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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46화 (46/131)

46. 내가 어여삐 여기는 사람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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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1

왁자한 축제의 거리. 공짜로 나눠주는 풍등을 받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인파에 휩쓸려 아우성치는 목소리. 한 순간 놓쳐버린 어미를 찾아 목 놓아 우는 어린 아이의 울음.

축제의 이면에 감춰져 있던 아수라장이 라온의 주위로 흘러갔다. 하지만 그 어떤 소란스러움도 라온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영에게 안겨 있는 지금, 라온에게는 오직 자신과 그의 심장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내 심장소리가 이리 컸었던가. 게다가 얼굴은 왜 이리 화끈 달아오르는 것인지.

마치 불덩이를 뒤집어 쓴 듯 양 볼이 붉게 타올랐다.

행여 그 모습을 영에게 들킬세라 라온은 더욱 깊게 고개를 파묻었다.

진정해, 홍라온. 이건 우연히 벌어진 일에 불과해.

화초저하께서 나를 이리 안은 건 순전히 내가 인파에 휩쓸리는 것을 막으려다 벌어진 우연이란 말이야.

그러니 이리 가슴 뛰면 안 되는 거야. 이런 사소한 일에 의미 두어서는 안 돼.

아무래도 만월의 밤이 무슨 조화를 부린 것이 틀림없었다.

일평생 허락되지 않았던 고운 여인의 치장과 따뜻한 사내의 품이라니.

그래, 이건 어쩌면 몽혼한 꿈결의 한 자락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서 꿈에서 깨어나야지. 꿈에서 깨면 허망할 테니, 괜히 마음 두근대지 말아야지.

라온은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이질적인 감정에 당황하고 수줍어하는 스스로를 향해 질책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 덕분일까? 내내 겁먹은 어린 짐승처럼 요란하게 날뛰던 심장소리가 조금은 잠잠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고개를 들기가 두려웠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도무지 상상이 되지도, 감당할 자신도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화초저하께선 어떤 표정을 지으실 지는 안 봐도 뻔했다.

지금 고개를 들면 분명 화초저하께선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계실게 틀림……어?

용기를 내 고개를 드는 라온의 눈에 옅게 미소 짓는 영의 얼굴이 들어왔다.

설마 지금 웃고 계신 건가?

여인의 복색을 한 날 보고는 단 한 번도 감정을 드러내신 적이 없으셨는데. 혹여 날 알아보신 건 아니시겠지?

그때였다.

“괜찮으시오?”안부를 물어오는 영의 낮은 목소리.

감정 같은 건 머리카락 한 올만큼도 담겨 있지 않는 그 목소리에 라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그럼 그렇지. 날 알아보셨을 리가 없어. 알아보셨으면 이런 식으로 행동하실 리 없다.

방금 전의 그 미소도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보고 웃으신 것이 틀림없어.

“괜찮으시다면 이제 그만…….”말끝을 흐리는 영의 시선이 제 가슴팍을 향했다.

“아, 네.”라온은 영의 품에서 냉큼 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화초저하께서 날 안고 계신 것이 아니라, 내가 이분께 달라붙어 있었던 거구나.

그런 걸 가지고 나 혼자 괜한 오해를 하다니. 생전 처음 여인의 복색을 한 탓일까?

자꾸만 나도 모르게 엉뚱한 오해를 한단 말이야.

라온은 영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제 이마를 콩콩 쥐어박았다.

그녀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은 에두르는 시선으로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고 있었다.

“이제 소란이 조금 가라앉은 것 같소.”“네, 그런 것 같습니다.”공짜 풍등으로 인한 소동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밀물처럼 밀려들던 인파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높은 곳에 올라서 있던 영이 먼저 아래쪽으로 풀쩍 뛰어내렸다. 그런 다음 라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니, 괜찮습니다. 저 혼자 뛰어내릴 수 있습니다.”라온의 말에도 영은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여인이 혼자 뛰어내리기엔 너무 높소. 게다가…….”영이 라온을 위아래로 훑었다.

“아.”나 지금 치마 입고 있었구나. 깜박 잊고 있었네.

그제야 자신이 어떤 복색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라온은 영이 내민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그런 그녀를 영이 가볍게 들어 아래로 내려주었다.

“고, 고맙습니다.”라온은 붉게 달아오른 볼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살며시 돌렸다.

또 이런다. 그냥 손만 잡은 것뿐인데, 왜 이리 얼굴이 붉어지는 거야?

넌 이미 화초저하의 등판을……그것도 벗은 등판까지 본 사이라고.

이제와 손 한번 잡았다고 부끄러워 할 입장이 아니란 말이야.

그나저나 화초저하의 등판을 떠올리니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기는커녕 더 부끄러워지는군.

