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꽃들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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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8
잠에서 깨어난 라온은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안개 속에 서 있는 듯 머릿속이 몽혼했다.
여긴 어디지?
왠지 낯선 느낌에 흐릿한 시선을 천천히 움직였다.
고운 자수가 수놓인 휘장, 묵직한 무게감을 지닌 책장 위로 샛노란 아침빛이 아른거린다.
노랑나비처럼 팔랑거리는 빛살은 책장을 지나 섬세한 조각이 새겨진 화류목 탁자에 맺혔다.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탁자의 장식을 보며 라온은 작게 입을 벌렸다.
“아…….”어여쁘다.
그렇게 열없이 벌어진 입에서 또다시 열없는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아아…….”그런데 나 뭐하는 거지? 아니, 나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순간.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안개가 거짓말처럼 말끔히 개었다.
쨍한 여름아침처럼 선명해진 의식으로 지금의 상황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사신단의 방문. 하루 종일 세자저하의 뒤를 지키고 서 있었던 일.
그리고……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세자 저하의 벗은 뒷모습.
일순, 두 뺨이 불에 덴 듯 화르륵 달아올랐다.
기억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지난 밤, 세자저하는 함께 자자고 청하였다.
감히, 그럴 수 없어 명을 거역했다. 대신 그의 발치에서 그의 잠자리를 지키기로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저기, 빛살이 너울대는 덧창문 아래에 앉아있었건만. 어째서 지금은 여기에 있는 것일까?
게다가 지금 덮고 있는 이 호사스러운 이불은……!
“미쳤나봐!”라온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새어나왔다.
너무 큰 소리에 서둘러 제 입을 틀어막은 라온은 튕기듯 발딱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의 주인인 영은 어디로 갔는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고, 붙박이처럼 처소를 지키던 환관들과 궁녀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 텅 빈 방안에서 라온은 ‘자고’ 있었다. 그것도 감히 세자저하의 침소에서.
“하아…….”내가 왜 그랬을까?
라온은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틈에 잠이 든 것일까?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마치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린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저 뭔가 상당히 포근하고 아늑한 것을 끌어안고 오랜만에 푹 잤다는 것밖에는.
문제는 잠을 자도…… 너무 푹 잤다는 것이다.
설마…… 내가 잠결에 이부자리로 파고든 건 아니겠지? 그런 것이 아니라면 내가 여긴 어떻게 누워있는 거야?
내가 여기서 잤다면, 그럼 화초저하께선 어디서 주무셨다는 걸까?
아니, 그보다 혹시 내가 여인이라는 걸 잠결에 발설하거나 하진 않았을까?
“아, 정말 미치겠네.”잠결에 무얼 어찌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은 라온은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렸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쿵.
일순,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놀란 라온은 서둘러 자세를 바로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저하, 어젯밤에…….”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입속말을 우물거릴 때였다.
“홍 내관.”목덜미를 짓누르는 무거운 목소리에 라온은 고개를 들었다. 방에 들어온 것은 영이 아니라 최 내관이었다.
밤새 무슨 심한 고초를 겪었는지 늙은 환관의 얼굴은 10년은 더 늙어보였다.
눈 밑의 그늘이 유난히 검어진 최 내관을 보며 라온은 흠칫 뒤로 물러나 앉았다.
“최 내관님, 무슨 일 있으셨사옵니까?”“홍 내관.”“네, 최 내관님.”“어쩌자고 그리했는가?”“네?”“간밤에…… 어쩌자고…….”차마 말을 잇지 못한 최 내관이 휙 외로 고개를 틀었다.
라온은 식은땀을 흘리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소, 송구하옵니다. 어쩌다보니 일이 이렇게 되었사옵니다.”안 자려고 했는데 자고 말았습니다.
최 내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홍 내관, 자네…… 어쩌자고…… 어쩌자고…….”말끝을 흐리던 최 내관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홍 내관으로 인해 저하의 성심이 평온해졌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감사할 일이네.’전 판내시부사 박두용의 목소리가 귓전을 웽웽 울렸다.
