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마음에 들지 않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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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4
가배를 이틀 앞두고 기치를 앞세운 청국의 사신들이 한양에 당도했다.
태평관에 여장을 푼 사신들이 곧 입궐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궁은 더욱 분주해졌다.
청나라 사신들을 위해 베푸는 연회인 하마연(下馬宴)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인정전 앞에 거대한 차일이 쳐졌고 왕과 왕족들이 상석에 자리했다. 이어 정전의 너른 뜰에 놓인 품계석에 따라 신료들과 청나라 사신들이 좌정했다.
그 와중에도 임시로 마련된 숙설소(熟設所)에 100여 명의 대령숙수들이 산해진미를 만드느라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정전 앞 하월대(下月臺)에선 장악원 소속의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했고 더불어 여령(女伶)들이 춤과 노래로 연회의 분위기를 고취시켰다.
그렇게 시작된 연회는 늦도록 이어졌다.
밤이 되자 연회의 장소는 동궁전으로 옮겨졌다.
사잇문을 모두 걷어 올린 중희당에 새로운 연회상이 마련되었다.
몇 순배 돈 술로 청나라의 사신들은 정전에서보다는 조금은 느른하게 풀린 표정으로 흥취를 즐겼다.
모든 것은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칙사들은 즐거워했고, 그들을 맞이한 조선의 대신들도 한결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대접했다.
그러나 한 사람, 왕세자 영은 예의 빙설 같은 얼굴로 사람들의 범접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전신에서 피어나는 차가운 기운에 절로 주눅이 들어버린 듯 청국의 사신들마저도 그의 눈치를 살폈다.
물론 아랑곳하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저분은 지치지도 않는군.’영의 등 뒤에서 병풍처럼 서 있던 라온은 단상을 향해 다가오는 한 여인을 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이번 사신단은 청국과 조선, 양국 간의 문화교류에 목적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음악과 춤에 관련된 장인들이 여럿 사신행에 참여했다. 그 중에 여인의 수는 모두 일곱이었다.
저마다 악기와 노래, 그리고 춤에 특별한 재주를 지닌 여인들이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눈에 띄는 엄청난 미인들로 한번 보면 잊으래야 잊을 수가 없는 여인들이다.
그 일곱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미모를 지닌 여인이 있었다.
붉은 바탕에 화려한 황금빛 모란꽃이 수놓인 길복(吉服), 갖가지 꽃모양의 장신구와 점취장식으로 모양을 낸 머리 장식한 여인이 영을 향해 붉게 칠한 입술을 길게 늘이며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청나라 5황자의 딸인 소양공주였다.
청나라 제후국의 공주라는 신분 탓일까? 그녀는 타인의 시선에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영의 냉랭한 표정마저도 상관하지 않는 듯했다.
소양공주는 청국 최고의 비파 연주가 자격으로 이 사신행에 참여했다.
그러나 오늘 하루 보여준 공주의 태도는 그녀에겐 또 다른 저의가 숨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소양공주가 영을 향해 유혹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왔다.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볼우물을 만들었다. 그 은근한 유혹에 당황한 것은 영이 아니라 그 뒤에 서 있던 라온이었다.
여인임에도 너무도 당당한 감정표현에 민망한 마음마저 들었던 까닭이다.
청나라의 여인들은 조선의 여인들과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조선의 여인들이 청초하면서도 수줍은 봄꽃이라면 청국의 여인들은 한껏 만개한 화려한 여름 꽃이었다.
겸양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조선의 여인들과 달리 그들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다.
특히나 마음에 드는 사내를 보았을 때 그들은 수줍어하는 대신 당당한 유혹을 택했다.
사내는 누구나 호색한 법. 특히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의 유혹 앞에 태연할 수 있는 사내는 좀처럼 드물었다.
소양공주의 대담하고 당당한 유혹의 바탕에는 그런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공주마마 세상에는 예외란 존재하는 법이랍니다. 하필이면 화초저하께 마음을 두실 것은 무엇이람.
