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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33화 (33/131)

33. 왕세자의 명(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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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4

“사신단은 어디까지 왔다 하더냐?”이른 새벽부터 동궁전 안팎을 돌아보던 영이 그림자처럼 뒤를 따르는 최 내관에게 물었다.

“아침에 수원성을 떠났다 하옵니다. 아마도 오늘 밤이면 한양에 당도하여 태평관에 여장을 풀 수 있으리라 짐작되옵니다.”“그들을 맞는데 한 치의 실수도 없어야 하느니라.”“명심하겠나이다.”“외연과 내연의 준비는 차질 없이 잘 되어가고 있는 것이냐?”“진연청의 관리들과 궁인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나이다. 이제 마지막 점검만 하면 끝이 난다 하오니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심려? 아니다. 오히려 기대가 될 뿐.”영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생겼다 사라졌다. 걸음을 멈춰 세운 그가 최 내관을 돌아보았다.

“그에게서는 아직 확답을 받지 못했느냐?”“박두용 영감께서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 하였나이다.”“그래?”“그렇사옵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으니, 저하께서는 심려일랑은 내려놓으시고 그저 옥체 보중하시라고 말씀 올리라 하였나이다.”“박 상선이 그리 말했다니, 기대를 해 보아도 좋겠군.”영의 얼굴에 흡족한 안색이 피어올랐다. 이윽고 그는 소맷자락에서 손바닥만 한 서책을 꺼내 최 내관에게 건넸다.

“이번 진연의 순서를 적어놓은 홀기니라. 그것을 진연에 참석하는 대신들의 수에 맞춰 준비하라.”“명 받잡나이다.”“특히 영의정이 낭독해야 할 치사부분을 공들여 필사하라 이르라.”“정녕…… 일을 강행하실 생각이시옵니까?”홀기를 가볍게 훑던 최 내관이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동궁전 앞에 세워지는 거대한 장막을 응시하며 영이 대답했다.

“해야만 하는 일이다.”영의 확고한 의지를 읽은 최 내관은 홀기를 소중히 갈무리했다.

잠룡처럼 몸을 낮추고 계시던 왕세자께서 드디어 운신을 시작하셨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에 얼마나 큰 무게가 실려 있는지 너무도 잘 알기에 영을 따르는 최 내관의 얼굴에는 긴장감마저 서려 있었다.

그 이후로도 영은 마치 산보를 나온 사람처럼 천천히 걸으며, 동궁전에서 열릴 내연의 준비를 세세히 점검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훑는 눈길로 안팎을 세심하게 둘러보던 그가 문득 걸음을 멈춰 세웠다.

저 멀리로 장 내관의 얼굴이 들어왔다. 독특한 기억력을 가진 손 끝 야무진 환관이었다.

그러나 영의 시선은 장 내관에게서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영의 무심한 망막에 장 내관의 뒤를 쫓는 라온이 들어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뚫어져라 라온을 바라보던 영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저하.”곁에서 연신 영의 안색을 살피던 최 내관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디 미령하신 곳이라도 있나이까?”“없다.”단칼에 잘라내듯 단호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한데 모아진 그의 미간은 좀처럼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세자저하께서 어찌하여 저러실까?

최 내관의 근심이 깊어지려는 찰나, 영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늙은 환관의 귓속을 파고 들어왔다.

“헌데, 저 녀석들은 어찌 저리 한데 뭉쳐 다니는 것이냐?”최 내관이 영의 시선을 쫓아 눈길을 돌리니 앞뒤로 나란히 걷고 있는 장 내관과 라온의 모습이 들어왔다.

늙은 내관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진연이 열리는 며칠 동안 홍 내관에게 저하의 곁을 지키라 명을 내리지 않으셨사옵니까?”“헌데?”“하여, 장 내관이 홍 내관에게 저하를 모시는 데 필요한 몇 가지 사항을 알려주는 듯싶사옵니다.”최 내관의 말에 영이 미간을 다시 모으며 중얼거렸다.

“나를 모실 때 필요한 것을 왜 장 내관에게 물어? 내게 직접 물어보면 될 것을…….”영의 혼잣말을 들은 최 내관은 황망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저 아이가 대체 무엇이관대, 세자저하께서 궁의 법도마저 무시하시며 저리 총애하시는 것일까?

작금의 세자저하께서는 일평생을 궁의 법도에서 한 치 어긋남이 없이 살아오신 분이셨다.

