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역시, 그렇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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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7
정자 위의 시간이 멈췄다.
라온은 텅 빈 진공의 공간 속에 서 있는 듯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마주 선 영의 눈동자 속엔 얼이 빠진 자신의 모습이 오롯이 맺혀 있었다.
이리보고, 저리 뜯어봐도 영락없이 여인인 자신이 그의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하지? 어찌한다?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피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맞서는 것이라 하셨다.
하지만 화초저하의 저 서늘한 시선과 냉기 뚝뚝 흐르는 표정을 보니…… 차마 맞설 자신이 생기지 않는다.
라온이 허둥대는 사이에도 영의 시선은 줄곧 그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꿰뚫어보는 시선에 살갗이 따끔거릴 지경이다.
날 알아보셨을까?
밤이고, 등롱이 켜져 있긴 하지만 어두운 곳이고, 게다가 이리 여인의 복색까지 갖춰 입고 있는데…… 설마 알아보셨을까?
긴장감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바로 그때였다.
“저하가 아니시옵니까?”언제 돌아왔는지 윤성이 정자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귓가에 거센 빗소리가 들려왔다.
멍하니 영을 바라보던 라온의 뇌리에 얼굴을 가려야 한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라온은 다급히 고개를 돌려 영을 외면했다.
때마침, 우연인지 윤성이 영의 앞을 가로막아 그의 시야를 막았다.
“저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시옵니까?”“잠시 궁 밖으로 나올 일이 있었다. 그러는 너는 어쩐 일이냐?”“일이 있어 시전에 나왔다가 비를 만났지 뭡니까.”윤성이 제 등 뒤에 서 있는 라온을 돌아보았다.
“일행이 있는가 보구나.”“네.”윤성의 어깨너머로 라온을 무심히 넘겨보던 영은 두 사람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홍 내관, 낯빛이 좋지 않습니다.”쫓는 시선으로 영을 바라보던 윤성이 라온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라온은 말끝을 흐리며 저 앞에 있는 영을 곁눈질했다. 그제야 이유를 알았다는 듯 윤성이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혹여 세자저하 때문에 그러십니까?”“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나저나 어찌합니까? 이리 보셨으니…… 저는 이제 죽었습니다.”“걱정 마십시오.”“어찌 걱정이 안 됩니까?”여인인 것을 들키고 말았다. 지금껏 여인의 몸으로 감히 국법을 어기고 환관이 되어 왕세자를 기망해왔던 것이다.
당장에 목이 베인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걱정 말라니.
이 옷만 입지 않았어도.
저도 모르게 원망의 마음이 들어찼다. 그러나 라온은 이내 눈매를 아래로 내렸다.
아무리 소원이라고 해도 안 입으면 그만인 것을. 결국 옷을 입기로 결정한 것은 라온 자신이었다.
잠시 동안 고운 옷에 마음 한 자락 즐겁기까지 하였으면서, 이제와 남의 탓을 해서 무엇하랴.
라온은 아직 여물지 못한 제 마음을 나무랐다.
그때, 그녀의 귓가로 윤성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잊으셨습니까?”
“무얼 말입니까?”
“세자저하의 한 가지 사소한 결점 말입니다.”
“저하의 사소한 결점이라면…….”
결점? 화초저하께 결점이라 불릴 만한 것이 있었던가?
“아!”
그제야 한 가지가 떠올랐다.
“여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것 말씀입니까?”
“네. 바로 그겁니다.”
“설마, 지금 세자저하께서 제 얼굴을 못 알아볼 거라고 말씀하시는 건 아니시죠?”
“왜 아니겠습니까?"
윤성이 입가를 길게 늘이며 영이 있는 쪽을 눈짓했다. 라온이 힐끔 눈길을 보냈다.
아닌 게 아니라 윤성과 라온을 바라보는 영의 얼굴은 무심, 그 자체였다.
특히나 라온을 바라볼 때는 전혀 모르는 타인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설마요. 세자저하께선 제 얼굴을 알고 계십니다. 저분께선 제 얼굴을 구별할 수 있단 말입니다.”
