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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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1
라온은 영을 따라 성정각으로 들어섰다.
물결처럼 일렁거리는 횃불이 성정각 마당을 밝히고 있었다.
마당 귀퉁이에 내려앉은 하얀 달빛을 따라 수줍은 들국화의 향내가 은은하게 퍼졌다.
정교하게 조각된 석상들, 뽀얗게 닳은 반석을 걸었다.
텅 빈 처소 앞을 지키던 궁녀들이 영의 뒤로 물고기 떼처럼 몰려들었다.
조족등을 든 최 내관이 마지막으로 다가와 그의 발밑을 환하게 밝혔다.
계단 위로 올라서자 두 명의 궁녀가 다가왔다. 그녀들은 무릎을 굽힌 채 디딤돌 위에 선 영의 신발을 잡았다.
덕분에 영은 허리를 굽히지 않고도 신을 벗을 수 있었다.
그가 대청마루 위로 올라가기 무섭게 소리 없이 처소 문이 양옆으로 환하게 열렸다.
이윽고 영의 뒤를 따르던 라온의 시야에 처소 안의 광경이 펼쳐졌다.
형과 식, 정해진 규와 율에 맞춰 정교하게 정리된 왕세자의 처소엔 뒤늦은 저녁수라가 차려져 있었다.
연회 내내 제대로 음식을 먹지 않은 영을 위한 것이었다.
영이 자리에 앉자 최 내관을 비롯한 환관들은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시립하여 늘어섰다.
그 옆자리엔 수라상을 차린 수라간의 상궁과 나인들이 열을 맞춘 채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최 내관이 고갯짓을 하자 기미상궁의 기미가 시작되었다.
성정각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 모든 일련의 과정들이 마치 잘 맞물려진 톱니바퀴처럼 조금의 어긋남이 없이 이어졌다.
동궁전에 있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한 몸인 듯 움직였다. 누구도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고, 부산스러운 몸짓도 없었다.
그러나 모든 일들은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되었다.
오직 한 사람, 라온만이 처음으로 접하게 된 낯선 세상에 허둥대고 있을 뿐이다.
라온은 잔뜩 긴장한 채로 영을 훔쳐보았다.
방 안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기미 상궁의 기미가 끝나자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고요한 적막 속에서 영의 식사가 이어졌다.
음식을 씹는 소리도, 식기에 수저가 부딪히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완벽하게 소리가 지워진 세상 한가운데 있는 사람처럼 영은 소리없이 음식을 삼키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온은 문득 궁 밖에서의 식사시간을 떠올렸다.
비록 궁색한 밥상이었지만 이야기와 웃음이 빠지지 않았던 시간. 그 소소한 일상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외로움이라는 무거운 공간 속에 홀로 있는 영이 조금은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정신 차려, 홍라온. 지금 이런 태평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야.’잠시 잠깐, 영의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던 라온은 풀어진 주먹을 다시 말아 쥐었다.
아주 잠깐 잊고 있었던 긴장감이 다시 등줄기를 꼿꼿하게 세웠다.
‘자러 가자.’영이 했던 말이 여전히 귓가에 맴맴 맴돌았다.
설마 진심으로 하신 말씀은 아니겠지? 그래, 그저 농으로 한번 해 본 말씀이 틀림없어.
애써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며 힐끔 영을 바라보던 라온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우연이었을까?
막 숟가락을 내려놓는 영과 눈이 딱 마주쳤던 것이다. 여느 때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그 단순한 우연.
그러나 오늘은 이상하게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자.’라는 말이 갖는 묘한 어감 때문일까? 성정각에 들어선 이후로 두려움을 동반한 긴장감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 견딜 수가 없었다.
아니, 심장만 뛰면 좋으련만.
이상하게도 아까부터 발끝으로 수십 마리의 개미가 기어 올라오는 듯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동시에 무엇인가 서늘한 감촉이 등줄기를 훑었다. 연신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아니, 이 식은땀은 동궁전의 이 숨 막히는 정적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동궁전은 그야말로 조금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 완벽한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 완전무결한 세상의 한가운데 영이 있었다.
