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월하노인의 팔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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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1
볕살이 병연의 몸 위를 날아다녔다.
온몸에서 물방울을 흩뿌리며 서 있는 그의 모습은 용왕의 환신처럼 신비로웠다.
물기로 흥건한 검은 머리카락이 병연의 너른 어깨 위를 잔나비처럼 휘감았다.
그가 머리를 흔들 때마다 찰랑거리는 모양새가 바람에 흔들리는 진주주렴을 연상시켰다.
라온은 문 틈새에서 얼굴을 떼지 못했다.
아니, 머릿속에서는 보아서는 안 된다고 소리치고 있지만 넋이 나간 몸뚱이가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어물거리는 찰나.
병연이 돌연 몸을 돌렸다.
순간, 비스듬히 보이던 그의 벗은 몸이 온전히 앞모습마저 드러냈다. 바람을 머금은 짙은 물의 향기가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나무욕조에 가려진 사내의 아슬아슬한 모습에 라온은 숨이 턱밑에 딱 달라붙는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휙, 바람소리와 함께 검은 천 하나가 라온을 향해 날아들었다.
“헉!”라온의 입에서 마른 비명이 절로 새어나왔다.
이윽고 얼굴로 날아든 검은 천을 벗겨내기 위해 라온은 허둥거렸다.
“이게 뭐야?”부지식간에 날아들어 라온의 눈을 가려버린 것은 병연의 겉옷이었다. 라온은 반사적으로 욕조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병연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로 가셨지?
“김 형! 김……형.”그를 찾아 고개를 돌리니, 툭 뭔가가 라온의 코끝에 와 닿는다.
어느 틈엔가 병연이 라온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병연과 눈이 마주치자 라온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방금 전의 광경이 떠올라 두 볼이 붉어지고 말았다. 잔망한 생각을 감추려 라온은 황급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 위로 병연의 무심한 목소리가 툭 떨어졌다.
“예서 뭐하는 거냐?”“훔쳐보지 않았습니다.”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훔쳐보았느냐 묻지도 않았건만, 라온은 다짜고짜 머리채부터 흔들어댔다.
문득 병연의 무심한 시선이 힐긋 찡그려졌다.
잠시 눈치를 살피던 라온이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실…… 조금 본 것도 같습니다.”“…….”“실은 보긴 봤습니다. 하지만 많이 보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솜털만 조금…… 아니, 정확히는 물 묻은 머리카락만…….”횡설수설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이실직고하던 라온이 불현듯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뭐, 딱히 본 것은 없지만. 설사 본들 어떻습니까. 같은 사내끼린데. 안 그렇습니까? 하하하.”라온은 너스레를 떨며 애써 뻔뻔한 웃음을 흘렸다.
이내 병연에게서 특유의 무심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같은 사내는 아니지.”병연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몸에 묻은 물기를 툭툭 손끝으로 털어내며 말했다.
“같은 사내가 아니라니요?”은근한 두려움을 담은 채 라온이 물었다.
뭘 눈치챈 건 아니겠지?
힐끗, 라온을 돌아보던 병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엄밀히 말해 환관을 사내라 칭할 수는 없지.”“아, 그런 뜻이었습니까?”한 시름 놓았다는 듯 라온이 중얼거렸다. 병연이 새삼스럽다는 눈길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런 뜻이 아니면 무슨 뜻인 줄 알았는데?”“다른 뜻이 무어가 있겠습니까? 그런 뜻인 줄 짐작하고 있었지요. 하하하.”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한 라온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서둘러 처소로 들어섰다.
문득, 주위를 둘러본 라온이 병연에게 물었다.
“김 형. 어젯밤에 처소에 안 들어오셨던 것입니까?”처소의 싸늘한 공기 속엔 사람의 온기라곤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병연은 물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는 너는 어디서 자고 온 거야?”“저야 뭐…… 연회 준비로 한동안 바쁠 거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연회 준비로 정신없이 바빴던 녀석치고는 안색이 터무니없이 좋군.”“하하하. 그렇지요?”라온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사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답니다. 왕세자 저하를 침수에서 밀어내고 단잠을 잤으니 그럴 수밖에요.
