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그런 거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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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8
가을 소낙비는 언제 그리 거세게 내리 쏟았나 싶게 금세 그쳤다.
모처럼 아늑했던 분위기는 비가 그침과 동시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라온은 괜히 하늘을 향해 불퉁한 눈길을 보냈다.
변덕도 심하시지. 이왕 빗살 뿌려주시는 김에 좀 더 뿌려주시면 얼마 좋습니까?
그런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듯 유유히 걷는 영의 뒤를 쫓아 걷고 있노라니 어디선가 바쁘게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급한 용무라도 있나?
그런데 멀리서부터 다가온 발소리들이 어쩐 일인지 영과 라온의 주위를 에워쌌다.
“황정엿 사세요.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있는 황정엿 사세요.”“귀한 유밀과 먹어보세요. 이때가 아니면 절대로 못 먹는 귀한 음식이에요.”열 살 남짓의 아이 대여섯이 엿과 유밀과를 흔들며 호객행위를 했다.
이미 중추절도 파장 분위기. 때 아닌 소낙비로 손님을 놓친 아이들은 한가롭게 걷고 있는 영과 라온을 보고 진드기처럼 달라붙었다.
라온은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이런 아이들이 있구나.’명절 때가 되면 흔하게 볼 수 있는, 동정심을 이용한 얄팍한 상술이었다.
아이들의 상술이 통한 것일까?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영이 걸음을 멈추고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그 엿, 가격이 얼마더냐?”기다렸다는 듯 엿을 팔던 아이가 대답했다.
“석 냥입니다.”영이 관심을 보이는 듯하자 다른 아이들도 서로 자신의 물건을 내보이며 아우성쳤다.
“이 유밀과는 두 냥 닷 푼입니다. 특별히 나리께만 싸게 드리는 겁니다.”“화전도 일품입니다. 두 냥에 여기 있는 걸 다 드리겠습니다.”아이들이 부르는 터무니없는 가격에 라온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 녀석들이 어디서 허튼 수작을.
아이들이 팔고 있는 엿과 유밀과는 하나같이 값싼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가장 비싸 보이는 적(炙)조차도 개떡을 불에 대충 그슬려서 고기처럼 보이게 만든, 한 마디로 말해 가짜 고기였던 것이다.
그런데 뭐? 석 냥? 두 냥 닷 푼? 저 아이들이 파는 것을 다 합해봐야 잘해야 닷 푼 정도 될까? 어린 녀석들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라온이 허튼 수작 부리지 말라고 호통을 치려 할 때였다.
“가만 보자 석 냥에 두 냥 닷 푼. 그리고 넌 얼마라고 했지?”“한 냥…… 아니, 두 냥, 두 냥입니다.”“그래. 두 냥이구나.”영이 아이들이 부르는 대로 돈을 치르고 음식을 사기 시작했다.
돈을 받은 아이들은 엉덩이에 불붙은 망아지 떼처럼 우르르 어딘가로 달려갔다.
행여 마음이 바뀌어 돈을 돌려달라고 할까봐 멀리 도망을 가 버린 것이다.
영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라온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아니, 저 양반이 왜 저걸 사는 거야?
“아이들이 속이는 걸 모르셨습니까?”내내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소리 없이 가슴만 치던 라온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알고 있었소.”“그런데 어찌 그 돈을 다 주셨습니까?”“모두 내 백성이 아니요. 내가 그들을 어여삐 여기는 건 당연한 일이오.”아, 네. 그렇군요. 내 백성. 그러니까 저 아이들도 화초저하께서 어여삐 여기는 백성들이란 말이지요.
라온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아이들에게까지 사기를 당할 정도라니. 걱정이다. 걱정이야.
우리 화초저하, 세상 물정에 이리 어두우시니. 앞으로 험한 세상 어떻게 헤쳐 나가시려는지 모르겠네.
그런 라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은 담담한 미소만 지었다. 그러다 문득, 낯선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몇 발짝 떨어지지 않는 곳에 예닐곱 살 정도의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그보다 어린 남동생의 손을 잡고 영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남루한 행색의 남매는 영이 방금 전, 아이들에게 산 음식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허름한 입성과 깡충한 소맷자락 아래로 보이는 바싹 마른 팔이 안쓰러웠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이 남매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한쪽 무릎을 굽혀 소녀와 눈높이를 맞춘 영이 물었다.
“너희도 음식을 팔러온 것이더냐?”소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전 팔 게 아무것도 없어요.”영이 소녀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어린 사내아이를 바라보았다.
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사내아이의 다른 손엔 거리에서 공짜로 나눠준 풍등이 들려 있었다.