영이 식사를 마치자 그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상궁과 궁녀들이 밀물처럼 성정각을 빠져나갔다.
어느새 처소 안쪽에 잠자리를 마련한 환관들마저 그 뒤를 쫓았다.
방 한구석에 엉거주춤 서 있던 라온 역시 다른 환관들을 따라 은근슬쩍 방을 나서려 했다.
그때였다.
“홍라온,” 영의 나지막한 목소리. 그 나직한 부름이 족쇄가 되어 라온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네?”“너는 어딜 가려는 것이냐?”당연히…….
“저도 나가보려고요.”“너는 아직 나와 할 일이 남았다.”“네? 할 일이요?”그게 뭔데요? 정말 같이 자자고 하시는 것은 아니시지요?
라온은 거의 울상이 되어 영을 응시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최 내관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한 꾸러미의 문서가 들려 있었다. 영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바짝 긴장한 라온이 휴, 낮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속내일랑 알지 못한 영은 예의 무심한 얼굴로 최 내관이 가져온 문서를 훑었다.
“이번에 청국에서 요구한 것들이옵니다.”“황금 천 근? 이것은 무엇이냐?”“근자에 들어 청국에 아편이 성행하고 있다 하옵니다. 아편에 중독된 자들이 아편을 구하기 위해 제 가족과 이웃을 위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보니 민심마저 흉흉해진 모양이옵니다. 하여, 아편중독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소를 세우기로 하였고, 그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이옵니다.”“서역의 무역상들이 취급하는 가장 큰 품목 중에 하나가 아편이지. 그들에게 장사를 허락했던 자들이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을 리 없을 터. 그럼에도 눈앞의 사리사욕을 위해 백성들을 아편의 구렁텅이로 빠트린 자들이 아니더냐. 그런 자들이 이제와 백성을 구제하겠다? 그것도 제 나라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에게 손을 내민다?”음험하고 고약한 악취가 느껴진다. 영의 얼굴에 냉소가 피어올랐다.
빠른 시선으로 최 내관이 가져온 문서를 훑던 영이 문득 한곳을 지목했다.
“명단에 있는 이 유상평이라는 자, 애초 사신단의 명단에는 없던 자였다.”그의 말에 최 내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자께서 말씀하시는 유상평이라는 자는 이번 사신행을 따라온 일개 짐꾼에 불과한 자였다.
그런 자의 이름을 저하께서 어떻게 기억하신단 말일까?
그러나 영의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자 외에도 이자와, 이자, 그리고 여기 있는 진 대인이라는 자까지 모두 다섯 명의 이름이 바뀌었다.”최 내관은 서둘러 문서를 뒤져 한 달 전 청국에서 보내온 사신단의 명단을 훑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경탄한 얼굴로 영을 올려다보았다.
“저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한 달 전에 청국에서 보내온 명단에는 그 다섯의 이름은 없었사옵니다.”
한 달 전에 보았던 문서를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외운 것도 놀랍거니와 바뀐 다섯의 이름을 정확하게 지목한 영의 능력에 최 내관은 혀를 내둘렀다.
“유상평이라. 언젠가 보았던 청국의 장사치들 명단에서 이 자의 이름을 본 기억이 난다. 항주 태생으로 10년 전 갑자기 거상이 된 자라 하였지. 그런 자가 이번에는 짐꾼이 되어 조선 땅을 밟았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영이 불현듯 눈빛을 세웠다.
“율아!”
그의 나직한 부름에 처소 그늘진 곳에서 붉은 무관복을 입은 한율이 모습을 드러냈다.
라온이 서 있는 자리, 바로 뒤편이었다.
저 커다란 사내가 바로 등 뒤에 있음에도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다니.
“헉.”
놀란 라온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라온을 무심히 지나친 율은 영의 앞에 부복했다.
