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47화 (47/131)

47. 내 백성을 위한 일

“내가 어여삐 여기는 사람이오.”

영이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농담…… 마셔요.”

소양공주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농담하는 것으로 보이오?”

되묻는 영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소양공주의 얼굴 위로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균열이 생겼다.

쿵.

동시에 라온의 심장 역시 바닥으로 추락했다.

나를 어여삐 여긴다고? 화초저하께서?

숨 쉬는 것조차 잊은 라온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영을 올려다보았다.

“이쯤 하였으면 내 대답은 충분한 것이라 생각하오.”

소양공주가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설마 하였지만 이렇게까지 직설적인 대답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이는 명백한 무시.

“어찌 제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소양공주가 영과 라온을 번갈아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으나 참는 듯 아랫입술을 잘근 씹어대던 그녀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누각을 나갔다.

공주가 사라지기 무섭게 라온이 다급하게 물었다.

“대, 대체 어쩌자고…… 그,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제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세요? 보세요. 말까지 더듬잖아요.

그나저나 어여삐 여기는 사람?

또 주책없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혹여 절 알아보시기라도 한 겁니까?

한껏 기대 어린 시선으로 영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가 예의 무심한 얼굴을 라온의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무에 잘못된 것이라도 있소?”“네?”그럼 이게 지금 잘된 것으로 보이십니까? 이런 식으로 고백을 하시면…….

“내가 내 나라의 백성을 어여삐 생각한다는데. 그게 무에 잘못되었소?”“그런…… 것입니까?”그러니까 여인에 대한 관심이나 연모 같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백성에 대한 사랑?

“당연히 그런 것이지, 무에 다른 이유가 있겠소?”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되묻는 영을 보며 라온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 그렇지요. 저도 별다른 생각 하지 않았습니다.”이제보니 소양공주의 노골적인 구애를 거절할 요량으로 나를 어여삐 여긴다 말씀하신 모양이다.

좀처럼 포기하지 않는 소양공주를 떼어놓으려면 이 정도 충격을 주지 않으면 안 되겠지.

이해는 된다. 화초저하의 의도를 분명 이해는 할 수 있는데…….

왜 자꾸만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네.

“이만 가는 게 좋을 것 같소.”영이 몸을 일으켰다.

라온도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그 뒤를 따랐다.

그나저나 소양공주께선 어디로 가신 것일까?

이리까지 노골적으로 거절을 당하셨으니. 마음에 제법 큰 생채기가 생긴 것이 틀림없으리라.

아무리 지체 높은 분이라 하여도 마음 여린 여인인 것은 매한가지. 아마도 한동안은 제법 가슴앓이를 하실 것이다.

어쩌면 마음의 병이 깊어 자리보존하고 누우실지도 몰라. 그리되면 어찌하나? 가여워서 어찌하려나?

깊은 상념에 빠진 라온이 영과 함께 누각을 나설 때였다.

“어딜 가시는 길입니까?”그새 어디를 가서 옷을 갈아입었는지.

좀 전보다 훨씬 화려한 복색과 치장으로 단단히 무장한 소양공주가 예의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야? 그사이에 말짱해지신 거야? 그야말로 회복력 하나만은 최강이신 분이다.

라온은 혀를 내두르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영 역시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시간이 제법 늦어 이만 돌아가려 하오.”차가운 영의 말에도 소양공주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벌써 돌아가시다니요. 밤은 이제 막 시작되었사옵니다. 중추절은 지금부터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무람없이 다가온 소양공주는 영과 라온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은근슬쩍 라온을 밀어내고 영의 옆자리를 차지한 소양공주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조선에 당도했을 때부터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무엇이오?”“조선의 풍물을 제대로 경험하고 싶었사옵니다. 소녀, 태어나 지금까지 청국을 벗어난 적이 없었사옵니다. 조선에 대한 것은 이야기로만 들었지, 무엇하나 제대로 경험한 것이 없었지요. 하여, 오늘 밤 제대로 조선의 풍물을 보고, 듣고, 느끼고 싶사옵니다.”“안내가 필요하다면 적당한 사람을 보내겠소.”소양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소녀는 저하와 함께 조선을 느끼고 싶사옵니다.”영이 소양공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켠으로 밀러난 라온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조선의 풍물을 경험하고 싶다 하였소?”“그리 말하였습니다.”“나 역시 조선의 풍물을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독특한 풍물이라면 한 가지 알고 있는 것이 있소.”영의 말에 소양공주가 반색하며 그의 팔에 달라붙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소녀 꼭 한 번 보고 싶사옵니다.”영이 제 팔에 매달린 공주를 밀쳐내며 말을 이었다.