아, 그러고 보니 나 그것 때문에 긴장하던 중이었지? 이 무딘 신경이라니.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화초저하의 잠자리를 빼앗을 수가 있단 말인가.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 게냐?”“아, 아닙니다. 그보다 김 형께선 웬 목욕이십니까?”라온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목욕할 때도 무슨 특별한 이유가 필요한 거냐?”“보통은 그렇지 않지요. 하지만 오늘처럼 그리 정성을 들여 씻는 경우는 좀처럼 드문 경우가 아닙니까. 보통 뭔가 특별한 일을 앞두고 있거나, 혹은 뭔가 특별한 일을 끝마쳤을 때가 아니면…….”병연이 팔짱을 끼며 라온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정성들여 씻은 것은 어찌 알았느냐?”“네?”“안 봤다며?”“그, 그렇지요. 저는 아무것도 안 보았지요.”“…….”“그런데 정말 말씀 안 해 주실 겁니까? 이 추운 날에 느닷없이 목욕재계하신 이유 말입니다. 혹여…… 누구 잘 보일 여인이라도 생긴 것입니까?”진짜 묻고 싶은 말이 이것이었다. 아침부터 목욕재개라. 마음에 든 여인이라도 생긴 것일까?
“…….”“어? 뭡니까? 그 표정은? 정말 잘 보이고 싶은 분이라도 생긴 것입니까?”라온이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거렸다.
그 새까만 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병연이 딱, 라온의 이마에 알밤을 먹였다.
“아얏!”“바보 같은 소린 그만두고…….”“치이, 괜히 할 말 없으시니까.”잔뜩 입술을 내민 채로 라온은 투덜댔다.
“성가신 녀석. 종알종알 말도 많구나.”“성가셔서 매번 죄송합니다.”“이렇게 허술한 너를 믿고 이런 부탁을 해도 될지 모르겠다.”“부탁이요?”일순, 라온의 눈이 반짝거렸다.
“김 형이 제게 부탁할 일이 있단 말입니까? 무슨 부탁이요? 하십시오. 무슨 부탁이든 해 보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그렇지 않아도 병연에게 빚진 것이 많았던 터라. 뭐든 갚아주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그의 입에서 ‘부탁’이라는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들어주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라온은 병연의 턱밑으로 바싹 달라붙었다.
그런 라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병연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서찰이 들어 있는 하얀 봉투였다.
“웬 서찰입니까?”봉투를 받아들고 잠시 생각을 굴리던 라온이 문득 배시시 입가에 미소를 물었다.
“혹시…… 잘 보이고 싶은 그 여인에게 보내는 서찰입니까? 저더러 대신 전해주라는 말씀이십니까?”김 형께선 모르시겠지만, 그런 거라면 제가 전문가랍니다.
“자꾸 헛소리하지?”“아닙……니까?”“그 서찰. 네가 잠시 맡아줘야겠다.”“제가 가지고 있으라고요?”느닷없는 말에 라온은 눈을 깜박거렸다.
“그 말은 제게 주는 서찰이라는 말씀이십니까?”아! 그런 것이었군요. 할 말이 있으시면 말로 하시지, 굳이 서찰까지 쓰시다니.
우리 김 형, 겉보기엔 조금 거친 듯 보이지만 은근 수줍음이 많은 분이시라니까.
그런데 이 안에 뭐가 있을까? 설마, 앞으로 자선당에서 지켜야 할 수칙 같은 게 들어 있는 건 아니겠지?
라온은 해사하게 웃으며 서찰을 열려고 했다.
그때, 병연이 그녀의 이마를 다시 콩! 하고 아프지 않게 때렸다.
“또 왜 때리십니까?”“누가 열어보라고 했냐?”“제게 주는 것이라면서요?”“맡기는 거라고 했지, 네 것이라고 하지는 않았다.”라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제 것이 아니라고요? 그런데 왜 제게 주시는 겁니까?”“잘 간직하고 있다가 훗날 내가 아무런 기별도 없이 자선당을 사흘 이상 비우면…… 그때 열어봐라.”“김 형.”라온은 병연을 불안한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아무 일도 없다.”“그런데 왜 이런 걸 제게 맡기는 겁니까?”“그러니까 만약이라고 하질 않아? 만에 하나, 천에 하나, 무슨 일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서 준 것뿐이야. 특별한 의미 없어. 그러니 마음 쓰지 마라.”“마음이 쓰입니다.”“정히 마음이 쓰인다면…… 이리 내놔.”“그건 싫습니다.”“왜?”“김 형께서 처음으로 제게 부탁한 것이 아닙니까.”“그럼 인상 펴든가.”“…….”“홍라온.”“걱정이 돼서 그럽니다.”“걱정 같은 건 할 필요 없다니까.”“김 형.”“오늘 따라 성가시게 왜 자꾸 부르는 거야?”“저는 김 형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김 형. 김 형이 제 곁에 오래오래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김 형 곁에 할 수 있는 한 오래도록 머물 것이니. 김 형도 제 곁을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김 형. 어디 아프지 마십시오. 행여 어디 다치지도 마십시오.”만약 위해 준비한 서찰이라니.
