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39화 (39/131)

39. 세자저하께서 늦잠을 자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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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4

늦은 밤.

성정각에서 때 아닌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왜 이러시는 것입니까?”비스듬히 주저앉은 라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앞에는 반쯤 벌거벗은 영이 너른 등을 드러낸 채 서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라온은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

화초저하를 따라 성정각으로 오고, 간단하게 생각한 사신들의 방문이 실은 숨겨진 저의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으며, 저하께서 그 모든 저의를 간파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더 놀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순조로웠다. 자러 가자는 말에 긴장했던 사실을 깜빡 잊을 만큼.

하지만 그 이후부터 이상하게 분위기가 흘러갔다.

야식으로 나온 약과를 먹을 때 영의 처소를 에워싸고 있던 인기척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사건은 그 직후에 일어났다.

매미가 허물을 벗듯 돌연 화초저하께서 옷을 벗기 시작한 것이다.

사그락 사그락, 비단 스치는 소리와 함께 화초저하의 발치로 곤룡포가 흘러내렸다.

눈처럼 하얀 저고리를 벗자 속살이 훤히 비치는 속저고리가 드러났다.

영의 발치로 비단 옷이 산을 이뤘다.

그리고 마침내 라온의 눈앞에 영의 상반신이 태고의 모습을 드러났다.

사내의 뒤태란 원래 저리 아름다운 것인가? 솜씨 좋은 장인(匠人)이 오랜 세월 공들여 조각한 조각상이 저러할까?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 아닌 듯한 영의 미려한 아름다움에 라온은 그대로 숨이 딱 멈추는 것만 같았다.

“대, 대체 뭐하시는 겁니까?”허물을 벗듯 입고 있던 속저고리마저 모두 벗은 채 등을 보이고 있는 영을 향해 라온이 비명을 지르듯 물었다.

어째서 갑자기 옷을……. 이대로 날 덮치기라도 하면 어쩌지? 여기서 소리를 질러야 하나?

아니, 그랬다가 행여 정체가 탄로나게 된다면……? 아, 생각하기도 싫다.

라온은 끔찍한 생각에 저도 모르게 체머리를 흔들었다.

힐끔,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린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영이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는 너야말로 뭐하는 것이냐?”“네?”“어서 침의를 가져오지 않고 뭘 하는 거냐?”한순간, 허를 찔린 사람처럼 라온은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침의? 침의라면…… 잘 때 입는 그거? 그렇다면 나를 상대로 무얼 어쩌겠다는 건 아니라는 뜻?

‘휴, 다행이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라온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에 있는 자개장을 열어보면 있을 것이다.”“네? 네.”라온은 영이 가리킨 자개장을 열었다. 눈부시게 하얀 침의가 그 안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그걸 이리 가져오너라.”“네?”여전히 벗고 있는 영의 등 모습을 보던 라온은 왼고개를 틀고 말았다.

산 너머 산이라니. 일평생을 남장한 채 사내처럼 살아왔지만 사내의 벗은 몸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극심한 긴장에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영이 담담한 목소리로 다시 재촉했다.

“이리 가져오래도.”“……네.”라온은 침의를 손에 든 채 주춤거리는 걸음으로 영을 향해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설수록 영의 벗은 등이 점점 크게 다가왔다.

그의 긴 목선과 강인한 어깨가, 여름 햇살처럼 반짝거리는 피부가 너무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저도 모르게 입안에 침이 고였다. 침의를 들고 있는 손이 바르르 떨렸다.

영의 바로 뒤에 멈춰 선 라온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허둥댔다.

영이 기다렸다는 듯이 양팔을 벌렸다.

“어서 하지 않고 뭘 하는 것이냐?”오랫동안 군림하며 살아온 자의 자연스러운 행동.

라온은 들고 있던 침의를 조심스럽게 들어 영의 팔에 넣는다.

사르륵.

매미날개로 만든 듯 부드러운 비단자락이 영의 손끝에서 물 흐르듯 살결을 타고 오른다.

혈관이 툭툭 불거진 손등을 따라 오르자 사막의 모래능선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굴곡의 팔뚝을 만날 수 있었다.

슬쩍 슬쩍 그의 맨살에 손끝이 닿을 때마다 라온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화들짝 움츠려들어야 했다.

숨 가쁘게 팔뚝의 능선을 오르던 침의가 어느덧 나무뿌리처럼 근육이 단단하게 얽혀 있는 어깨로 향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탄탄하면서도 탄력적인 느낌에 라온은 저도 모르게 숨이 가빠왔다. 침의를 잡은 손끝은 사시나무 떨 뜻 떨리고 있었다.