“그 풍등, 파는 것이 아니니?”소녀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 풍등은 공짜로 받은 거라 팔 수 없어요.”“난 그 풍등이 가지고 싶구나. 혹시, 팔 생각은 없느냐?”영의 제안에 잠시 생각하던 소녀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공짜로 받은 풍등을 돈을 받고 팔수는 없어요.”소녀의 똑 부러지는 대답에 영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곧바로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허어, 이를 어쩐다. 난 그 풍등이 꼭 가지고 싶은데……. 그렇지. 이렇게 하면 어떻겠느냐?”영이 조금 전에 산 음식들을 소녀에게 내밀었다.
“넌 공짜로 얻은 풍등이라 돈을 받고 팔 수 없다 하고, 난 그 풍등이 꼭 갖고 싶으니……. 그렇다면 풍등을 이 음식들과 바꾸면 어떻겠느냐?”“음식요?”소녀가 눈을 깜빡였다.
“제법 먹음직스러워서 구입을 하긴 했는데, 생각해보니 조금도 배가 고프지 않구나. 안 그래도 버려야 할까 난처해하던 참이다. 만약, 네가 이 음식을 받는 대신 풍등을 준다면 참으로 고맙겠구나.”“하지만…….”소녀가 망설였다.
그때, 풍등을 꼭 들고 있던 남동생의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남매는 꽤 굶주려 있었다.
영이 음식을 내밀었을 때부터 사내아이의 눈은 음식에 꽂혀 있었다.
남동생을 가만 바라보던 소녀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음식을 주시면 풍등을 드리겠어요.”“고맙구나.”영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
“이번엔 왜 엉뚱한 짓을 했다고 따지지 않는 것이오?”두 남매와 헤어지고 얼마 뒤, 이번에는 아무런 타박도 하지 않는 라온이 이상하다는 듯 영이 물었다.
그의 물음에 라온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과하지 않으니까요.”“어째서 그렇소?“음식을 파는 아이들에겐 과하게 큰돈을 주셨습니다. 그 아이들은 오늘의 기억을 잊지 않을 거예요. 앞으로도 큰돈을 쉽게 구할 수 있다고 기대하게 되겠죠. 어쩌면 오늘과 같은 요행만 바라게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조금 전의 오누이는 달랐어요.”“어떻게 다르단 말이오?”“그들 오누이에게 풍등은 그저 잠깐의 유흥에 지나지 않았죠.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물건. 하지만 음식은 달랐습니다. 저하께서 주신 음식은 오누이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어요.”“과연…… 그렇군.”영이 미소를 지었다. 라온도 덩달아 미소를 짓다가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런데 그 풍등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엉뚱하게 산 음식은 배고픈 오누이에게 주었다. 하지만 대신에 풍등이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풍등이 꼭 필요한 사람은 없었다.
라온의 말에 영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풍등 역시 꼭 필요한 사람에게 주면 되질 않겠소.”“풍등이 꼭 필요한 사람이요? 그게 누굽니까?”궁금한 얼굴로 묻는 라온에게 영이 풍등을 내밀었다.
라온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저 말입니까?”“아직 풍등을 날리지 못하지 않았소?”“그렇긴 하지만…….”“아까 누각에서 보니 꽤 날려보고 싶어 하는 듯 보이던데. 내 짐작이 틀렸소?”영이 라온의 손에 풍등을 넘겨주었다.
잠시 머뭇하던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꺼운 마음으로 풍등을 받아들었다.
“고맙습니다.”라온은 영이 건네는 세필 붓으로 풍등에 소원을 적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그녀의 소원은 오직 하나였다.
‘어머니와 우리 단희, 더는 아프지 않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주세요.’거침없이 소원을 적은 라온은 잠시 망설였다.
힐끔, 등 뒤에 있는 영의 눈치를 살피던 그녀는 한 귀퉁이에 아주 작게 몇 글자를 더 적었다.
어깨 너머로 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원은 다 적었소?”“네. 다 적었어요.”“그럼 날려 보냅시다.”영이 풍등에 불을 붙였다. 천천히 떠오른 풍등이 어느새 하늘 높은 곳까지 올랐다.
달무리와 어울리는 풍등의 한쪽 귀퉁이에 혹여 영에게 들킬까 작게 써 놓은 라온의 또 다른 소원이 적혀 있었다.
‘화초저하와 김 형께서 바라시는 바가 모두 이뤄지길 기원합니다.’
***
영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거리의 풍경이 빠르게 라온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 얼마나 걸었을까?
