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소원입니다
저녁 무렵, 라온은 동궁전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홍 내관. 홍 내관.”
누군가 자신을 찾는 소리에 라온이 걸음을 멈췄다.
담벼락을 옆에 끼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도기의 모습이 보였다.
“도 내관님, 무슨 일이십니까?”
“예조참의께서 자네를 불러오라 하셨네.”
숨이 턱까지 차오른 도기가 헉헉 마른 숨을 뱉으며 말했다.
“예조참의께서요? 무슨 일로요?”
“그건 나도 모른다네.”
“하오나 저는 지금 동궁전으로 가야 합니다.”
“동궁전에는 왜?”
“저녁에 연회가 있질 않사옵니까. 연회 중에는 세자저하의 곁을 지켜야 합니다.”
“이런, 자네 아직 소식 못 들었는가?”
“소식이요? 무슨 소식 말입니까?”
라온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잠깐 사이에 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눈만 뜨고 나면 변화무쌍한 일들이 수시로 생기는 궁이다 보니, 좀처럼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오늘 저녁 연회는 취소되었네.”
“취소요?”
“일정이 바뀌었네. 사신단과 조정대신들이 갑자기 뱃놀이를 떠났다질 뭔가. 그러니 동궁전에는 갈 필요가 없다네.”
“하지만 세자저하께서는 아무 말씀 없으셨는걸요.”
“어허, 높으신 분들이 결정하시는 일일세. 그런 변동사항을 자네에게 일일이 말해 줄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이번 일은 갑자기 결정된 일이라, 알리고 싶어도 알릴 수 없었을걸세.”
“그래도 일단 동궁전으로 가 상황을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째서 자꾸 고집을 부리는가? 아까 말하지 않았나. 뱃놀이를 떠난 건 사신단과 조정대신들이라고.”
“세자저하는요?”
“글쎄, 그거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오늘 행사에 저하께서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네.”
라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 사신단의 방문은 세자저하께서 친히 계획한 것이라 들었다.
그런데 중요한 행사에 정작 세자저하께서 참석하지 않다니. 혹, 어디 미령하시기라도 한 건 아닐까?
‘나 때문에?’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감히, 세자저하의 침소를 독차지한 간 큰 행동. 죽으려고 환장을 했지.
그 어이없는 행동 때문에 세자저하께서 몸이 불편해지신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부르실 때가 되었는데도, 여직 부르지 않아서 마음 한구석이 불안하던 참이다.
그러기에 라온은 도기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동궁전으로 먼저 가 동태를 살피려 하였다.
“자자, 그만 고집 부리고 일단 나와 함께 예조참의를 뵈러 가세. 그분께서 자네를 찾으라고 아까부터 닦달이시네.”
“하지만…….”
라온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서둘러야 하네. 어서 가세.”
보다 못한 도기가 라온의 등을 떠밀었다.
도기에게 반쯤 떠밀려 가면서도 라온의 시선은 동궁전에 고정되어 있었다.
***
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는 시각.
마포나루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두 사내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다.
영과 병연이었다.
두 사람은 저 멀리 포구에서 배에 오르는 사신단과 조정대신들을 바라보았다.
등롱이 켜진 배에는 그들 외에도 기생들과 며칠은 거뜬히 지내고도 남을 음식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저하께서 생각한 대로 흘러가는군.”강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서 있던 병연이 영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리까지 딱딱 들어맞으니 씁쓸하구나.”영이 병연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한동안 저들의 발길을 묶어놔 줘. 저들이 생각했던 기일보다 좀 더 오래. 그 안에 아바마마께서 성심을 세상에 공표하실 것이다.”“저들이 순순히 받아들일까?”“아바마마와 내게 필요한 것은 명분이다. 지금 저들이 스스로 그 명분을 우리에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지.”“저자들을 저리 움직이게 한 것은 저하였고 말이지. 저희들이 저하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만만한 자들이 아니다. 어쩌면 예상을 했을 수도 있겠지. 저들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행보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할 것이야.”“알고 있어.”“그들의 행적은 아직 찾지 못한 거냐?”영의 물음에 병연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애쓰는 건 알고 있지만 좀 더 서둘러다오. 저들이 홍경래의 자손을 찾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하였다간, 또 다시 악몽이 시작 될 것이야. 칼자루를 다시 저들의 손에 쥐어 줄 수는 없지.”영의 눈동자에 결연한 빛이 서렸다. 병연이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왜? 어찌 그리 보는 것이야?”“문득 저하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서.”“내가 무섭다? 며칠 전 네 손에 명을 달리한 일당들이 들으면 가슴을 칠 노릇이겠군. 하하하.”“그런가? 어쨌든 저하와 적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영이 병연을 마주보며 말을 덧붙였다.