오죽하였으면 궁인들 사이에 세자저하께서는 숨 쉬는 것마저도 궁의 법도에 따라 쉬신다는 소문이 돌았을까?

그런 분께서 저 어린 소환내시에게만은 법도를 무시하는 명을 내리셨다. 존귀하신 왕세자저하의 곁을 소환내시와 같은 아랫것에게 지키게 한 것이다.

내리시는 명을 감히 거역할 수 없어 받잡았지만, 최 내관의 뇌리엔 의문이 증폭되어 갔다.

저 어린 것이 무엇이관대? 저 어린 것을 향한 세자저하의 성심이 무엇이관대?

최 내관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라온을 응시했다. 그때, 영의 목소리가 또 한 번 늙은 내관의 뇌리를 뒤흔들었다.

“그나저나, 저 녀석 안색이 왜 저리 안 좋아?”걱정 섞인 말투.

“네? 무어라고 하셨나이까?”“아무것도 아니다.”잠시 라온을 쳐다보던 영은 마땅치 않다는 얼굴로 돌아섰다.

***

누군가 지켜보는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른 채 라온은 장 내관의 뒤를 따라 걸었다. 걷는 발걸음에 힘이 하나도 없다.

“홍 내관, 어찌 그러시오? 아닌 게 아니라 낯빛도 영 좋지 않아 보입니다.”동궁전의 뒤뜰로 향하던 장 내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뒤따르는 라온을 돌아보았다.

“아닙니다. 고뿔기가 있었는데 다행히 많이 좋아졌사옵니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어지러웠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손끝으로 전신의 기운이 모두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이런, 많이 아팠나 봅니다.”“괜찮습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났더니 한결 몸이 가뿐해졌사옵니다.” “아, 그래서 오늘 늦게 나왔군요.”“송구하옵니다.”“아니오.”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장 내관은 라온을 조용한 곳으로 이끌었다.

볕이 좋은 바위 위에 라온을 앉힌 장 내관이 진지한 얼굴로 다시 말문을 열었다.

“홍 내관, 우리 같은 환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 줄 아시오?”“무엇이옵니까?”“바로 건강이오. 건강을 잃은 환관은 궁에서는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지요. 궁은 쓸모없는 존재에게까지 관대한 곳이 아닙니다.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건강해야 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건강, 두 번째도 건강이오.”“명심하겠습니다.”살아남기 위해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서글펐지만 라온은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괜찮겠소?”“괜찮습니다. 정말입니다. 보십시오. 힘이 팔팔하옵니다.”라온은 애써 웃는 얼굴로 너스레를 떨었다.

“자, 그럼 아까 하던 이야기를 이어서 할 터이니, 귀 기울이시오.”장 내관이 아주 긴요한 이야기라도 하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네. 귀 쫑긋 세우고 있사옵니다.”“홍 내관은 이번 연회에서 세자저하의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무르라는 특별한 명을 받았소.”“그렇습니다.”“세자저하께서 그런 명을 내리실 때는 무슨 연유가 있음이 틀림없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홍 내관에겐 조금은 시기상조가 아닌가 싶소.”“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세자저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분을 뫼신다는 것은 저하께서 홍 내관을 총애한다는 뜻이 아니겠소.”“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저…….”화초저하께선 그저 자신의 약점을 다른 이에게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것뿐입니다……라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기에 라온은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저하의 총애를 받는 한 사람으로써 충고한다면…….”“…….”라온은 먼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 내관님 이야기를 할 때면 유난히 이를 으득 갈던 화초저하의 모습을 보면 그다지 총애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그런 라온의 마음일랑 알 리 없는 장 내관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총애를 받는 만큼, 많은 자들의 시기도 받아내야 할 겁니다.”“그렇습니까?”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라온의 얼굴에 근심이 떠올랐다.

“그럼 어찌해야 하옵니까?”“걱정 마시오. 내가 누구요? 세자저하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는 손끝 야무진 장 내관이 아니오. 내, 홍 내관에게 총애를 받으면서도 시기 또한 받지 않을 수 있는 나만의 비법을 전수해 주리다.”“역시 장 내관님이시옵니다.”라온이 눈을 빛내며 장 내관을 응시했다.

으쓱해진 장 내관이 턱을 치켜세웠다.