“정말이오? 감당하기 힘이 들 수도 있소.”“호호호. 저하께서 소녀를 걱정해주시는 것이옵니까?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소녀, 대국의 공주이옵니다. 이런 제가 감당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사옵니까?”소양공주의 단언에 지금까지와 달리 영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원한다면…… 좋소, 갑시다.”

***

세 사람은 번화한 길을 벗어나 좁고 복잡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영의 뒤를 잰 걸음으로 쫓던 소양공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무얼 보여주시려고 이리 어두운 곳으로 가시는 것일까? 음습한 골목, 어디에도 구경할 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소양의 눈에 골목 끝자락에 내걸린 희미한 불빛이 들어왔다.

작은 국밥집에서 내건 등롱이었다.

왁자한 축제의 열기는 이 초라하고 볼품없는 국밥집에까지 밀려들었다.

밤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국밥집을 보며 소양공주는 미간을 한데로 모았다.

설마, 나를 저곳으로 데려가려는 것은 아니시겠지?

대국의 공주가 발을 들이기엔 지나치게 허름한 곳이었다.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 하였던가. 영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국밥집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하는 수 없이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 소양공주의 미간이 더욱 심하게 일그러졌다.

국밥집은 겉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낡고 남루한 곳이었다.

사방에서 벌레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소양공주가 불안한 눈길로 사방을 에둘러볼 때였다.

“저…… 이곳은…….”영과 소양공주의 뒤를 그림자처럼 뒤쫓던 라온이 역시나 불안한 시선으로 영을 응시했다.

이 국밥집에 대해서라면 여기 있는 세 사람 중, 그 누구보다도 라온이 잘 알고 있었다.

처음 영과 만난 날, 그에게 추억을 만들어주겠다는 일념으로 안내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의 참람했던 기억을 떠올리던 라온은 영과 소양공주를 번갈아보았다.

화초저하, 대체 무슨 생각으로 공주마마를 이곳으로 안내하시는 것입니까? 여기 누가 있는 줄 잊으신 것입니까?

아니나 다를까.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자 꼬장꼬장한 인상의 노파가 사나운 눈매로 그들을 응시했다.

“야, 이 빌어먹…….”욕쟁이 할멈이 특유의 걸출한 입담을 입에 올리려는 찰나.

영을 알아본 노파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마치 죽은 사람이 되살아오기라도 한 듯 노파가 몸을 가늘게 떨기 시작했다.

예의 무심한 시선으로 노파를 지나친 영은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소양공주가 미적미적 그 맞은편에 앉았다. 싫은 걸 억지로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 없다는 듯 휘 주위를 에둘러보던 영이 한쪽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라온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거기서 뭐하는 것이오?”“네?”“어서 앉지 않고 왜 그리 서 있는 것이오?”톡톡, 제 옆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영이 말했다.

“괜, 괜찮습니다. 저는 이렇게 서 있는 것이 편합니다.”“내가 불편하오. 그러니 어서 앉으시오.”더는 거부할 수없는 영의 단호한 눈빛.

라온은 하는 수 없이 영과 소양공주가 앉아 있는 평상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살짝 걸쳤다.

순간, 소양공주의 눈매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어디라고 너 따위가 앉는 것이냐?

보란 듯 발톱을 세우는 공주를 보며 라온은 마른 숨을 작게 내쉬었다.

저러기도 쉽지 않을 텐데. 청나라의 여인들은 죄다 저런 것일까?

보통 호감 가는 사내의 앞에서는 아무리 아니더라고 음전한 척, 마음 넓은 척, 가식을 떨기 마련인데…….

그러나 오만 도도하신 소양공주께서는 제 본능에 충실하신 분이셨다.

