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44화 (44/131)

44. 비 내리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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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4

가배를 하루 앞둔 운종가의 밤.

왁자한 축제의 분위기로 거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길게 이어진 붉은 등롱 아래로 아직 잠들지 않은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아낙들은 좌판에서 파는 인절미를 나눠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그 옆에서 술잔을 주고받는 사내들의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오를 무렵.

저 멀리 길 끝으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사대부가의 사내와 음전한 양반가의 규수가 달빛을 조족등 삼아 나란히 걷고 있었다.

다른 때라면 이 늦은 밤, 양반가의 사내와 여인이 나란히 걷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기도 하겠지만.

축제의 전야라. 모두들 대수롭지 않은 시선으로 두 사람을 응시했다.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이 흘렀다.

두 사람이 시전의 한복판으로 들어섰다. 다음 순간, 조잘대던 아낙들의 수다소리가 잦아들었다.

고함을 지르며 술잔을 부딪치던 사내들도 하는 짓을 멈춘 채 두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선남선녀(善男善女)라는 글자를 사람의 형상으로 빚어놓으면 딱 저런 모습이리라.

붉은 능에색 도포를 입은 젊은 사내는 바람이 불면 대나무 향이 물씬 풍겨올 듯 청수한 인상이었다.

그 곁에서 매화가 수놓인 붉은 치마를 입고 걷는 여인의 자태는 하늘 꽃인 듯 단아하여 생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시끄럽던 시전 거리에 잠시 동안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바늘 떨어지는 듯한 적막을 깬 것은 대장간 허 서방의 먼 인척인 바우 어멈이었다.

그녀는 강원도 산골마을에서 한양에 사는 조카 집에 놀러온 참이었다.

바우 어멈에게 한양은 그야말로 신천지였다.

이곳 한양은 보이는 것, 들리는 소리, 걷는 길조차도 하나같이 범상치가 않았다.

하다못해 하늘에 떠나가는 구름마저도 한양의 구름은 어딘가 남달라 보였다.

그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지금 보는 두 사람의 용모였다.

“우태 저래 이쁘나? 사람이 우태 저럴 수가 있나. 저 얼굴 좀 보라니. 한양 양반들은 마카 저래 이쁘나?”그 곁에서 인절미를 우물거리던 안 씨가 조금은 우쭐대며 말했다.

“어머나, 숙모님도. 저리 곱게 생긴 양반들 처음 보셔요?”“처음 본대니. 뭐이, 얼굴이 만지면 분가루가 우수수 떨어지겠다야.”“뭐, 저 정도를 가지고. 한양에서 저 정도는 하얗다고 할 수도 없어요. 하얀 눈이 왔을 때 눈인지, 사람얼굴인지 구분하지 못해야, 아…… 얼굴색이 조금 희구나라고 할까.”“진짜로? 그럼 한양 양반들은 마카 저래 곱나?”“그럼요.”“이야, 한양 양반들은 얼굴 보고 양반 족보 주는 거나?”“호호호, 숙모님도. 말도 안 돼요. 그렇게 양반 족보 주면 저도 양반이겠네요.”그때였다.

“이 여편네가 실성을 했나.”두 사람 사이로 험상궂은 얼굴 하나가 끼어들었다. 대장장이 천 서방이었다.

술이 적당히 오른 천 서방이 아내 안 씨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지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여?”“뭐예요?”“얼굴 순으로 족보를 받으면 자네가 양반이란 말이시?”“그, 그거야 뭐.”괜히 농으로 한 이야기에 저리 쌍심지를 켜고 나서자 괜스레 부아가 치민 안 씨가 가재미눈으로 남편을 노려보았다.

“그럼 얼굴 순으로 족보를 받으면 나는 뭔데요? 솔직하게 말해 봐요. 얼굴 순으로 하면 난 뭔데요? 양반? 중인? 아니면……?” 한 마디만 싫은 소리 해봐. 가만 안 둘 거야, 하는 경고가 가득 담긴 눈빛.

하지만 눈치 없는 천 서방이 그 눈빛을 알아차릴 리 만무했다.

잔뜩 벼르고 있는 안 씨를 향해 천 서방이 말했다.