“우선 아까 내가 동궁전을 돌며 지목했던 장소, 잘 기억하고 있지요?”“아무렴요. 장 내관님께서 친히 콕콕 집어주셔서 잊으래야 잊을 수가 없습니다.”“그래요. 그 장소를 잘 기억하세요. 그 장소들은 지난 5년간 내가 이 동궁전에서 버티며 찾아낸 특별한 장소요. 세자저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되, 남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천혜의 요소라고나 할까요.”“오, 그렇습니까?”역시, 5년이나 동궁전에서 버텨낼 수 있었던 장 내관님의 비밀이 그곳에 있었군.

그 천혜의 요소에 숨어 있었기에 5년이나 동궁전에 머물렀어도 정작 왕세자께서는 장 내관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천혜의 요소는 왜 기억하라는 것이옵니까?”“연회가 열리는 동안 홍 내관은 내가 알려준 천혜의 요소에 있는 겁니다. 그리고 저하께서 필요로 하실 때만 저하의 곁에 가면 되는 거지요.”“그러니까 장 내관님 말씀은…….”“눈에 띄지 않는 겁니다.”“…….”또 나왔다, 장 내관님의 소심한 처세술.

과거엔 세자저하의 눈에 띄지 않았던 장 내관은 이제 시기하는 자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또다시 나름의 처세술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라온은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런 소심한 처세술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가늘고 길게, 정확히는 3년 동안 무사히 궁에 남아 있기 위해서는 장 내관의 처세술이 꼭 필요했다.

“장 내관님의 가르침, 가슴 속에 깊이 새겨 넣겠습니다.”“암요. 그래야지요.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겠소.”“네.”“여기, 세자저하의 기침 시각과 침수에 드시는 시각, 그리고 아침 수라를 젓수는 시각과 낮 것, 저녁 수라와 야참 드시는 시각, 저하께서 좋아하시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 저하의 곁을 지킬 때 홍 내관이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들이 죄 적혀 있다오. 할 수만 있다면 여기에 적힌 것을 죄 외워두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잘 알겠사옵니다.”“뭐, 이 정도만 알아도 저하를 보필하는데 큰 지장은 없을 겁니다.”“정말 감사하옵니다. 장 내관님이 없었다면 어찌해야 좋을지 감도 잡지 못했을 것이옵니다.”“우리 사이에 그 무슨 인사치레요.”“아닙니다. 정말 감사하옵니다.”“인사받자고 한 일이 아니오. 그보다 홍 내관.”할 말이 있지만 차마 말문을 떼지 못한 장 내관은 잠시 머뭇거렸다.

“왜 그러십니까?”“저기…… 몸도 성치 않은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될는지.”“무엇입니까? 말씀하시옵소서.”“지금 즉시 동궁전의 정원으로 가봐야 할 게요.”“동궁전의 정원이요?”“정원을 관리하는 김 상원께서 오늘 갑자기 처가에 일이 생겨 입궁을 못 하셨다고 하오.”“처가요?”처가? 환관에게 무슨 처가가 있단 말일까?

라온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그 처가가 제가 아는 그 처가이옵니까? 내자의 친정?”“맞아요. 그 처가가 맞소.”“환관에게 어찌 처가가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라온의 물음에 되레 장 내관이 황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모르셨소? 환관도 일가를 꾸릴 수가 있답니다. 출입번 내시들 중에 일가를 꾸린 사람들이 더러 있지요.”아, 환관도 혼인할 수 있구나.

문득, 궁금해졌다. 내관의 혼인생활이란 어떤 걸까? 분명 평범한 가정과는 다른 느낌이리라.

“그렇군요. 그럼 동궁전의 정원에서 무얼하면 되옵니까?”“가을 가뭄이 심하게 들어 정원의 꽃이며 나무가 바짝 말랐다고 합니다. 물이라도 주지 않으면 연회 날에 보기 흉한 모습을 보일지 모른다고 김 상원이 걱정하셨소. 듣자하니 우물물을 길어와 꽃과 나무에 일일이 뿌려줘야 한다고 하오.”“걱정 마십시오. 제가 오늘 중으로 파릇파릇하게 되살려놓겠습니다.”“거참. 혼자 하기 힘든 일이라 내시부에 일손을 요청했건만. 마 내관이 도움을 줄 일손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나라도 홍 내관을 돕고 싶지만…….” “장 내관님은 세자저하의 처소를 청소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사옵니까?”“그러게 말입니다. 내 손이 가지 않으면 도통 일이 되질 않으니.”“그게 다 장 내관님의 손끝이 여느 분보다 야무져서 생긴 일이 아니옵니까?”“그러게 말입니다. 적당히 야무지면 좋았을 것을, 어쩌자고 이리 야무진 것인지.” 장 내관이 푸념인지 자랑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수다를 늘어놓을 때였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갑작스러운 그늘에 열심히 종알거리던 장 내관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탄성 같은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세자저하?”