최 내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닐세. 그보다 오늘은 피곤하겠군.”“네?”피곤하다고요? 너무 푹 자서 개운하다 못해 하늘로 승천할 지경입니다만.
“그만 처소로 돌아가 쉬게나. 자네의 거취에 대한 것은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니.” “하지만…….”갑자기 처소로 돌아가 쉬라니. 왠지 불안하다.
설마, 세자저하의 자리에서 잤다고 궁에서 내쫓으시겠다는 말씀은 아니시지요?
동그래진 눈으로 쳐다보는 라온을 잠시 바라보던 최 내관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세자저하와 하룻밤을 보냈으니, 여인이라면 그에 합당한 처신을 할 것이나 상대는 사내…… 아니, 환관이었다.
이 일이 알려진다면 세간 사람들의 뭇매를 피할 수 없을 것이나, 그렇다고 이대로 방치할 수도 없는 일.
혼자서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인지라. 아직 궁 안 어딘가에 있을 박두용을 찾아가 뒷일을 의논할 결심을 하며 최 내관은 말을 이었다.
“오늘은 저녁까지 특별한 일이 없네. 그러니 처소로 돌아가 쉬었다 저녁 무렵에나 동궁전으로 오게.”“네.” 라온은 불안한 표정으로 성정각을 나섰다.
어떻게 해. 최 내관님의 심각한 표정을 보니…… 나 정말 세자저하께 무슨 짓이라도 한 건가봐.
***
청명한 가을바람이 발치를 쓸었다. 바람에 휩쓸려 또르륵 구르는 낙엽을 쫓아 걸음을 옮겼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고는 있지만, 정작 라온의 정신은 딴 곳에 팔려 있었다.
대체 어쩌자고 곯아떨어진 걸까? 그것도 대담하게 세자저하의 침소에서 자다니.
간밤에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모르겠다. 설마, 정말로 세자저하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건 아니겠지?
화초저하가 말도 없이 사라진 것이 마음에 걸렸다. 최 내관의 우울한 표정은 더더욱 가슴을 무겁게 만들었다.
이제 나 어떻게 되는 거야? 정말로 큰 일 난 것은 아니겠지?
아무리 벗이라 하지만, 엄연히 화초저하와 자신은 세자와 환관이라는 엄청난 신분차가 있다.
하잘것없는 환관 따위가 감히 세자저하의 잠자리를 차지했으니, 제아무리 벗을 아끼는 화초저하라 해도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저런 걱정을 하며 라온이 멍한 얼굴로 걷고 있을 때였다.
한 무리의 환관들이 우르르 라온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걸음을 재개 놀리는 것으로 보아 바쁜 용무가 있는 모양이다.
잠시 멈춰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라온은 다시 타박타박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다시 또 한 무리의 궁녀들이 종종 걸음으로 그녀의 곁을 지나간다.
“응? 무슨 일이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니 삼삼오오 열을 맞춘 환관들과 궁녀들이 후원 쪽으로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궁금해 하는 찰나였다.
“이보게, 홍 내관.”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도기의 모습이 보였다.
“아, 도 내관님.”“자네도 그곳으로 가는 길인가?”“그곳이라고요?”“그래. 그곳 말일세.”“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옵니까?”라온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도기가 쯧쯧 혀를 찼다.
“이런이런, 홍 내관. 설마 자네 소문 못 들은 겐가?”“소문이요? 무슨 소문 말씀이요?”라온의 물음에 도기가 주위를 쓱 둘러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쟁이 났다네.”느닷없는 도기의 한 마디에 라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전쟁이요?”전쟁이라면 나라의 근간이 흔들릴 대사건이 아닌가? 그런데 전쟁이 났다고 말하는 도기의 표정이 어째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자, 어서 가세나. 전쟁 구경하러.”“전쟁이 났다면 도망가는 게 정석 아니옵니까? 아니면 나라를 위해 의롭게 분기한다거나.”“그런 전쟁이 아니라네. 이번에 난 전쟁은…… 뭐랄까. 그래, 꽃들의 전쟁이라네.”“꽃들의 전쟁이라고요?”대체 이 양반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전쟁은 전쟁인데, 꽃들의 전쟁이라니.
