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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35화 (35/131)

35.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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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31

고운 달빛이 라온의 축 처진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그 빛깔, 곱기도 하네.”자선당 안으로 들어서던 라온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궁에서 맞는 마지막 밤일지도 모른다.

아니, 살아서 보는 마지막 하늘이려나? 처소 안으로 들어서는 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어쩌다 여인의 몸으로 환관이 된 것입니까?’문관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메아리쳤다.

그 자리에서는 아니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딱 잡아뗐지만 믿지 않는 눈초리였다.

사내의 물음은 혹시나 라온이 여인이 아닐까 하는 반신반의하여 던지는 질문이 아니었다.

여인이라는 확정 아래 왜 환관이 되었는지 묻는 순수한 호기심과 같은 질문이었다.

사내가 버릇처럼 짓는 미소에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아무래도 들켜버린 것 같은데, 어쩌지? 그보다 그 사내는 어떻게 내가 여인인 걸 단박에 알아냈을까?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그리 확신하며 물었으니, 이제 뒷일은 딱히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내시부 소속의 감찰내시들이 들이닥쳐 자신을 끌고 간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어머니…… 단희야.”이대로 도망질이라도 칠까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도망치면 그 죗값이 고스란히 어머니와 단희에게로 돌아갈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라온은 그저 처분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라온은 처연한 눈길로 방 안 구석구석을 훑었다. 그간 정도 많이 들었는데.

바닥에 깔려 있는 보료를 손끝으로 쓸어내리던 라온은 그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이 따스한 감촉과는 이제 작별해야하나?

“어? 계셨습니까?”대들보 위에 있는 병연의 뒷모습이 라온의 시야에 들어왔다.

맞다, 이 자선당을 떠나게 되면 가장 보고 싶을 한 사람, 김 형이 있었지. 김 형과도 이제 작별인가?

문득 지금까지 자선당에서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처음 병연을 귀신으로 오해하던 일과 보름달이 뜨던 밤, 누각에서 나눴던 즐거운 술자리와 부원군 대감댁에서 라온을 위해 기꺼이 산닭을 잡아주던 병연의 모습이 긴 그림이 되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김 형.”저 아무래도 들킨 것 같습니다. 이제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온이 불렀지만 등을 돌리고 있는 병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무심한 등에 대고 다시 라온이 목청을 돋웠다.

“김 형, 그런데 말입니다…….”병연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다. 그라면 어쩌면 이해해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차마 진실을 털어놓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닙니다.”결국 얼버무린 라온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자선당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고인 물처럼 무거운 공기가 자선당을 채웠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병연이 고개를 들어 라온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아닙니다. 별일 아닙니다.”다시 무거운 적막이 둘 사이를 가로 막았다.

병연이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엔 묻지 않아도 저 혼자 종알종알 말 많던 녀석이 아니던가.

“아직도 몸이 안 좋은 거냐?”“아닙니다. 어제 김 형이 돌봐주신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게다가 화초저하께서 귀한 환을 주셔서 그런지. 이제는 말짱합니다.”“저하께서……?”병연의 눈빛이 깊어졌다.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라온과 병연이 함께 지낸 이후로 가장 긴 침묵이 흘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라온이 병연을 향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김 형.”“…….”“저는 김 형이 좋습니다.”“서책에 주석을 달아준 것도 아닌데.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서책에 주석을 달아주셔서 김 형이 좋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김 형이 좋습니다.”오라비 같아서, 아비처럼 든든해서 너무 좋습니다.

“김 형이 믿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 다시 말씀드리는 겁니다. 다른 건 다 믿지 않으셔도 제가 김 형을 좋아했다는 사실만은 믿으셔야 합니다.”여인인 것을 숨겼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필시 병연은 자신에게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속이고 싶어 속인 것은 아니지만 거짓말을 한 건 피할 수없는 사실이었다.