“율아, 지금 이 시각부터 너는 이 유상평이라는 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말고 감시하도록 해라. 그자가 뉘와 접촉을 하는지, 어떤 속셈을 갖고 이 조선 땅에 발을 디뎠는지 소상히 알아내야 한다. 알겠느냐?”
“명 받잡나이다.”
율이 방을 나간 후에도 영은 최 내관과 함께 사신 개개인에 대한 인상과 그들의 목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지켜보던 라온은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오늘의 연회, 그저 먹고 즐기는 잔치에 불과한 줄 알았건만, 영과 최 내관의 대화를 들으니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닌 듯했다.
뿐만 아니라 이번 사신단의 방문 역시도 단순하지 않았다.
문화교류는 명목상의 이야기일 뿐, 그 안에는 두 나라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그런데…… 나 왜 이 자리에 있는 거지?
저 복잡한 이야기 속에 라온이 낄 자리는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그런 그녀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일까?
최 내관과 대화를 나누던 영이 갑자기 라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응? 화초저하께서 왜 갑자기 날 보시는 것일까?
궁금해하는 찰나, 최 내관의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무얼 하는가? 이제 자네가 아뢸 차례일세.”
“네?”
제 차례라고요? 뭘 물어보셔야지 아뢰어도 아뢸 것이 아닙니까?
느닷없는 이야기에 두 눈만 끔뻑거리고 있자니 영이 말했다.
“내가 너에게 물어볼 것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질 않겠느냐.”
세자저하께서 나에게 물어볼 것……아!
잠시 생각을 굴리던 라온은 영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즉시 알아차렸다.
그가 자신에게 물어볼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여인에 대한 일.
지금 영은 사신단과 함께 온 여인들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묻고 있는 것이다.
“사신단과 함께 온 여인들 중에는 특별히 수상한 분은 없었습니다.”
라온은 영을 돌아보았다.
물론 화초저하께 지극히 수상한 감정을 가지신 분은 여럿 보았습니다만.
특히 소양공주께서는 절대 이대로 청국으로 순순히 돌아가실 분은 아닌 듯 보였지요.
그러나 차마 뒷말을 할 수는 없었는지라.
라온은 지극히 짧고 간단한 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끝마쳤다.
“그뿐이냐?”
“그뿐입니다.”
잠시 라온에게 고정되었던 영의 시선이 다시 탁자에 놓인 문서로 돌아갔다.
일에 열중한 영의 모습은 소름이 끼치도록 진지했다. 그의 눈빛 어디에도 ‘자러 가자’ 하던 장난스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단순한 장난이었나? 괜히 긴장했구나.
꼿꼿이 세우고 있던 허리를 조금 느른하게 굽힌 라온은 쏟아지는 잠을 참으며 눈가를 비볐다. 긴장이 풀리니 피곤이 몰려왔던 것이다.
최 내관의 어깨 너머로 영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그녀는 작게 입을 벌려 하품까지 했다.
문득 영의 입가에 실금 같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나 이내 미소를 지운 그가 최 내관을 향해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면 되겠구나.”
“하오면 더 시키실 일은 없사옵니까?”
“야참을 들이라 하라.”
“야참……이라 하셨사옵니까?”
뜬금없는 명에 최 내관이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좀처럼 없던 일이다. 그러나 군소리 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금방 올리겠나이다.”
말과 함께 최 내관이 처소 밖으로 물러갔다.
한쪽 구석에 앉아 연신 눈치를 살피던 라온이 이번에도 그 뒤를 슬금슬금 따랐다.
“넌 또 어딜 가려는 것이냐?”
“아, 저도 그만 물러가려고…….”
“너는 아직 할 일이 끝나지 않았다.”
“……!”
라온이 울상을 지었다.
대체 궁녀들과 내관들이 다 물러난 이 자리에 무슨 할 일이 있으시단 말입니까?