“얼굴 순으로 족보를 준다면 자네는 말이시…… 천…….”천 서방의 입에서 천한 상것이라는 말이 나오려는 바로 그 순간.

“왕족이십니다.”결 고운 붉은 비단치마를 입은 여인이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왔다.

쓰개치마를 한껏 눌러쓴 여인이 천 서방의 곁으로 다가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몇 번 말씀드렸습니까? 여인에겐 속에 있는 말을 곧이곧대로 하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아차차.”그제야 천 서방이 아차 하는 얼굴로 제 이마를 쳤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 뚝 뗀 표정으로 안 씨에게 소리쳤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란 말이시. 얼굴 순으로 족보를 주면 자네는 왕족이여. 이거 왜 이래?”“아이, 참. 사람들 많은 데서 왜 그래요?”안 씨 역시 언제 눈을 치켜떴는가 싶게 푸스스 풀린 얼굴로 천 서방의 팔에 매달렸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저마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한동안 안 씨의 애교에 흐흐, 웃음을 짓던 천 서방이 뭔가 괴이쩍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근데 말이시. 참말로 요상허네.”“뭐가요?”“방금 전에 삼놈이가 왔다 갔는가?”“이 양반이.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고. 느닷없이 웬 삼놈이 타령이오?”“그려? 그렇단 말이시?”그럼 방금 전에 위기에서 벗어나게 도와준 건 뉘란 말인가?

천 서방이 눈동자를 뒤룩 돌렸다.

저 멀리로 사라지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헌칠한 사내와 그 곁을 음전하게 걷는 여인의 모습이.

“저 뒤태, 낯설지 않은데 말이시.”혹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천 서방의 눈매가 가늘게 여며졌다. 그러나 우직한 사내는 이내 체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취해도 많이 취했는가 보다. 삼놈이 그놈이 아무리 계집처럼 곱다해도 계집이 될 수는 없는 것인데.

어쩌자고 저 귀한 아가씨의 뒷모습에서 삼놈이를 떠올린 것일까.

***

“하마터면 들킬 뻔했습니다.”쓰개치마를 쓰고 종종걸음 치는 라온을 돌아보며 윤성이 말했다.

방금 전, 천 서방에게 짧은 조언을 하고 홀연히 자취를 감춘 여인. 다름 아닌 라온이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모르게…….”윤성이 걸음을 세우고 라온을 물끄러미 돌아보았다.

“왜 그러십니까?”“대체 궁에 들어오기 전에 무얼 하고 사셨던 것입니까?”“어째 그리 물으십니까?”“궁금하여서요. 운종가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고, 모르는 사람이 없질 않습니까. 예서 장사라도 했던 것입니까?”“장사는 아니고…….”“그럼요?”“상담을 하였습니다.”“상담이요?”“네. 운종가 사람들을 상대로 소소한 고민 상담을…….”“그렇습니까?”“네.”조금은 계면쩍은 생각에 라온이 얼굴을 붉혔다.

무릎을 굽혀 그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윤성이 문득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좋은 재주를 지니셨습니다.”“네?”“나중에 고민이 생기면 홍 내관을 찾아가야겠습니다.”“아, 아닙니다.”손사래를 치는 라온을 윤성이 귀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참의영감, 어디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까?”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쯤 못 들어줄 리 없다.

게다가 그 소원이라는 것이 이 비싼 옷을 입어주는 것이라면 더더욱 안 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참의영감, 어디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까?”시전거리를 걷는 라온은 울상이 되어 윤성에게 속삭였다.

아까부터 자신과 윤성을 힐끔대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불편해 죽을 지경이었다.

어디 힐끔대는 것뿐일까? 두 사람을 곁눈질하며 속닥거리는 여인들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아마도 이 옷 때문이리라. 그래, 내 보기에도 지나칠 정도로 아름다운 옷이긴 하다.

라온은 조금이라도 빨리 너무 귀해서 오히려 불편한 이 옷을 벗고 싶었다.

그런 라온의 마음을 알 리 없다는 듯 윤성은 운종가를 느릿느릿 한가롭게 걸었다.