왜 그런지 알 수는 없지만요.
“그건 홍 내관이 여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저하께서는 말입니다, 치마 두른 사람의 얼굴은 절대로 구분하지 못하십니다.”
“그럼 명온 공주를 알아보신 것은 어찌 설명할 수 있단 말입니까?”
“공주마마 역시 저하껜 누이일 뿐. 여인은 아니질 않습니까?”
“그러니까 공주마마께선 가족이라서…… 여인으로 느껴지지 않아 얼굴을 알아보신다 그 말씀이십니까?”
윤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제야 라온은 숨통이 조금 트이는 듯했다. 이대로 정체가 발각되는 줄 알고 얼마나 긴장했던지.
그런데…… 정말 못 알아보시는 것일까?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던 사이인데.
고작 입성하나 달라졌다고 하여 정말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실까?
“궁금하십니까?”
윤성이 속내를 훤히 꿰뚫어보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네?”
“저하께서 정녕 홍 내관을 못 알아보시는 것이 궁금하다는 표정이라서 말입니다.”
귀신이다.
“아닙니다. 하나도 궁금하지 않습니다.”
긁어 부스럼이라고. 괜히 위험을 자초하고 싶지는 않았다.
라온은 조금 짓궂은 표정을 짓는 윤성을 향해 황급히 도리질을 했다.
싫습니다. 절대로 싫습니다. 혹여나 시험해 볼 생각일랑은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헌데…….”
두 사람이 실랑이를 하고 있자니 맞은편에서 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온과 윤성의 시선이 동시에 영에게로 집중되었다.
“너는 오늘 뱃놀이에 함께 가지 않았던 것이냐?”
영이 흑백이 선명한 눈으로 윤성에게 물었다.
“소인은 해야 할 일이 있어 배에 오르지 않았사옵니다.”
“해야 할 일?”
영의 무심한 시선이 라온을 향했다.
그 서늘한 눈씨에 라온은 저도 모르게 흡 하고 들숨을 들이켰다.
고양이 앞의 쥐가 이런 심정일까? 머리끝이 쭈뼛 곤두서고 전신으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나를 향한 저 차가운 눈빛.
굳게 닫혀 있는 붉은 입술.
당장이라도 저 입술 사이로 호통소리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두려움에 눈이라도 감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나 살 떨리는 긴장도 잠시.
한순간 라온을 향했던 영의 시선은 스치듯 그녀를 지나갔다.
비로소 라온은 참았던 숨을 뱉을 수 있었다.
“별일이로구나.”영이 옷자락에 묻어 있는 빗물을 털며 말을 흘리자, 윤성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온지요?”“네가 여인과 함께 있다니 말이다.”윤성의 입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저라고 항상 책 더미에만 묻혀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책 더미에만 묻혀 있다라…….”영이 윤성의 말을 다시 읊으며 묘한 여운을 남겼다.
윤성이 뛰어난 학식과 더불어 다재다능한 인재라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런 그에게 그간 많은 혼처가 오고 가고, 수많은 여인들이 연심을 품은 것 또한 이상한 것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정작 윤성은 지금까지 그 어떤 여인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 윤성이 여인과 함께 있다니. 정녕코 의외의 일이었다.
영이 윤성의 곁에 있는 여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두 사람은 어찌 된 사이더냐?”“그게…… 저…….”영의 시선에 얼어버린 라온은 머릿속마저 텅 비어버렸다.
정신 차려. 무슨 핑계라도 대야 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정작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바보처럼 그게…… 저…… 따위의 소리밖에 없었다.
다행히 윤성이 다시 나서주었다.
“어찌 보이십니까?”“내가 먼저 질문을 했다.”“저하께 어떻게 비춰질지 궁금하여 여쭙는 것이옵니다.”“어떤 사이냐에 따라 보이는 것도 달리 보이겠지.”영이 대답하자 윤성이 라온의 어깨를 조심스레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제가 마음에 두고 있는 분입니다.”“네?”마음에 두고 있는 분? 이게 무슨 소리야? 설마, 농담? 그래, 당연히 농담이겠지.