온몸으로 라온에 대한 적대감을 발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온은 퍼렇게 번뜩이는 소양의 시선을 피하는 듯 고개를 외로 틀었다.

사실, 날을 세우는 공주의 눈총일랑은 무섭지 않았다.

다만, 행여나 공주께서 자신의 정체를 알아챌까봐 마음을 졸이는 중이었다.

애써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언제 정체가 발각될지 모르는 일이다.

두 여인 사이의 신경전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영이 다시 한 번 제 옆자리를 손짓했다.

“여기 자리가 넓소. 불편하게 모서리에 앉지 말고 이리 썩 다가와 앉으시오.”이 양반이, 눈치가 없으신 거야? 부러 이러시는 거야?

흡사 눈에서 불이라도 뿜을 듯한 소양공주를 보며 라온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저는 이곳이 편합니다. 그러니 마음 쓰지 마십시오.”“그러시어요. 저 자리가 편하다질 않사옵니까.”소양이 라온을 향한 영의 시선을 제 얼굴로 가로막았다.

사내를 홀리는 듯한 특유의 매력적인 미소를 한껏 머금은 그녀가 팔랑팔랑 손부채질을 했다.

“그보다…… 한참을 걸었더니 조갈이 나는군. 물 한잔 마셨으면 좋으련만.”소양공주가 라온을 돌아보았다.

라온은 갑작스런 그녀의 눈총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 사나운 공주님께서 왜 또 날 흘겨보시는 걸까.

공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못 들었나요?”“네?”“내가 지금 조갈이 난다고 하질 않아요. 물을 마시고 싶다고 말하였잖아요.”라온에게 모욕감을 안겨주려는 공주의 빤한 수작.

다른 여인이라면 수치감을 느꼈을 태도였건만. 라온은 되레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어떻게든 소양공주 시야 밖으로 피할 수만 있다면 물심부름이 아니라 더한 것도 할 자신이 있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서둘러 대답한 라온이 재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바로 그때.

막 자리에서 일어서는 라온의 팔목을 누군가 거칠게 잡아끌었다.

영이었다.

“엄마얏!”영의 거친 완력에 휘청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은 라온은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의문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영의 목소리가 라온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주모!”“네, 불러계시옵니까?”내내 세 사람을 예의주시하던 노파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여기 국밥 세 그릇과 물 한 그릇만 주게나.”“네, 곧 올리겠나이다.”새색시마냥 양손을 간잔지런하게 모은 노파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그런 노파의 발길을 영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그런데 이곳의 분위기가 예전과 많이 달라진 것 같군.”“무슨 말씀이오신지?”“내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와는 사뭇 그 분위기가 달라져서 하는 말이네.”노파를 직시하며 영은 낮은 목소리를 이어갔다.

“내게 조금은 맹랑한 벗이 있는데 말일세.”말을 하던 영이 힐끔 곁에 있는 라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라온이 그 시선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다시 노파에게로 눈동자를 고정시켰다.

“그 맹랑한 벗이 말하길, 이곳에 오면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하더군.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서나 들을 법한 친근한 말들을 들을 수 있어 좋다고.”“그 말씀은…….”노파의 눈동자에 문득 이채가 서렸다. 영이 말하는 저의를 이제야 눈치챈 것이다.

“내 오늘 귀한 손님과 함께 이곳을 찾은 연유는 오직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진귀한 풍물을 보여주고자 함이었다네.”“하오나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영이 손을 들어올렸다.

“내 오늘만은 특별히 그 어떤 일이라도 허락할 것이니. 주모는 걱정하지 말고 가진 재량을 모두 보여도 될 것이네.”영은 허리를 반으로 접은 채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노파를 격려했다.

세자저하의 특별한 격려에 내내 굽히고 있던 노파의 허리가 서서히 펴지기 시작했다.

등줄기를 꼿꼿하게 세운 노파가 소양공주를 향해 눈빛을 세웠다.

그리고 잠시 후.

마침내 운종가 뒷골목만의 특별한 풍물이 노파의 입을 타고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씨암탉을 잡아 주둥이에 물고 있을 년을 보았나. 니년은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사지육신 멀쩡한 년이 누구더라 물을 떠와라, 마라 심부름질이야? 이런 말 한 마리 다 잡아먹고도 말 냄새도 안 풍길 년 같으니라고.”