“너와 벗이 된 건 나의 행운이라 생각한다.”병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도 영과 벗이 된 걸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병연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언제나 웃는 녀석, 그래서 자꾸만 손아귀에 움켜쥐고 싶은 녀석의 얼굴이.
그리고 그 녀석이 바라보는 시선도 떠오른다. 서로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녀석의 시선은 영에게로, 그리고 영의 시선은 녀석에게로 향해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자 뭔가 묵직한 것이 병연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 생경한 감정을 떨쳐버리려는 듯 병연이 돌아섰다.
“변죽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애초에 입에 발린 말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워낙에 제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 녀석이니까.
하지만 오늘따라 더더욱 제 마음을 굳게 닫아거는 병연을 보며 영이 마른 입맛을 다셨다.
“사흘이다. 사흘만 저들을 잡아두면 된다.”영의 말에 병연은 대답대신 삿갓을 깊게 눌러썼다. 라온이 선물해준 삿갓은 어느새 병연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홀로 남겨진 영은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강물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형형색색 아름다운 등롱을 단 놀잇배가 강물을 따라 유유히 흐르기 시작했다.
진짜 전쟁은 이제부터였다.
앞으로 지금보다 더욱더 위험해질 것이고, 더욱더 고립되겠지.
그러나…….
“예전만큼 외롭지는 않을 것 같군.”그의 곁에는 병연이라는 든든한 벗이 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특별한 벗이 있었다.
손끝에 남아 있는 보드라운 감촉.
잔향처럼 뇌리를 떠나지 않는 그 작은 얼굴.
붉은 노을로 물든 강물을 바라보며 영은 미소를 지었다. 단단한 결기로 반짝거리는 그의 눈동자에 다른 의미의 생기가 피어올랐다.
***
라온이 윤성을 찾아갔을 때 그는 예조의 서고에서 먼지와 나뒹굴고 있었다.
궁녀들이 속닥거리는 말을 모아보자면 윤성은 왕세자 이영의 동갑내기 외사촌이었다.
어린 시절 청으로 유학을 떠났던 그가 조선으로 돌아온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맑고 청수한 느낌의 헌헌장부(軒軒丈夫), 옥골선풍(玉骨仙風)의 바른 본보기라 할 수 있는 윤성은 호사가들의 입에 왕세자 영과 비교되며 오르내렸다.
영이 새파랗게 벼려진 날카로운 진검이라면 윤성은 갈대를 엮어 만든 무른 풀잎 칼이었다. 영이 차가운 북풍한설이라면 윤성은 감미로운 봄바람이다.
귀태가 흐르는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 웃음이 맺혀 있었다. 하여, 쏙닥질 좋아하는 궁녀들은 웃는 군자란 뜻으로 윤성을 ‘소군자(笑君子)’라 불렀다.
탁자 아래에 앉아 서책을 뒤적이던 윤성이 소군자란 별호에 걸맞게 온화한 미소로 라온을 맞이했다.
저 미소, 궁녀들이 보았다면 비명을 질러댔겠군.
“홍 내관, 그렇지 않아도 찾던 참이었습니다.”“도 내관님께서 급히 찾으신다 하시기에 왔습니다. 무슨 일로 찾으셨는지요?”어린 시절 청으로 유학을 떠났기에 윤성에 대한 모든 것들은 비밀에 휩싸여 있었다.
신비의 소군자, 김윤성. 명석하고 매사 신중하기가 세자저하와 비견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그게……아얏!”몸을 일으키던 윤성이 탁자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치고는 비명을 질렀다. 어이없이 이마를 찧는 윤성을 보며 라온은 먼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중하다는 말은 취소.
“괜찮사옵니까?”“아, 괜찮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디까지 말했더라?”윤성이 이마를 짚은 채 생각에 골몰했다.
그 모습을 보며 라온은 생각했다.
명석하다는 말도 취소해야 하나?