병연이 아무것도 아니라 안심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라온은 불길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혹여, 김 형께서 불치의 병이라도 앓고 있다면 어쩌지? 이미 라온에게 그는 친오라비와 같은 사람이었다.
“……성가신 녀석.”물끄러미 라온을 응시하던 병연은 불퉁한 한 마디를 내뱉으며 휙 몸을 돌렸다.
라온에게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를 피해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대들보 위를 향해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러다 문득 멈춰 섰다.
잠시 망설이던 병연이 제 품속에 다시 손을 집어넣었다.
이윽고 그의 손끝에 뭔가가 딸려 나왔다. 붉게 염색한 색실을 꼬아 만든 팔찌였다.
매듭 끝에 눈물 모양의 붉은 보석이 달린 팔찌는 여인의 것이었다. 그 자그마한 팔찌의 감촉이 병연의 손아귀로 들어왔다.
손바닥 위를 도르르 구르는 붉은 보석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병연은 생각에 잠겼다.
***
밤과 새벽이 교차하는 어스름한 시각.
병연이 등롱이 환하게 내걸린 저택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곳이 확실하냐?”그의 물음에 수하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불량한 향도계의 무리가 이곳을 수시로 들락거리고 있습니다. 몇 녀석을 잡아 문초해 본 결과 이곳이 근거지라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을 이끄는 우두머리 중 하나가 지금 이곳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수하의 고하는 소리에 병연의 눈빛이 깊어졌다.
“어떤 자냐?”“사목이라는 자이옵니다.”사목(蛇目). 뱀처럼 차갑고 잔악한 자였다.
“확실한 것이냐?”“틀림없습니다.”병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우리는 대역무도한 자들에게 별주를 권한다.”그의 등 뒤에 시립해 있던 오십 명의 복면 사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대답하는 목소리는 없지만,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오랜 기간 훈련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짐작케 했다.
“여기…… 이것을.”수하가 병연에게 복면을 건넸다.
“필요 없다.”병연은 복면을 받는 대신 등에 메고 있던 삿갓을 썼다.
“그 삿갓, 요즘 들어 자주 쓰시는 것 같습니다. 특별한 연유라도 있는 물건입니까?”수하의 물음에 병연은 머리에 쓰려던 삿갓을 내려다보았다.
특별한 연유라? 딱히 그런 것은 없다. 다만, 라온이 처음으로 선물한 것이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선물이다.
병연은 대답 대신 삿갓을 깊숙이 눌러썼다.
어디선가에서 몰려온 먹구름이 달을 가렸다.
그 순간, 병연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담을 넘는 모습이 하늘을 나는 새처럼 가볍기 그지없었다.
그 뒤를 따라 복면을 쓴 수하들도 담을 넘어갔다.
잠시 뒤, 저택 이곳저곳에서 다급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누, 누구냐?”“흐악!”첫 번째 비명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칼 찬 사내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평범한 사대부 집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발 빠른 대응.
그것은 이들이 곧 이런 일을 대비하여 충분한 훈련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곧 그들과 복면인들 사이에서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수는 저택에서 나온 사내들이 우세했지만, 실력은 복면인들이 월등했다.
두 무리가 복잡하게 얽히며 치열한 싸움이 이어졌다.
너른 마당에서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고 있을 때, 병연은 저택의 심처를 걷고 있었다.
삐걱. 삐걱.
그가 걸을 때마다 발아래의 마루가 신음을 흘렸다.
소리 없이 걷는 법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연은 부러 발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주의를 끌기 위함이다.