설마, 수국과 금잔화가 꽃잎과 이파리를 날리며 싸움을 하고 있다는 소리는 아니겠지요?
“어이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 자자, 어서 그만 가세.”“일단 무슨 일인지 알아야 갈게 아니옵니까?”“알 필요 없네. 그곳에 가면 다 알게 될 테니 말일세.”도기는 통통한 몸을 뒤뚱거리며 급히 걸음을 옮겼다. 궁금증에 라온 역시 그 뒤를 종종 걸음으로 뒤따랐다.
***
도기를 쫓아 향한 곳은 후원의 영화당이었다.
영화당 근처로 가자 두 진영으로 갈라서 있는 두 무리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당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은 명온 공주였고, 왼편엔 청나라 사신의 일행으로 동행한 소양 공주였다.
서너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공주 사이에 팽팽한 기운이 흘렀다.
사나운 기세는 양쪽으로 갈라서 있는 무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오오, 벌써 시작되었나보군.”도기가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두 분 공주마마께서 저리도 사나운 표정을 하고 계신 것이옵니까?”“아까 말하지 않았는가? 전쟁 중이라고.” “설마 전쟁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라온의 물음에 도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저 두 분의 전쟁을 말하는 것일세.”그제야 라온은 왜 도기가 꽃들의 전쟁이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명온 공주와 소양 공주, 두 공주의 미모는 꽃에 비견해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대단했던 터였다.
“그런데 대체 어쩌다 저리 되었습니까?”한쪽의 조선의 공주고, 다른 한 쪽은 청나라의 공주다.
두 나라의 관계와 이번 사신행의 목적을 생각하면, 자매처럼 사이좋게 지낸다고 하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양국의 이해관계를 생각하면 억지로라도 화목한 모습을 보여야 옳았다.
그런데 어쩌자고 저리 쌍심지를 세우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그게 말일세…….”도기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문제는 호사가들의 잔망스러운 입방아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조선 최고의 미인으로 손꼽히는 명온 공주와 청나라 오대 미녀 중의 하나였던 소양 공주의 만남은 호사가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두 사람 중 누구의 미모가 더 뛰어날 것인가를 두고 내기판도 벌어졌다.
말이 소문이 되고, 허풍이 사실처럼 떠돌게 되면서 두 사람 사이엔 은근한 경쟁구도가 갖춰졌다.
처음 두 공주는 크게 괘념치 않았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고 막상 소문을 접하게 된 뒤로는 조금씩 서로를 의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싸움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은 간밤에 있었던 우연한 마주침이었다.
의도적으로 영에게 접근했던 소양 공주는 그의 냉정한 태도에 잔뜩 부아가 치밀어 후원을 거닐던 중이었다.
때마침 명온 공주도 후원을 산보 중이었다. 라온에 대한 어수선한 생각으로 명온 공주의 심기 역시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만나는 그 순간부터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두 여인은 의식적으로 각자의 차림을 훑었다. 이윽고 둘 모두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명온의 곁으로 성큼 다가온 소양이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명온 공주시로군요.”“소양 공주께서 이리 늦은 시각에 후원에는 어인 일이시옵니까?”“창덕궁의 후원이 그리 아름답다 칭찬이 자자하여 산보를 하던 참입니다.”“아, 그러하옵니까?”명온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표정이 떠올랐다.
창덕궁 후원의 가을밤은 그 운치와 아름다움이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자긍심 가득한 눈으로 주위의 경관을 에둘러 보던 명온이 겸양을 떨며 말했다.