그런데 무슨 농담을 그리 진지한 얼굴로 하십니까?
라온이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윤성을 응시했다.
그 눈빛에 담긴 속내를 뻔히 알면서도 시치미 뚝 뗀 윤성이 다시 영에게 물었다.
“이제 어찌 보이십니까? 잘 어울리지 않사옵니까?”“글쎄. 나는 그런 쪽으로는 영 보는 눈이 없구나.”영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한번 봐 주십시오. 사실 궁금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우리 두 사람의 모습이 어떨지 말이옵니다.”영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라온과 윤성을 번갈아보았다. 그렇게 잠시간 보다 입을 열었다.
“정히 내 의견이 궁금하다면, 일간 궁으로 함께 들어라.”“네?”“마침 내 곁에 여인에 대해서 정통한 아이가 있으니. 그 아이에게 한번 물어보면 네가 원하는 답을 얻을 수도 있겠구나.”영의 말에 라온은 시선을 먼 허공으로 돌렸다.
여인에 정통한 아이. 저거, 나 말하는 거 맞지?
눈앞에 있는 사람을 두고 저리 말하는 영을 보자, 기가 막히다 못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여인의 얼굴을 구별하지 못하는 영의 진면목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세상에는 저런 분이 정말 계시는구나.
다행이다.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울적해졌다.
어떻게 저러셔? 나조차도 못 알아보시다니. 서운하네.
라온은 고개를 저었다.
서운해? 지금 무슨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야? 만약, 여기서 들켜버리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
화초저하의 사소한 결점을 천만다행으로 여기지는 못할망정…… 실망하다니.
이율배반적인 자신의 마음에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하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다행이야. 저하께서 나를 알아보지 못해 다행이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 서운하네.
벗으로서 함께 지내온 시간이 얼마인데, 치장 조금 했다고 못 알아보시다니.
실망입니다. 화초저하. 저를 향한 저하의 마음은 고작 이 정도셨습니까?
믿을 수 있는 벗이라 말하신 것의 무게가 고작 이 정도에 불과한 것입니까?
벗이라면서요. 세상에 오직 둘밖에 없는 벗이라면서요.
안심(安心)과 상심(傷心) 사이를 표류하던 라온의 귓가로 영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헌데, 두 사람은 어찌 만난 것이냐? 청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언제 여인 만날 틈이 있었던 것이냐?”“우연이 운명이 되었다고나 할까요.”“그건 또 무슨 뜻이더냐?”“우연히 만나 작은 비밀 하나를 공유하게 되었지요. 그 작은 비밀이 눈덩이처럼 구르고 뭉쳐져 어느덧 이리도 깊은 마음이 되었습니다.”또다시 이어진 윤성의 짓궂은 장난.
“농이 지나치십니다.”남들이 들으면 우리가 정말 무슨 특별한 사이라도 된 듯 오해하겠습니다.
오늘따라 농이 심한 윤성을 보며 라온은 겸연쩍은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란 말이지.”윤성의 말을 곱씹던 영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게도 그런 사람이 하나 있다. 우연히 비밀을 알게 되어 벗이 된 이가.”“그렇습니까? 어떤 사람입니까? 저하께서 벗이라고 칭할 정도면, 꽤나 대단한 사람인가 보옵니다.”“대단하지. 이따금씩 맹랑한 소리를 하여 나를 기함시키기도 하니까.”“세자저하를 말입니까? 허어, 정말로 그런 사람이 있다니, 직접 듣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윤성이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기억하는 영은 빙벽 같은 사내였다.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차가운 본성을 풀지 않는.
그런 사람을 기함시키다니. 아니, 그 무엇보다 저 성정에 맹랑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곁에 두다니.
믿을 수 없었다.
윤성이 슬쩍 라온을 봤다.