또한, 그가 찾고 있는 자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발소리를 듣고 반응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웬 놈이냐?”드르륵 문이 열리며 칼을 찬 일단의 사내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서슬 퍼런 협박에도 병연은 무심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사목을 만나러 왔다”그 나지막한 한 마디에 사내들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중 하나가 슬그머니 뒤로 빠져나갔다. 병연은 그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사목?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이곳에 그런 사람은 없다. 그러니 돌아가라.”서툰 거짓말을 하는 사내를 향해 병연은 차가운 어조로 경고하듯 말했다.
“내가 볼일이 있는 사람은 오직 사목 하나뿐이다. 헛되이 죽고 싶지 않다면 당장 물러서라.”“이런 미친 자식이! 감히 누굴 협박하는 거냐? 얘들아. 쳐라!”무리의 맨 앞에 서 있던 사내가 외치자마자 복도를 가득 메운 자들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병연이 검 자루에 손을 올렸다.
“죽게 될 것이다.”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내들은 고함을 지르며 칼을 휘둘렀다. 자신들의 수가 많음을 믿은 것이다.
병연이 숨을 짧게 들이마시며 검을 뽑아들었다.
뽑혀 나온 검신을 타고 한 줄기 차가운 한기가 흘러 내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스윽! 스윽! 츳!
붓을 휘두르듯 종횡으로 거침없이 검을 그었다.
일필휘지(一筆揮之).
허공에 글을 쓰듯 막힘없이 휘둘러지던 검이 별빛 같은 잔영을 흩뿌리며 어느덧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검을 수습한 병연이 다시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병연이 안채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음에도 그에게 달려들었던 사내들은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무기를 휘두르는 험악한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니,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었다. 험악하게 일그러졌던 그들의 얼굴.
그 표정이 지금은 공포와 충격으로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무슨 검이…… 이렇게 빨라?”누군가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한사람씩 바닥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신기루 같은 병연의 검에 그들은 본인들이 죽었다는 자각을 하기도 전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앞을 가로막는 성가신 장애물들을 단숨에 제거한 병연이 안채에 다다랐을 무렵.
벌컥!
중문이 열리며 흉악하게 생긴 중년의 사내 하나가 옆구리에 작은 함을 든 채 허겁지겁 밖으로 달려 나오고 있었다.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했기에 여기까지 그런 놈들이 쳐들어오게…… 허억!”수하들의 일처리를 타박하며 바쁘게 뛰어나오던 그가 뒤늦게 병연을 발견하고 굳었다.
병연이 삿갓을 슬쩍 들어올렸다.
흉악하게 생긴 사내는 한쪽 눈이 없는 애꾸였다.
“왼쪽 눈썹에서 코 위를 지나가는 검상과 애꾸눈. 틀림이 없군.”한 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흉터를 가진 사내.
그가 바로 병연이 찾던 사목이었다.
“너…… 넌!”병연을 본 사목이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두려움을 너머선 공포였다.
병연이 무심한 어조로 사목의 죄목을 읊었다.
“사목. 불순한 무리와 작당하여 선량한 자들을 약탈하고 힘없고 죄 없는 여인들을 겁간하였으며, 수차례에 걸쳐 살인을 자행하였다. 또한, 수차례에 걸쳐 관리들에게 뇌물을 썼다. 틀린가?”사목이 저승사자를 만난 것처럼 몸을 떨며 애원하듯 말했다.
“사, 살려주시오. 내, 내 전 재산이오. 이걸 모두 드리겠소.”“인정한 걸로 알겠다.”병연의 검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람을 갈랐다.
사목의 가슴이 갈라지며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가 병연에게 주려던 상자가 조가비처럼 입을 벌리며 엽전꾸러미와 은덩이가 쏟아져 나왔다.
병연이 검을 수습하며 중얼거렸다.
“그 돈으로 염라대왕이라도 매수하는 게 좋을 것이다.”
***
싸움을 끝낸 병연은 삿갓을 쓴 채로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시전 거리를 걸었다.
시린 아침햇살에 그는 눈을 가늘게 여몄다.
피비린내 물씬한 싸움이 끝난 지도 벌써 몇 시진이 흘렀건만. 그를 휘감고 있는 죽음의 냄새는 좀처럼 가셔지지 않았다.
비릿한 혈향을 지워내기 위해 병연은 부러 사람들 사이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몸으로 차마 자선당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이 그를 에워싸고 있는 불길한 냄새를 조금씩 씻어주는 듯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둔 하늘을 부유하는 잔별처럼 정처 없이 걷던 그의 걸음이 문득 멈춰 섰다. 여인의 장신구를 파는 점포 앞이었다.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가게 앞을 지키던 여주인이 단숨에 쪼르르 달려 나왔다.
