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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37화 (37/131)

37. 지금 상당히 위험한 발언 하신 거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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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7

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그럼에도 연회는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지고 있었다.

사신들과 그들을 영접하는 관료들 모두 적당히 취기가 올라 큰 목소리로 웃고 떠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마음 편히 즐길 수 있었던 데에는 환관들의 조용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환관들은 연회 전반을 살피고 필요한 일들을 재빠르게 파악했다.

상 위의 음식은 물론이고, 사신들에게 무언가 필요한 기색만 보여도 그것이 무엇인지 미리 알아채고 준비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라온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환관은 궁의 아침을 열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 말처럼 실제로 궁이 무탈할 수 있는 것은 환관들을 비롯한 궁인들의 피땀 흘리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환관은…… 정말 대단하구나.”그저 내시라고만 알고 있는 직책. 세간 사람들에게는 사내가 아닌 사내라 하여 조롱거리처럼 불리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이야말로 궁 안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사람들이다.

“암요. 환관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지요.”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라온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자, 장 내관님.”놀래라. 언제 오신 것일까?

어느 틈엔가 다가온 장 내관이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서 있었다.

“좀 전부터 줄곧 곁에 있었어요. 모르셨소?”“몰랐습니다.”어떻게 그리 기척도 없이 움직이는지.

무려 5년 동안 동궁전에 머무르면서도 아무도 그의 존재를 몰랐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처음 맞는 큰 행사인데…… 쉽지 않지요?”“아닙니다. 세자 저하께서 편의를 많이 봐주셔서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그리고 또 한 사람, 쓸데없이 챙겨주려 애쓰는 예조참의도 계시지요.

“가만 보자.”장 내관이 주위를 쓱 훑어봤다.

풍경을 살피듯 그저 한 번 쭉 보는 것에 불과한데도, 실상 그는 연회의 분위기와 전반의 흐름을 단박에 파악해냈다.

그 모습이 노회한 사냥꾼처럼 여유롭고 노련해 보였다.

이윽고 장 내관이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찮겠군요.”“네?”뭐가 괜찮다는 겁니까?

“당분간은 왕세자 저하를 귀찮게 할 사람들은 없을 것 같소.”장 내관의 말에 라온은 눈을 깜빡이며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정신없이 오고가는 사람들.

술에 취해서 흥청망청 하는 것 같아도 사실 조선을 방문한 대국의 사신들이나 그들을 대접하는 관리들이나 저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하고 있었다.

사신단에 포함된 여인들은 그보다는 아무래도 움직임이 덜했으나 틈틈이 영을 훔쳐보고 있어, 언제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아니에요. 내 말을 믿으세요. 오늘은 더 이상 세자저하를 귀찮게 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그걸 어떻게 아시옵니까?”“흐름이 그래요. 흐름이.”“흐름요?”흐름이라니. 대체 뭘 보고 흐름이라고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대체 뭡니까?

장 내관이 턱을 쓰다듬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소. 이건 그냥 알 수 있는 거라서.”“그냥 알 수 있다고요? 어떻게 말이옵니까?”뭔가 득도한 노승이나 할 법한 말에 라온은 다시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글쎄요. 말하자면 변덕스런 봄 날씨를 알아내는 방법과 상통한다고 보면 될 것이오. 구름의 모양을 보거나 바람의 흐름을 봐도 언제 비가 오고 언제 날이 갤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지만, 의외로 손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소?”장 내관의 긴 설명에도 불구하고 라온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변덕스러운 날씨를 알아낼 방법이 있단 말이옵니까?”“있지요. 거의 모든 집안에 신묘한 점쟁이처럼 내일 날씨를 점쳐 주시는 분이 한두 분씩은 있지요.”장 내관이 웃으며 허리를 짚어보였다.

“눈과 머리가 아닌 몸으로 날씨를 예측하시는 분들 말이오.”“아!”뭔가 생각났다는 듯 라온이 양 손바닥을 마주쳤다.

몸으로 날씨를 예측하시는 어르신들의 신경통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말인즉, 뚜렷한 근거는 없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자, 그러니 날 믿고 좀 쉬시오.”“하오나…….”“정히 불안하면 세자저하께서 목 태감과 담소를 나누는 동안만이라도 잠시 쉬세요.”라온이 영을 바라봤다. 영과 담소를 나누는 목 태감은 이번 사신단을 이끌고 온 사신단의 우두머리였다.

보아하니 대화가 꽤 길어질 것 같았다.