병연과 영이 자신을 그리 생각하리라는 것을 생각하니 더욱 슬퍼졌다. 적어도 두 사람을 대했던 마음만큼은 진실이라는 것을 미리 말해두고 싶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잠이나 자.”대들보에서 불퉁한 지청구가 날아들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입술을 삐죽 내밀었을 터였지만, 이 밤에는 이런 지청구마저 반가웠다.

“그러게 말입니다.”그을음이라도 삼킨 듯 목안이 따끔해지고 코끝이 알싸하게 아려왔다. 행여 눈물이 나올까 싶어 라온은 이불을 머리 위까지 푹 뒤집어썼다.

자선당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쉽게 잠이 오질 않았다……가 정상이건만.

물색없는 몸뚱이는 제 처한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물 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 채 깊은 잠의 나락으로 라온을 끌고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라니. 이 무딘 신경을 어찌하면 좋을까.

***

잠시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세자저하께서 환을 주셨다더니, 그 환 때문인지 평소와 달리 라온은 금세 잠이 들었다.

대들보에 누워 있던 병연은 아래로 툭 뛰어내렸다.

오늘따라 별스럽게 구는 녀석인지라.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라온의 머리맡으로 다가온 그는 잠든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다 내렸군.”다행이다. 성치도 않은 녀석이 일을 나간다고 하여 내심 걱정하였건만.

그런데 어찌하여 이 작은 얼굴에 근심이 가득일까?

잠시 말없이 잠든 라온을 내려다보던 병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려 했다.

병연이 라온의 이마에서 손을 떼려는 그 순간.

“어머니.”라온의 하얀 손이 병연의 손을 잡았다.

잠이 깬 것인가 하여 보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아마도 꿈을 꾸는 중인듯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라온은 병연의 손을 힘껏 잡고 놓지 않았다.

마치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마지막 동아줄을 잡은 듯 절실한 얼굴로 잠꼬대를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나.. 어떡해요? 나…… 집에 가고 싶어요. 어머니…… 나 이제 집에 가고 싶어. 어머니랑 단희랑 같이 살고……싶어. 같이…….”“…….”손을 빼려던 병연은 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오늘밤도 제대로 자긴 글렀군.”비스듬히 열린 동창 문 틈새로 스며든 달빛이 잠든 라온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유백색의 달빛이 내려앉은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병연은 먼 허공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성가신 녀석.”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상하네.”눈을 뜬 라온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이 깬 라온은 푸른 새벽빛이 스며든 문풍지를 응시했다.

뭐야? 아무 일도 없네. 한밤중이라도 누군가 들이닥쳐 자신을 끌고 갈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사내가 곧장 내시부로 가지 않았던 걸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수 없었으나 확실한 것은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과, 또 하나…….

“늦었다!”용수철처럼 튕겨지듯 자리에서 일어난 라온은 서둘러 차비를 마치고 동궁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오늘부터는 소환내시 교육장으로 가는 대신 곧장 동궁전으로 가서 일과를 시작하라는 명을 받았던 것이다.

다행히도 연회준비와 사신단을 맞이하는 준비로 분주했던 탓에 동궁전의 누구도 라온의 지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동궁전에 도착하니 이미 왕세자 영은 중희당에 들어 서연에 한창이었다.

내관과 신료들을 대하는 모습이 라온이 봐왔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자선당에서 보는 영은 무뚝뚝하긴 했지만 그래도 틈이 제법 많았던 친근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감히 범접할 수없는 위엄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퍼렇게 날이 선 그의 기세에 신료들은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생소한 모습이라 잠시 그 모습을 훔쳐보고 있노라니, 중희당 앞을 지키고 섰던 최 내관이 다가왔다.

“서연 중에는 저하께서 찾으실 일이 없을 터이니. 잠시 쉬고 오게나.”엉거주춤 자리를 지키고 섰던 라온은 중희당의 뒤뜰로 걸음을 옮겼다. 중희당 뒤뜰에는 장 내관이 알려준 천혜의 요소 중 한곳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라온이 뒤뜰에 갔을 때, 그 천혜의 요소는 다른 사람들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도 내관님! 아, 이 내관님과 하 내관님. 안녕하시옵니까?”도기를 비롯한 세 명의 불통내시들이 그곳에 일렬로 쪼르르 앉아 있었다.