“아이고, 어서 오시어요. 뭘 찾으십니까?”“…….”시전에서 닳고 닳은 여주인의 눈이 삿갓 아래에 감춰져 있는 병연의 시선을 좇았다.
아하! 연인에게 줄 선물을 고르고 있는 것이로구나.
이윽고, 여주인은 쭉 늘어져 있는 장신구 중에서 가장 가장자리를 채우고 있던 붉은 팔찌를 척 집어 들었다.
“이것으로 말씀드리자면 월하노인의 팔찌입지요.”“월하노인의 팔찌?”“운명의 상대를 점지하는 월하노인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겠지요? 그 노인이 운명의 상대를 점지할 때 이 붉은색의 실을 쓴다질 뭡니까요. 이 붉은 실로 서로 묶인 운명은 그 어떤 것으로 감히 자를 수가 없다고 합니다요.”“…….”“이 월하노인의 붉은 팔찌를 선물 받은 여인은 이 팔찌를 건넨 사내와 운명으로 묶여 절대 갈라지지 않으니.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귀한 팔찌입니다요.”“말도 안 되는 소리.”“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한번 묶어보시라니까요. 세상에 없을 월하노인의 팔찌, 단 돈 두 냥이면 살 수가 있습니다요.”“…….”순간, 삿갓 아래로 드러나는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찔끔한 여주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경망스럽게 흔들던 팔찌를 얼른 제자리로 내려놓았다.
잠시 그 모습을 보던 병연은 무심한 얼굴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점포 저 멀리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여주인은 괜스레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 그 양반. 안 살 거면 말 것이지, 눈씨는 왜 세우고 난리람. 에구구, 나도 이제 한물갔구나. 척 보면 이런 물건 살 사람인지, 아닌지 알 것이지. 첫 눈에도 봐도 이런 물건하고는 담벼락 쌓은 사내한테 뭘 팔아보겠다고 그리 입방정을 떨어댄 것인지…….”종알종알 쉼 없이 종알대던 여주인의 말문이 갑자기 딱 막혔다.
턱 밑으로 불쑥 다가온 쇠붙이를 보며 여주인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기 두 냥.”어느새 되돌아온 병연이 여주인에게 엽전 두 냥을 내밀며 말을 덧붙였다.
“그 팔찌, 주시오.”“네? 네.”놀라 눈만 껌뻑대던 여주인이 서둘러 팔찌를 건넸다.
“잘 사셨습니다. 틀림없이 월하노인의 점지대로 좋은 여인과 운명적인 만남을 하실 수가…….”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병연은 여주인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거참. 귀신한테 홀린 것도 아니고. 사람이 어째 저리 빠르대? 아니야, 저게 어디 사람이야? 귀신이지.”
***
“월하노인의 붉은 팔찌라…….”낮게 혼잣말을 하는 병연의 곁으로 라온이 다가왔다.
“김 형, 그게 무엇입니까?”쓱, 라온에게 등을 보인 채로 병연이 고개를 흔들었다.
“뭔데 그러십니까?”라온이 뒤꿈치를 세운 채로 병연에 손에 들린 것을 기웃댔다.
고개를 돌려 라온을 돌아보던 병연은 손안에 들린 팔찌를 오래도록 만지작거렸다.
운명의 상대를 옭아매는 붉은 팔찌.
장사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이 팔찌를 보는 순간, 이 녀석이 생각났다. 이 녀석의 가는 팔목에 걸어두면 참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도 했다.
혹여…… 만에 하나, 천에 하나…… 보이지 않는 운명의 실이라는 것이 정말 있고, 그 실에 매여 이 녀석이 내 곁에 머물 수만 있다면…….
“어리석은 생각.”풀썩, 병연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사라진다.
아주 잠시 잠깐 라온의 온기에 욕심이 났었는가 보다. 저 말간 웃음에 현혹되어 어리석은 생각을 한 것이 틀림없다.
“김 형. 그게 뭡니까? 보여 주십시오.”병연이 생각에 빠져 있는 와중에도 어린 새처럼 두 팔을 파닥거리며 라온은 호기심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를 향해 잠시간 몸을 돌리고 있던 병연은 완전히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그리고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다.”끝내 전하지 못한 월하노인의 팔찌는 다시 그의 품속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