“원래 이리들 짬짬이 쉬는 거라오. 그렇지 않고 어찌 버티겠소. 연회가 오늘 하루만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신단을 위한 연회가 내일도 계속될 것이고, 그 다음날은 가배진연에 또 다음날은 회작연까지 있으니. 첫날부터 이리 무리할 필요 없어요. 저기, 병풍 뒤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쉴 수 있는 천혜의 요소가 있다오.”“그럼 잠시만 다녀오겠사옵니다.”“세자저하의 담소가 끝나는 대로 내 홍 내관에게 기별을 하리다.”“감사하옵니다.”라온은 장 내관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서둘러 병풍 뒤로 돌아갔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까부터 잠시라도 앉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던 것이다.

모처럼 쉴 수 있다는 생각에 라온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장 내관이 말한 병풍 뒤 천혜의 요소엔 선객이 있었다.

“참의영감.”예조참의 김윤성이 라온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홍 내관께서도 쉬러 오신 모양입니다.”“……네.”“이리 앉으십시오.”“아, 아니옵니다.”“하루 종일 저하의 뒤에서 서 있질 않으셨습니까. 그래서야 제대로 걷기라도 하겠습니까. 잠시라도 쉬세요.”“저는 괜찮습니다.”어디라고 감히 환관이 예조참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을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라온은 손사래를 쳤다.

그 곤란한 기색을 알아차린 듯 윤성이 자신의 옆자리에 있던 의자를 슬그머니 뒤로 반쯤 빼주었다.

“이리하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겁니다.”“정말 괜찮사옵니다.”그녀의 눈을 빤히 쳐다보던 윤성이 예의 빙긋, 보기 좋은 웃음을 입가에 떠올렸다. 마치 라온의 속을 훤히 꿰고 있다는 표정이다.

“그러지 말고 앉으십시오.”“제가 어찌 참의영감과 나란히 앉겠사옵니까?”“걱정 마십시오. 내가 홍 내관과 의논할 일이 있어 잠시 앉으라 청했다고 하면 그만입니다.”“저 같은 소환내시가 감히 예조참의와 의논할 일이 무에가 있겠사옵니까.”지나가는 참새도 믿지 않을 거짓말입니다.

“내가 있다고 하면 그만입니다. 뉘라고 내게 그 의논할 것이 무어냐고 꼬치꼬치 묻겠습니까.”그 자신만만한 태도에 라온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닌 게 아니라, 예조참의 김윤성의 존재감은 라온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대단했다.

오랫동안 청국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탓인지, 윤성은 이번에 조선을 찾은 사신단 일행들과 제법 친분이 두터워보였다.

청국의 사신들은 사소한 문제부터 제법 큰 사안에 이르기까지 모두 윤성의 견해를 듣고 결정을 내릴 만큼 그에 대해 깊은 신뢰를 보였다.

비단 청국의 사신들뿐만 아니라 조선의 신료들마저도 사신단과 관련한 일이라면 윤성부터 찾아댔다.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노비들에게까지 꼬박꼬박 존대를 하는 겸손한 성격 탓에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엄지를 추켜세우며 그를 칭송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덕분에 윤성은 하루 종일 그야말로 정신없이 바빴다.

하지만 동분서주한 만큼 그는 조정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의 행동을 트집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아니, 한 사람은 있구나.’화초저하, 그분이라면 지위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참의영감께 한 마디 할 수도 있겠지.

“이 병풍 뒤를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니, 걱정 말고 편히 쉬어도 됩니다.”거듭된 윤성의 권유에 라온은 주춤주춤 의자를 향해 다가갔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앉아서 쉬자. 정말 잠깐만 앉았다 일어나면 괜찮을 거야.

라온은 ‘이제부터 우리는 공모자’라는 듯한 눈빛으로 윤성을 응시했다.

라온의 커다란 눈 속에 담긴 속내를 읽은 듯 윤성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그 따스한 미소에 라온은 저도 모르게 따라 웃고 말았다.

“그럼 아주 잠깐만 앉겠습니다.”“푹 쉴 수 있도록 내가 홍 내관의 병풍 노릇을 해 드리겠습니다.”“아니옵니다. 참의영감께 감히 그런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어찌 그리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우리가 남입니까?”“네?”남이 아니면 뭡니까?

윤성이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이듯 말했다.

“비밀을 공유한 사이가 아닙니까.”“……!”이 양반이. 그 비밀이라는 말, 하지 말라니까요.

라온은 반사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걱정 마세요. 아무도 들은 사람 없습니다.”윤성이 친근한 미소를 지었다.

허물없이 대하는 태도가 마치 십년지기 벗을 대하는 듯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덕분에 오늘 하루 동안 라온은 윤성이 많이 편해졌다.

이런 친화력이야말로 우리 화초저하께 꼭 필요한 능력인데…….

영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그 융통성 없는 냉랭한 표정이 생각났다. 윤성과는 사뭇 대조되는 표정이었다.

영이 눈보라치는 시린 겨울이라면 윤성은 꽃피는 따뜻한 봄날이었다.