“홍 내관 왔소?”도기를 가운데 두고 오른쪽에 앉아 있던 상열이 손을 들어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왼편의 하 내관도 가벼운 고갯짓으로 인사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도기만은 얼굴을 무릎 위에 묻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도 내관님, 무슨 일이라도 있사옵니까?”평소라면 라온이 아는 체 하기도 전에 종종 걸음으로 다가와 이런 저런 얘기를 했을 도기였다.

“그것이…….”곁에 있던 상열이 난처한 표정으로 양손을 비볐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시옵니까?”라온이 도기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시 물었다.

잠시 후, 도기가 마지못해 고개를 드는 순간 라온은 저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헉! 도 내관님.”도기의 통통한 얼굴 가득 눈물이 가득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통통하던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잔뜩 부풀어 있었다.

“왜 이러십니까?”“흐엉, 홍 내관.”“도 내관님. 울지 마시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보십시오.”“그게……흐윽, 개종자, 흑, 내가……흑흑. 태평관, 흑, 끄윽, 그런데 개종자 그놈이, 흑흑, 성 내관이…….”울며 털어놓는 도기의 이야기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체 뭐라는 겁니까?”갑갑한 마음에 라온은 상열을 돌아보았다.

상열이 침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젯밤 늦게 태평관에 청국의 사신단이 도착했소.”“그렇습니까?”“그런데 예정했던 사신단의 인원보다 더 많은 인원이 조선을 찾았고, 당연히 사신들이 머무를 태평관에서 일할 환관도 더 필요하게 되었소. 그래서 예조에서는 부랴부랴 태평관으로 추가로 보낼 환관의 명단을 올리라는 명을 내시부에 내렸소이다.”“태평관에서 일할 환관을 보내는 것인데, 그리 까다롭게 합니까?”“그건 홍 내관이 몰라서 하는 말이오. 사신들이 묵는 동안 태평관에서 일하는 것은 내관들에겐 몇 없는 절호의 기회라오. 사신들과 친해지면 앞으로 벼슬을 얻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사신들과 함께 온 청국의 상인들과도 안면을 틀 수 있으니. 조선의 대상인들이 태평관에서 일하는 환관에게 줄을 대기 위해 안달하는 처지지요. 그러다보니 태평관에서 일하는 환관이 되기 위해 너도나도 지원하는 것이외다.”“아, 그런 것이군요. 그런데 그것과 도 내관님께서 이러시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도기, 이 친구가 태평관의 환관이 되겠다고 지원을 했나보오.”“네? 하지만 불통내시들은 동궁전의 일을 도우라는 명이 있질 않았사옵니까?”“연회 동안 저하의 곁을 지켜야 하는 홍 내관을 제외하고 다른 불통내시들의 일은 어제부로 마무리가 되었다오. 게다가 예조에서 이번 태평관에서 일할 환관은 지난번 강경시험의 성적순으로 뽑는다고 했으니. 도기, 이 친구는 당연히 태평관의 환관이 되리라 생각했던 모양이오.”“그런데 안 되었습니까? 왜요?”“마종자가 방해를 하는 바람에 다른 이가 들어갔어요.”“어떻게 방해한 것이옵니까?”“예조에 올리는 문서에 마종자가 도기 대신 자신이 부리는 자의 이름을 올렸다고 하오.”“그러는 법이 어디에 있사옵니까?”“마종자의 말로는 실수였다고 하는데…….”“실수를 하였으면 바로잡으면 될 것이 아니옵니까.”“그래서 도기 저 사람이 성 내관님을 찾아가 말씀을 드렸지만 소용없었소.”“어째서요?”“이미 문서가 예조에 올라갔다고 하오. 성 내관께서도 내시부의 실수를 예조에서 알게 되는 것이 탐탁찮으니, 다음 기회에 다시 지원해보라 하셨소. 게다가 나오는 길에 마종자에게 자신의 실수를 성 내관에게 고해 바쳤다는 이유로 저리 볼이 붓도록 맞았지 뭐요.”“그럼 저 얼굴이……”울어서 부은 게 아니고 맞아서 부은 거야?