“참의영감, 대체 무슨 선물을 사려고 이러십니까?”“글쎄요.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으니. 마땅한 것이 눈에 띌 때까진 이리 다녀볼 작정입니다.”윤성의 태평한 대답에 라온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저더러 이런 모습으로 계속 다니란 말입니까?”“안 될 것은 무업니까?”“안 될 것은 없지만 조금 불편해서 말입니다.”“무어가요?”“치마를 입어본 적이 없었던지라. 불편합니다. 하지만 뭐, 그 정도쯤은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람들이 힐끔대는 건 도무지 감당이 되질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 옷 때문인 것 같습니다.”“그러니까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불편하다는 말씀이지요?”“네. 그런 것이지요.”그러니 그만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물론 이 옷도 갈아입고요.

아, 이렇게 궁이 그리웠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라온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그제야 윤성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 사람을 힐끔대던 사람들이 황급히 딴청을 부렸다.

하지만 눈에 확연한 딴청이라. 어린아이라도 알아차릴 정도였다.

“이런. 제가 선물 고르는 데 정신이 팔려 홍 내관을 곤란하게 했습니다.”“네.”아셨으면 그만 돌아가시죠, 네?

“그럼…….”“이만 궁으로 돌아가시렵…….”“이쪽 길로 가겠습니다. 이쪽 길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만.”응? 돌아가는 게 아니고요?

잔뜩 기대하던 라온은 맥이 탁 풀려버렸다.

어느새 인적이 드문 뒷골목으로 발길을 옮긴 윤성이 라온을 향해 손짓을 해보였다.

“홍 내관, 이쪽입니다.”“네, 갑니다. 가요.”사람의 발길이 너무 없어 조금 으스스하긴 하지만 적어도 힐끔대는 시선은 없으니 다행이었다.

그런데 이 골목, 너무 사람이 없는 거 아니야? 어디선가 왈짜패라도 툭 튀어나온다면 꼼짝없이 당하겠는걸.

***

“어이, 거기 너희 둘.”큰 길에서 골목으로 접어든 지 얼마나 지났을까? 협소한 골목길을 걷는 윤성과 라온에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과 멀지 않는 앞쪽,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이 건들거리는 걸음걸이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고 있었다.

아,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을까.

“애초에 제가 실수를 하였습니다.”라온은 윤성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뭐가 실수를 하였다는 것입니까?”“이 골목으로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되짚어 생각해보니 이곳에서 종종 봉변을 당한 양반님네가 있었다는 사실을 깜빡하였지 뭡니까.”“그런 것입니까?”“죄송합니다.”“홍 내관이 죄송할 것이 무어가 있겠습니까. 애초에 이 길로 가자고 한 것이 다름 아닌 제가 아닙니까. 그러니 그런 얼굴 마십시오.”“아닙니다. 제가 불편하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이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런 불미스러운 일과 마주하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닙니까.”두 사람이 속삭이는 사이 사내들이 두 사람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운종가 뒷골목을 전전하는 왈짜패 덕칠과 그 무리들이었다.

“이런, 두 분께서 무엇을 그리 속이실까?”맨 앞에 서 있던 덕칠이 이죽거리는 말과 함께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어느새 사내들은 윤성과 라온의 주위를 둥글게 포위했다.

“어이쿠, 날도 좋은데 쓸데없이 얼굴은 왜 가리고 계시나 모르겠네. 답답하지도 않으신가?”히죽거리며 웃던 덕칠이 돌연 라온이 쓰고 있는 쓰개치마를 휙 벗겨냈다.

“호오, 이것 보게?”덕칠의 입에서 휘파람 소리가 새어나왔다. 쓰개치마로 가리고 있던 얼굴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미색이었던 까닭이다.

“가배 날이라고 여기저기 정분난 것들 일색이니. 계집하나 없는 우리 같은 놈들은 어디서 위안을 받을까 했더니. 저기 하늘에 계시는 달님이 가엾게 보셨나. 이렇게 고운 선녀를 떡하니 눈앞에 보내주시고 말이야. 어때, 아가씨. 이런 안방샌님보다 우리 같은 사내가 진국이란 말이지.”덕칠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입맛을 다셨다. 일행들과 함께 큭큭 비웃는 웃음을 흘리던 그가 윤성을 향해 턱짓을 했다.

“계집만 놓고 얌전히 꺼질래? 아니면 죽을 만큼 맞고 꺼질래?”“어허!”윤성이 눈매를 치켜뜨며 호통을 쳤다.