저 온화한 온기 한 자락을 저하의 심장에 심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라온은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의자에 앉자 피로가 자르르 풀렸다.

아, 이제야 살 것 같다.

의자 등받이에 깊게 등을 파묻고 있자니 윤성의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그런데 세자저하께선 아직도 여자 얼굴을 구별하지 못하시는 모양이로군요.”윤성의 담담한 한 마디에 라온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알고 계셨습니까?”“물론, 알고 있습니다.”뭐야? 화초저하께서 여자 얼굴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거.

혹시 궁 안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 아니야? 무슨 놈의 궁에 이리 비밀이 없어?

“언제까지 그리 서 계실 생각이십니까?”윤성이 빙그레 웃으며 의자를 툭툭 쳤다.

라온이 다시 자리에 앉자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왕세자 저하의 사소한 결점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저 또한 어린 시절부터 왕세자 저하와 친분이 있다 보니 우연히 알게 된 것이지요. 아마,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와 홍 내관을 포함해서 채 다섯 명이 안 될 것입니다.”“그렇습니까?”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친인척을 모두 포함해서 고작 다섯 명밖에 모르는 영의 비밀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들떴다.

“저하께선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분이라면 어린 시절에도 지금처럼 얼음냉기 풀풀 풍기며 다니셨을 것 같습니다.”“그럴 리가요. 저하께서도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어요. 어린 시절엔 곧잘 소리 내어 웃고, 속상한 일이 생기면 엉엉 울기도 하셨지요.” “설마요.”화초저하께서 소리 내어 웃고 울었다고? 도무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정말이라니까요.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지요. 세자저하와 저하의 배동,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이 몰래 궁을 빠져나갔던 적이 있었어요. 온갖 모험을 하며 말썽도 부리고 새 벗도 만들며 시간을 소일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들켰지 뭡니까.”“저런,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당연히 혼쭐이 났지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저하께서 갑자기 사라지신 바람에 궁궐이 발칵 뒤집혔다지 뭡니까. 그 이후로 왕세자 저하껜 그림자 무사가 꼭 붙어 다니게 되었답니다. 명목은 세자저하의 안위를 지킨다는 것이지만, 사실은 또 말없이 사라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감시랍니다.”“설마 지금까지 그리 감시하는 건 아니겠지요?”“모르지요. 겉으로는 빈틈없이 철두철미한 모습이지만, 듣자하니 요즘도 가끔은 아이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더군요.”바로 그때였다.

“최 내관!”동궁전 섭리를 찾는 영의 목소리가 병풍 너머에서 들려왔다.

윤성이 씩 웃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입니다.”라온은 서둘러 병풍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내 그녀의 눈에 단상에 앉아 있는 영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와 담소를 나누던 목 태감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담소가 끝나면 알려주신다더니. 흐름이니 본능이니 자신만만해 하시던 장 내관님, 대체 어디로 가신 겁니까?

장 내관을 찾지 못한 라온은 영의 뒤편에 시립했다.

그런 그녀는 돌아보지 않은 채 줄곧 최 내관에게 시선을 집중한 영이 말했다.

“최 내관, 그만 침소로 돌아가야겠다.”“지금 말이옵니까?”최 내관이 의아한 기색을 눈가에 띄웠다.

연회는 어느덧 파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세자께서 자리를 비운다고 하여도 큰 지장은 없었다.

하지만 영은 언제나 연회의 가장 끝까지 남아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는 하였다.

오늘도 마찬가지라 생각하였건만. 아무래 우리 저하께 무슨 심기 불편한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최 내관의 얼굴에 근심하는 빛이 떠올랐다.

“사신들이 조선에 머무는 시간이 짧지 않으니. 못다 한 이야기는 차후에 하기로 하고. 마음껏 여흥을 즐기도록 하라. 혹여 따로 나와의 만남을 원하는 자가 있다만 처소로 안내하면 될 것이다.”“명 받자옵니다.”최 내관에게 연회의 뒷정리를 명한 뒤 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벅저벅, 침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던 그가 문득 멈춰 섰다. 여전히 정면을 주시한 채로 영이 말했다.

“뭐하고 있는 것이냐?”“…….”“홍라온, 게서 뭐하고 있는 것이야?”“네?”영의 부름에 라온이 쪼르르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연회 동안에는 내 곁에서 잠시도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말, 그새 잊은 것이냐?”말을 마친 영은 성큼거리는 걸음으로 중희당을 나섰다.

머쓱한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라온이 저 뒤, 병풍 앞에 서 있는 윤성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꾸벅, 인사를 마친 라온이 한달음에 영의 뒤를 쫓았다.

***

저 멀리 걷던 영이 눈앞에서 사라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성큼 거리는 영의 큰 보폭을 따라잡지 못해 라온은 종종 걸음 쳤다. 하지만 그 걸음마저도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홍 내관, 홍 내관.”윤성이었다.

