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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34화 (34/131)

34. 왜 이렇게 친절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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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8

자선당으로 걸음을 옮기는 라온은 퉁퉁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귀한 걸 입에 쏙 넣어주시다니.”화초저하께선 성격도 이상하시지.

기왕 주신 환, 그냥 곱게 주시면서 ‘너 하고픈 대로 하려무나. 네 누이를 갖다 줘도 좋고…….’라고 하시면 얼마나 좋아.

그 귀한 것을 고작 고뿔에 걸린 날 먹게 하시다니.

할 수만 있다면 뱃속에 녹아내린 환을 다시 끄집어내 둥글게 빚고 싶은 마음이 한 가득이었다.

그러나 이미 엎지른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듯, 입안에 넣자마자 봄눈 녹듯 녹아내린 환을 다시 원래대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도…….”신경써주는 것이 고마웠다.

사실, 영의 앞에서는 괜찮다고 했지만 지금 그녀의 상태는 딱 기절하기 일보직전이었다. 지금까지는 그야말로 정신력 하나로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영이 준 환 때문일까? 갑자기 온몸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팔다리마저 제멋대로 흐느적거리는 기분이다.

“이대로 그냥 푹 자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자선당까지는 앞으로 백 보 정도. 백 보만 가면 소원 성취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안고 라온은 한 발짝 한 발짝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자선당 대문 앞에서 그녀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짙은 초록 당의를 입은 상궁마마가 대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던 것이다.

중년의 상궁은 라온을 보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자네가 자선당에서 기거하는 홍 내관인가?”다급히 묻는 상궁의 모습에 라온은 뭔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제가 홍라온이옵니다만, 뉘신지요?”“명온 공주마마를 모시고 있는 한 상궁이라고 하네. 공주마마께서 자네를 기다리고 계시네. 나를 따라오게.”“……네.”그럼 그렇지. 아프다고 쉴 팔자가 아님을 진즉에 알고 있었기에. 라온은 두 번 물음을 하지 않고 한 상궁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공주마마께서는 왜 또 부르시는 것일까?

라온은 물에 빠져서도 자신에게 냉랭했던 명온 공주를 떠올렸다.

언제쯤이면 그 마음이 풀어지시려는지.

그런데 공주님의 심부름으로 온 한 상궁 마마님. 설마, 절 만나려고 여기서 계속 기다렸던 건 아니시지요?

***

“공주마마, 한 상궁이옵니다.”“안으로 들라.”낭랑한 명온 공주의 목소리와 함께 공주처소의 문이 양옆으로 소리 없이 열렸다.

방 안에는 화려한 연분홍빛 당의를 입은 명온 공주가 보료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붉은 문관복을 입은 젊은 사내가 마주 앉아 있었다.

한 상궁이 라온을 재촉했다.

“뭘 하고 있는 겐가? 안으로 들지 않고서.”“아, 네.”대체 무슨 일로 부르신 것일까? 저 낯선 문관은 또 누굴까?

라온이 궁금한 얼굴로 한 상궁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다담상을 든 두 명의 궁녀가 안으로 뒤따라 들어왔다.

궁녀들은 들고 온 다담상을 공주와 사내 앞에 각기 하나씩 내려놓았다. 다담상을 무심히 응시하던 명온이 힐끔 라온을 쳐다보았다.

찰나지간, 공주의 얼굴 위로 화색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금세 눈길을 아래로 내리는 모습이 새치름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짓던 문관이 입을 열었다.

“공주마마의 손님이신 모양이시군요. 괜히 제가 방해가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선하고 온화한 사내였다.

“그럴 리가요.”공주가 라온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듣자하니 너의 차(茶) 우리는 솜씨가 제법이라던데.”명온의 말에 라온은 저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치뜨고 말았다.

“네?”제가요? 언제요?

하지만 한 상궁을 비롯한 그곳에 모여 있는 모든 궁녀들이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잘 우린다고 해. 못 우려도 잘 우린다고 해야 해.’아무래도 문관의 말에 명온 공주가 차 우리는 것을 핑계 삼은 모양이다.

공주가 환관을 따로 부르는 일은 범상한 일이 아니니, 어쩔 수 없이 그런 핑계를 댄 것이리라.

궁녀들의 소리 없는 겁박에 라온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보잘 것 없는 솜씨이옵니다.”라온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네 솜씨 한번 보자꾸나.”명온의 명에 라온은 다기(茶器)가 놓인 상을 내려다보았다.

찻물을 끓이는 탕관과 퇴수기, 차호, 차칙 등 차를 우리는 그릇이 간잔지런하게 놓인 것을 보며 라온은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라온이 차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어린 시절, 유난히 차를 좋아하는 할아버지 덕분에 이런 다기 상을 자주 접했던 덕분이었다.