마치 자기가 당한 것 같은 울분에 라온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흐어어어엉.”도기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그 모습에 라온이 버럭 소리쳤다.

“울지 마십시오.”“흐윽…….”“그리 맞기까지 했는데 넋 놓고 울기만 할 겁니까?”“그럼 어쩌겠는가?”콧물을 훌쩍이며 도기가 물었다.

“실수를 바로잡아야지요. 아무리 눈 뜨고 코 베어가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자기 몫의 자리까지 이렇게 허무하게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그렇긴 하지만…….”“마 내관의 실수를 바로 잡을 방도가 없사옵니까? 상선 어르신께 말씀드린다면…….”“상선께서는 요즘 대전 밖으로 한 발짝도 안 움직인다네.”“그럼 다른 방법은 없사옵니까?”“딱 하나 있긴 한데.”“그것이 무엇이옵니까?”“예조를 직접 찾아가 실수를 정정하는 방법이 있긴 하네만.”도기의 말에 라온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그리 하십시오.”“뭘?”“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가난해도 비루하지 말 것이며, 겸손하되 비굴하지 말 것이며, 휘어지되 꺾이지 말라하셨습니다.”“뭐라는 겐가?”도기가 작은 눈을 끔뻑거리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하자면…… 예조를 찾아가자, 이 말이옵니다.”“예조를 찾아가?”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상열과 하 내관이 펄쩍 뛰었다.

“그럼 이리 손 놓고 있을 작정이옵니까? 이리 우는 대신에 부당하게 빼앗긴 권리를 되찾기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해 봐야 할 것이 아니옵니까?”라온이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자네 말이 맞긴 맞네만…….”확고한 라온의 의지에 기가 눌린 상열이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맞장구쳤다.

바로 그때였다.

“홍 내관의 말이 옳네.”도기가 눈물이 범벅인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작은 두 눈을 있는 힘껏 홉 뜬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가서 얘기하세나.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맞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말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우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옵니다.”라온이 도기의 용기를 북돋웠다.

“자네들이 그리 나온다면, 나 역시도 동참하겠네.”상열의 말에 마지막으로 하 내관마저 이 작은 봉기에 동참했다.

“자, 모두 함께 가세나.”의기투합한 다섯 명의 불통내시들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왜 안 가시옵니까?”“그러는 홍 내관은 왜 안 가는가?”“저는 도 내관님을 따라가려 하였사옵니다만.”“이런이런, 유감하게도 나도 같은 생각이었네.”“같은 생각이라니요?”“나도 홍 내관을 따라갈 생각이었다는 말일세.”“하하. 이런 일에까지 겸양을 보이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자, 그리 하지 마시고. 도 내관님이 앞장서십시오.”“아닐세. 아니야. 대의를 앞두고 어찌 나 같은 소인배가 앞장 설 수 있겠는가? 암, 말도 안 돼지. 안 되고말고. 이 일은 자네가 제안한 것이니, 당연히 자네가 앞장서서 이름을 높이 휘날려야 하네. 그러니 그만 겸손을 보이고 앞장서게. 우리가 자네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줌세.”불통내시들은 한 목소리를 낼 때와는 달리, 누가 예조로 가서 부당한 일에 대해 얘기할 것인가를 두고 서로 양보하는 훈훈한 광경을 자아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양보는 그 후로도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럴 것이 아니라, 차라리 우리 중에 한 사람을 뽑아서 예조로 가는 것이 어떠한가?”“한 사람을 뽑아요?”묻는 라온의 앞에 언제 준비했는지 도기가 뽑기 통을 내밀었다.