영과 보폭을 맞춰 걷던 라온은 그가 멈춰 서기에 함께 걸음을 멈췄다.
내내 영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돌리니 수표교의 커다란 은행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낭자!”
어느 틈엔가 두 사람을 발견한 윤성이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아, 깜빡 잊고 있었다. 참의영감과 이 은행나무 아래에서 만나기로 했었지.
영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웠던 탓에 윤성과 만나기로 한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라온은 미안한 표정으로 윤성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홍 낭자, 대체 어딜 갔다 오는 것입니까? 내내 찾아 다녔습니다.”
영을 의식한 것인지 윤성은 라온을 홍 낭자라고 불렀다. 처음 들어보는 그 호칭이 어색해 라온은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 모습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윤성이 손에 들고 있던 제비꽃 색의 풍등을 흔들었다.
“이것 좀 보십시오.”
자랑스럽게 풍등을 흔드는 그를 향해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풍등 아닙니까?”
“네. 제가 특별히 홍 낭자를 위해 남겨둔 것입니다.”
“저를 위해서요?”
“네. 함께 소원을 적어 날려 보내려고요.”
저리 순수한 얼굴로 말하는 윤성에게 차마 이미 풍등을 날렸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라온은 등 뒤에 서 있는 영을 돌아보았다.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다 다시 윤성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참의영감의 소원은 적으셨습니까?”
윤성이 잠시 뒷머리를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라온을 건너다보며 물었다.
“갑자기 소원을 적으려니,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군요. 무슨 소원이 좋겠습니까?”
“참의영감께서 평소 간절히 염원하던 것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간절히 원했던 것이라면…….”
말끝을 흐리던 윤성이 문득 라온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홍 낭자께서 진심으로 제 마음을 알아주는 것입니다.”
“……하하하. 농담이 과하십니다.”
이 양반이, 아까부터 장난에 재미를 붙이셨나.
라온이 밉지 않게 윤성을 흘겨보았다. 질세라 윤성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런, 제 말이 농으로 들리십니까?”
“네. 농으로 들립니다. 그것도 아주 진한 농으로 말입니다. 그러니 장난은 그만하시고 다른 소원을 생각해 보십시오.”
“진심인데.”
제 진심을 알아주지 않아 아쉽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윤성이 이번에는 영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저……아니, 외사촌께서는 소원이 무엇이옵니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던 윤성이 영을 외사촌으로 불렀다. 순간, 심기 불편한 듯 영의 미간에 한 데로 모아졌다.
윤성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해맑은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외사촌의 소원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사옵니까?”
그의 물음에 영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이 땅에서 외척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영의 단호한 대답에 윤성의 미소가 잠시간 경직되었다. 그러나 이내 평소의 부드러움을 되찾은 윤성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외사촌도 참. 듣는 외척, 간담이 서늘해지는 농담을 다하십니다.”
“진심이다.”
이번에도 조금의 망설임 없는 대답이 이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던 라온이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 소원 말고 다른 것은 없습니까? 왜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하늘에서 갑자기 뚝 하고 돈벼락이 떨어진다거나 하는…….”
“이 땅 위에 살아 있는 모든 목숨붙이들이 행복하면 좋겠군.”
라온의 목소리 사이로 영의 진심 어린 대답이 파고들었다.
“누구도 아프지 않고, 아픈 사람은 돈 걱정 없이 쉬이 의원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배고픈 이 없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이 내 소원이오.”
“아…….”
한 나라의 국본답게 소원의 크기도 남다르시군요. 화초저하.
“그러는 홍 낭자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윤성이 라온에게 물었다.
“제 소원은…….”
이미 한번 풍등을 날려 보낸 뒤라, 딱히 다른 소원이 생각나지 않았다. 라온은 괜스레 먼 산으로 시선을 던졌다.
“소원이 없습니까?”
그런 그녀의 사정을 알 리 없는 윤성이 다시 물었다.
“생각해보니 딱히 소원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설마, 소원이 없을 만큼 삶이 흡족하단 뜻은 아니시겠지요?”
“흡족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예전에는 어린 동생이 아파 그 아이의 건강을 염원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아이의 병도 다 나아가고 있고, 큰 재물은 없지만 우리 가족들 배곯지 않게 되었으니. 그 또한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저 역시도 이제는 먹고 사는 데 크게 지장이 없으니. 더 이상 무얼 바라면 욕심이라고 하여 하늘님께서 노하실 것 같습니다.”
다만, 그래도 하나 욕심을 내어보라고 한다면…….