혹시, 홍 내관을 말하는 겁니까?
라온은 새치름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외로 틀었다.
그렇다고 긍정할 수도,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만약, 다른 자리에서 저리 물었다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벗이라 하시면서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는 분께서 하는 말이었다.
화초저하, 제가 정녕 저하의 벗이 맞기는 한 것입니까?
“대체 그 사람이 누굽니까?”윤성의 물음에 영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녀석이 있다. 제법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 녀석이지.”영의 말에 라온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 녀석을 한 명 알고 계신다 하셨습니까? 저도 그런 분을 한 분 알고 있습니다.
답답해서 지켜보는 내내 억장이 무너질 것 같은 분 말입니다.
영의 미소가 짙어질수록, 라온의 답답한 한숨 또한 깊어졌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거센 빗줄기가 점차 잦아들더니 이윽고 물기를 털어낸 뽀얀 달이 다시 얼굴을 비췄다.
하늘을 올려보던 윤성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비님이 그치셨군요. 하오면 저희는 그만 가보겠사옵니다.”윤성이 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까부터 어깨를 축 늘이고 있던 라온도 덩달아 인사를 하고는 정자를 가로질렀다.
바로 그때였다.
“나도 함께 가자꾸나.”등 뒤에서 들려온 영의 목소리에 윤성과 라온이 걸음을 멈췄다.
“함께……라고 하시었사옵니까?”윤성의 물음에 영이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도 잠시 비만 피하던 참이었다. 비가 그쳤으니 그만 가봐야지.”“저희는 조금 더 시전거리를 돌아다닐 참이옵니다만.”“마침 잘 되었구나. 나 역시도 백성들이 어찌 명절을 보내는지 한번 둘러볼 참이었다. 이참에 함께 걸음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말과 함께 영이 먼저 정자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별 수 없이 윤성과 라온이 그 뒤를 따랐다.
라온은 시무룩한 눈으로 걸음을 옮기는 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역시, 기억하지 못하시는구나.
영이 함께 가자고 했을 때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곁을 지나치면서도 그 흔한 눈길 한 번 흘리지 않으셨다.
역시, 그렇구나.
라온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그분에게 어떤 의미인지. 벗이라 하였지만 엄연한 신분의 차가 존재했다.
화초저하께서 밤하늘을 비추는 고고한 달빛이라면, 나는 한낱 젖은 땅 위에 고여 있는 작은 물웅덩이.
물웅덩이 속엔 달빛을 담을 수 있지만, 정작 달빛 속엔 물웅덩이의 그림자조차 담을 수 없었다.
정신 차려, 홍라온. 서운해할 일도 아니고, 서글퍼할 일은 더더욱 아니야.
이게 정상이고, 바른 것이야. 오히려 저분께서 날 알아보지 못하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만약, 화초저하께서 날 알아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랬어? 알아보지 못해 얼마나 다행이야?
그러니까 웃어. 씩씩하게 걸어. 허리도 꼿꼿하게 세우고, 어깨도 활짝 펴고.
우울한 생각은 그만 해. 넌 홍라온이야. 언제나 즐겁게 살아야 해.
눈물 따위 흘리는 미련한 짓은 하지 말자. 고작 해야 여인의 치장을 한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뿐이야.
그건 화초저하의 사소한 결점이니까. 그 정도는 이해해줘야지.
그런데 나, 대체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설마…… 화초저하께 다른 기대라도 했었던 거야?
***
가배는 내일이건만, 벌써부터 달마중을 나온 사람들로 거리가 북적이고 있었다.
라온은 영과 윤성, 두 사람을 좌우로 둔 채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세 사람이 향한 곳은 수표교 근처의 커다란 은행나무였다.
중추절, 이 은행나무 아래에서 소원을 빌며 그 어떤 소원도 이뤄진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덕분에 해마다 수표교의 은행나무를 찾는 사람들의 수도 많아졌다.