영을 향한 소양공주의 은밀한 유혹에 라온은 눈에 띄지 않도록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 여인은 뉘더냐?”영의 작은 목소리가 라온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온갖 화려한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모자를 정도로 아름다운 공주셨건만.
영의 눈에는 다른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구분되지 않는 얼굴 중에 하나였을 뿐이다.
“소양공주이십니다.”그리고 제가 이렇게 대답하는 것도 벌써 세 번쨉니다.
“저 여인이 소양공주라고?”그 새삼스러운 되물음에 라온은 다시 한 번 한숨을 짓고 말았다.
이제는 저 화려한 미인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어떻게 매번 이렇게 알아보지 못하는 걸까? 놀랍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또한, 어째서 영이 자신을 그림자로 세운 것인지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었다.
왕세자께서 사신으로 온 여인들을 구별조차 못 한다면 단순한 비웃음을 넘어서, 상대국을 무시한다는 자칫 심각한 오해를 초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용케 중전마마나 누이들의 얼굴은 알아보는 듯하니,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이려나?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소양공주가 걷어 올린 덧창 문 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시각은 해시초(亥時初:밤9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던 터라. 검은 융단처럼 펼쳐진 밤하늘에는 둥근 달이 걸려 있었다.
유백색의 달을 그윽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소양공주가 시선을 돌려 영을 응시했다.
“조선의 달은 참으로 아름답사옵니다.”아련한 목소리에 뭔가 기대하는 바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 기대하는 바를 파악하지 못한 무딘 사내는 예의 건조한 어조로 대답했다.
“달이야 어느 곳이든 공평하게 뜨는 것, 조선의 달이라고 특별히 아름다울 리 있겠소?”이쯤 하였으면 다른 여인이라면 일찌감치 마음을 접고 물러났을 것이다.
그러나 소양공주는 다른 범상한 여인들과는 달랐다.
“오늘처럼 달빛이 환한 날엔 창덕궁의 자태가 사뭇 곱다 들었사옵니다.”“청국의 이화원도 이곳 못지않다는 소리를 들었소.”“소녀의 눈에는 이화원의 달빛보다 이곳, 창덕궁의 달빛이 훨씬 곱사옵니다. 저 달빛을 등불 삼아 산책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소양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좀 더 노골적으로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비파연주가의 자격으로 이번 사신행에 따라 나서라는 아비의 명을 받았을 때 소양은 그저 귀찮은 마음뿐이었다.
조선과의 문화교류라는 명분도 그녀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지 못했다.
작고 보잘것없는 나라와 무에 교류할 것이 있다고. 조금은 얕잡아보는 심정으로 떠나온 사신행이었건만.
하마연에 참석한 왕세자 이영을 보는 순간, 투덜대던 그녀의 마음은 먼지처럼 사라졌다.
한순간에 미혹되었다고 할까? 영을 보는 순간, 소양공주는 어떤 운명을 느꼈다.
하늘이 이 조선이라는 나라로 자신을 이끈 것은 오로지 저 이영이라는 사내와 만나게 하기 위함이리라.
제 멋대로 운명을 재단해버린 그녀는 조선에서 머무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그를 유혹하리라 작정하였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다른 사내의 마음일랑은 단박에 녹여 버렸던 자신의 미소 앞에서도 왕세자는 줄곧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왕세자께서는 부끄러워 마음을 숨긴 것이 분명했다.
이 소양이가 이 정도에 쉽게 물러설 줄 알았습니까?
“달빛이 쏟아지는 연못물은 또 얼마나 고울 것이며, 달빛을 받은 꽃들은 또 얼마나 아름답게 하늘거릴까요? 아, 궁금하여라.”“…….”잠시 소양공주를 바라보던 영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리 궁금하시다면…….”영이 말하는 순간, 소양공주는 저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키고 말았다.