“소양 공주의 눈에 어찌 보였을까 궁금합니다. 혹여 미흡하다 보신 것은 아닌지 걱정 아닌 걱정도 되옵니다.”그 모습에 소양 공주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어찌 말씀을 올려야 할까요?”“그게 무슨 말인지요?”“객의 자격으로 입에 발린 말을 하자니, 말을 하는 내 얼굴이 화끈거리고. 그렇다고 마음속의 말을 곧이곧대로 하자니, 듣는 주인의 얼굴이 화끈하실 것인데.”일순, 명온 공주의 눈썹이 휘어졌다.
소양 공주의 말인 즉, 후원의 풍광이 그리 탐탁지 않다는 말이렷다?
그러나 애써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명온이 다시 말했다.
“호호호, 그 어인 말씀입니까. 말씀해 보시어요. 그리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무언가 미흡한 것이 있는가 보옵니다.”“딱히 뭐라 한 가지를 꼬집을 만한 것은 없습니다.”“호호호, 한 가지가 아니라는 말씀으로 들리는군요.”“어머나, 감춘다고 감춘 것인데. 호호호, 사실 제가 무언가를 감추고 에둘러 말하는 것이 서툴답니다. 매사에 너무 솔직한 것이 제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아바마마께서 곧잘 말씀하셨지요. 호호호.”“소양 공주의 솔직한 고견, 두 귀를 활짝 열고 들어보겠나이다.”“그리 말씀하시니, 허심탄회하게 말하지요. 이런 말씀드리면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조선이라는 나라는 보면 볼수록 참으로 신기합니다.”“무엇이 그리 신기합니까?”“보이는 사물이며 풍경, 하물며 여인들마저도 어찌 그리 소박한 것인지. 호호호, 청국에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없는 없는 수수한 광경인지라. 보는 제가 다 당황스럽지 뭡니까.”“…….”명온의 눈썹이 꿈틀 했다.
이것 봐라. 지금 대놓고 무시하는 거 맞지?
사물과 풍경에 대한 언급은 핑계에 불과했다.
핵심적인 단어는 ‘소박한 여인들’인데. 다시 말하자면 명온 자신을 소박하고 수수하다고 평을 내린 것이다.
잠시 당황하던 명온이 이내 도도한 표정을 되찾으며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조선은 원래 여백의 미를 중시하는 나라이지요. 과유불급이라는 말도 있지 않사옵니까? 너무 과하지 않는 치장과 너무 과하지 않는 이 나라의 정취가 소양 공주의 눈에는 그리 소박하게 보였나 봅니다. 하긴, 요란하게 치장하는 것을 좋아하는 청국 사람의 눈에는 그리 보일 수도 있겠지요.”“요란한 치장이라 하셨습니까?”소양의 이마에서 빠직, 힘줄 돋는 소리가 들려왔다.
명온이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이런, 제가 말실수를 했군요. 요란이라는 단어는 취소입니다.”“당연히 그래야…….”“그러나 뭐든 과한 것은 오히려 부족한 것보다 못한 법입니다. 알록달록 과한 치장과 장식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 마련이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천한 기생들이나 그런 치장을 즐긴답니다. 확실히 요란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겠군요. 차라리…… 천박이라면 모를까. 아! 물론 소양공주께서 그러하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나라간의 성향이랄까, 풍습에 관한 이야기일 뿐입니다.”슬쩍 슬쩍 찔러대는 명온의 말에 소양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화려한 치장과 장식은 우리 청국에서는 부와 명예의 상징입니다. 흥, 이처럼 작은 소국에서는 그리 장식하고 싶어도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랍니다. 처소에 쌓이고 널린 것이 그런 장신구이지요. 하지만 저만해도 그러한 겉치레에 관심이 없답니다. 왜? 그런 장식을 안 해도 충분히 아름다우니까요. 굳이 그런 장식을 해야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스스로의 미모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야 그런 화려한 노리개로 자신을 무장해야 하겠지만 내겐 필요가 없습니다.”“지금 내가 내 미모에 자신이 없어 이리 장신구를 하였다는 말이외까?”급기야 소양이 버럭 화를 터트렸다.
