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궁녀 홍단이
사람들이 사라진 거리로 푸른 밤이 안개처럼 밀려들었다.
어느덧 이울기 시작한 달빛 아래.
젊은 두 남녀가 작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궁까지 배웅해드리겠습니다.”
윤성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야심한 시각입니다. 여인이 혼자 밤거리를 걷게 만들다니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라온을 궁까지 배웅하겠노라고 고집을 부리는 중이었다.
라온이 윤성을 향해 한사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다른 여인과는 다르다는 사실을요. 일평생을 사내처럼 살아온 저입니다. 이깟 어둠쯤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어둠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질 않습니까.”
“그럼…….”
잠시 윤성의 말뜻을 생각하던 라온이 이번에도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어느 사내가 저를 보고 다른 마음을 품겠습니까? 행여 그런 사람이 있다면 재빨리 이 조족등을 얼굴에 비추면 됩니다.”
“조족등을 얼굴에 비추면 된다니……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얼굴이 무기라는 말, 못 들어보셨습니까? 설령 어둠 속에서 제 모습을 제대로 못 보고 뒤쫓아 온다고 하여도 제 얼굴을 확인하면 틀림없이 발길을 돌릴 것입니다.”
라온의 말에 윤성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라온을 응시했다.
“왜 그리 보십니까?”
“궁금하여서요.”
“무엇이 말입니까?”
“홍 내관께서 정말 몰라 그리 말을 하는 것인지. 그것이 아니라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는 것인지 영 갈피가 잡히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무얼 모르는 척한다는 겁니까?”
라온의 되물음에 윤성이 불현듯 발치에 놓인 조족등을 라온의 얼굴 가까이로 들어올렸다.
“이 얼굴을 보고 사내들이 발길을 돌릴 것이라는 생각은 대체 어떻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홍 내관은 면경도 안 보십니까?”
“네.”
“네?”
그 당당한 대답에 윤성은 잠시 멍해졌다.
그런 그를 향해 라온이 조심스레 다시 물어왔다.
“면경, 잘 안 봅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왜요? 왜 면경을 안 보십니까? 어찌 여인이 면경을 안 볼 수가 있는 것입니까?”
윤성의 다그치는 듯한 물음에 라온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야…… 면경 살 돈도 없거니와, 행여 면경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을 들여다볼 시간도, 행색을 꾸밀 여유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인이질 않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다른 여인들과는 사정이 다르다니까요. 그리고 지금은 여인이 아니라 환관입니다.”
말을 하며 라온은 작게 웃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라온을 보며 윤성은 잠시 말을 잊었다.
무언가 묵직한 것이 그의 가슴 한쪽을 짓누르는 듯했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홍 내관은 단 한 번도 여인이고 싶었던 적이 없습니까?”
“…… 제겐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금은 아픈 물음이라, 라온은 대답을 회피했다.
지금까지 그녀의 삶이란 여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사치일 정도로 치열했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 역시 지금까지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럼 누군가 홍 내관을 지켜주었으면 하고 바란 적도 없습니까?”
“제 일신 하나는 거뜬하게 지킬 자신, 있습니다.”
제법 다부지게 말아 쥔 주먹을 보란 듯 흔드는 라온을 보며 윤성의 미소 띤 얼굴이 잠시 잠깐 흐려졌다.
자신을 위한 욕심 같은 건 단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듯한 라온이 그의 심장에 이질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뭔가 찌르르한 감촉이 가슴 한구석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윤성은 서둘러 흐려졌던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그를 따라 라온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윤성을 향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오늘 정말로 고맙습니다. 덕분에 귀한 경험을 많이 하였습니다.”
“저야말로 홍 내관 있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참의영감이 아니라면 제가 언감생심, 이런 귀한 옷을 어찌 입어 보겠습니까. 게다가 풍등도 날려보질 않았습니까. 사실, 예전부터 풍등은 한 번 날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오늘 참의영감께서 제게 베푼 것이 이미 차고 넘칩니다. 그러니 궁까지 배웅해주시겠다는 말씀은 그만 두십시오.”
“하지만…….”
“궁까지 저를 배웅하였다가 북촌에 있는 참의영감 댁까지 가려면 아마 환하게 날이 샐 것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연회에 참석하셔야 할 분이 아니십니까. 조금이라도 쉬셔야지요.”
“아무리 그래도…….”
“제가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정히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자, 그럼 이걸 받으십시오.”
윤성이 소맷자락에서 무언가를 꺼내 라온에게 건넸다. 궁으로 들어갈 때 필요한 통부였다.