드디어 왕세자께서 꽁꽁 가둬놨던 마음의 빗장을 풀고 자신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것이 틀림…….
“안내해 줄 사람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소.”“……!”전혀 예상 밖의 대답에 소양공주의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자존심에 단단히 상처를 받은 듯 그녀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물러갔다.
“저하.” 보다 못한 라온이 영의 귓전에 바싹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무슨 소리더냐?”“공주께서 말씀하시는 뜻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달빛의 정취를 즐기고 싶다는 말은 단순히 궁을 구경을 하고 싶다는 말이 아닙니다. 당신과 함께 산책을 하고 싶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이제 보니 화초저하, 여자 얼굴만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눈치도 좀 없으신 것 같습니다.
라온의 말에 영이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다.”“네?”“공주께선 지금 나와 함께 달구경 하자는 것이 아니더냐?”“알고 계셨습니까?”라온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걸 알고 계셨으면서도 모르는 척 시침을 떼신 것입니까?
“내 비록 여인의 얼굴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소한 결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눈치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그렇다면 어이하여…….”그리 눈치가 없는 척하셨습니까?
“몰라 묻는 것이냐? 당연히 그녀와 함께 하고 싶지 않아서다.”“어째서요?”라온은 거듭 이유를 물었다.
소양공주는 청국 황자의 공주. 신분으로 보나 미모로 보나 영에게 안성맞춤이라 할 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영이 대답 대신 손을 들었다.
“공주께서 또 오는구나.”라온이 고개를 들었다.
과연 영의 말대로 소양공주가 다시 단상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라온은 놀란 얼굴로 영을 봤다.
화초저하께서 소양공주를 알아본 거야? 이제 드디어 여자 얼굴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 화초저하의 사소한 결점도 마침내 사라진 것일까?
“화려한 의복과 치렁치렁한 장식이 눈에 띄는군.”그럼 그렇지. 얼굴을 알아본 게 아니라, 옷과 장신구를 보고 알게 된 거로군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소양공주가 영을 향해 예를 취했다.
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고 눈으로 다시 찾은 연유를 물었다.
“선물할 것이 있었다는 것을 그만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공주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뒤쪽으로 눈짓을 보냈다.
눈짓을 받고 들어온 청국의 환관이 길고 커다란 보퉁이를 내려놓았다.
“청국의 거문고 장인이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거문고이옵니다. 저하의 거문고 소리가 그리 아름답다는 풍문이 청국에까지 전해졌던 터라. 청국의 황제께서 특별히 명을 내리시어 만든 것이지요.”“그렇소?”영이 거문고를 세심한 눈길로 살폈다.
화려하게 장식된 용두(龍頭)와 담백하게 마무리된 봉미(鳳尾)가 한 폭의 산수화처럼 어우러졌다.
통 위를 흐르는 여섯 가닥의 줄은 마치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폭포수처럼 신비로운 백색 광채를 자아내고 있었다.
“훌륭한 물건이오.”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자 공주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왕세자 저하께서 연주를 해 주신다면, 이 보물의 가치가 더욱더 빛날 것이옵니다. 그 아름다운 소리를 소녀가 경청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겠사옵니까?”소양공주의 얼굴이 다시 한 번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이번에도 영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디에서 들은 소문인지 모르겠으나, 내 솜씨는 그리 뛰어나지 못하오. 미욱한 솜씨로 보물의 가치를 욕보일까 두렵구려.”완곡했지만 더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만큼 확고한 거부였다.
“하오면……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나이다.”소양공주는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는 얼굴로 중희당을 나가버렸다.
그러나 한껏 끌어올린 입술 끝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라온은 놓치지 않았다.