그때 윤성이 손바닥을 마주치며 소리쳤다.
“아, 맞다, 제가 홍 내관님을 급히 찾은 이유는 함께 저자로 나가기 위함이었습니다.”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윤성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라온의 두 눈이 커졌다.
“괜찮으시면 나와 함께 저자로 나가자고 하였습니다.”“궁에서 나가자는 말씀입니까?”“네.”마치 밥이나 한 끼 하러 궁 밖으로 나가죠, 하는 말투.
“송구하오나, 저는 궁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습니다.”탁자를 사이에 두고 윤성과 마주보고 서 있던 라온이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요?”“환관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궁을 나갈 수가…….”“필요한 수속이라면 이미 제가 다 허락을 받았습니다.”이쯤 되자 라온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와 저자거리에 나가고자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윤성이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실은 여인에게 뭔가를 선물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여인이 무얼 좋아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하여, 홍 내관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아! 소군자께 좋아하는 여인이 생긴 모양이구나. 그런데 하필이면 조언을 구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환관이라니.
“곤란합니다.”“뭐가 곤란하단 말씀이십니까?”“아시다시피 전…….”“환관이지요.”“네. 환관입니다. 환관에게 여인에게 선물할 물건을 골라달라니요.”윤성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홍 내관은 단순한 환관이 아니질 않습니까. 홍 내관은…….”당황한 라온이 급히 윤성의 입을 막았다.
“쉿. 그건 비밀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걱정 마십시오. 지금 여기엔 우리 둘만 있습니다.” 윤성은 ‘둘만 있다’는 말을 강조했다.
문득, 부끄러움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윤성과 지척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던 라온은 뒤로 물러섰다.
라온이 물러난 만큼 윤성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탁자에 손을 짚은 채 그는 라온을 향해 길게 몸을 기울였다.
“안 될까요?”“거듭 말씀드리지만, 곤란합니다. 그러다 혹 제 정체가 밝혀지기라도 하면…….”“정체가 밝혀질 리가 있겠습니까? 홍 내관께선 그저 저와 함께 저자거리로 나가 선물 고르는 것을 도와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라온은 고개를 크게 저었다.
“송구합니다.”거듭된 거부.
그럼에도 윤성은 쉬이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라온의 턱 밑으로 바싹 얼굴을 들이민 채 속삭이듯 말했다.
“예전에 말했던 소원 말입니다.”“네.”“지금 말해도 됩니까?”“무엇인지…….”“오늘 하루, 제가 원하는 대로 해주셔야겠습니다.”말인 즉, 두 말하지 말고 저자로 함께 나가 달라는 말이었다.
라온이 흠칫 놀랐다.
“세자저하께서 찾으실지도 모릅니다.”“그분께서 홍 내관을 곁에 두려는 이유는 사신단 때문이 아닙니까. 허나, 때마침 사신단은 뱃놀이를 떠나 오늘 밤에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저하께서 홍 내관을 찾으실 일은 없을 것입니다.”“또 하나, 제가 궁 밖으로 나가려면 통부가 있어야 합니다.”“이미 준비해 놨다니까요.”윤성이 소맷자락에서 뭔가를 꺼냈다. 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통부였다.
라온의 얼굴에 난처한 표정이 역력했다.
“대체 이렇게까지 하면서 저와 함께 가시려는 이유가 뭡니까?”윤성은 뒷머리를 긁으며 계면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게…… 조선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아는 여인이라고는 홍 내관 한 분뿐입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만큼은 홍 내관께서 수고를 좀 해주셔야겠습니다.”그의 순박한 미소에 라온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대신 이걸로 일전에 약조한 약속은 없어지는 겁니다.”쐐기 박듯 단호히 말하는 라온에게 윤성이 자신을 믿으란 듯 가슴을 두드려 보였다.
“걱정 마십시오. 이래봬도 사내대장부가 아닙니까. 하하하.”
***
반 시진 후.
라온과 윤성은 나란히 저자거리를 걷고 있었다.
거리를 걷는 라온은 사대부가 사내의 복색을 하고 있었다.
일전에 영과 병연, 두 사람과 함께 궁 밖으로 나갈 때 입었던 옷이다.
두 사람은 시전을 걸으며 여러 가지 물품들을 구경했다.