“홍 내관, 뽑으시게.”잠시 망설이던 라온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나머지 불통 내시들을 돌아보며 단단히 쐐기를 박았다.

“좋습니다. 뽑겠습니다. 대신, 누가 뽑히든 두말하지 않고 예조로 가는 겁니다.”에이, 설마 내가 뽑히겠어?

***

“홍 내관, 축하하오.”등 뒤에서 도기의 축하인사가 들려왔다.

이게 축하받을 일입니까?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결국 예조로 가는 한 명을 뽑는 제비뽑기에 라온이 선택되었다.

예조의 서고(書庫) 앞에선 라온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태평관으로 보낼 환관을 임명하는 예조참의(禮曹參議: 정3품의 당상관)께서 이곳에 계시다고 하였다.

“홍 내관, 난 홍 내관의 살신성인을 가슴 깊이 기억할 것이네.”그런 거 너무 깊이 기억하지 마세요.

“자, 홍 내관. 그럼 힘내시게나.”갑니다, 가요. 그렇게 힘껏 밀지 마세요.

마지막 말과 함께 도기는 서고의 문을 열고 라온의 등을 힘껏 밀었다.

얼결에 라온이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등 뒤에서 문이 탁 닫혀 버렸다.

“휴.”라온은 서고의 거대한 책장들을 둘러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들이쉬는 숨결에 오래된 종이 냄새와 은은한 먹 향기가 섞여 있었다.

라온은 길게 열을 맞춰 서 있는 책장 사이를 기웃거렸다.

“계시옵니까?”라온은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책장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자 들창문을 배경으로 커다란 탁자 하나가 모습을 보였다.

탁자 위에는 수많은 서책과 문서들이 지저분하게 산을 이루고 있었다.

“아무도 안 계시옵니까?”예조의 참의께서 분명 이곳에 있다고 했는데.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의 그림자는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안 계시지요? 아무리 봐도 아무도 안 계신 것이 틀림없습니다.”문 밖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도기에게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한 라온이 몸을 돌릴 때였다.

“뉘신가?”탁자 아래에서 책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사내가 불쑥 몸을 일으켰다.

“헉!”놀래라.

너무 놀란 나머지 라온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런. 내가 놀라게 했나 봅니다.”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던 사내가 미안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아무렴요. 설마, 책상 아래에 사람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라온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사내를 쳐다봤다. 때마침 사내도 라온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흐억!”라온의 입에서 좀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큰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녀의 눈앞에서 보기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사내…… 다름 아닌 어제 명온공주의 전각에서 보았던 그 문관이었다.

라온이 여인이라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냈던 의문의 사내.

“아, 이제 보니 당신이었군요.”사내의 미소가 짙어졌다.

“왜…… 문관께서 왜 여기에 계시는 것이옵니까?”“예조참의가 예조의 서고에 있는 것이 그리 놀랄 일입니까?”놀라는 라온이 되레 이상하다는 듯 윤성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렇지요. 예조참의가 예조 서고에 있는 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잠시만요, 뭐라고 하셨사옵니까? 누구라고요?”“예조참의.”윤성이 말간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참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웃음을 보는 라온은 편하게 웃을 수 없었다.

“흡.”라온은 터져나오는 비명을 막기 위해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저 사람이 예조참의? 이건 혹 떼러 왔다가 혹 붙인 꼴이 아니던가.

도기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스스로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괜한 걸음 했다는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이럴 때 어찌한다?

어려운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어김없이 떠올랐던 할아버지의 말씀조차도 이 경우에 해당하는 조언은 없었다.

도망이라도 쳐야 할까?

어느새 서류에 얼굴을 묻고 있는 윤성의 눈치를 살피던 라온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한 발짝은 무사히 뗐고, 두 발짝도 조금 위태로웠지만 성공. 라온이 회심의 미소를 머금은 채 세 발짝째 걸음을 떼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네?”저도 모르게 우뚝 멈춰 선 라온은 동그래진 눈으로 윤성을 응시했다.