“저하, 여인이 한을 품으며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 못 들어보셨습니까?”“들어봤다.”“그런데 어쩌자고 여인이 서리를 품을 만큼 냉정히 대하는 것입니까? 게다가 저분이 뉘옵니까? 청나라 황자의 따님이 아닙니까? 당장에 무얼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그 마음을 받아주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온의 지청구에 영이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싫은데도 좋은 척 거짓연기를 해야 하겠느냐? 과연 공주가 바라는 것이 그런 것일까?”영의 물음에 라온은 말문이 막혔다.
사소한 말로도 쉬이 상처받는 여인이라면 분명 거짓일지언정 좋아한다 말해주길 바랄 것이다.
하지만 소양공주도 그럴까? 그녀의 적극적인 성정을 보면 거짓된 고백은 오히려 그녀의 심기를 상하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어느 것이 정답인지는, 여인에 관한 것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다며 자부하던 라온조차도 판가름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것은 또 하나 있었다.
소양공주를 바위 보듯 하는 화초저하의 태도에 왜 자신의 마음이 흐뭇해지는 것일까.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
연회의 자리는 밤이 늦도록 계속 되었다. 살집이 두둑하게 오른 청국의 사신들은 끊임없이 차려지는 음식을 끊임없이 먹어치웠다.
그 와중에도 오직 한 사람, 영만은 왕세자의 위엄을 잃지 않았다.
황제의 칙사라는 이유로 거들먹대는 사신단의 우두머리, 목 태감(太監:청나라 환관의 우두머리)조차도 왕세자 영 앞에서는 자라처럼 움츠려들었다.
그 모습에 거대한 바람벽을 두르고 있는 듯 라온은 절로 든든해졌다. 영이 있으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었고,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단단한 바람벽의 사소한 결점 때문에 라온은 쉴 틈이 없었다. 소양공주 이후에도 사신들과 함께 온 여인들이 영에게 접근해왔던 까닭이다.
소양공주만큼은 아니었지만 다들 고귀한 신분의 여인들이었다.
여인들의 접근 방식은 각양각색이었다.
더러는 은밀히 전할 소식이 있다며 조용한 장소에서 단둘이 만날 것을 청해왔다.
영은 그 조용한 장소에 자신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최 내관을 대신 내보내는 것으로 거부의 의사를 전달했다.
어떤 여인은 눈물로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빙벽 같은 사내는 그 애련한 눈물 앞에서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녀들을 대하는 영의 자세는 오직 하나로 일관되어 있었다.
그제야 소양공주에게 보인 완강한 태도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왕세자 영은 이 나라의 국본임과 동시에 상징적인 존재라. 그의 작은 행동 하나마저도 큰 의미가 되는 것이니.
단 하나도 쉽게 생각하고 가볍게 움직일 수 없음이었다.
문득 영을 바라보는 라온의 눈길이 깊어졌다.
가장 높은 곳에 있기에 가장 외로운 존재, 그것이 바로 영이었다.
왕세자의 위엄과 권위로 스스로 무장한 채 단 한 번도 흐트러짐 없이, 꼿꼿한 자세로 단상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인간 같지 않군.
사람이 어떻게 저리 단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인지.
‘무서운 분.’라온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휘휘 가로로 저을 때였다.
-꼬르륵.
느닷없는 소음이 뱃속에서 들려왔다. 생각해 보니 왕세자를 보필한다는 중압감에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제대로 입에 대지 못했다.
오랜 시간 한 자리에 서 있었던 탓에 다리는 퉁퉁 부었다.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왕세자를 보필하느라 자신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망각했던 것이다.
갑자기 허기와 피곤함이 밀려들었다.
‘아, 물 한 모금 마셨으면 소원이 없겠네.’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던 라온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손등으로 훔칠 때였다.
“많이 힘드신 모양이군요. 여기 차라도 한 잔 하시지요.”“네. 고맙습니다.”라온은 무심코 차를 받아 마셨다.
그런데 어라? 누가 내게 차를 준 거지?
뒤늦게 든 궁금증에 고개를 돌렸다.
“어엇!”라온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새어나왔다.