***

폭포수처럼 쏟아진 운종가의 풍물에 소양공주는 얼어버리고 말았다.

공주라는 고귀한 신분의 그녀가 어디에서 이런 대우를 받아봤을까. 차라리 조선의 말이라도 몰랐으면 좋았으련만.

하필이면 어릴 적부터 배운 능숙한 조선말이 그녀에게 더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조선의 풍물에 결국 소양공주는 창백해진 얼굴로 달아나고 말았다.

갑자기 급한 볼일이 떠올랐다나? 그 어떤 굴욕에도 굴하지 않았던 그녀조차도 운종가 뒷골목의 풍물 앞에서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군.”소양공주가 제 발로 물러가고 얼마 뒤, 영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노파가 영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아닐세. 애초에 내가 원해서 한 일이 아닌가.”“하오나 감히 존귀한 분께서 듣지 않아야 할 말을 듣게 하였사오니. 망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나이다.”본디 궁의 수라간 상궁이었던 노파는 영이 뉘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라 명하시기에 감히 귀한 분 앞에서 욕지거리를 내뱉긴 했지만. 마음자락이 편하지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허락한 일이네. 별일 없을 터이니, 그만 고개를 들게.”말과 함께 영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국밥 값을 치렀다.

“아니옵니다. 소인이 어찌…….”“나를 제 먹은 국밥 값도 치르지 않는 파렴치한 사람으로 만들 셈인가?”“그런 것이 아니오라.”마지못해 영이 주는 돈을 받아든 노파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국밥 세 그릇 가격치고는 지나치게 과하옵니다.”“받아두게. 덕분에 번잡했던 것이 해결됐으니 결코 과한 돈이 아닐세.”“……망극하옵니다.”잠시 망설이던 노파는 결국 영이 건네는 돈을 받았다.

영은 라온과 함께 국밥집을 나섰다. 그의 뒤를 말없이 쫓던 라온이 돌연 한숨을 쉬었다.

“어찌하여 그리하셨습니까?”“무엇이 말이오?”“소…… 그분께서 큰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았습니다.”저도 모르게 소양공주라고 하려던 라온이 급히 ‘그분’이라고 호칭을 바꿨다.

“충격이라…….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그리까지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왜 그리 매정하게 하신 것입니까?”“그야 당연히 마음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오.”영이 소양공주에게 마음이 없음은 이미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소양공주 스스로도 눈치채고 있으리라.

그럼에도 라온이 이리 한숨을 쉬는 까닭은 영의 대처 방법 때문이었다. 굳이 이리 단호히 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좀 더 부드러운 방법으로 저하의 뜻을 전하면 되었을 일입니다.”영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라온을 바라보았다.

“난 이미 몇 번이고 거절의 속내를 그분께 보였소. 그럼에도 물러나지 않았던 분이오. 그런 사람에게 내가 어찌해야 하는 것이오? 어쩔 수 없이 다정하게 대해야겠소? 정녕 그리하면 그분이 상처를 덜 받고 물러설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오?”“그건…….”라온은 말문이 막혔다.

소양공주의 성격을 생각해보건대, 영이 다정하게 대하면 대할수록 그것을 기회로 보고 오히려 더 달려들었을 것이다.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상처를 받게 될 사람은 소양공주였다.

일찌감치 희망도 품지 못하게 냉정하게 대하는 것이 낫다는 영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적어도 소양공주를 대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영의 선택이 최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렵구나. 어려워.’한때는 여인에 대한 문제라면 모르는 것이 없는 삼놈이라 불렸건만. 그럼에도 아직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하긴, 애초에 여인에 대해 해박한 것처럼 보였던 것도 그녀 자신이 남장을 한 여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해와 아집으로 점철된 시커먼 사내들 틈바구니에서 여인의 속내를 귀신처럼 헤아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일을 경험하며 자신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실소가 새어나왔다.

삼놈이가 뭐라고. 어차피 지금은 환관이 되어 궁에 갇혀 있는 몸이 아니던가.

여인의 복색을 한 것도 오늘 밤으로 끝. 내일부터는 다시 사내도 여인도 아닌 환관 홍라온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야말로 일장춘몽, 하룻밤의 꿈이었다.