궁을 나오자고 할 때는 거듭 불편한 표정으로 거부하던 라온도 막상 저자에 나오자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사방이 꽉 막혀 있는 궁과 달리 시전은 사람들의 생기로 가득했다.
답답한 가슴이 시원해졌다. 또한, 시전을 걷는 동안 윤성과 나누는 대화는 즐겁고 편안했다.
그는 참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윤성이 청나라의 신기한 문물에 대해 설명할 때면 라온은 저도 모르게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곤 했다.
많은 볼거리와 윤성의 이야기로 반 시진이나 걸었음에도 라온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궁에 들어가기 전으로 돌아간 듯, 마음마저 편해졌다.
그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윤성이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모든 상황이 다 마음에 들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었다.
“잠시만 이리로 가시지요.”별안간 윤성이 라온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라온은 크게 당황하며 팔을 빼려 했다.
“가,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윤성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찌 이리 부끄러워하시는 겁니까?”“아시지 않습니까? 저는…….”“사람들의 눈에 비춰지는 홍 내관은 그저 곱상하게 생긴 사내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리 유별나게 행동한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일리 있는 말인지라.
라온은 결국 팔을 빼지 못한 채 윤성이 잡아끄는 대로 끌려가고 말았다.
라온의 팔을 잡은 윤성은 큰 길로 방향을 틀었다. 몇 개의 골목을 지나가자 제법 큰 규모의 포목점이 나왔다.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것입니까?”라온의 물음에 윤성은 대답대신 포목점 안주인과 눈인사를 건넸다.
“내가 말해 둔 것은 어찌 되었는가?”윤성의 물음에 라온을 힐끔 곁눈질하던 안주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안쪽에 준비해 놨습지요.”“그럼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게.”윤성의 눈짓을 받은 포목점 안주인이 점포 안으로 사라졌다.
“혹, 여인에게 선물하실 것이…….”두 사람을 지켜보던 라온의 물었다. 채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윤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옷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어울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라. 홍 내관이 한번 입어봐 주시겠습니까?”“네? 말도 안 됩니다.”라온이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여인으로 태어났으나 일평생을 사내로 살아온 라온이었다.
딱 한 번 치마를 입어본 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오래전의 일이었다.
철이 들고 난 이후론 치마는 몸에 대어 본 적도 없다.
그런데 갑자기 치마라니. 여인의 복색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선물할 옷을 한번 입어봐 달라는 것이 그리 정색할 일입니까?”되레 이상하다는 듯 윤성이 물었다.
“하지만 여인의 옷이지 않습니까?”“그래서 홍 내관께 부탁하는 것이 아닙니까. 여인의 옷을 제가 입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그래도…….”“잊으셨습니까? 오늘 하루, 제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하질 않으셨습니까?”윤성이 눈가를 가늘게 여미며 웃는 낯으로 다시 부탁을 해왔다.
“입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아까 보았던 여주인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홍 내관의 사정일랑은 미리 언질을 해 두었으니. 크게 신경 쓸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저 주는 대로 입고 나오면 됩니다.”마지못해 라온은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느릿느릿, 영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떼는 그녀를 향해 윤성이 웃음을 보였다.
그렇게 마지 못해 들어간 포목점 안에는 라온이 태어나 단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또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
포목점 안쪽에는 덧창문이 내려진 곁방이 하나 있었다. 라온은 잠시 머뭇거리다 그 안으로 들어섰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주인은 그녀가 들어오기 무섭게 문을 안쪽으로 걸어 잠갔다.
그리고는 척척 소맷자락까지 걷어 올리고는 라온에게로 다가왔다.
“왜, 왜 이러십니까?”놀라 뒷걸음질 치는 라온의 옷고름이 여주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순식간에 입고 있던 도포자락이 벗겨졌다.
쓰고 있던 흑립도 떨어져나갔다. 겉저고리와 속저고리가 허물을 벗듯 흘러내린 것 역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찰나지간에 반라의 상태가 되어버린 라온이 제 가슴께로 양손을 모았다. 마지막 보루인 양 라온은 가슴을 옥죄고 있는 억센 천을 힘껏 그러잡았다.
“옷만 입어보면 될 것인데, 굳이 이것까지 풀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라온의 말에 여주인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쇤네로 말할 것 같으면 지난 30년을 옷 짓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살아온 사람입지요. 그 오랜 경험을 미뤄볼 때 옷태의 가장 기본은 속옷입니다요. 지금 아가씨께서 하고 계시는 가슴가리개는 뭐랄까, 너무 투박한 것입죠.”여주인은 조금의 사정도 두지 않고 라온의 가슴가리개 매듭을 풀어냈다.