“어느 안전이라고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인가?”“뭐야? 꼴에 양반이라는 거야?”“이놈들이!”“뭐? 이놈들? 이 양반 놈의 새끼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사내들이 바닥에 침을 퉤 하고 뱉으며 윤성을 향해 쌍심지를 켰다.

팔소매를 걷고 씩씩 거리는 양이 당장이라도 윤성에게 달려들어 요절을 낼 듯 보였다.

찰나, 라온이 양팔을 벌려 윤성의 앞을 막았다.

“아무래도 말이 통할 것 같은 자들이 아닌 듯합니다. 제가 이자들을 막고 있을 터니. 영감께서는 저쪽 큰길을 향해 달리십시오.”라온은 윤성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다급히 말했다.

하지만 정작 윤성은 달아나기는커녕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너무 무서워 정신이 나가셨나? 이런 상황에 웃음이라니.

라온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왜 웃으십니까?”“대체 지금까지 어찌 살아오신 겁니까?”“무슨 뜻입니까?”“정말 스스로가 사내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겁니까?”저 작은 몸으로 험악한 사내들과 대적하겠다고 하는 라온의 모습이 기가 막혔다. 너무 기가 막히다 못해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진실로 사내도 아닌 사람이 어찌 그리 뼛속까지 사내처럼 행동하는 것입니까.”윤성의 말에 라온은 뭐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 살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 같은 것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정일랑 윤성에게 털어놓은 분위기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주춤하는 라온을 등 뒤로 돌려세운 윤성이 사내들의 앞으로 성큼 나아갔다.

“뭐하는 것입니까?”“이왕 여인의 복색을 갖췄으니, 여인의 마음가짐도 한번 가져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그게 무슨 말씀입니까?”“이럴 땐 사내에게 기대어도 좋다는 말입니다.”“그럴 수는 없습니다.”불안한 얼굴로 도리질을 하는 라온을 윤성이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속삭인다.

“걱정 마십시오. 지금의 이 상황, 제가 해결하겠습니다.”“하지만…….”라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성이 양팔을 활짝 펼치며 호기롭게 소리쳤다.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볼까.”윤성은 덕칠과 그의 수하들을 향해 성큼 한 발짝 내딛었다.

돌변한 그의 모습에 잠시잠깐 덕칠은 긴장했다.

이 녀석 혹시 정말로 한 가닥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그런 불안은 주위에 있는 수하들의 모습을 확인하자 깨끗하게 사라졌다.

제 놈이 제아무리 대단해도 이쪽의 머릿수가 몇인데. 불안을 털어버린 덕칠이 입아귀를 비틀며 건들거렸다.

“이것들이 누굴 허수아비로 아나? 사람 앞에 두고 뭐하는 짓이야? 꼴에 사내라고 계집의 앞에서 허세 한번 떨어보려는가 본데…….”툭.

그때 무언가가 덕칠의 발치로 떨어졌다.

“에그머니.”반사적으로 깜짝 놀란 덕칠과 그의 수하들이 한 발짝 물러났다.

저 녀석이 던진 저 요상한 것이 터지는 것은 아닐까하여 잠시잠깐 불안해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건 또 뭐야?”곁에 있던 수하가 쪼르르 달려가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왔다. 주머니를 열자 엽전꾸러미가 보였다.

“열 냥인뎁쇼, 형님.”덕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새끼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고작 돈이었어? 고작 이런 쇠붙이 따위로 이 덕칠이를 어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냐?

“이 어르신이 고작 이 정도에 물러날 거라 생각했다면 큰 착각이라고…….”툭.

“또 뭐야?”“이번에는 스무 냥입니다요, 형님.”“이 양반 놈의 새끼가 누굴 거지로 아나.”툭.

“쉰 냥입니다요.”“이 양반이 실성을…….”툭.

“형, 형님. 백, 백 냥입니다.”“어르신!”덕칠의 허리가 직각으로 꺾였다. 수하들의 허리 역시 덕칠처럼 겸손해졌다.

그들의 허리는 딱 백 냥만큼의 자존심만 있었던 것이다.

“원한다면 여기 있는 은덩이도 마저 주지.”“이쪽 길이 걷기에 더 좋을 것입니다, 양반 어르신.”