이것만 있으면 궁으로 들어갈 때 별 문제 없으리라.
"정말로 고맙사옵니다,참의영감."
윤성에게 고개를 숙여 이별을 고한 라온은 궁을 향해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조금 걷다 힐끗 뒤를 돌아보니 윤성이 여전히 처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참 좋으신 분.
라온은 다시 한 번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걸음을 재게 놀렸다.
자신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윤성은 저 곳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다시 뒤돌아보았다. 더 이상 윤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꽤 멀리 왔음이라.
설사, 여전히 그곳에서 윤성이 서서 라온을 지켜보고 있다 해도 라온이 서 있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는 완전히 혼자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갑작스레 발아래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차게 느껴졌다. 라온은 옷깃을 여미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금 이 순간, 화초저하와 함께라면 얼마나 좋을까?’
영은 풍등을 날리기 무섭게 돌아가야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그를 따라서 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었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영의 뒤를 차마 쫓을 수가 없었다.
화초저하와 함께 이 길을 걸었다면 이리 춥지도, 쓸쓸하지도 않았을 텐데.
빗속에서 영이 제 소맷자락으로 만들어주었던 장막이 떠올랐다.
그 아늑하고 따뜻했던 라온만의 공간. 그 짧고 포근했던 시간을 떠올리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나저나, 우리 화초저하. 고작 입성 하나 달라졌다고 매일 보는 내 얼굴마저 못 알아보시다니.”
자신을 전혀 모르는 사람 대하듯 하던 영을 생각하니 웃음과 함께 서운한 감정이 교차했다.
어찌하면 받은 마음, 고스란히 돌려줄 수 있을까를 궁리하며 걸었다.
그러다 문득 라온은 걸음을 멈췄다.
“아차! 이 옷!”
라온은 중대한 볼일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입고 있는 이 아름다운 여인의 옷은 되돌려주고 사내의 복장으로 갈아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입성으로 궁으로 들어갔다가 행여 아는 이라도 만난다면…… 날벼락도, 아주 큰 날벼락이 떨어지리라.
“큰일 났다. 늦겠어.”
옷을 갈아입었던 포목점의 문이 닫히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라온은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
“이 밤중에 저리 달리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윤성은 작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눈매를 가늘게 여몄다.
무에 그리 급한 일이 생긴 것인지.
저 멀리, 라온이 조급증을 내며 달리는 것이 보였다.
라온이 싫다하여 내놓고 뒤를 쫓을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홀로 궁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보이지 않게 라온의 뒤를 쫓던 윤성은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는 인식하지 못했다. 지금 자신이 짓고 있는 미소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라는 사실을 말이다.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는 윤성의 뒤로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길게 늘어졌던 그의 입매가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윤성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예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정중한 물음이었지만, 말투에는 제 뒤를 밟은 자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참의께서 진행하고 계시는 일이 어찌 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하여 와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습니까.”
윤성이 사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가면 같은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은 라온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그 눈빛을 보지 못한 것인지.
사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혹여, 소인이 할 일은 없습니까? 언제라도 말씀만 하십시오. 귀찮은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사내가 라온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며 의미심장한 말을 내놓았다.
순간.
윤성이 차고 냉혹한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런 생각일랑은 꿈에서도 안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네?”
“내가 하는 일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내 일에 끼어들었다간…… 나도 내가 무슨 짓을, 어찌 할지 모르겠습니다.”
윤성의 미소가 깊어졌다.
그 미소 속에 소름끼치도록 잔인한 빛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
“보십시오. 이보세요! 문 좀 열어주세요. 이봐요!”
라온은 문 닥힌 포목점의 문을 힘껏 주먹으로 내리쳤다.
쾅쾅쾅쾅!
텅 빈 거리에 시끄러운 소음이 쾅쾅 메아리쳤다.
그러나 불 꺼진 포목점의 안쪽에서는 그 어떤 반응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무도 없는 듯했다.
“망했다.”
낙심한 라온은 포목점 처마 아래에 쪼그리고 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털썩 주저앉고 싶었지만. 입성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였던가.
행여 귀한 옷이 망가질까 싶어 자분자분 하는 행동이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쪼그린 채 무릎에 턱을 괴고 앉은 라온의 귓가에 축시(丑時:새벽 1시)를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조금 있으면 인시(寅時: 새벽 3시)가 되리라.
오늘은 연회가 있는 날이다. 그 때문에 내시부의 모든 내시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인시까지 내반원으로 모이라는 엄명이 있었다.
행여 늦거나, 참석하지 못했다간…….