***

“세자저하.”장 내관이 몸을 반으로 착 접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한 채 영은 라온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낯빛이 좋지 않구나.”라온이 대답할 사이도 없이 장 내관이 밝게 대답했다.

“고뿔기가 있어 그렇다 하옵니다.”“고뿔기가 있는 녀석이 무얼 한다고 이리 나온 것이냐? 약은 먹었느냐?”저도 모르게 걱정하는 속내를 입 밖으로 꺼낸 영이 서둘러 뒷말을 붙였다.

“행여 네 고뿔이 다른 이에게 옮기기라도 하면 어찌하느냐?”두 눈을 반짝거리던 장 내관이 걱정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소인 뉘보다 건강하여 이깟 고뿔에 전염되거나 하진 않사옵니다.”“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오늘은 약을 먹고 푹 쉬도록 해라.”영의 말에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옵니다. 소인은 괜찮사옵니다.”“내가 괜찮지 않다.”“네?”“연회가 열리는 내내 내 곁에 너를 두어야 하는데. 나는 저기 있는 장 내관만큼 튼튼하질 못하니. 행여 너의 고뿔이 내게 옮기면 어쩔 것이냐?”“하오나…….”오늘 일과에 늦은 것만도 다른 환관들에게 크게 미안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제와 고뿔 때문에 일찍 돌아가기까지 한다면 다른 이들을 볼 낯이 없게 되리라.

라온이 곤란한 얼굴로 눈짓을 보냈지만 소용없었다.

그녀가 보내는 신호를 보고도 못 본 척한 채 영은 장 내관을 돌아보았다.

“손 끝 야무진 장 내관의 생각은 어떠하냐?”“소인의 미욱한 판단으로는…….”영의 저의를 알지 못한 장 내관은 그저 ‘손 끝 야무진’이라는 말에 정신을 빼앗겨 해맑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하의 생각이 천 번 만 번 옳다고 사료되옵니다.”“그것 봐라. 여기 손 끝 야무진 장 내관도 내 생각이 옳다 하질 않느냐. 무릇 환관이란 자신의 몸을 모시는 상전의 몸처럼 돌볼 줄도 알아야 하느니. 그러니 너는 당장 돌아가 너의 환우를 돌보도록 하라.”“하오나, 소인에겐 할 일이 많사옵니다.”“걱정 마라. 그쯤은 여기 있는 손 끝 야무진 장 내관이 알아서 해결할 것이니.”영의 말에 라온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런 말이 통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장 내관님이 아무리 순박하여 남의 말에 잘 속아 넘어간다고 하여도 이런 속이 빤히 보이는 술수에 넘어가 성 싶…….

“여부가 있겠나이까? 홍 내관, 염려 말고 처소로 돌아가 보중에 힘을 쓰세요. 뒷일은 손 끝 야무진 내가 다 책임질 것이니.”장 내관은 헤벌쭉한 얼굴로 양손을 들어보였다. 왕세자의 칭찬이 그리도 기뻤던 모양이다.

아, 저런 수법에 넘어가는 사람도 있구나.

영의 칭찬 몇 마디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장 내관은 가뭄에 몸살을 앓고 있는 동궁전의 정원으로 향했다.

어린 아이처럼 잔뜩 들뜬 모습으로 걷는 장 내관의 뒷모습을 라온은 미안함과 황당함이 교차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너무 하셨습니다.”장 내관이 저 멀리로 사라지자 라온이 영에게 불평하듯 말했다.

“내가 무얼?”“괜한 칭찬으로 장 내관님께 제 일까지 떠넘긴 것이 아닙니까?”“그럼 그 몸으로 일을 하겠다는 것이냐?”“제가 할 일입니다. 제 일신 하나 편하자고 다른 이를 힘들게 할 수는 없습니다.”“궁의 융통성 운운하던 녀석이 이런 일에는 어찌 그리 꽉 막힌 말을 하는 것이냐?”“그때야 어머니와 누이를 봐야한다는 절박한 사정이 있었기에 그랬던 것이 아닙니까.”“어머니와 누이를 절박하게 아끼는 것만큼 네 몸도 필사적으로 아껴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저로 인해 장 내관님께서 더 많은 일을 하게 되셨습니다. 앞으로 미안해서 장 내관님을 어찌 보란 말씀입니까?”고집을 부리는 라온의 이마에 콩, 아프지 않게 꿀밤을 먹인 영이 말했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철저한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곳이 궁이다. 그리고 궁의 위계질서란 권력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 오늘 장 내관은 왕세자의 특별한 명으로 정원을 보살핀 것이다. 특별한 명은 곧 특별한 총애와도 상통하는 말이니. 자연히 장 내관이 누릴 수 있는 권력 또한 그만큼 늘어난 셈이 되는 것이지. 이래도 오늘의 일이 장 내관에게 나쁜 일이라고만 하겠느냐?”“뭔가…… 급조한 냄새가 납니다만.”영을 바라보는 라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괜스레 먼 허공으로 시선을 돌리며 영이 말했다.