“아, 저는 그리 꼭 꼬집어 말하지 않았습니다.”“지금 공주의 미모가 나보다 뛰어나다 말하지 않았습니까?”“그리 들렸으면 섭섭하군요. 하지만 이리 화를 내시는 걸 보니 과히 틀린 말도 아니었던 모양입니다.”“미모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하신 모양이로군요.”“아직 누구에게 밀린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지요.”두 여인이 서로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소리 없는 눈싸움을 주고받던 두 공주가 동시에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리고 뒤따르는 궁녀에게 물었다.
“너 보기에 누가 더 아름다워 보이느냐?”“말해봐라. 누가 더 고와 보이느냐?”“그……그것이…….”그 노골적이 물음에 그 누구도 제대로 된 답을 내어놓지 못했다.
***
“뭐, 그리해서 오늘 두 번째 격전을 치르게 된 것이지요.”도기의 말에 라온은 두 공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주보고 있는 두 여인은 누가 더 아름답다고 꼽을 수 없을 정도로 각기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저리 노려본다고 해서 결론이 나겠습니까?”라온의 물음에 도기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전쟁의 승자를 가려줄 심판관을 청했다 하네.”“심판관이요?”“아, 마침 저기 오시는군.”라온은 도기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내 저 멀리서 해맑은 얼굴로 걸어오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분은 영온 옹주님이 아니시옵니까?”“그렇다네. 옹주님이야말로 이 궁에서 이 전쟁의 승자를 판가름하실 유일한 분이시지.”“어째서 그렇습니까?”“어린 아이의 눈은 세상에서 가장 솔직하다고 하질 않는가. 게다가 저분의 성정은 곧고 바르기가 대쪽 같으시니. 아마 옹주마마시라면 누구의 편에 치중되지 않고 진실을 말할 것이라고 양국 공주마마 모두 동의하셨다네.”“아, 그렇군요.”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영화당으로 들어온 영온 옹주가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며 명온 공주와 소양 공주를 번갈아보았다.
이미 데리러 갔던 궁녀에게서 저간의 사정을 자세히 들은 뒤였다.
명온이 애써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영온아, 너 보기에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에 누가 제일 아름다워 보이느냐?”명온 공주의 말에 영온 옹주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겁낼 것 없다. 그저 궁금하여 물어보는 것이니. 그러니 너는 아무런 사심 없이 너의 감상을 얘기하면 될 것이야. 너 보기에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누가 제일 아름다운 사람으로 보이느냐?”이때, 소양 공주가 앞으로 나서며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 보기에 누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느냐? 한 번 그 사람의 손을 잡아보려무나.”명온과 소양, 두 공주 모두 자신의 미모에 자신이 있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지. 어서 내 손을 잡거라.’‘흥, 아무리 혈육이라 하지만 아이의 눈은 솔직한 법. 잠시 망설일지 몰라도 결국은 내 손을 잡을 것이다.’한편, 영온 옹주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 명온과 소양 공주를 번갈아보았다.
그 신중한 눈길에 명온 공주는 물론이고 천하의 소양 공주마저 긴장한 표정으로 심사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꽤 오랫동안 공들여 그 자리에 있던 한 사람, 한 사람을 꼼꼼히 살펴보던 영온 옹주가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체 누굴 선택할까?
모두들 긴장한 채로 영온 옹주를 응시했다.
역시 같은 조선의 공주인 고아한 미모의 명온 공주를 선택할까?
아니면 화려한 미인인 소양 공주의 손을 들어줄까?
‘어서 이리와.’‘뭘 망설이는 거냐? 당장 내 손을 잡아라.’두 공주가 마치 마중하듯 손을 내밀었다.
그럼에도 영온 옹주는 좀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호기심과 궁금증이 증폭되어갈 쯤.
어린 옹주가 자박자박 작은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는 그 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의 손을 잡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영온 옹주의 뒤편에 서서 구경하고 있던 라온이었다.