마종자와 성 내관의 얼굴을 떠올리던 라온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체머리를 흔들던 라온은 저 멀리로 보이는 궁궐과 손에 쥐고 있는 통부를 번갈아 보았다.
“이 통부만 있으면 궁에 들어가는 것은 별 문제가 없을 텐데.”
하지만 행여 아는 이라도 만나게 되면 어쩐다?
잠시 고민하던 라온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고민만 하다 시간을 축낼 수는 없었다. 한번 부딪혀 보는 수밖에.
아랫배에 단단히 힘을 준 라온은 궁을 향해 힘찬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들어갈 거요?”
궁문 앞에서 쭈뼛대는 라온을 보며 문 앞을 지키는 섰던 병사가 물었다.
끄덕끄덕.
저 나이 든 병사가 제 얼굴을 알아 볼 리 만무했건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라온은 고개를 외로 비스듬히 기울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기우뚱한 모습이 되레 병사의 의심을 샀다.
“왜 그리 이상하게 서 있는 게요?”
“목…… 목을 삐끗해서.”
“아주 대차게 놀다 오셨구먼.”
낮게 웃음을 흘리던 병사가 척, 손을 내밀었다.
“네?”
휘둥그레 눈을 뜨는 라온에게 병사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통부 좀 보여주시오.”
“아, 네. 통부.”
라온이 내미는 통부를 받아든 병사가 품에서 작은 책자를 꺼냈다.
“통부는 있으니 됐고. 자, 어느 전각의 뉘요?”
“네? 그, 그건 왜요?”
“아, 이 궁녀님이 궁밖에 한두 번 나가셨나?”
아저씨, 저 이번이 두 번째로 궁 밖으로 나갔던 건데요.
“명부 확인하는 거 아니오? 어느 전각의 누구요?”
“그, 그러니까…….”
처음에는 화초저하와 김 형의 뒤를 쫓아 나갔던 터라.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다.
아까 궁을 나갈 때도 윤성이 알아서 처리해 이런 명부를 적어야 하는 줄은 알지 못했다.
그런데 통행 명부라니. 아니, 그보다 명부에 적힌 이름을 대조한다니.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졌다. 어찌 대답해야 하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자니 다시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보시오, 그러니까만 계속하지 말고…….”
바로 그때였다.
“무슨 일인가?”
실랑이를 벌이는 두 사람의 사이로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수문장이었다.
“여기 있는 궁녀님이 어느 전각의 뉘인지 말을 하지 않아…….”
병사의 말에 수문장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통부는?”
“여기 있습니다.”
병사가 라온에게서 받은 통부를 수문장에게 건넸다. 통부에는 아무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수문장이 라온을 쏘아보았다.
“어느 전각의 누구인가?”
“그, 그러니까…….”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라온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동, 동궁전의…….”
“동궁전, 동궁전이라…….”
책자를 손끝으로 훑는 수문장을 보며 라온은 마른 입술을 연신 깨물었다. 어쩌지? 어찌한다?
바로 그때였다.
“여기 있군. 동궁전 나인, 홍단이.”
“네?”
“동궁전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동궁전에서 나간 궁녀는 나인 홍단이뿐인데. 자네가 아닌가?”
“네? 아니, 그러니까. 네. 제가 궁녀 홍단이인 거 같습니다. 아, 아니, 제가 홍단이가 틀림없습니다.”
궁녀 홍단이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죄송합니다.
라온은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궁녀 홍단에게 진심으로 사죄했다.
“들어가 보시오.”
수문장이 문 한쪽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가볍게 목례를 한 라온은 서둘러 궁문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뒷모습을 멀뚱하니 지켜보던 늙은 병사가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수문장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입니까요? 아까 잠시 눈을 붙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요?”
“늙었는지 이제는 잠도 안 오네.”
새파랗게 젊은 수문장의 말에 늙은 병사는 어이없는 미소를 흘리고 말았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냐?
병사는 이번에는 저 멀리로 사라지는 궁녀의 뒤태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동궁전에 저리 고운 궁녀가 있었던가? 홍단이…… 홍단이란 말이지.”
***
어느덧 인시가 가까워진 시각.
"최 내관, 거기 있느냐?”
세자의 침소 앞을 지키던 최 내관은 영의 부름에 황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불러계시옵니까? 저하.”
“지금 당장 알아볼 일이 있다.”
“하명하시옵소서.”
“오늘 번을 서는 수문장을 찾아가 궁녀 홍단이가 환궁했는지 알아보라.”
“네? 궁녀 홍단이요?”