온몸의 신경이 손끝으로 집중되었다.

영의 맨살에 닿을 때마다 불에 덴 듯 저릿한 감각이 느껴졌던 터라. 조금이라도 영과의 접촉을 줄이기 위해 라온은 안간힘을 썼다.

바로 그때였다.

영이 별안간 라온의 작은 손을 와락 휘어잡았다.

“아!”라온은 잇새로 터져 나오는 비명을 삼키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다.

영에게 손이 잡힌 채로 라온은 고개를 들었다.

일순, 그녀를 내려다보는 영과 시선이 마주쳤다. 간질거리는 숨결이 이마에 와 닿았다.

부드럽지만 아릿한 감촉에 숨이 턱하고 멈추는 것만 같았다. 애써 잠재웠던 심장이 성난 짐승처럼 다시 날뛰었다.

행여 심장소리를 들킬세라, 라온은 황급히 뒷걸음질을 치려 했다. 하지만 영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조금은 짓궂은 얼굴로 라온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이, 그의 코가, 그의 입술이…… 금방이라도 닿을 듯 가깝게 다가왔다.

순간, 모든 것이 정지한 듯 느껴졌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했다.

라온은 숨이 가빠왔다. 보이지 않은 손길에 숨통이 막힌 듯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의식마저 아득해지려는 찰나.

영이 입꼬리를 둥글게 말며 미소를 지었다.

“녀석.”영은 잔뜩 굳어 있는 라온의 손에서 침의를 받아 입었다.

“무얼 그리 긴장하고 있는 것이냐?”라온은 영이 옷을 다 입는 동안에도 굳어 있었다.

석상처럼 굳어 있는 라온이 귀엽게 느껴진 영이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 가볍고도 장난스러운 손길이 정지해버린 시간을 다시 흘러가게 했다.

“휴…….”이제야 마른 숨이 조금 쉬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라온의 눈에는 탈의한 영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무슨 망측한 생각을 한 거야? 홍라온. 정신 차려.’라온은 불순한 상념을 털어내려 황급히 체머리를 흔들었다.

그때였다.

힘껏 잡아당기는 손길.

몸의 중심을 잃은 라온이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황망히 고개를 돌리니 영의 얼굴이 들어왔다.

어느새 햇솜으로 만든 이불 위에 반쯤 비스듬히 누운 그가 라온을 자신의 몸 쪽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화들짝 놀란 라온이 물었다.

“뭐, 뭐하는 겁니까?”“몰라서 묻는 것이냐?”영이 되물으며 자신의 옆자리를 눈짓했다.

“저더러 여기 누우라는 말씀입니까?”“함께 자자하지 않았느냐.”“하오나 제가 어찌 감히 저하와 함께…….”라온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황급히 도리질을 했다.

“정히 그러하다면, 이제부터는 이곳을 성정각이 아닌 자선당으로 생각하여라.”“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이 밤에 너와 나, 왕세자와 환관이 아니라 벗과 벗으로 지내자는 말이다.”“그 말씀은…….”“벗이 한 이불 속에서 잔다고 무슨 허물이 있겠느냐?”“하지만…….”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절대 함께 잘 수 없습니다.

뒷말은 그저 입속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이리 가슴이 두근대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라온, 자신의 사정이지 영의 사정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화초저하께서는 나를 사내로 알고 있다. 아니, 사내도 아닌 환관으로 알고 있다.

음험한 속셈으로 이리 유인하는 것이 아니리라. 그야말로 순수한 마음으로 함께 자자 청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라온은 말 못 할 속사정으로 함께할 수 없었다. 과연 어떤 핑계를 대고 거절한단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조금의 사심도 담기지 않은 영의 말이 이어졌다.

“오늘 고생 많았다.”“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그리 생각하니 다행이구나. 그리고 사신들이 돌아갈 때까지 오늘처럼 네가 수고를 해 주어야겠다.”“당연합니다. 걱정 마십시오.”“그래. 앞으로 많이 곤할 것이니, 오늘 밤만이라도 푹 자자.”“그, 그런 것이라면 저도 다른 분들처럼…….”벌떡 일어나려는 라온의 팔을 영이 다시 잡았다.

“어딜 가려고.”“아앗!”거센 완력에 라온은 영의 품안으로 넘어지듯 안기고 말았다. 영의 단단한 품속에 라온의 자그마한 몸이 그대로 푹 파묻혔다.