윤성은 여전히 보고 있는 문서에 집중한 채 라온에게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탁자에 놓인 서류에 뭔가를 열심히 써 내려가는 중이었다.

뭐지? 조금 전의 그 말은 정말 저 사람이 말한 걸까? 아니면 환청?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내내 서류에 몰두하던 윤성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로 오셨느냐고 물었습니다.”“그, 그러니까…….”내가 여기 왜 왔더라?

용무가 있어서 온 것은 분명한데, 윤성을 다시 만난 충격에 라온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져 버리고 말았다.

저 사람, 내가 여인인 것을 알고 있다. 저 이가 입만 벙끗해도 내 목이 달아날 거야. 그런데 하필이면 예조참의라니.

정말이지 말 그대로 딱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라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성이 미소 지은 얼굴로 물었다.

“내시부 소속이시지요?”“네? 네. 네.”“잘 됐군요.”뭐가 잘 돼요? 설마…….

두려운 생각에 절로 몸이 떨려왔다.

윤성의 말이 이어졌다.

“마침 이 서찰을 내시부로 가져갈 누군가를 부를 참이었습니다.”윤성이 방금 작성을 마친 문서를 라온에게 건넸다.

다행이다. 그 일이 아니었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문서를 받아드는 라온에게 윤성이 덧붙이듯 말했다.

“내시부에서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착오…… 라고요?”“예조에서는 지난 강경시험의 성적순으로 태평관에 들일 환관을 뽑는다고 하였는데, 내시부에 제대로 전달이 안 되었나 봅니다. 전혀 엉뚱한 자가 천거되었지 뭡니까. 그래서 제가 지난 강경 성적을 참고하여 태평관에 들일 환관의 이름을 적어놨습니다. 제대로 했는지 한번 확인해 보시겠습니까?”“제가요?”“제가 청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궁의 사정에 밝지 못합니다. 혹시 실수라도 하지 않았는지 홍 내관께서 확인해 주십시오.”“……!”얼결에 서류를 펼쳐 읽던 라온은 두 손을 바르르 떨고 말았다.

내가 홍 내관이라는 걸 알고 있어. 그걸 알고 있다는 건 나에 대해 조사를 해봤다는 뜻이리라.

라온은 불안한 눈길로 윤성을 응시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윤성은 여전히 그 어떤 사심도 없는 표정으로 라온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라온이 들고 있는 서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확인, 안 하십니까?”“아, 네.”내시부로 보내는 서찰에는 마종자가 의도적으로 빼버린 도기의 이름이 또박또박 정갈한 글씨로 써 있었다.

“옳게…… 작성하신 듯합니다.”“됐습니다. 그럼 그걸 내시부의 성 내관에게 전해 주십시오.”“……그것뿐입니까?”혹시 저한테 따로 하실 말씀은 없으세요?

“달리 의논할 거라도 있습니까?”오히려 질문을 던진 윤성은 다시 탁자에 앉아 산더미처럼 쌓인 문서 위로 시선을 묻었다.

갈피를 잡지 못한 라온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주춤거리다 서고의 문을 열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참! 홍 내관!”윤성의 부르는 목소리에 라온은 석상이 된 듯 문을 열던 그 모습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쿵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 사이, 자리에서 일어선 윤성이 라온의 등 뒤로 바싹 다가섰다.

그리고는 얼어버린 라온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어제 제가 했던 질문 말입니다.”꼴깍, 마른 침을 삼키며 라온은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무래도 그건 비밀이겠지요?”“…….”“그 비밀, 지켜 드리겠습니다.”뜻밖에 말에 라온은 고개를 돌려 윤성을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을 등진 채 서 있던 윤성은 라온과 눈이 마주치자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그것은 봄날처럼 따스한, 그래서 잔뜩 굳어 있던 경계심이 녹아내릴 만큼 포근하고 온화한 미소였다. 덕분에 바짝 오그라들었던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조금은 풀어진 라온을 향해 윤성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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