라온은 능숙한 솜씨로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물을 끓이고, 차구를 배열하고 다시 차기를 덥히고 차를 우려내는 과정이 그야말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조금은 억지스럽게 라온을 불러들인 명온마저도 자세를 바로 해 지켜볼 지경이었다.

사실, 라온이 차를 잘 우리건 우리지 못하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차를 우리지 못하면 가르친다는 핑계로 곁에 둘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푸른 잎차가 하얀 잔에 정갈하게 담겼다.

라온은 알맞게 우러나온 차를 명온에게 내밀었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나이다.”명온은 라온이 내미는 차를 입에 넣고 음미했다. 이윽고 공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맛있…….”명온공주는 저도 모르게 칭찬을 하려다가 ‘아차’ 하며 살그머니 찻잔을 내려놓았다.

“뭐…… 마실 만하구나.”“송구하옵나이다.”명온이 예의 새치름한 눈을 내리깐 채로 말했다.

“차 우리는 법은 어디서 배웠느냐?”“할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셨사옵니다.”“할아버지께서 제법 잘 가르쳐주신 모양이구나.”“그저 어깨 너머로 조금 배운 것뿐이옵니다.”“네 솜씨가 제법 훌륭하구나. 요즘 차 맛이 좋지 않아 고심하던 차였는데.”“공주마마께서도 차를 좋아하시옵니까?”“소일 삼아 조금 즐기는 편이다.”“하오면 소인, 미흡한 솜씨나마 시간이 날 때마다 공주마마의 처소에 들려 차를 우려 드려도 되겠나이까?”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 하지 않았던가. 뛰어봤자 궁 안이라고.

아무리 피해 다녀도 궁궐에 있는 동안은 공주께서 찾는 이상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라온은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얼굴을 마주하다보면 마음속의 앙금도 조금씩 녹아내리리라.

“뭐…… 네 생각이 정히 그렇다면 그리 하도록 해라.”명온이 크게 선심 쓴다는 듯 말했다.

“망극하옵나이다.”“…….”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명온의 입술이 자꾸만 실룩거렸다. 웃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잎차 맛이 이리 달았던가?

유난히 달콤하게 느껴지는 차 맛에 명온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공주마마의 말씀대로 차 맛이 참으로 좋습니다.”마주 앉아있던 사내가 온화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으며 말했다.

아차, 잊고 있었네.

사내를 바라보는 명온공주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귀찮은 기색이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라온과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불청객이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명온은 할 수 있는 최대한 예를 다했다.

아니, 다하려고 애를 썼지만…… 저도 모르게 싫은 기색이 문득문득 피어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공주의 모습.

자신을 귀찮아하는 처사에 화가 날 만도 하건만, 사내는 오히려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왜 웃으세요?”“중전마마께서 공주마마께서 아프다 하시어 걱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건강한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말았습니다.”“어마마마께서 괜한 말씀까지 하신 모양입니다.”웃음이 매력적인 이 사내는 다름 아닌 명온의 외사촌인 김윤성이었다.

청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그는 어젯밤 조선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어마마마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들렀던 참인데, 내침 김에 명온까지 찾아본 것이다.

어마마마 뵈었으면 그냥 가실 것이지.

윤성만 아니었으면 조금은 더 라온과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련만.

윤성의 눈치가 보여 좋아도 좋은 기색을 차마 할 수가 없었던 명온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이번엔 아주 돌아오신 것입니까?”“네. 조선을 떠난 지 꼬박이 10년이 되니. 이제는 집이 그립군요.”“어마마마께서 좋아하시겠습니다.”“공주마마께서는 아니 좋으십니까?”공주와 라온을 번갈아보던 윤성이 조금은 짓궂게 물었다.

“뭐…… 나쁠 것은 없습니다.”새침하게 대답하는 명온을 보며 윤성이 다시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왜 자꾸만 웃으십니까?”“귀여워서요.”“네?”“공주마마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으시군요.”“뭐가 말입니까?”“속내를 숨길 줄 모른다고나 할까요.”다시 라온을 곁눈질 하던 윤성이 불현듯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 가시려고요?”저도 모르게 반색하던 명온이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오랜만에 오셨는데 좀 더 머물다 가셔요.”윤성이 따뜻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눈치라는 게 있어서요. 얼굴을 보았으니 되었습니다. 방해꾼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방해꾼이라니요. 당치 않는 말씀이어요.”말은 그리 하지만 명온공주는 윤성을 배웅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덩달아 일어나 윤성을 배웅하는 라온은 얼굴이 해쓱해졌다.