고개를 숙인 라온의 두 뺨이 저녁노을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그만…… 가보겠습니다.”라온이 간청했지만 등 뒤에서 그녀의 어깨에 쥐고 있던 영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내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밤에도 날 찾는 사람이 올 수도 있다고.”“그런 연유로 저를 잡으시는 것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자신을 살뜰하게 챙겨주는 영의 마음은 너무도 고마웠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인의 몸으로 사내와 한 이불 속에서 밤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럴 수는 없다.”“그럼 이곳에서 저하의 곁을 지키고 있겠습니다.”서둘러 영의 품에서 벗어나며 라온이 말했다.

“네 몸은 무슨 무쇠로 만들었다더냐? 조금이라도 쉬어야 할 것이 아니더냐?”“쉴 수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그러지 말고 이리 와서 누워라.”“아닙니다. 궁엔 엄연히 지켜야 할 법도가 있는 법. 세자저하의 곁을 저와 같은 소환내시가 지킨다는 것 자체가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그런 것도 모자라 옆자리에 누우라니요. 말도 안 됩니다. 그러니 제발 그 말만은 마십시오.”정말로 세자 저하 곁에서 잤다가 어떤 사달이 벌어질지 모른단 말입니다. 자칫 정체라도 들키는 날이면…….

좀 전까지 달뜬 흥분으로 두근거리던 가슴이 이번엔 다른 이유로 뛰었다.

“그러지 말고 이리 오너라.”“안 됩니다.”“명이다.”라온이 그 자리에 납죽 엎드렸다.

“이렇게 간청합니다. 그저 저하 곁에서 쉴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필사적인 모습에 영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녀석, 고집하고는.

“네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못내 아쉬운 눈길로 라온을 바라보던 영이 이부자리에 누웠다.

라온이 조금 떨어진 곳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영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정말 밤새도록 그렇게 있을 작정이냐?”걱정 가득한 그의 물음에 라온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당연합니다.”“그냥 이리 오지?”“전 이곳이 편합니다.”“정히 그렇다면 다리라도 편히 풀던가.”“전 이 자세가 가장 편합니다.”“녀석…….”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던 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을 감았다.

라온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 십년감수했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깊은 잠에 빠진 듯 영이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반면, 라온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영 불편한 얼굴로 몸을 뒤척였다. 아까부터 다리가 저려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괜히 이 자세가 편하다고 그랬나?

역시, 밤새 무릎을 꿇고 있는 건 무리였다. 슬쩍 영의 눈치를 살피던 라온은 자세를 바꾸려 조금씩 움직였다.

그러다 쓰러지듯 풀썩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 아야야.”라온이 저린 다리를 부여잡고 앓는 소리를 낼 때였다.

“쿡.”어딘가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라온이 급히 고개를 들었다.

혹시 화초저하께서 깨신 것일까?

아마도 환청인 모양이다. 영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안도하며 라온은 저린 다리를 주물렀다.

멀리서 축시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밤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시각이 이리 되었나?”길게 기지개를 켜며 라온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자꾸만 아래로 내리 감기는 눈을 애써 치켜뜨길 몇 번이나 했을까. 용케 참고 있던 라온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지니 오늘 내내 서 있었던 피곤이 밀물처럼 몰려온 것이다.

잠시 후.

병든 닭처럼 위아래로 꾸벅이던 라온의 고개가 바닥으로 푹 하고 꼬꾸라졌다.

제풀에 놀란 라온이 발딱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는 영의 동태부터 살폈다.

돌아눕긴 했지만 이번에도 깨진 않으셨네.

휴우, 안도의 숨을 쉬던 라온은 문득 머리가 떨어졌던 바닥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어라? 여기에 웬 베개?

베개가 있었던 덕분에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베개가 없었다면 라온의 이마가 아픈 것은 둘째 치고, 쿵 하는 소리로 영의 숙면을 방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베개가 왜 이곳에 있는 걸까?

어쩌면 화초저하께서 몸을 뒤척이시면서 우연히 베개가 이쪽으로 미끄러져왔는지도 모른다.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미심쩍은 면이 없잖아 있지만, 그것 외에는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힐끔, 영을 곁눈질하던 라온은 슬그머니 베개를 끌어안았다.

어쩌면 또 졸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바닥에 머리를 박을지도 모른다.

괜한 부산함으로 평온히 잠든 세자저하를 깨울 수는 없었다.

‘죄송하지만 이 베개만 빌리겠습니다.’ 잠든 영의 뒷모습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 라온은 빌린 베개를 고개가 떨어질 만한 위치에 얌전히 두었다.

그로부터 일각이 채 지나기도 전, 라온은 다시 꾸벅꾸벅 졸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베개에 고개를 처박은 채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등 뒤에서 들려오던 부산한 몸짓이 잦아들자 내내 잠든 척하고 있던 영이 눈을 떴다.

라온의 곁으로 다가간 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았다.