***

“아깝지도 않으십니까?”라온은 불퉁한 목소리로 윤성을 향해 소리쳤다.

윤성이 왈짜패에게 내어준 돈을 손가락을 꼽아보던 그녀는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얼마야? 다 세지도 못할 지경이다.

그 큰돈을 서슴없이 내어주었건만. 윤성의 얼굴에는 조금의 안타까움도 보이지 않았다.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아름다운 분과 함께 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습니까.”윤성의 얼굴에 가득한 미소에 라온은 고개를 젓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리 웃을 수 있다니.

“그런데 여긴 어디입니까?”라온은 현우재라는 현판이 붙은 대문을 올려다보았다.

“집안사람들이 간혹 들리는 곳입니다. 지금처럼 너무 걸어 다리가 아프거나, 혹은 잠시 비를 피할 곳이 필요할 때, 이곳에 들려 쉬었다가 가기도 하지요.”말하자면 오직 윤성의 집안사람들을 위한 쉼터라는 뜻.

안으로 들어서자 잘 손질된 정원이 들어왔고, 그 한가운데 팔각지붕을 이고 있는 정자가 보였다.

윤성이 불투명한 휘장이 내려진 정자를 가리켰다.

“하늘을 보니 한바탕 소나기라도 내릴 모양입니다. 저기서 잠시만 쉬었다가 가지요.”윤성의 말대로 좀 전까지 말짱했던 하늘엔 금방이라도 빗살을 흩뿌릴 듯 먹장구름이 가득했다. 불어오는 바람에도 비 냄새가 섞여 있었다.

“방해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저곳에서 쉬고 계십시오.”윤성은 정자 입구까지 라온을 안내했다.

“참의영감께서는 함께 안 가십니까?”“저는 급히 다녀올 곳이 생겨서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습니다.”“어디 가시는 것입니까?”“여인은 몰라도 되는 곳입니다.”“아…….”여인은 몰라도 되는 곳이라면…… 혹시 측간?

라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녀오십시오.”“금세 다녀올 것입니다.”“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나름 배려하는 라온의 말에 윤성이 미소를 지었다.

이내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가로지르는 그를 보며 라온도 정자 안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가 팔각지붕 안쪽으로 발을 들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후두둑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덕칠의 인생에 오늘처럼 운이 좋았던 날도 없는 듯했다.

두 손에 가득 담긴 엽전을 들여다보며 덕칠을 큭큭 웃음을 흘렸다. 이 돈이면 며칠은 기생집에 죽치고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며칠이 무엇인가. 한 서너 달은 능히 계집과 술을 마음껏 취할 수 있으리라.

간밤에 무슨 꿈을 꾸었기에 이런 횡재를 다 했나.

“가자, 이 형님이 오늘 거하게 한 턱 쏘마.”덕칠의 말에 수하들이 어깨춤을 추며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그들이 골목길을 채 벗어나기 직전.

긴 그림자가 그들의 앞을 막았다.

“어?”아까 보았던 그 안방샌님이다.

“아이고, 어르신. 여긴 또 어쩐 일로? 왜? 아직 줄 돈이 남은 것이오?”덕칠의 물음에 윤성이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담으며 말했다.

“아니.”“그럼……?”채 물음이 끝나기도 전.

강력한 힘이 덕칠의 턱을 내리찍었다.

“컥!”외마디 비명과 함께 덕칠이 한쪽 옆으로 고꾸라졌다.

“이 개자식이 감히!”느닷없는 기습에 덕칠을 지키던 수하들이 눈에 불을 켜고 윤성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흉흉한 기세와는 달리 이내 가을 낙엽처럼 순식간에 바닥을 나뒹굴었다.

덕칠과 그 수하들을 일격에 해치우는 윤성은 아까 자분자분 갖고 있던 모든 돈을 내놓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 앞에 서 있는 윤성은 지옥의 야차와 다를 것이 없었다.

덕칠이 벌벌 떨며 윤성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살, 살려만 주십시오.”아까 윤성이 줬던 돈과 은덩이는 물론이고 제 갖고 있던 돈 마저 윤성에게 바치며 덕칠이 애원했다.