“제법 명절 분위기가 나는군요.”윤성이 목을 길게 빼 내밀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무얼 발견했는지 반색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어딘가로 쪼르르 달려가는 그를 보며 라온이 근심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행여 저와 헤어지게 되면 저기 은행나무 아래로 오십시오. 거기서 기다리겠습니다.”“알겠습니다.”윤성이 손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윽고 그가 달려간 곳은 다름 아닌 엿을 파는 곳이었다.
“아이도 아니고.”어린아이처럼 잔뜩 들떠 있는 윤성을 보며 라온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이내 제 곁에서 묵묵히 걷고 있는 영을 보며 불퉁하게 입매를 모았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에게 서운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무에, 신경 쓰이는 것이라도 있소?”그 모습을 스쳐보던 영이 미간에 보일 듯 말듯 주름을 새겨 넣으며 물었다.
평소 라온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정중한 말투.
그러나 반갑지 않았다.
너무 정중한 것은 오히려 폭력이라는 말이 있었던가. 그 말이 꼭 맞았다.
자신에게 격식을 차려 말하는 영의 모습은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너무 먼 곳에 있는 사람인 듯 느껴졌다.
화초저하께서 그리 하신다면 저 역시도 모르는 사람 대하듯 할 겁니다.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여염집 규수처럼 음전한 모양새로 대답을 한 뒤 라온은 정면을 보며 걸었다. 아니, 정면만 보고 걸었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행여 저도 모르게 영을 돌아볼까 싶어 뚫어져라 정면만 바라보며 열심히 다리를 움직였다.
바로 그때였다.
“저쪽에서 풍등을 공짜로 나눠준대요.”“풍등?”“네. 소원풍등이요.”“어머. 그거 하나에 한 냥씩 받고 팔던 거 아니에요?”“진짜?”“지금 이럴 게 아니라 빨리 가봅시다.”“공짜로 나눠준다는 데 수량이 많을 리가 없잖아?”라온의 뒤편에서 일어난 술렁거림이 순식간에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왠지 사람이 많아진 것 같은데?’자꾸만 등을 떠미는 사람들. 이상하게 생각한 라온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시야에 우르르 돌진해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좀 전까지만 해도 한산했던 거리가 해일처럼 밀려드는 인파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공짜로 풍등을 나눠준다는 소문 한 자락이 만들어낸 아수라장이었다.
“비켜요. 비켜.”“아! 밀지 말아요.”“좀 앞으로 갑시다. 이러다 풍등을 못 받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요?”아우성치는 사람들, 소란스런 발걸음소리, 거친 숨소리들.
‘아차’ 하는 사이에 라온은 강물에 빠진 것처럼 인파에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
“미, 밀지 마세요.”라온은 어떻게든 인파속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사방에서 빽빽하게 밀려드는 사람들의 숨소리에 현기증까지 일었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가 강한 힘으로 그녀의 팔을 낚아채듯 잡아당겼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천만뜻밖에도 영이었다.
조금 높은 곳에 서 있던 영이 인파에 휩쓸린 라온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풍등에 관심 있는 게 아니라면, 이쪽으로 피하는 게 좋겠소.”애초에 풍등에는 관심도 없었던 터라. 라온은 두 손으로 영의 손을 잡았다.
영이 라온의 손을 끌어당기며 단단한 팔로 감싸 안 듯이 그녀의 어깨를 휘감았다.
이윽고.
바르작거리던 라온은 그대로 영의 가슴에 폭 안겨들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하였소.”영이 낮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나 라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마에 닿은 영의 탄탄한 가슴.
그의 팔로 만들어진 든든한 장벽.
느닷없이 수줍고 설레었다. 라온의 깊은 곳에서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소녀가 되살아났다.
쿵쿵, 쿵쿵.
영의 탄탄한 가슴에 얼굴을 묻은 그녀의 귓가로 요동치는 제 심장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힘차게 뛰게 그의 심장소리도.
“괜찮소?”영이 좀처럼 반응이 없는 여인을 향해 무심한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 한 순간.
영의 입가에 한 줄기 가느다란 미소가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