괜스레 처량한 마음이 든 탓일까? 양 어깨가 바닥으로 축 늘어졌다.

***

강둑을 나란히 걷는 발소리가 물소리와 함께 흘러갔다.

라온과 영은 교교한 달빛이 강물 위로 산란하는 것을 지켜보며 개천을 따라 걸었다.

영근 가을밤이라, 바람이 제법 서늘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움츠리며 와스스 떨고 있자니 영이 돌연 방향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어쩐 일인지 걷는 걸음에 조급함이 서려 있었다.

바람이 조금 서늘하긴 했지만 달빛을 조족등삼아 걸은 밤 산책이 나쁘지 않았다.

영과 이리 걷고 있으니 자신이 마치 여염집 규수라도 되는 듯 느껴져 기분이 묘해지려던 참이었는데.

라온은 아쉬움이 깃든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비가 올 것 같소.”“비가요?”라온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영의 말대로 방금까지 맑던 하늘엔 먹장구름이 가득했다.

“날씨도 참. 변덕스럽기가 봄바람을 무색케 합니다.”아까 한 차례 소낙비가 내렸던 뒤라. 비구름은 멀리 사라진 줄 알았건만.

일평생 처음으로 곱게 치장한 자신에게 심술이라도 부리려는 것일까? 빗방울을 흩뿌려대는 하늘을 향해 라온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때문에 눈매를 아래로 내리뜰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시작된 비는 순식간에 폭우로 돌변했다.

느닷없는 소나기에 사람들이 아우성을 지르며 뛰어다녔다. 영과 라온도 비를 피하기 위해 서둘러 달렸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솟을대문이 보였다.

두 사람은 어린 아이 팔 길이만 한 처마 아래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다행입니다. 하마터면 흠뻑 젖을 뻔하였습니다.”머리에 묻은 빗방울을 털어내며 라온은 한숨 돌렸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갑자기 방향을 바꾼 빗살이 두 사람이 서 있는 처마 아래를 향해 짓쳐들어왔다.

“이런!”짧게 탄성을 내지르며 라온은 본능적으로 몸을 외로 틀었다. 조금이나마 빗물을 피해 보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워낙에 바람이 세고, 빗살이 거칠었던 터라. 젖지 않을 도리가 없으리라.

꼼짝없이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겠구나.

아, 어찌한다? 제 일신 젖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 고운 비단 옷이 젖는다는 것을 생각하니 뒷골이 쭈뼛 섰다.

내 옷도 아닌데……. 변상해 달라 하면 어쩌지?

그때였다.

푸른 장막이 라온의 머리 위를 감싸듯 둘러졌다.

“이건…….”라온은 장막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장막의 정체를 알아냈다.

영의 너른 소맷자락이었다.

그것이 든든한 철옹성이 되어 몰아치는 빗줄기를 고스란히 막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내 백성을 위한 일이오.”라온이 아닌 먼 산을 응시하는 그의 얼굴은 일말의 사심없이 담백했다.

“알고 있습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그러니까 제가 화초저하의 백성이라 이리 자상하다는 말씀 아닙니까.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누군가 이리 든든한 바람벽을 만들어 준다는 것이…… 그것이 화초저하라는 사실이 참말로 좋습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연신 귀밑 자분치를 흔들어댔다. 그러나 라온은 아까만큼 춥지가 않았다.

전신을 에워싼 따뜻한 온기에 전신이 느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느른한 기운에 취한 탓일까?

이상하게도 저도 모르게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

누군가 옆구리를 간질이는 듯 자꾸만 방싯방싯 웃음이 새어나와 견딜 수가 없었다.

“입에 벌레 들어가겠구나.”“아차!”라온은 서둘러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아무리 틀어막아도 행복한 기분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행여 이런 행복한 마음이 영에게 들킬세라 라온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여, 깨닫지 못했다.

조금 전 영이 자신에게 말을 놓았다는 사실을.

그의 시선이 내내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을.

라온을 바라보는 영의 시선에 온기가 서린 것을.

영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전보다 더욱 진해진 것을 라온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저 이 비가 조금은 오래 내렸으면 하고 기원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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