괜스레 어색하고 겸연쩍어 라온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걷기 시작했다.

“흠흠.”조금이라도 어색함을 덜어보려 헛기침을 하며 라온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참의영감께서는 어디에 계신 걸까요?”“그 녀석이라면……저기에 있소.”영이 가리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로 빡빡이 들어찬 수표교 건너편. 풍등을 나눠주는 구름떼 같은 인파 맨 앞쪽에 윤성의 모습이 보였다.

뭐야? 이제 보니 풍등을 공짜로 나눠주는 정신 나간 사람이 다름 아닌 참의영감이었어?

“참 엉뚱하신 분이시네요.”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영리한 녀석이오.”“네?”풍등을 공짜로 나눠주는 저분의 어디가 영리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영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쪽에서 공짜로 풍등을 나눠준다네.”“아이쿠. 풍등가격이 저렴한 것도 아닌데. 누가 그런 일을 한 건가?”“저 풍등을 보게나. 부원군 대감댁의 표식이 아닌가.”“아. 그러고 보니 저 앞에서 풍등을 나눠주시는 분이 부원군 대감의 손자가 아니신가.”“아하. 이번에 청국에서 돌아오셨다는 그분?”영은 말없이 하늘을 날고 있는 풍등을 올려다보았다.

풍등의 한 귀퉁이에 눈에 익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풍등을 날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볼 수 있는 위치에.

영은 침잠된 표정으로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와 나란히 걷고 있는 라온도 말이 없었다.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깊어질 무렵.

“어머나, 이게 누구시옵니까?”어딘지 낯설지 않은 여인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트렸다.

등 뒤로 고개를 돌린 라온의 눈에 한 여인이 들어왔다.

“소양공주님?”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라온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지금 여기서 환관 홍라온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행여 영이 들었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못 들었는지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그 사이, 소양공주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라온은 서둘러 쓰개치마를 깊게 푹 눌러썼다.

청나라 사신들을 위해 베풀었던 연회 내내 영의 곁에 붙어 있었으니. 어쩌면 자신을 알아볼지도 모른다.

화초저하처럼 여인의 얼굴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렇게 흔한 건 아니니까.

“세자저하가 아니시옵니까?”어느새 다가온 소양공주가 특유의 카랑한 목소리로 말을 붙여왔다. 그녀는 영과 그 곁에 있는 라온을 매서운 눈씨로 번갈아보았다.

“이런 우연이 다 있군요. 여기서 이렇게 저하를 뵐 줄은 몰랐사옵니다.”소양공주의 호들갑스러운 말에 라온은 두 눈을 가늘게 여몄다.

우연이라고요? 우연이라고 보기엔 지나칠 정도로 작위적입니다만.

소양공주의 성정으로 보아 화초저하의 뒤를 따라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우연히 뵌 거라 그런지 궁에서 뵐 때보다 더 반가운 것 같사옵니다. 아무래도 우리의 인연이 심상치가 않은 듯하옵니다.”소양공주는 의식적으로 ‘우연’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우연을 운명이라고 우기고 싶은 눈빛이다.

그런데 잠깐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라온은 서둘러 영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 역시나!

영의 미간에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저 곤혹스러운 눈빛의 의미는…….

화초저하께선 저분이 누구인지 모르고 계셔.

저 사람 누구지? 누군데 나한테 아는 척을 하는 거지? 하는 기색이 역력한 저 표정.

아, 어쩌지? 지금 알려드려야 하는 거 같은데. 이대로 두었다간 청국과 조선, 양국 간에 큰 문제가 생기는 거 아니야?

그런 문제를 없애려고 애초에 화초저하께서 나를 밤낮으로 곁에 붙어 있게 하신 거잖아.

하지만…….

지금 내가 소양공주에 대해 알려드리면 내 정체가 드러나게 될 테고. 아, 이를 어쩐다?

라온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속으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그런 복잡한 속내일랑 알지 못하는 소양공주는 화사한 미소를 지은 채 영에게 계속해서 말을 건넸다.

“이곳의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사옵니다. 게다가 풍등을 날려 소원을 비는 풍습은 대국과 조선이 꼭 닮았군요.”라온은 긴장한 표정으로 다시 영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미간에 그려진 주름의 깊이가 더 깊어져 있었다.

아아, 화초저하께선 여전히 모르고 계셔. 아니, 더욱 곤혹스러워하고 계셔.

어쩌지? 이대로 놔두면 저하께서 ‘댁는 뉘시오?’라는 질문을 던질 것 같은데.

그 한 마디에 따라올 후폭풍을 생각하니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소양공주가 적극적인 성격인 것에 비해 그리 썩 눈치가 좋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영의 표정에는 상관없이 공주는 열심히 제 할 말만 하고 있었다.