청수한 얼굴 가득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사내, 다름 아닌 윤성이었다.
예조참의의 자격으로 연회에 참석한 윤성은 마치 여인을 대하는 듯 여러모로 라온을 챙기고 있었다.
물론, 다른 이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교묘한 배려였지만 살뜰하기 그지없었다. 그 살뜰한 배려에 라온은 어색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라온이 굳은 얼굴로 머뭇대자 그가 재촉하듯 말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지 않았습니까? 저하께서 목 태감과 담소를 나눌 동안에 조금이라도 먹어 두세요.”“저는 괜찮사옵니다. 그러니…….”너무 관심 두지 마세요. 사람들이 보잖아요.
아닌 게 아니라, 윤성이 라온에게 다가올 때마다 묘한 시선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대부분 여인의 시선들이었다. 자신의 몫이 아는 듯한 배려에 라온은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뺐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윤성은 이번엔 엽전 크기의 약과를 건네 왔다.
“저는 괜찮사옵니다.”“어허, 제 손을 자꾸만 부끄럽게 할 작정입니까?”“하오나…….”이리 거절하는 것이 더 눈에 띌 터.
어쩔 수 없이 라온은 약과를 얼른 입안에 밀어 넣었다.
입안에 넣는 순간, 봄눈처럼 사르르 녹는 약과의 맛에 라온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그 모습을 슬그머니 곁눈질 하던 윤성이 손에 들고 있던 약과 전부를 라온에게 건넸다.
“이것도 마저 먹으십시오.”“아니옵니다.”말을 하는 와중에도 단침이 입 안에 고였다.
“나는 너무 먹었더니 배가 터질 지경입니다. 그러니 홍 내관이 나 좀 도와주세요.”“정히 그러시다면…….”라온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약과를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맛이 어떠합니까?”“맛있습니다.”“왕실의 비법으로 만든 특별한 약과라 그런 것입니다. 오직 왕족들과 왕실의 빈객만이 먹을 수 있는 귀한 약과지요.”“……!”맛있게 약과를 씹던 라온은 우뚝 멈추고 말았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 약과가 왕족과 왕실의 빈객만이 먹을 수 있는 귀한 것이라고요?
“그, 그리 귀한 것을 제가 먹어도 되는 것이옵니까?”걱정하는 빛이 고스란히 라온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그 모습을 곁눈질하던 윤성이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마 홍 내관이 그 약과를 먹었다는 사실을 남들이 알게 되면…….”“알게 되면요?”“왕실 능멸 죄로 태형을 당할지도 모릅니다.”“으앗!”놀란 라온이 서둘러 입안에 든 것을 뱉어내려했다.
“하하하, 농입니다, 농이에요.”“농…… 이라고요?”“농이고말고요. 하지만 그걸 먹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정말 곤욕을 치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윤성이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들고 있는 건 증거인멸차원에서 빨리 먹는 게 좋을 겁니다.”“…….”라온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윤성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귀엽다는 눈빛으로 마주보던 윤성이 예의 웃는 낯으로 말했다.
“연회는 오늘부터 시작입니다. 처음부터 이리 무리했다간 얼마 가지 못해 지쳐 쓰러질 것입니다. 사내들도 감당하기 힘든 일이란 말입니다. 하물며 홍 내관은…….”약과를 먹던 라온은 윤성의 말에 사레가 걸리고 말았다.
“콜록. 콜록.”사레들린 기침을 하는 라온에게 윤성이 얼른 마실 것을 가져다주었다.
“이런…… 놀라셨군요. 미안합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데……. 전에도 말했다시피 홍 내관의 ‘비밀’은 기필코 지킬 것이니 심려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간신히 진정한 라온이 윤성을 빤히 바라봤다.
비밀.
윤성은 라온이 여인이라는 가장 큰 비밀을 알고 있다.