“어?”“뭐야?”황망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랑곳하지 않은 채 대쪽같이 곧고 바른 성정의 영온 옹주는 라온의 손바닥에 차분히 손 글씨를 썼다.
<내가 보기에 이곳에 모인 사람 중엔 홍 내관이 가장 아름답네.>“감……감사하옵니다.”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따가운 시선에 라온은 식은땀을 흘리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런 라온을 향해 어린 아이 특유의 순수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영온은 그녀의 손을 잡고 유유히 영화당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떠난 자리에 깊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지만, 그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뭔가 알 수없는 패배감에 휩싸인 소양 공주는 붉게 칠한 입술만 질겅질겅 씹어댔다.
눈앞에 있는 명온 공주에게 진 것도 아니고 한낱 환관에게 미모로 밀리다니.
분한 것은 명온 공주도 마찬가지였다. 사모하는 사내보다 뒤쳐지는 미모라니.
사모하는 이가 저리 아름다운 이라서 행복해요……라고는 절대 말 하고 싶지 않았다.
심한 충격에 빠진 명온 공주는 한참이 지나도록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물론 소양공주 역시 돌상처럼 굳어진 채 멀어져가는 라온과 영온 옹주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뿌리라도 내린 듯 그 자리에 서 있던 두 공주는 패잔병의 모습으로 각기 제 갈 길로 갔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돌아가는 공주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상열이 도기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도 내관, 이 전쟁의 승자는 뉘인가?”도기가 통통한 얼굴을 갸웃하며 대답했다.
“아마도…… 홍 내관?”
***
전쟁의 최후 승자인 라온은 지친 얼굴로 자선당으로 돌아왔다.
영온 옹주가 자신의 손을 잡는 순간, 사방에서 날아드는 눈총을 감당하느라 진기를 모두 써 버린 기분이다.
“다녀왔습니다.”처소로 들어선 라온이 습관적으로 대들보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그러나 대들보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디 가셨나?”아무도 없는 텅 빈 처소를 둘러보며 라온이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였다.
“응? 이건 무슨 소리지?”어디선가 찰방거리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촤아악! 어딘가에 물을 쏟아 붓는 소리가 연이어 귓속을 파고들었다.
라온은 소리가 들려오는 뒤뜰로 걸음을 옮겼다. 소리는 자선당의 문 닫힌 부엌에서 들려왔다.
“거기…… 누구 있어요?”라온은 빠끔히 열린 문 틈새로 고개를 들이밀며 낮게 속삭였다.
이윽고 그녀의 시야에 뽀얀 수증기로 뒤덮인 부엌이 들어왔다.
뭐야? 불이라도 난 거야?
불안한 생각에 미간을 찡그리니, 수증기 사이로 부엌의 정경이 들어왔다.
사방 덧창문을 내려 어두컴컴한 부엌엔 옷가지들이 사방 흐트러져 있었다.
마치 허물을 벗듯 옷가지로 만들어진 길을 좇아 시선을 옮기니 동그란 나무 욕조가 들어왔다.
따뜻한 물로 채워진 듯 욕조에서 뿌연 수증기가 연신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수증기의 한 중앙엔 긴 생머리를 풀어헤친…….
“김 형?”저도 모르게 작은 입속말을 중얼거리던 라온은 곧이어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했다.
촤아악!
물살을 밀어젖히는 소리와 함께 불현듯 욕조에서 벌떡 일어난 병연의 벗은 뒤태가 고스란히 두 눈에 맺혔던 까닭이다.
덧창 문 사이로 스며든 가을 햇살이 그의 살갗에서 닿았다. 그의 몸에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물에서 갓 튀어 오른 유연한 물고기처럼 시린 빛으로 반짝거리는 그가 문득 라온을 향해 몸을 돌렸다.
“헉!”순간, 라온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틀 연속 사내의 벗은 몸이라니……
아무래도 마(魔)가 낀 것이 틀림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