“홍라온.”“…….”“라온아.”그의 부름에도 라온은 꿈적하지 않았다.

고른 숨을 규칙적으로 내쉬는 라온의 모습은 갓난아이처럼 천진난만했다. 그 곤한 잠자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영은 불편한 자세로 엎드려 있는 라온을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이부자리에 조심스레 뉘였다.

잠시 뒤척이던 라온은 햇솜으로 만든 이불속으로 녹아들듯 파고들었다.

영은 깊은 잠에 빠져버린 라온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그 옆에 마주 보고 누웠다.

“녀석, 단 한 번도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는구나.”말 안 듣는 어린 동생을 대하듯 영은 잠든 라온의 코를 아프지 않게 톡 튕겼다.

“으음.”잠결에도 라온이 콧등을 찡긋했다. 그 귀여운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바로 그때.

툭, 가냘픈 무게감이 그의 가슴 위로 힘없이 내려앉았다.

느닷없는 감촉에 영은 시선을 제 가슴 아래로 내렸다. 잠결에 라온이 제 팔을 영의 가슴 위에 얹은 것이다.

“감히…….”영의 입에서 지청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내뱉는 말과는 달리 하는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행여 라온이 깰까 싶어 천천히 그 가느다란 팔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사내놈의 팔이 어찌 이리 가늘까?

괜스레 마음 한쪽이 언짢아져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영의 미간에 그려진 주름이 더욱 깊어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또르르.

마치 작은 구슬이 굴러오듯 라온의 작은 머리가 베개 위에서 흘러내리는가 싶더니 이내 온기를 찾아 영의 옆구리 사이로 파고들었던 것이다.

“감……히.”라온의 동그란 이마가 영의 턱 언저리에 와 닿았다.

“참으로 맹랑한 녀석이구나.”옆으로 시선을 돌려 라온의 잠든 모습을 내려다보며 영이 중얼거렸다.

감히 왕세자의 옆구리를 파고든 환관이라니.

누군가 보았다면 기함할 일이었다.

하지만…… 따뜻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이 아늑한 느낌에 영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그렸다.

어찌하여 이 녀석에게만은 이리 관대해지는 것인지.

낮게 한숨을 쉬던 영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

라온의 따뜻한 체온 탓인지, 자꾸만 졸음이 몰려와 견딜 수가 없었다.

금세 잠이 드는 모습이 일평생을 내내 불면증을 앓았던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

다음 날 아침.

성정각 문 앞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최 내관이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게 무슨 소린가? 세자저하께서 아직 기침하지 않으셨다니.”“네. 벌써 묘시(卯時:아침 5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기척이 없으시옵니다.”“어허. 이거 참.”최 내관이 불안한 표정으로 침소 문을 응시했다.

세자저하를 모신 이후로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심한 불면을 앓고 계시는 저하께선 인시(寅時:새벽 3시) 전엔 틀림없이 기침하시곤 했었던 것이다.

말없는 그의 근심이 다른 내관들과 상궁들에게도 전이된 듯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섭리께서 한번 안으로 들어가 보시는 것이 어떨는지요?”누군가의 말에 최 내관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침소 안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저하, 소인 최 내관이옵니다.”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워낙에 예민하신 분이라, 이 정도 목소리라면 진즉에 반응을 보였을 터. 근심이 더욱 커졌다.

망설이던 최 내관이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문차비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윽고 얌전히 닫혀 있던 방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희붐한 푸른 새벽 속에 잠겨 있는 방 안으로 최 내관이 들어섰다.

잠시 후.

최 내관은 그 어느 때보다 평안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영을 보았다.

“저하, 주무시옵니까? 저하…….”“시끄럽구나.”부산을 떠는 최 내관의 말문을 영이 막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영이 옴쳐드는 낮은 목소리로 최 내관을 불렀다.

“최 내관.”“네, 저하.”“오늘은 늑장을 좀 부려야겠다.”놀란 최 내관이 두 눈을 끔뻑거리며 영을 응시했다.

“저하, 혹여 어디 미령하시옵니까? 어의를 부르라 하올까요?”“아니다. 그저…… 오늘은 이불 속에서 쉬이 나가고 싶지가 않구나.”“……알겠나이다.”일평생을 바지런하게 살아오신 분이시니, 지치실 만도 하시지.

하루쯤 늑장을 부린다고 하여 큰일 날 것은 없었다.

영의 속내를 어림짐작한 최 내관이 뒷걸음질로 방을 나갔다.

방문이 닫히자 영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뒤척여 덮고 있던 이불을 천천히 내렸다.

이윽고 영의 곁에 새끼 고양이처럼 옹송그린 모양으로 잠든 라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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