화초저하와 김 형의 곁에 조금은 오래 있고 싶습니다. 달밤에 다정한 벗들과 술잔을 다시 한 번 나누고 싶습니다.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소원인지라. 라온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라온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영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잠시간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서 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첫닭이 울 것이외다! 마지막 풍등을 날리시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소맷자락에서 휴대용 지필묵을 꺼내든 윤성이 풍등에 커다란 글씨 하나를 써 넣었다.
원(願)
“무슨 뜻입니까?”
라온이 물었다.
“소원을 소원한다는 뜻입니다.”
“소원을 소원한다고요?”
“누구의 소원이든, 그 어떤 소원이든 이뤄달라는 뜻이지요.”
이윽고.
중추절 전날에 날리는 마지막 풍등들이 하나 둘, 하늘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 부모의 평안과, 내 아이의 안녕, 그리고 내 연인의 연모가 영원하기를…….
풍등에 실린 소원들이 하늘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그 여린 몸짓에 박차를 가했다.
가을 밤하늘이 금세 오색 찬연한 풍등으로 물들었다.
***
즐거웠던 탓일까?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흐르는 듯했다.
어느덧, 소나기를 뿌린 먹구름도 흩어져 버리고, 휘영청 밝은 달이 다시 제 모습을 되찾았다.
둥근 보름달이 산자락으로 천천히 제 모습을 감추는 시각.
함께 풍등을 날렸던 윤성과 라온에게 일별을 고한 채 환궁한 영이 동궁전의 문턱으로 들어섰다.
“이제 돌아오시옵니까?”
기다렸다는 듯 최 내관이 종종걸음으로 뛰어나왔다.
최 내관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영은 그대로 침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최 내관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평소보다 늦으시어 걱정하셨사옵니다.”
“…….”
“익위사들마저 물리신 채 잠행을 납시었다는 말에 소인, 노심초사 하였사옵니다.”
끄기“잠시 백성들의 명절을 살핀 것뿐이다.”
“그렇사옵니까?”
영이 옷 갈아입는 것을 분주히 돕던 최 내관이 문득 근심어린 표정으로 주저주저 말을 이었다.
“하온데 저하…… 잠행 나가셨다 무에 심기 불편한 일이라도 있으셨던 것이옵니까?”
동궁전으로 들어서는 세자저하의 기색이 여느 때와 확연히 달랐다.
특유의 무심한 표정일랑은 변함이 없었지만 느껴지는 기운은 평상시의 것보다 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영은 단호한 말로 최 내관의 시름을 끊어냈다.
“그런 것 없다.”
어딘가 모르게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지만, 최 내관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영의 시중을 든 최 내관이 뒷걸음질로 침소를 나섰다.
그가 막 조심스럽게 침소의 문을 닫을 때였다.
“하하하하!”
최 내관이 깜짝 놀라며 다급히 문을 다시 열었다.
“어허!”
영의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화, 황공하옵니다.”
최 내관이 다시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느닷없는 웃음소리라니? 내가 무얼 잘못 들었나?
그때 최 내관의 의문에 답이라도 하는 듯 다시 영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그런 거란 말이지. 그런 거였어.”
지금껏 세자저하를 모시면서 이리 크게 웃으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관데? 대체 뭐가 그런 거란 말씀이실까? 우리저하께서 어찌 저러실까?
호기심과 의문은 연기처럼 무럭무럭 커져만 가는데, 정작 영에게는 감히 물어볼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것일까?”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저리 크게 웃으시는 것을 보니 무척이나 기쁜 일이 분명했다.
한편, 한바탕 시원한 웃음을 터트린 영은 무언가를 떠올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읊조렸다.
“율아.”
침소의 그늘에서 한율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 그림자처럼 그의 곁을 지키는 세자익위사의 우익위였다.
우익위 한율에게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영이 말했다.
“네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구나.”
“하명하시옵소서.”
“한 사람에 대해 조사해 주어야겠다.”
“누굴 조사하면 되겠습니까?”
“어쩌다 어처구니없게 환관이 된 아이인데…….”
나직한 목소리로 명을 내리던 영은 문득 말끝을 흐렸다. 그의 미간이 한 데로 모아졌다.
이건 옳지 못하다. 뒷조사라니. 적어도 벗에게 할 짓은 아니었다.
“아니, 아니다. 그만 되었다.”
한율은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홀로 남게 된 영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그 녀석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려봐야겠지? 그것이 벗에 대한 예의겠지? 하지만…… 홍라온. 감히 날 속였으렷다? 그 죄가 가볍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 과연, 이 죄를 어찌 벌해야 할까?”
영의 얼굴에 문득 짓궂은 미소가 가득 들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