공주마마의 얼굴을 보아하니 오늘 쉽사리 보내줄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뭐 별일 있을까? 라온은 애써 좋은 생각만 했다.

여긴 빠질 물도 없고, 그렇다고 칼 찬 호위무사도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죽을 염려는 없다는 뜻.

죽지만 않는다면 무슨 일인들 못 할까?

각오를 단단히 하는 라온의 앞에 윤성의 배웅을 마친 명온이 다가왔다.

“이제야 제대로 시작할 수가 있겠구나.”“네?”뭘 제대로 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등줄기로 스멀스멀 불길한 예감이 기어올랐다.

이윽고 공주의 처소 문이 열리고 십여 명의 궁녀들이 일렬로 줄을 맞춰 들어왔다.

궁녀들이 들고 있는 다기 상을 보며 라온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공주마마, 이게 다 무엇이옵니까?”“차니라.”“저 많은 차를 다 드시겠다는 건 아니시지요?”“말하지 않았느냐? 소일삼아 차를 즐긴다고.”한껏 눈을 내리깐 채 새침하게 대답한 명온이 보료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탄성도, 비명도 아닌 기이한 한숨 소리가 라온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한다면, 공주마마께서 소일삼아 차를 즐긴다는 점이다.

본격적으로 즐겼으면 어쩔 뻔했어. 안도의 한숨을 내리쉬며……가 아니잖아!

아, 이 궁에서는 쉬운 일이 하나도 없네.

***

명온 공주는 일곱 종류의 잎차를 세 주전자나 더 마신 후에야 라온을 놓아주었다.

딱히 무슨 말을 나눈 것도 아니었다.

그저 차를 우리고 우린 차를 마시는, 뭔가 상당히 어색하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었다.

라온은 기진맥진하여 보경당을 나섰다.

“아, 정말 긴 하루구나.”어느새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긴장했던 것이 풀린 탓인지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졌다. 라온은 아픈 다리를 주무르기 위해 비스듬히 몸을 기울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져 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 아팠었지.

공주 앞에서는 긴장을 하고 있어서 아픈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이제야 긴장이 풀리니, 노곤한 약 기운이 현기증과 함께 한꺼번에 몰려온 것이리라.

그때였다.

“괜찮으십니까?”느닷없이 어깨를 부축하는 손길에 라온은 고개를 돌렸다.

“어?”아까 명온공주의 처소에서 봤던 그 사내다.

사내의 얼굴에 예의 따뜻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한없이 부드럽고 달콤한 미소라, 보고 있기만 해도 마음이 풀어지는 그런 웃음이……라고 생각할 겨를이 없잖아.

사내의 손이 제 어깨를 잡고 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란 라온은 슬그머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 괜찮습니다. 덕분에 험한 꼴을 면했습니다. 감사하옵니다.”“몸이 불편한 것 같은데.”“아닙니다. 괜찮습니다.”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라온은 전각의 돌담 옆으로 휘청거리며 걸어갔다. 그 위태로운 모습을 지켜보던 윤성이 갑자기 어딘가로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윤성의 손에는 작은 물그릇이 들려 있었다.

“입술이라도 좀 축이십시오.”“감사하옵니다.”그렇지 않아도 심한 조갈에 물 생각이 간절했던 터였다. 라온은 윤성이 내민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아, 시원해.”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차가운 기운이 들어가서 그런가. 어지러웠던 머리도 조금은 맑아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거…….”윤성이 손에 있던 것을 라온에게 건넸다.

단희가 만들어준 향낭이었다.

이게 왜?

궁금한 표정이 라온의 얼굴에 확연하게 피어올랐다. 기다렸다는 듯이 윤성이 대답했다.

“조금 전, 볼일이 있어서 다시 보경당에 들어가던 중에 발견했습니다. 아마도 내관께서 흘리신 듯하여 가져온 것인데, 내관의 것이 맞습니까?”윤성이 물었다.

“제 것이 맞습니다. 하마터면 귀한 것을 잃어버릴 뻔하였습니다. 정말 감사하옵니다.”향낭을 건네받으며 라온이 고개를 숙였다.

“당연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귀한 것인가 봅니다.”“네. 귀한 것이옵니다. 제 누이가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여 만든 것이거든요.”“곱습니다.”느닷없는 윤성의 말에 라온이 고개를 들었다.

“그 향낭 말입니다. 참으로 곱습니다.”깜짝 놀랐네.

라온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맞장구쳤다.

