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저한테 너무 잘해 주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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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1
“네놈이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좌포도청의 종사관(從事官) 최재우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는 부모를 죽인 원수라도 되는 듯 무서운 눈씨로 라온을 노려보았다.
“대체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이러십니까? 우선, 이것부터 놓고 말씀하십시오.”얼굴의 힘줄이 불거지고 숨통이 막혀왔다. 라온은 주먹을 들어 최재우의 손등을 팡팡 내리치며 소리쳤다.
그러나 최재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되레 라온의 목덜미를 더욱 세게 옥죄었다.
“네가 감히, 내시 주제에 여인을 희롱하였단 말이더냐. 이 천하의 몹쓸 놈 같으니라고.”최재우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목을 졸린 라온의 얼굴은 더욱 파리해졌다.
바로 그때였다.
어느새 다가온 병연이 최재우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그야말로 오랜만에 만난 친우의 어깨를 두드리듯 가벼운 손짓.
그러나 그 가벼운 손짓에 최재우의 입에선 다급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엇?”어깨에 뜨끔한 느낌이 드는가 싶더니, 갑자기 팔에서 힘이 쑥 빠졌던 것이다.
팔에서 힘이 빠지니 자연스럽게 라온의 목을 틀어쥔 손의 힘도 빠져버렸다.
“쿨럭. 쿨럭.”최재우의 손아귀에서 겨우 빠져나온 라온이 밭은기침을 해댔다.
“괜찮으냐?”영이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네. 괘, 괜찮습니다.”그리 말하는 라온의 두 눈에는 눈물이 송글 맺혔다. 한순간이었지만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그녀의 눈물을 본 영이 미간에 깊은 주름을 그리며 물었다.
“어찌 된 일이냐?”라온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저 들소 같은 자의 말에 따르자면 네가 어떤 여인의 마음을 희롱한 것 같은데…….”“정말로 모르겠습니다.”이 궁 안에 들어와서 알고 지내는 여인이라고는 정말 한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그중 세 분은 감히 자신이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신분의 여인들이었다.
“정녕 이유를 모르겠느냐? 그거 참 이상한 일이로구나. 분위기를 보아하니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은데.”아닌 게 아니라, 라온을 겁박했던 사내의 분위기는 흉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붉게 충혈된 커다란 고리눈은 당장이라도 라온을 박살을 내고 말겠다는 의지를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살벌한 눈빛에 심장이 오그라들 지경이었다.
바로 그때.
영이 은근슬쩍 자리를 옮겼다. 우연인지 최재우의 시야를 막아버리는 교묘한 위치였다.
덕분에 라온은 그 살벌한 눈빛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다.
설마, 날 배려해주신 거야?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 영을 보던 라온은 역시나 하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럼 그렇지. 영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담담한 얼굴로 주위를 관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긴, 저 냉정하신 화초저하께서 그리 세세하게 마음 써주실 리 없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의 등 뒤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사이 병연과 최재우의 싸움은 험악한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네놈은 또 뭐냐? 저 빌어먹을 환관 놈과 한패냐?”화가 머리끝까지 난 최재우가 솥뚜껑만 한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휭휭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한 대 맞으면 바위로 만든 사람이라도 부셔져버릴 엄청난 기세라. 라온은 저도 모르게 ‘안 돼!’ 하고 소리쳤다.
괜히 자신으로 인해 병연에게 해가 돌아갈까 봐 불안했다. 당장이라도 뛰어나가 싸움을 말리려는 라온의 앞을 영이 막아섰다.
“괜찮다.”“괜찮다니요. 상황을 보십시오. 잘못하다가 김 형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찌합니까?”김 형이 다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저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라온의 간절한 눈빛에도 영은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 오히려 라온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더욱 완강히 그녀를 막아 세웠다.
“너의 김 형을 못 믿느냐?”“이건 제가 김 형을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고작 저 정도에 너의 김 형이 다칠 성싶으냐? 만약,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넌 저 녀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네?”“잠시 지켜봐라. 저 녀석, 감당하지 못할 일에 끼어들 정도로 무모한 녀석이 아니니까.”결국, 라온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둘의 싸움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최재우는 커다란 주먹을 사방으로 휘둘러 댔다. 좌포도청의 종사관답게 그의 주먹엔 무시무시한 기세가 담겨 있었다.
그 살벌한 공격에 대한 병연의 대응이란 그저 상체를 옆으로 슬쩍 기울이며 피하는 것이 전부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당장이라도 한 대 맞을 것 같은 위태로운 상황.
하지만 다음 순간.