윤성이 묵묵히 그것들을 받아 소매에 갈무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덕칠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하온데…… 아까는 왜 그리하셨습니까요?”“무엇을?”“이리 주먹을 잘 쓰시면서 아까는 왜……?”“나더러 여인의 앞에서 피를 보라는 것이냐?”윤성이 다시 웃었다. 평소의 밝고 따사로운 미소와는 전혀 다른…… 오싹 소름이 일 정도로 차갑고 냉정한 웃음이었다.

“네?”덕칠의 궁금증이 채 해소되기도 전에 그의 목에서 검붉은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컥!”목을 움켜쥔 덕칠이 답답한 신음을 흘리다. 충격과 경악이 서린 눈으로 윤성을 지켜보던 덕칠이 줄 끊어진 인형처럼 모로 쓰러졌다.

그 모습을 무심히 지켜보던 윤성이 발길을 돌렸다.

“비님이 오시네.”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엔 지금의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

굵은 빗줄기가 정원을 가득 채웠다.

“비님이 꽤 오시네.”라온은 정자 난간에 턱을 괸 채 하늘을 올려보았다. 빗줄기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비가 그쳐야 돌아가도 돌아갈 텐데.”갑자기 초조해진다.

행여 오늘밤 안으로 비가 그치지 않으면 어쩌지? 마음 같아서는 이 비를 뚫고 곧장 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리했다가는 이 귀한 비단 옷이 흠뻑 젖고 말겠지?

라온은 곱게 치장한 제 입성을 눈으로 더듬었다.

윤성의 엉뚱한 소원으로 마지못해 입게 된 비단치마. 일평생 이리 고운 비단옷을, 그것도 여인의 옷을 입게 되리라곤 상상조차 해 본적 없다.

하여, 윤성이 이것을 입어 달라 소원하였을 땐 당황스러우면서도 기뻤다.

사내로 살아왔지만 타고나길 여인인 것을. 제 아무리 사내가 되어야 한다고 되뇌었어도 불쑥불쑥 솟구치는 여인의 본성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봄이 오면 괜스레 가슴이 설레었다. 빛 고운 꽃을 보면 저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이리 곱디고운 옷을 볼 때면……가끔씩은 탐이 나기도 했었다.

어느 여인이라고 이리 고운 것을 마다할까? 하지만 막상 이 고운 것을 몸에 걸치니 근심이 뒤따랐다.

행여 옷에 흠집이라도 날까 겁이 나 숨 한번 크게 쉴 수가 없었다.

거친 흙바닥에 치맛자락이라도 끌릴 세라 걷는 내내 치맛단을 쥐고 걷느라 손에 쥐가 날 지경이다.

아무리 고운 것이면 무얼 해.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을.

이런 모습 화초저하나 김 형이 보셨으면 뭐라고 하실까?

“돼지 목에 주주목걸이다.”라온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영의 표정과 목소리를 흉내 냈다.

그녀는 이번에는 병연과 비슷한 불퉁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병연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말했다.

“성가신 녀석.”두 사람의 흉내를 번갈아 내던 라온이 풋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 끝에 이상하게도 그리움이 딸려온다.

지금 당장 돌아가고 싶었다, 궁으로. 매사 한기가 돌 만큼 차갑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조차 없는 불퉁한 그 얼굴들이 무에 그립다고.

“이 비가 그치는 대로 서둘러 돌아가야겠다.”먹장구름이 점점 걷히는 것을 보니 오래 내릴 비는 아니었다. 다행이다 안심하고 있을 때였다.

툭.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이제 오십니까? 너무 늦는 거 같아 걱정하던 참이었습니다.”라온이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정자 입구로 막 들어온 사내를 보며 라온은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옷자락에 묻은 빗방울을 툭툭 털어내는 사내를 보며 그녀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비의 장막을 걷으며 나타난 사내는 윤성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낯선 이도 아니다.

사내는 라온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먹장구름 뒤로 숨어버린 달빛을 닮은 사람.

“화초저하.”라온은 저만 들릴 정도로 작게 입소리를 중얼거렸다.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영이 정자에 올랐다.

빗줄기가 만들어낸 투명한 공간 안에서 라온은 영과 마주섰다.

쏴아아아.

정자 밖의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그러나 라온은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자신을 향한 영의 시선.

그 무심한 눈길에 포박 당한 듯 라온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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