“아, 그렇지요. 제 누이의 솜씨가 참으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저도 이리 고운 향낭은 처음 봅니다. 저 혼자서만 갖고 다니기에 아까울 정도입니다.”자랑하는 라온을 향해 윤성이 입가를 길게 늘여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온화한 웃음이 윤성의 청수한 얼굴과 너무도 잘 어울렸다. 그가 웃는 순간, 묘하게도 주위의 모든 것이 환하게 빛나 보였다.

다른 여인들이 보았다면 한순간에 넋을 잃을 정도로 아득한 미소.

하지만 영과 병연에게 단련된 덕분일까?

저가 얼마나 아찔한 미소를 마주하고 있는지 자각하지도 못한 라온은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던 향낭을 품 속 깊숙이 갈무리할 뿐이었다.

지체 높은 사대부라고 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권위적이고 안하무인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구나.

그런데 이게 언제 떨어진 거지? 잘 묶어뒀는데.

라온은 문득 향낭을 들어보았다. 향낭 끈이 날카로운 무언가에 잘려진 것처럼 매끄러웠다.

어디에 걸려서 잘리기라도 한 건가? 그러데 어째서 칼로 잘린 것처럼 이리 매끄러운 거지?

의아한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향낭의 주인도 참으로 곱습니다. 환관복이 안타까울 정도로 말입니다.”윤성의 말에 라온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방금 무어라고 하셨습니까?”내가 뭘 잘못 들었나?

그러나 윤성은 라온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처소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아닙니다.”“부축해 드리겠습니다.”“아닙니다.”“괜찮아 보이지 않습니다.”“아니요. 절대 괜찮습니다.”라온의 완강한 태도에 윤성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발 물러섰다.

그리고는 고집스럽게 걸음을 옮기는 라온의 곁을 그림자처럼 따랐다.

라온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안 가십니까?”“처소까지 들어가는 것을 보고 가렵니다.”“왜요?”“걱정이 되어서 말입니다.”“그러니까 왜 걱정이 되는 것입니까?”“자꾸만 몸을 휘청하시는 것이…… 지켜보는 내내 안심이 안 되는군요.”“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은 정말로 많이 좋아졌습니다.”사내는 무척 자상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라온은 그런 그가 부담스러웠다. 일평생을 남장을 한 채 삭막한 사내들 틈에서 살았다.

남장을 하였기에 보통의 사내들처럼 행동하려 애를 썼고, 그런 라온을 대하는 사내들의 태도 역시 거칠었다.

그런데 이 사내가 라온을 대하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다른 사내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내 착각이겠지?

“정말로 괜찮으니 그만 돌아가셔도 됩니다.”라온은 애써 씩씩하게 말하고는 터벅터벅 걸었다.

그러나 채 몇 걸음 옮기지도 못하고 머릿속이 핑하고 어지러워졌다. 잠시 식었던 열이 후끈 하게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거 보십시오. 이러니 제가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어느 틈에 다가온 윤성이 라온을 부축하며 말했다.

“괘, 괜찮습니다.”“내관께서는 괜찮을지 몰라도 지켜보는 전 안 괜찮습니다.”윤성이 이마에 주름을 그리며 말을 이었다.

“몸에 열은 없으신 듯한데, 몸이 축 늘어지시는 걸 보니…… 약효가 강한 탕약이라도 드셨습니까?”먹었지요. 왕족만이 먹을 수 있는 귀하고 호사스런 환이랍니다. 설마 그 환의 효력이 이렇게 대단한 줄은 몰랐습니다.

“약은 잘 드셔야 합니다. 약효가 뛰어난 약들 중에는 졸음이나 가벼운 몸살을 동반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아, 그래서 화초저하께서 처소로 돌아가 쉬라고 하셨던 거구나.

그런데 뜻하지 않게 명온공주의 차 시중을 드느라 쉬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명온공주 역시 라온이 아픈 것을 모르고 한 행동이니, 원망할 수는 없었다.

“그, 그만 놓아주십시오.”낯선 사내의 온기에 당황한 라온이 그를 가볍게 밀었다. 하지만 윤성은 여전히 라온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라온이 물었다.

“왜 이렇게 친절하십니까?”“어린 시절부터 친절하라고 배웠습니다.”“모든 사람에게요?”윤성이 예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사내가 무조건적인 친절을 베풀 대상은 오로지 여인뿐입니다.”“……!”라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이 사람, 뭐라고 말한 거지?

그녀의 놀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성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하였는데, 이제는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뭐, 뭘 알게 되었다는 겁니까?”라온의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윤성은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라온을 바라보며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 전에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뭐가…… 궁금하십니까?”“어쩌다…… 여인의 몸으로 환관이 되신 것입니까?”쿵!

순간, 라온은 심장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했다.

설마 나, 들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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