“달빛을 향해 둥실둥실 떠오르는 풍등의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군요. 하아, 그런데 다리가 아프니. 앉아서 구경하면 더욱 좋으련만. 아, 그러고보니 마침 이 근처에 적당히 쉴 만한 곳이 있는 것 같던데…….”소양공주는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영의 의향을 떠보았다.

라온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다시 영을 응시했다.

어쩌지? 내 정체를 밝히는 한이 있더라도 소양공주인 것을 알려드려야 하나?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영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라온은 영의 시선을 좇아 눈길을 옮겼다.

옷차림을 살피고 계셔. 어어, 소양공주의 목에 걸린 화려한 장신구를 확인하셨어.

영민하신 우리 화초저하, 여인의 얼굴을 분간하지 못하니 복색과 장신구로 정체를 파악하고 계시는구나.

다행이다. 소양공주의 복색이 워낙 화려하고 특이하여 조선의 여인과는 확연히 다르니까.

아아, 미간이 펴지고 있으셔.

이제 드디어…… 드디어 누군지 눈치채신 겁니까?

영의 미간이 펴짐과 동시에 라온의 입에서도 안도의 한숨소리가 새어나올 수 있었다.

“소양공주시로군.”영의 한 마디에 라온은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장하십니다, 화초저하. 얼굴도 구분하지 못하는 여인의 정체를 단지 복색만으로 파악하셨군요.

“네?”소양공주가 눈을 깜빡거렸다.

조금은 당혹스러운 표정.

라온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알아요. 당황스러우시겠죠. 지금껏 얼굴을 맞대고 있다가 뜬금없이 이름을 부르시니.

하지만 저하께선 이제야 겨우 당신이 소양공주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랍니다.

“제 이름은 왜 갑자기……?”소양공주의 물음에 영은 예의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오.”순간, 라온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화초저하, 뜬금없이 여인의 이름을 부르고 단지 아니라고 대답하시다니요?

그런 대답에 ‘아하, 그러시군요.’ 하고 납득할 여인이 세상 어디에 있다고…… 바로 그때 들려온 소양공주의 목소리.

“네. 아무것도 아니시로군요.”어라? 납득하신 겁니까?

“그럼 좀 전에 말씀드린 곳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소양공주의 말에 영이 라온을 쳐다보며 물었다.

“어떠시오? 괜찮으시겠소?”“네?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왠지 모르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청국과 조선의 돈독한 관계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양보할 수 있습니다.

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시오.”

***

소양공주가 영과 라온을 안내한 곳은 수표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층 누각이었다.

청국의 양식으로 지어진 이곳은 조선에 들어와 있는 청국 상인들이 이용하는 곳이라 하였다.

라온은 두 가지 면에서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 첫 번째는 한양에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운종가에서 잔뼈가 굵었다 자부하였건만. 이런 곳이 숨어 있었다니.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이 전부라고 믿고 살아온 것이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와 다를 것이 없었다.

두 번째로 놀란 사실은, 처음 조선을 찾았다는 소양공주께서 조금도 헤매지 않고 이곳을 찾았다는 것이다.

“아까 우연히 보게 된 곳이지요.”누각으로 들어서며 소양공주가 변명했다.

하지만 우연히 본 곳치고는 너무 능숙하게 찾으셨습니다, 공주마마.

누각의 이층으로 올라서자 개천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세 사람은 누각 한쪽에 자리 잡고 앉았다.

라온은 불빛을 등지고 앉는 것을 잊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공주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함이었다.

다행히도 도도한 공주께선 라온에겐 조금도 관심 없다는 듯 일말의 시선조차 던지지 않았다.

소양공주는 오직 영만이 보이는 듯 라온을 아예 없는 사람 취급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기분 나쁠 법도 하였건만. 라온에겐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공주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라온은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지금의 자리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보시어요. 이곳에서 보면 한양의 거리가 한눈에 들어온답니다.”소양공주가 누각 밖을 손짓했다.

아닌 게 아니라, 누각 위에서 보는 시전 거리는 또 다른 정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사람들이 날려 보낸 풍등이 누각의 처마를 스치듯 올라가는 모습 또한 놓치기 아까운 장관이었다.

밖의 풍경에 잠시 넋을 놓고 있자니, 화려한 음식상이 차려졌다.

“이곳을 운영하는 자가 대국의 유명한 숙수이옵니다. 음식 맛이 제법 쓸 만하지요.”라온은 수긍하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의 말대로 음식의 맛도 괜찮고, 종류 역시 다채로웠다.

조선의 음식보다 다소 기름진 것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매일 먹는 것이 아니니 이 정도 기름기쯤이야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라온은 젓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때가 아니면 이런 진귀한 것을 언제 또 맛볼 수 있을 것인가.