행여 밝혀지기라도 했다간 죽음을 면치 못할 대죄. 다행히 윤성은 그녀의 비밀을 지켜주기로 약조하였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언젠가 라온이 그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는 것. 그 소원이 무엇일까? 궁금했지만 윤성은 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때가 되면 말해줄 거라는 묘한 대답을 끝으로 윤성은 그 일에 대해 함구했다.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몇 번 본 윤성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닌 듯했다.
게다가 이리 틈이 날 때마다 자신을 챙기는 것을 보면 결코 라온에게 위해가 되는 일을 벌이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분명 비밀을 지켜주신다 하셨습니다.”라온은 쐐기를 박듯 다시 말했다.
“네. 분명 홍 내관과 그리 하기로 약조하였지요.”“인륜과 천륜에 어긋나는 일이면 들어드릴 수 없다는 말도 분명히 했습니다.”“분명 그리 들었습니다.”다시 한 번 확답을 받은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 또한 약조를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저의 ‘비밀’에 관한 것은 언급도 하지 말아주셨으면 하옵니다.”“그리 원하신다면 그리 하겠습니다.”라온의 강한 어조에도 윤성은 입가에 드리운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런, 시간이 벌써 많이 늦었군요. 연회는 아직 두 시진 정도 더 이어질 듯하니, 혹여 먹고 싶은 거라도 있으면…….”윤성은 마치 친 오라비처럼 자상하게 필요한 것을 물어왔다.
비록 여인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일평생으로 남장한 채로 사내처럼 살아온 라온이었다.
이 새삼스러운 배려에 어찌 대응해야 할지 처신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아하하, 제가 외유내강(外柔內剛) 형이라, 참의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허약하지 않사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저는 정말로 괜찮사옵니다.”라온이 슬금슬금 그의 곁에서 멀어졌다.
질세라 윤성이 옆걸음으로 라온을 뒤쫓았다. 눈여겨보지 않는다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은밀한 술래잡기였다.
그러기에 중희당에 모여 있는 그 누구도 두 사람의 실랑이를 알지 못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
“저하, 저하…….”뭔가 심기 불편한 일이라도 있는 듯 미간을 찡그리는 영의 모습에 최 내관이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마주앉아있던 목 태감 역시 무에 자신이 실언이라도 하였는가 하여 전전긍긍 좌불안석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영의 신경이 가 있는 곳은 눈앞에 있는 목 태감이 아니라 저 등 뒤에 있는 라온과 윤성이었다.
뭔가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자꾸만 신경을 거슬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단상 위, 웃는 낯의 윤성과 그 곁에 있는 라온을 곁눈질로 바라보던 영이 미간의 주름을 더욱 선명하게 그려냈다.
“그러니까 소인은……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것이 아니오라…….”목 태감은 영의 영문 모를 한 마디에 식은땀을 흘리고 말았다. 포태한 여인처럼 한껏 살이 찐 그의 배가 불안함으로 들썩거렸다.
그런 목 태감의 불안한 마음일랑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영은 단상 위에 있는 두 사람에게로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잠시 후, 영의 불편한 심기를 알기라도 한 것일까?
실랑이를 벌이던 라온과 윤성의 모습이 동시에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영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청국의 칙사인 목 태감이 늘어놓는 이야기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하, 이것도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다른 방법도 있나이다. 그러니까…….”좀처럼 펴질 줄 모르는 영의 표정을 살피며 목 태감이 분주히 눈동자를 굴릴 때였다.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군.”영이 기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소인이 무슨 무례라도 저질렀나이까?”놀란 목 태감이 불안한 얼굴로 작은 눈을 홉떴다.
내가 무슨 실수를 했을까? 대체 뭐지? 뭘까?
물어보고 싶은 마음 굴뚝이었으나, 영의 기세가 워낙에 등등한 탓에 입도 벙긋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불안한 모습으로 전전긍긍하는 목 태감을 뒤로 한 채 영은 어딘가로 옮겼다.
자꾸만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두 사람이 있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