“앗! 이러지 마십시오.”“제 옷을 입기 위해서는 이 볼품없이 투박하기만 한 가슴가리개부터 다른 것으로 바꿔야 합니다. 쇤네 일평생을 살면서 이런 것은 듣도 보도 못했습지요.”여주인은 완강하게 버티는 라온은 가볍게 제압했다.
이내 비단으로 만들어진 부드러운 가슴가리개가 라온의 하얀 둔덕을 휘감았다.
덕분에 사내의 것처럼 납작하던 가슴에 보기 좋은 곡선이 그려졌다.
그제야 흡족한 표정을 지은 여주인이 바닥에 쌓아놓은 옷가지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속속곳, 바지속곳, 단속곳, 너른바지, 무지기치마까지 치마를 입기 전까지 입어야 할 속옷이 무에 이리 많은 것인지.
이거 무슨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도 아니고.
몸 위로 부드러운 비단천이 한 꺼풀씩 덧입혀질 때마다 라온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단단히 속차림을 끝낸 뒤에야 여주인은 붉은 바탕에 연분홍색 매화꽃이 수놓인 치마를 꺼내놓았다.
열두 폭의 치맛자락이 허공에 흔들릴 때마다 당장이라도 꽃잎이 우수수 떨어질 것처럼 아름다웠다.
“아!”라온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손에 꼭 쥐면 바스러져 버릴 듯 부드러운 비단으로 만들어진 치마가 라온의 몸에 덧입혀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붉은 치마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흰색 저고리를 입은 라온이 면경 앞에 앉았다.
“본디 옷이란 그에 맞는 치장이 뒤따라야 하는 법입지요.”포목점의 여주인이 정수리 위에 틀어 올린 라온의 상투를 풀었다.
어깨 위로 검은 융단이 흘러내렸다.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을 빗질하는 여주인의 손길에 따라 라온의 모습이 조금씩 변해갔다.
내내 사내의 복색과 사내의 표정, 그리고 사내의 행동에 갇혀 있던 라온의 본성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
윤성은 뒷짐을 진 채 포목점 안을 서성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안쪽에서 굳게 걸어 잠그고 있던 문이 드디어 열렸다.
그리고 잠시 후, 붉은 치맛자락과 함께 라온이 문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반색하며 고개를 돌리던 윤성이 문득 멍하니 굳어졌다.
그의 얼굴에 가득하던 웃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일순간에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린 듯 그는 텅 빈 표정으로 라온을 응시했다.
윤성의 눈동자에 맺힌 라온은 눈 위에 핀 한 그루의 겨울 매화였다.
단단하지만 한없이 여리고, 당장이라도 눈 속에 녹아버릴 듯 아스라했다.
너무도 아련하고 신비로워 도무지 생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참의 영감.”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윤성을 향해 라온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 미안합니다. 내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찬물이라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든 얼굴로 윤성이 말했다.
손을 들어 얼빠진 표정을 쓱쓱 지워낸 그가 예의 따뜻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어떻습니까?”라온의 물음에 윤성이 조금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름답습니다.”“제가 보기에도 참으로 아름다운 옷입니다.”“네. 옷도 아름답군요.”“이제 됐지요? 그럼 갈아입고 오겠습니다.”라온은 서둘러 옷을 벗으려 했다. 사실, 아까부터 조마조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사각거리는 비단의 부드러운 감촉, 분명 엄청나게 비싼 것이 틀림없었다. 행여, 이 귀한 옷에 무슨 흠집이라도 난다면…….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던 라온은 부르르 몸을 떨며 포목점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윤성이 그녀를 잡았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왜 그러십니까?”“생각이 바뀌었습니다.”“네?”“이 옷은 다른 사람에게 선물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왜요?”라온의 물음에 윤성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 홍 내관의 자태를 보니 다른 사람에게 줘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 옷은 그냥 홍 내관께서 입으셔야겠습니다.”“안 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 귀한 것을 어쩌자고 내게 주신다는 것일까?
황급히 고개를 가로젓는 라온을 향해 윤성이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원입니다.”“……!”아, 미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