그에 반해 영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만 가볍게 끄덕거리고 있을 뿐이다.

요리는 끊임없이 나왔다. 궁에서도 구경하지 못한 신기한 요리들이 연신 차려졌다 치워지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다양한 음식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오다니. 미리 준비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소양공주가 준비한 것은 비단 음식뿐만이 아니었다.

“이렇게 좋은 날, 술과 음식만으로는 뭔가 허전하지요.”그녀가 손뼉을 쳤다.

기다렸다는 듯이 아름다운 무희들이 누각 위로 올라와 춤사위를 벌였다.

다섯 가지 능수금라를 차려입은 무희들의 몸짓은 흡사 화려한 여름 꽃을 연상시켰다.

지켜보던 라온은 연신 감탄했다.

세상에 다시없을 산해진미와 무희들의 화려한 춤사위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것들을 준비한 소양공주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공주는 영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원하는 것을 취하기 위한 그녀의 적극적인 면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라온은 보이지 않도록 한숨을 쉬었다.

아쉽게도 소양공주의 눈물 나는 노력도 화초저하 앞에서는 무의미한 몸짓에 불과했다.

영의 얼굴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무심(無心).

처음 이 누각에 올랐을 때부터 시종일관 그는 무심할 뿐이었다. 하지만 라온은 그의 표정에서 사소한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눈초리가 아래로 살짝 기울어진 것으로 보아 지루하신 게 틀림없어.

소양공주는 그 후로도 청국의 화려한 풍물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어떻게든 영의 시선을 끌려 애썼다.

그에 반해 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은 대답만을 줄 뿐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니 안쓰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뒤늦게 소양공주도 그런 사실을 깨달은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계속 청국의 이야기만 하였군요.”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조선에 와서 여러 가지로 놀랐사옵니다. 비록 대국의 그것처럼 크고 웅장하지는 않지만, 소박하면서도 기품 있는 풍경이 많은 것에 놀랐사옵니다. 물론, 가장 놀란 것은 세자저하를 뵈었을 때였지요.”소양공주가 입술을 가리며 웃었다.

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소?’ 하고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보다 못한 라온은 답답한 듯 제 가슴을 통통 두드렸다.

화초저하, 여인이 저렇듯 관심을 끌려고 말을 꺼낼 때는 크게 미소를 지으며 아! 정말로 그렇습니까? 라고 받아주셔야지요.

그 무심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소양공주의 물음이 이어졌다.

“세자저하. 괜찮으시다면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말씀해 보시오.”소양공주가 돌연 라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눈빛이 곱지만은 않았다.

라온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정체를 들키면 틀림없이 곤란해지리라.

물론, 소양공주 같은 성격에 한낱 환관에 불과한 자신을 기억할 것 같지는 않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이 여인은 뉘온지요?”“쿨럭.”고기를 집어 막 입어 넣던 라온은 소양의 말에 사레들린 기침을 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내색하지 않고 있었지만 영의 곁에 있는 라온이 은근하게 신경이 쓰인 모양이다.

“아까 얼핏 보았는데, 저하께서 이 여인을 안고 계시던데. 어찌된 사이인지 물어도 되겠사옵니까?”“우연히 마주친 사람치고는 꽤 많은 것을 보았소.”“호호호, 어릴 적부터 주의력이 좋다는 소릴 곧잘 들었지요. 특히나 관심이 있는 것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보는 비상한 재주가 있지요.”“…….”“아, 그리 근심 어린 표정은 거두시어요. 소녀, 마음 넓다는 소리도 많이 듣고 자랐답니다. 그러니 말씀해 주시옵소서. 이 여인과는 어떤 사이신지요? 저는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옵니다. 원래 영웅은 호색한 법이니까요.”캐묻는 듯한 소양의 눈동자에 영이 오롯이 담겼다.

“나는 영웅도 아니고, 호색은 더더욱 아니요.”영의 서늘한 목소리가 소양공주를 향해 화살처럼 쏘아졌다.

“또한, 이 여인이 뉘인지 공주께 설명할 이유 따윈 내겐 없소.”영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소양은 물러서지 않았다.

“말씀해 주시어요. 대체 이 여인이 저하의 무엇인지…….”집요하게 물어보는 모습이 원하는 답을 듣지 않으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 분명해보였다.

물끄러미 소양공주를 돌아보던 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정히 알고 싶다하시니, 내 말하겠소. 이 여인은…….”소양의 얼굴에 긴장하는 기색이 깃들었다.

덩달아 긴장한 라온 역시 영의 입술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윽고 영의 반듯한 입술이 열리고 흘러나온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두 여인의 귀를 파고들었다.

“내가 어여삐 여기는 사람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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