.
벗이라 하여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라는 라온의 말에 목안에 생선뼈라도 걸린 듯 껄끄러웠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고 있자니, 영의 속내를 오해한 라온이 냉큼 떡을 내려놓았다.
“떡이 싫으십니까? 그럼 이 약과는 어떻습니까? 이것도 무척이나…….”
“맛난 것이지.”
“네. 이건 저도 먹어본 것이라 잘 압니다. 이 약과, 무척이나 맛있습니다. 그러니 드셔보십시오.”
며칠 전에 먹었던 약과의 기억을 떠올리던 라온은 저도 모르게 군침을 꼴깍 삼키고 말았다.
그 모습을 힐끔 쳐다보며 웃음을 짓던 영의 얼굴에 문득 짓궂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 권하니, 하나 먹어볼까?”
말을 하며 다담상을 제 앞쪽으로 끌어당긴 영이 약과를 입안에 밀어 넣었다.
그렇게 하나, 둘…… 약과가 그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지켜보는 라온의 얼굴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했다. 약과의 맛을 기억하는 입속엔 자꾸만 침이 고였다.
그러나 무정하신 세자께선 작정이라도 한 듯 남김없이 다담상의 약과를 죄다 먹고 있었다.
갑자기 없던 식욕이라도 생긴 것일까? 우리 화초저하, 원래 이렇게 잘 드셨어? 어쩜 한번 먹어보란 소리도 없으신…….
“하나 먹어 볼 테냐?”
그때, 라온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영이 물어왔다.
“아, 아닙니다.”
저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 한 번에 넙죽 받아먹진 않을 거라는 말이지요.
한 번은 예의상 거절하고, 또 다시 권하시면 그때 먹어야지.
작심했지만…….
“그래? 네가 오늘은 배고프지 않은가 보구나.”
영의 대답에 내심 기대하던 라온의 얼굴이 줄 끊어진 연처럼 푸스스 풀려버렸다.
화초저하, 삼세 번이라는 말도 모르십니까? 아니, 세 번은 아니라도 어떻게 딱 한 번 권하고는 그리 미련 없이 거두시는 것입니까?
잔뜩 억울한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때였다.
힐끗, 곁눈질하던 영이 라온의 관모를 푹 눌러버렸다.
“감히, 어디라고 입을 삐죽대는 것이냐?”
어찌 이 녀석 하는 짓이 이리도 귀여워 보이는 것인지. 아마도 여인이라는 사실을 안 탓이리라.
눈앞이 가려진 라온이 허공을 짚으며 허둥대는 모습마저도 귀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속내를 알 리 없는 라온이 볼멘소리를 냈다.
“어찌 제게 이러십니까?”
“몰라 묻는 것이냐? 감히 뉘 앞이라고 불퉁한 모습이더냐?”
말은 그러했지만 푹푹 라온의 관모를 더욱 깊게 내리누르는 영의 손끝엔 어린 아이 같은 장난기가 가득했다.
“이러지 마십시오. 안 보인단 말입니다.”
“안 보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아…… 왜 이러십니까? 이러시면 안 됩니다.”
화초저하, 정녕 이러실 겁니까? 안쓰러웠던 마음, 취소입니다.
관모를 제대로 쓴 라온은 잔뜩 골 난 표정으로 영을 응시했다. 그런 그녀를 영이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마주 보았다.
그런데…… 우리 화초저하, 원래 이리 짓궂은 분이셨던가? 뭔가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진 것 같은데.
대신들이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셔서 충격이라도 받으신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야?
그때, 라온의 입으로 뭔가가 불쑥 들어왔다.
“이건…….”
“약과니라.”
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먹어라. 명이다.”
***
“저하께선 어쩌시자고 그런 장난을 치시는 것인지.”
정오 무렵.
동궁전을 나선 라온은 왔던 길을 되돌아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주상전하께서 세자저하를 찾지 않으셨다면 라온을 향한 영의 짓궂은 장난은 계속 되었으리라. 결국, 약과에 떡까지.