라온은 병연이 한쪽 손을 뒷짐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한 손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만큼 병연에겐 여유가 넘쳤던 것이다.
‘아!’비로소 영이 말한 게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제압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제압할 수 있을 만큼 병연의 실력은 사내보다 한참 위였다.
그런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최재우는 이를 악문 채 빈 허공에 열심히 주먹을 휘둘렀다.
“이 놈이! 미꾸라지처럼 잘도 피하는구나.”그 모습을 본 영이 나직하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호된 맛을 보기 전에는 진정할 것 같지 않구나.”영의 말에 병연이 고개를 끄덕였고, 최재우는 화를 터트렸다.
“뭐야? 그럼, 날 당장이라도 쓰러트릴 수 있는데도 여유를 부렸다는 거냐? 오냐, 할 수 있으면 해 봐라. 못 하면 넌 오늘 내 손에 죽는다.”최재우가 두 손을 갈고리처럼 펼치며 병연에게 달려들었다. 미꾸라지처럼 살랑살랑 피하기만 하니, 일단 붙잡아 놓고 해결할 생각이었다.
그 순간, 병연이 버들가지처럼 유연한 동작으로 몸을 움직였다.
차분하게 서 있을 때는 느리게 흐르는 구름 같은데, 정작 발을 떼고 몸을 움직이자 그 속도가 빛살처럼 빨랐다.
퉁!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놓은 것처럼 병연의 주먹이 한 순간에 최재우의 가슴에 송곳처럼 틀어박혔다.
“크윽!”최재우가 답답한 신음을 흘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병연이 엉거주춤 무너지는 그의 무릎과 어깨를 밟고 뛰어올랐다.
허공에서 한 바퀴 공중제비를 돌던 병연은 그대로 최재우의 등을 찍어 눌렀다.
충격과 무게를 이기지 못한 최재우가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그 위에 올라탄 병연이 나직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더 이상 경거망동했다간 정말로 호된 맛을 보게 될 것이다.”최재우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병연의 말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병연이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자신의 목을 밟아서 부러뜨릴 수 있음을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최재우가 제압되자 라온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는 내내 병연이 어찌 되는 것은 아닐까 하여 가슴을 졸였던 것이다.
“어떠냐? 지켜보고 있어도 된다 하였지?”영의 말에 라온은 뿌루퉁 입술을 내밀었다.
“만약, 김 형께서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찌하려 했습니까?”“그럴 리 없다.”“그러니까 만약이라고 하질 않습니까. 만약에요, 정말로 만약에 말입니다.”영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저 정도 일에 다친다고? 어림도 없는 이야기지. 만약, 녀석이 다칠 정도의 상황이라면 내가 지켜보고만 있었겠느냐?”“…….”김 형이 위험에 처한다면 화초저하께서 직접 나선다는 뜻입니까?
영의 길쭉하게 뻗은 손을 보던 라온은 먼 허공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상상이 되질 않았다, 영이 싸움을 하는 것은.
상념에 빠진 라온의 귓가에 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대화할 분위기가 된 것 같으니, 이리 행패를 부린 연유를 물어야겠지. 어떠냐? 네가 물어볼 테냐?”“아무래도 그래야겠지만…….”라온은 말끝을 흐리며 최재우를 슬쩍 돌아보았다.
병연에게 제압된 상태에서도 최재우는 라온을 향해 이를 으득으득 갈고 있었다.
라온은 한숨을 쉬었다.
저런 사람을 상대로 어찌 대화를 해야 하는 걸까? 그나저나, 대체 난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그때였다.
황급히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자그마한 인영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의녀 월희였다.
숨을 헐떡이며 들어온 그녀가 빠른 눈길로 방 안의 정경을 살폈다.
이윽고 눈앞에 펼쳐진 정황으로 대강의 사정을 알아차린 듯 월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한동안 멍한 눈으로 라온과 최재우를 번갈아보던 월희가 최재우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분위기를 눈치챈 병연이 뒤로 물러나자 최재우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워, 월희 의녀.”“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에요. 대체 얼마나 절 괴롭혀야 만족하시겠어요?”커다란 두 눈에 금세 눈물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내내 성난 들소처럼 거칠게 굴던 최재우는 두 눈망울을 좌우로 굴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나…… 나는…….”“홍 내관님, 괜찮으셔요?”월희는 뭔가 변명거리를 찾아 연신 입을 옴짝거리는 최재우는 무시한 채 라온을 돌아보았다.