“참의영감.”무슨 일이기에 이리 급히 달려오신 겁니까?

“이걸 잊고 갔습니다.”“이건…….”헐레벌떡 달려온 윤성이 소맷자락에서 꺼낸 건 아까 라온이 맛있게 먹었던 약과였다. 왕족과 왕실의 빈객들만이 먹을 수 있다는 바로 그 약과.

“이걸 왜 주시는 것이옵니까?”“아까 홍 내관이 맛있게 먹는 거 같아 따로 준비해 달라 하였습니다.”“아니옵니다. 너무 과한 배려입니다.”“이왕 장만한 음식이니 맛있게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윤성이 라온의 손에 반 강제로 약과를 쥐어 주려는 순간이었다.

“그 아이에게서 떨어져라.”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윤성과 라온,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뒤로 돌아갔다.

이윽고.

밤이 그려낸 어둔 그늘 아래서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겨울 빙설처럼 차가운 한기를 품은 사내, 영이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영은 라온을 잡고 있는 윤성의 손을 밀쳐냈다. 그리고는 라온을 자신의 가슴 쪽으로 잡아당겼다.

질세라 윤성이 라온의 곁에 바싹 다가서며 말했다.

“소인이 홍 내관에게 긴히 줄 것이 있사옵니다.”“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주면 된다.”“사소한 것이옵니다.”“사소한 것이라면 더더욱 필요 없다.”라온을 사이에 두고 두 사내가 얼굴을 마주했다. 둘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유백색의 달빛이 팽팽한 긴장감에 부풀어 올랐다.

부풀어 오르는 공기 한 중간에 라온이 말간 얼굴로 서 있었다.

대체 왜들 이러십니까?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터질 듯한 팽팽한 긴장감 위로 영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조참의가 예서 무엇하고 있는 것이냐?”“여기 있는 홍 내관이 하루 종일 굶은 듯하여 요깃거리를 챙겨주려 왔사옵니다.”“내 환관의 굶주림을 어찌하여 예조참의가 신경을 쓰는 것이냐?”“환관이든 예조참의든 모두가 조선을 위해 일하는 자들이 아니옵나이까. 서로 돕는다고 하여 이상한 것은 없다 생각하옵니다.”“오지랖이다.”“네?”“이 아이는 나의 사람이니. 내 사람은 내가 챙길 것이다. 그러니 참의는 그만 신경 꺼라.”영의 단호한 말에 윤성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여전히 신(臣)에게는 차가우시군요.”“볼일이 끝났다면 그만 물러가라.”“……하오면 오늘은 그만 물러가겠나이다.”잠시 머뭇거리던 윤성은 라온에게 눈빛 인사를 건네고는 뒷걸음질로 물러갔다.

윤성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라온은 영을 의아한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왜 그리 차갑게 대하십니까? 예조참의는 저하의 외사촌이 아닙니까? 조금은 따뜻하게 대하셔도 되질 않겠습니까.”“그러기에 이리 대하는 것이다.”“그건 무슨 말씀입니까?”“깊은 내막까지는 네가 알 필요 없다.”“두 분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리 차가운 눈빛 하지 마십시오.”“네게 호의를 베푼다고 해서 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궁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곳이야.”“뭔가 의미심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특별한 의미는 없다. 다만…….”“다만?”“이 궁에는 이유 없는 호의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그렇다면 화초저하께서 저에게 베푸신 호의도 뭔가 의도가 있으신 것입니까?”저도 모르게 불퉁스럽게 내뱉던 라온은 뒤늦게 제 입을 손으로 가렸다.

다행히 영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의도라……. 과연, 그럴 수도 있겠구나.”오히려 실금 같은 미소가 입가에 그려졌다.

“그만 가자.”돌연 영이 라온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어딜 가자시는 겁니까?”“말하지 않았느냐? 내 곁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라고.”“네?”“지금 세 발짝 떨어졌다. 두 발짝 더 가까이오지 않고 뭐하느냐?”“잠시만요.”라온이 영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저하의 곁을 지키라는 말, 설마 밤에도 지키라는 뜻은 아니겠지요?”“밤에는 나를 찾는 사신이 없다더냐?”“그럼 저는 어디서 자는 겁니까?”“당연히…… 내 침소지, 어디긴 어디겠느냐.”“그러니까 절 더러 화초저하의 침소에서 자란 말씀입니까?”“그래. 그런 말이다.”지금 상당히 위험한 발언 하신 거 아십니까?

그러나 라온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영은 그녀의 손목을 잡은 채 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자러 가자. 자칫하다간 예서 밤을 새겠구나.”영의 손길에 잡힌 채 라온은 고분고분 발걸음을 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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