알 수 없는 불안과 긴장이 다시 엄습해왔다.
라온의 이마 위로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혔다
***
“설마, 이걸 저더러 먹으라는 것은 아니시지요?”
잠시 후.
영의 처소 안으로 들어온 야식 상을 보며 라온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방금 전 식사를 마친 나더러 먹으라는 것이냐?”
“하오나…….”
“오늘 하루 종일 내 뒤를 쫓아다니느라 고생이 많았다. 제대로 먹지 못했을 터이니. 어서 먹어라.”
“그렇지만 제가 어찌 세자저하의 야참에 손을 댈 수가 있단 말입니까?”
방문 앞에 그려지는 최 내관의 그림자를 보며 라온이 옴쳐드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주위를 모두 물리라는 영의 말에 최 내관을 비롯한 모든 동궁전의 궁인들은 처소 밖으로 물러나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방에서 지켜보고 있는 귀가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특히나 최 내관은 낮은 헛기침 소리로 자신의 존재감을 끊임없이 라온에게 전해왔다.
영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허락한 일을 감히 뉘라서 토를 달 것이냐.”
라온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화초저하께는 문제가 없어도 저는 문제가 있습니다.
영이 약과 하나를 들고 말했다.
“먹어라. 명이다.”
라온은 한숨을 쉬며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았다. 아니, 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기습적으로 입안으로 들어오는 약과에 당황하고 말았다.
영이 손수 라온의 입에 약과를 넣어준 것이다.
“어어어…….”
입안을 가득 채운 약과 때문에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한 라온이 묘한 소리를 냈다.
“궁의 비법으로 만든 특별한 약과니라. 어떠냐? 맛이 괜찮으냐?”
당연히 맛있습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허기진 뱃속에 뭐가 들어간들 맛있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궁의 비법으로 만든 특별한 약과이니, 그야말로 입안에서 살살 녹는 기분입니다.
하지만…… 감히 왕세자의 야참을 뺏어먹는 환관이라니…… 후환이 두렵습니다. 진심으로…….
라온은 의식적으로 방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장이라도 저 문이 벌컥 열리고 검을 찬 무인들과 최 내관이 왕족모독죄를 들먹이며 쳐들어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라온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먹어라.”“제가…….”먹겠습니다. 아니, 제 손으로 먹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뒷말은 이번에도 이어지지 못했다.
라온이 종알종알 뒷말을 붙이기도 전에 영이 약과를 그녀의 입안으로 다시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그냥 주는 대로 먹어라. 이 또한 명이다.”“아니, 그러할 수는 없습……읍!”
***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또 다시 들려오는 묘한 신음소리에 최 내관의 주름진 미간이 더욱 일그러졌다.
“이러시면 아니되……읍!”“더는 저항하지 말거라. 명이다.”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최 내관의 눈이 커졌다.
이러시면 아니 된다? 더는 저항하지 말거라?
이 무슨 음란한 소리란 말인가.
“으으으으…….”“어떠냐? 좋으냐?”“……너무 하십니다.”“어허, 감히 네가 왕세자인 나의 명을 거역할 셈이더냐?”“그래도 이러하시면……읍!”더는 안 되겠는지 최 내관은 주위에 있는 궁인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모두들 멀찌감치 물러나라.’행여 궁 안에 세자저하에 대한 삿된 소문이라도 날까 두려웠던 탓이다.
그의 단호한 눈짓에 동궁전의 궁인들이 소리 없이 성정각 밖으로 물러났다.
이제 성정각 앞을 지키는 사람은 오직 최 내관 하나뿐이다. 그럼에도 그의 주름진 얼굴에 피어난 수심은 더욱 깊어졌다.
환관이란 무엇인가.
왕의 곁에서 손발이 되어 보필하는 것이 환관의 임무였다.
그리고 또 하나, 모시는 주군이 바른 길로 가도록 인도하는 것 역시 환관의 임무이기도 하다.