느닷없이 이른 시각에 웬 궁녀타령이실까? 그런데 궁녀 홍단이? 궁에 그런 이름을 가진 궁녀가 있었던가?
고개를 갸웃하는 최 내관에게 영이 재촉하는 눈빛을 보냈다.
어서 알아보지 않고 무얼 하는 것이냐?
소리 없는 재촉에 밀려 최 내관이 황급히 밖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영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서렸다.
궁녀 홍단.
궁녀 홍단이 사실은 영이 급조하여 만든 가상의 인물이라는 사실은 그의 명을 받잡은 수문장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영은 자정이 넘은 시각에 라온과 헤어졌다. 라온이 입고 있는 옷에서 새 옷 특유의 향이 났다.
그렇다는 말인즉, 포목점에서 새로 지은 옷을 바로 갈아입은 것이 틀림없을 터였고.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갈아입은 옷은 포목점에 있을 터였다.
물론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컸다. 그러나 영은 일말의 가능성에 대해 대비했던 것이다.
혹시나 라온이 겪게 될 낭패에 대해 미리 예측하고 방도를 마련한 것. 그것이 과연 쓰임이 있을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그때 상념에 빠져있는 영의 귓가에 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다시 종종 걸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최 내관이 나직이 아뢰었다.
“궁녀 홍단이가 좀 전에 환궁하였다고 하옵니다.”
“그래?”
영의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
***
“휴, 아무도 본 사람 없지?”
이른 새벽시간인 덕에 다행히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자선당까지 올 수 있었다.
자선당의 솟을 대문 안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온 라온은 그제야 내내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지척에 불 꺼진 처소가 들어왔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아, 이제야 숨통이 트이네.”
서둘러 처소 안으로 들어온 라온은 방 한복판에 대(大)자로 드러누웠다.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등줄기며, 어깨며. 온몸이 죄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듯했다.
라온은 팔다리를 길게 늘이며 굳은 근육을 풀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푸른 새벽빛이 처소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문풍지의 절반이 푸르게 변한 것으로 보아 곧 인시를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누워있던 라온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옷을 갈아입고 다시 환관 홍라온으로 되돌아갈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라온은 가늘게 여민 눈으로 텅 빈 방 안을 에둘러 보았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이 느낌.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데.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라온은 등잔에 불을 댕겼다. 어둑했던 실내가 금세 환해졌다.
휙, 주위로 시선을 돌리던 라온은 버릇처럼 고개를 들어 대들보를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김 형!”
하루 이틀, 처소를 비울 거라 했던 병연이 대들보 위에 있었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방에 들어올 때부터 휑한 느낌이 아니더라니.
반가운 마음에 라온은 병연이 있는 대들보 아래로 쪼르르 달려갔다.
“김 형, 언제 오신 것입니까? 하루 이틀 못 돌아오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녀의 목소리에 내내 눈을 감고 있던 병연이 눈을 떴다.
“성가신 녀…….”
버릇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의 목소리가 무슨 일인지 잦아들었다.
반짝거리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커다란 두 눈과 동그란 콧방울, 그리고 붉은 입술은 변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라온의 모습을 더듬던 그의 시선이 문득 정지했다. 동시에 그의 사고도 그대로 멈췄다.
***
“김 형.”
병연의 속내를 알 리 없는 라온이 여전히 화사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
반색하는 라온의 부름에도 병연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 일상적인 침묵.
그러나 라온을 바라보는 병연의 표정은 평소와 전혀 달랐다.
무언가에 놀란 듯 움찔하는가 싶더니 급기야 대들보 위에서 떨어지기까지 했다.
잔나비(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 천하의 김 형이 대들보에서 떨어질 줄이야.
“김 형!”
놀란 라온이 바닥에 떨어진 병연을 잡아 일으켰다.
“김 형, 괜찮습니까?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까?”
“…….”
라온의 걱정 어린 물음에도 병연은 여전히 침묵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그 모습 그대로 굳어버리기라도 한 듯 한쪽 무릎을 굽힌 채 라온을 바라볼 뿐이었다.
“김 형, 왜 그러십니까? 왜 그렇게…….”
어디 크게 다친 것은 아닐까? 걱정하며 병연의 시선을 쫓던 라온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아차, 잊고 있었네. 내가 지금 어떤 모습인지.
라온은 아직 여인의 복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귀신이라도 본 듯한 병연의 표정이 찍어내 듯 라온에게로 옮겨졌다.
병연과 마주앉아 있던 라온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뭐야?
나 이번엔 정말로, 제대로, 정통으로 들킨 거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