다담상에 차려내간 음식 대부분이 라온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덕분에 배는 부르지만, 왠지 영의 술수에 말려든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어린 아이도 아니시고, 어찌 그러시는지 모르겠네.”
불퉁한 목소리로 투덜대며 걸음을 옮겼다.
간밤에 한숨도 못 잔 탓에 몸이 물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졌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자선당이 가까워질수록 축 늘어졌던 몸이 다시 꼿꼿해졌다.
팽팽한 긴장감이 등줄기를 타고 오르자, 피곤함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불안함이 들어찼다.
두근두근, 두근두근두근.
불안감에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오늘 새벽. 여인의 모습으로 병연과 마주친 이후, 갑자기 자선당을 나가버린 그로 인해 제대로 된 해명조차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마냥 두려워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엉킨 실타래를 풀어야 했다.
라온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자선당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김 형, 김 형.”
아랫배에 단단히 힘을 준 라온은 방에 들어서기 무섭게 병연을 불렀다.
병연이 대들보 위에 있길 바라는 마음이 반, 지금 당장은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절반이었다.
그때, 예의 무심한 목소리가 대들보 위에서 들려왔다.
“왜?”
여느 때라면 반색하며 쪼르르 대들보 아래로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인 상황인지라.
라온은 겸연쩍은 얼굴로 대들보 위를 올려다보았다.
“김 형, 계셨습니까?”
“…….”
“그렇지 않아도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라온의 말에 병연이 훌쩍 대들보 아래로 뛰어내렸다.
대들보에서 맥없이 떨어졌던 새벽의 참사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 우아하고 유려한 자태로 사뿐 바닥에 착지했다.
이윽고 병연은 라온의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흠흠.”
괜스레 헛기침을 흘리던 라온이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김 형…….”
“…….”
“오늘은 어디 안 나가십니까?”
“그게 궁금해서 사람을 그리 애타게 찾은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뭐야?”
“그러니까…… 그게…… 식사는 하셨습니까?”
“할 말 없으면 그만 나가봐야겠다.”
“있습니다. 할 말.”
심드렁한 표정으로 일어서는 병연을 라온은 다급히 붙잡았다.
“김 형, 오늘 새벽에…….”
병연이 멈칫한 채로 라온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아, 어찌 말을 해야 하나? 어디서부터 털어놔야 하는 걸까?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병연에게는 털어놔야 할 것 같았다.
김 형이라면 어쩌면 내 사정을 이해해 주실지도 몰라.
아니, 설령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어쩔 수 없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병연에게까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사실 제가 오늘 새벽 그런 복장을 하고 있었던 건 말입니다.”
바로 그때였다.
“관심 없어.”
병연의 나직한 한 마디가 라온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네?”
“여장하는 네 녀석의 독특한 취미 따윈, 관심 없다는 뜻이야.”
“여장이라고요?”
“누구에게나 말 못 하는 비밀 하나쯤은 있는 법이지. 그러니 굳이 내게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지 마라. 나 또한 너의 독특한 취미에 대해서는 함구할 거다.”
“김 형.”
설마 제가 여장을 했다고 착각하고 계신 겁니까?
“할 말 다 끝났지?”
“네?”
“나는 이만 나가봐야겠다.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성가신 녀석.”
불퉁한 목소리로 라온을 밀어낸 병연은 그대로 자선당을 나가 버렸다.
결국 라온은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심정으로 자선당을 나서는 병연의 뒷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라? 이게 아닌데.
김 형, 그게 아닙니다. 독특한 취미라뇨? 여장이라니요?
여장이 아니라 여인입니다.
제가 여인이란 말입니다!
안 들켜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왜 자꾸 분한 마음이 드는 거지?
화초 저하도 그러시더니, 이젠 김 형까지.
내가 그렇게 사내처럼 생겼나?
***
한편, 자선당을 나선 병연은 서둘러 자선당의 담벼락 아래로 녹아들 듯 스며들었다. 그는 흐릿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자선당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잘 했다. 지금은 녀석의 비밀을 눈 감아줘야 할 때다.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너도 그만 좀 진정해라.”
병연은 마치 병이라도 걸린 듯 두근대는 제 심장을 향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