여인 보기를 돌같이 하던 우리 저하께 저런 남다른 취향이 있을 줄이야.
늙은 내관의 눈가에 축축한 물기가 들어찼다.
어쩐지 저하께서 저리 되신 것이 모두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어린 시절의 충격이 아마도 저런 식으로 발현되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 또한 운명이라면 운명.
그러나 묵묵히 그 운명을 받아들이기엔 후일 밀어닥칠 폭풍이 만만치가 않았다.
세자께서 남색을 하신다는 망측한 말이 백성들에게 돌기라도 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것은 이 나라 조선의 종묘사직이 흔들리고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는 일이었다.
아직은 늦지 않았음이라.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 것이 순리.
지금이라도 바른 길로 저하를 모시는 것이 이 늙은이가 해야 할 사명이리라.
이 늙은 한 몸을 초개와 같이 불살라 우리 저하를 바른 길로 인도하리라.
의지를 다진 최 내관은 쪼글쪼글한 입매를 다부지게 말아 물었다.
“저하, 저하…….”분연히 자리를 떨치고 일어난 최 내관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톡톡.
누군가 그의 뒤통수를 콕콕 두드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최 내관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판내시부사가 아니시옵니까?”전 판내시부사 박두용의 느닷없는 출현에 최 내관의 목소리가 절로 커졌다.
“쉿! 소리가 너무 크네.”“판내시부사께서 여긴 어인 일이옵니까?”“내 긴히 자네와 얘기할 것이 있네. 잠시 나를 따르게나.”“송구하오나, 소인은 지금 당장 해야 할 긴한 일이 있사옵니다. 무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최 내관의 완고한 모습에 박두용은 고개를 젓고 말았다.
“이것 봐라, 한가야. 내가 뭐라고 했느냐. 이 아이는 이런 아이니, 말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하질 않았어?”“그러게나 말이다. 이 녀석은 어릴 때부터 고지식하더니 커서도 그 모양이로구나.”말과 함께 어둠 속에서 또 한 명이 나타났다. 박두용과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한상익이었다.
두 사람이 최 내관의 양쪽에서 팔짱을 꼈다.
“왜, 왜 이러시옵니까?”“자자, 일단은 나가서 얘기하세.”“이러지 마시옵소서. 저는 지금 당장…….”“한가야, 이 눈치 없는 놈 입부터 막아라.”“왜 이러시옵……읍읍읍!”답답한 신음소리와 함께 오해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
눈치 없고 고지식한 최 내관이 박두용과 한상익에게 끌려 나가는 동안 성정각 안에 있던 라온은 새로운 위기상황을 맞닥뜨리고 있었다.
야식으로 올라온 약과를 손수 라온에게 먹인 영이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심상치 않은 눈빛에 라온은 심장이 뛰었다.
왜? 왜 이러시는 거지?
불안한 시선을 돌리니 문풍지 위로 그려졌던 사람들의 그림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 사람들 다 어디로 갔어? 인기척 하나 들려오지 않은 이 상황…… 혹시 지금 여기에 나와 세자저하, 둘뿐인 거야?
흘끗, 고개를 들어 영을 바라보았다.
영의 서늘한 눈이 라온의 놀란 얼굴을 담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라온이 푹 고개를 바닥으로 숙이며 본능적으로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혹시 내 정체를 눈치채고 이러시는 걸까? 아니, 그럴 리 없어.
하지만…… 저 눈빛은? 뭔가를 갈구하는 저 표정은 뭐야? 저건 마치…….
라온의 생각은 거기서 뚝 끊어지고 말았다.
“뭘 하는 것이냐?”나지막한 영의 목소리에 라온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느 틈엔가 영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분이 왜 등을 돌리고 계실까?
라온의 머릿속에 의문이 커져갈 때였다.
사르르륵.
비단 스치는 소리가 라온의 귓가를 진동했다.
잠시 후, 파도치듯 영의 어깨에서 검은 곤룡포가 흘러내렸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