“모로 가도 한양만 가면 된다고. 이 일로 인해 너도 쉴 수 있고, 장 내관 또한 이득을 취하게 되었으니 한 마디로 말해 일석이조(一石二鳥)라 할 수 있지. 그러니 더는 고집 부리지 말고 돌아가 쉬어라.”“…….”“왜 그런 눈으로 보는 것이냐?”“원래 모든 환관들을 이리 대하시는 것입니까?”“그럴 리가 있겠느냐?”“그럼…….”문득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영의 대답은 라온의 심장에 찬물을 끼얹었다.

“네가 내 벗이니 그런 것이다.”벗이라는 말이 나쁜 말도 아닐진대.

어째서 저리 부르실 때마다 가슴한 구석이 서걱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서운함에 라온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앞으로는 이러지 마십시오.”“왜?”“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에겐 저마다 위치에 맞는 본분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환관입니다. 저하께서 저하의 본분에 충실하시듯 저 역시 환관이라는 저의 본분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저하께서 저하의 권력을 이용하여 자꾸만 저의 본분을 망각하게 하는 일을 하신다면…….”“한다면 어쩔 것이냐?”“저도 가만있지는 않을 것입니다.”라온의 말에 영이 어이없다는 듯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이내 웃음기를 지우고 라온을 내려다보았다.

“감히 네가 나를 겁박하는 것이냐?”라온을 바라보는 영의 표정이 돌변했다. 그 서늘하고 냉랭한 눈빛에 라온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괜히 말했나?

차갑게 돌변한 영의 눈빛을 보니, 할 수만 있다면 방금 전에 했던 말은 취소하고 싶었다.

그러나 애써 속내를 내색하지 않았다.

그때, 영이 무게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야말로 본분을 망각하지 마라.”“무슨 말씀입니까?”“내가 명을 내리면, 너는 그 명을 따르는 것. 그것이 너의 본분이다.”“…….”“명이다. 지금 당장 처소로 돌아가 쉬어라.”잔뜩 긴장하고 있던 라온은 그 황당한 명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긴장이 풀려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녀에게 영이 품속에 있던 뭔가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게 뭡니까?”“열어보면 알 것이 아니더냐.”작은 목곽을 열어보니 엄지손톱만한 둥근 환이 들어 있다.

“이건…….”환에 코를 대고 숨을 들이마시니 청량하면서도 쌉싸래한 향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냄새만 맡아도 몸에서 기운이 솟는 듯했다.

세자저하의 품속에서 나온 것이니, 분명 온갖 좋은 약재들로 만든 것이 틀림없겠지? 우리 단희 먹이면 좋겠다.

환이 담긴 목곽을 보며 라온이 눈빛을 반짝거릴 때였다.

꿰뚫는 눈초리로 라온을 바라보던 영이 별안간 그녀의 손에 들린 목곽을 도로 빼앗아갔다.

“왜 그러십니까?”“내가 잠시 생각을 잘못 하였다. 이걸 네 손에 쥐어주는 것이 아닌데.”“줬다가 뺏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세상에서 제일 치사한 사람이 줬다 뺏는 사람이라 하였습니다.”그러나 다음 순간.

영이 항의하는 라온의 입에 동그란 환을 쏙 집어넣어주었다.

서늘한 영의 손끝이 라온의 입술에 와 닿았다.

그 우연한 스침에 라온의 두 눈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여리게 벌어진 입술도 다물어지지 않는다.

허리를 굽힌 영이 벌어진 라온의 입술을 꾹 여미며 속삭였다.

“왕세자만 먹을 수 있는 귀한 환이다. 꼭꼭 씹어 먹어라.”“…….”저한테 이러시면 안 됩니다.

라온이 울상을 지은 채 차마 씹지를 못하자 영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했다.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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