“저는…… 괜찮습니다.”자칫했으면 북망산자락에 한 발 디딜 뻔하긴 했지만, 병연의 발 빠른 대처로 무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된 것이었군.’월희가 나타난 순간, 라온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사내, 월희 의녀를 처음 찾아갔을 때 봤던 사내가 틀림없었다.
“월희 의녀님.”“네. 홍 내관님.”“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라온의 말에 옷고름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던 월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
잠시 후, 라온과 월희가 자리 잡은 곳은 자선당의 동쪽 누각이었다.
“월희 의녀님,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누각에 발을 디디기 무섭게 라온이 물었다.
“이게 다 제 잘못이어요.”“월희 의녀님의 잘못이라니요?”“그게…… 다른 의녀들이 하도 자선당에 원혼이 나온다고 입방정을 떨지 뭐여요. 그래서 아니라고, 그곳에는 원혼 같은 절대 없다고 얘기하던 와중에 홍 내관님의 이야기까지 나왔고, 그 바람에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이어요.”“그것이 이번 일과 무슨 상관입니까?”“그러니까…….”월희는 연신 콧물을 훌쩍이며 얘기를 이어갔다.
어느 날부터인가 월희의 이야기 속에 라온에 대한 것이 많아졌다. 월희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그저 월희는 할머니의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도와준 라온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이야기한 것뿐인데, 다른 의녀들의 눈에는 그것이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의녀들은 환관일망정 처음으로 사내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월희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그러다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월희에게 물었다.
“월희 너, 혹시 홍 내관이라는 분 좋아하는 거 아니니?”월희는 고개를 흔들며 강하게 부정했다.
“그, 그런 거 아니야.”“뭘 아니야. 얼굴을 보니 그런 거네.”월희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어지자 의녀들은 서로마주보며 큭큭거렸다.
사내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인도 아닌 것이 환관이라 하지만, 환관들과 궁녀들 사이에 정분이 나는 사건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일평생을 오직 왕만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하는 궁녀들에게 환관들이란 서로 마음을 나누고, 때론 연정을 나눌 수 있는 은밀한 통로였던 것이다.
아직 사내와의 연정이 무엇인지 모르는 월희에게 나이 많은 의녀들의 강론이 시작되었다.
사내란 무엇이며, 연정이란 무엇인지, 여인들만의 은밀한 속달거림이 한창일 무렵.
성난 황소처럼 씩씩 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큰 덩치의 거한이 월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좌포동청의 종사관 최재우였다.
뭔가 못마땅한 눈으로 월희와 그 주변의 의녀들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그가 별안간 버럭 고함을 질렀다.
“되다 만 놈이 얼굴 곱상한 것만 믿고 감히 여인을 희롱해? 내 이놈을 당장……!”소매를 걷어붙이고 뛰듯이 걸음을 옮기는 본새가 심상치가 않았다.
평소에도 이따금씩 찾아와 괜한 시비를 걸던 사람인지라 월희는 더럭 겁이 났다.
혹시 저 미련한 사내가 홍 내관님에게 무슨 해코지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달려온 것이었는데, 그만 한발 늦고 말았다.
***
“대체 제게 왜 그러는 걸까요? 제가 그렇게 미운 걸까요? 뜨거운 탕약 한 사발 쏟은 것이 그렇게 큰 죄인가요?”울먹이는 월희를 보며 라온은 한숨을 쉬었다.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겁니까?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온이 겪어본 월희는 보기 드물게 순진한 처자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한밤중에 원혼이 출몰한다는 자선당으로 찾아와 곡을 하는 것만 봐도 곱고 순진한 심성을 알 수 있으리라.
“그런데 뜨거운 탕약을 쏟았다는 말은 대체 무엇입니까?”“한 반 년쯤 전에 달인 탕약을 들고 가다가 그만 최 종사관님과 부딪히고 말았지 뭐여요.”“그때부터였군요.”최재우는 그때 의녀 월희를 처음 봤을 테고, 시쳇말로 한 눈에 반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와서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괴롭히시는데…….”억울한 듯 월희는 다시 눈물을 글썽거렸다.
라온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사내들이란. 나이를 먹고 덩치가 자랐다고 해서 다 어른이 된 것은 아니었다.
철들지 않은 사내는 여전히 어린 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어쩌면 월희를 좋아하는 그 사내가 너무 순박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지.
“제 생각에는 말입니다, 그분께서 월희 의녀님을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네?”라온의 말에 월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럴 리 없어요.”“제가 보기엔 그런 거 같습니다. 저분 월희 의녀님을 좋아하시는 것이 확실해요.”“아뇨. 절대 그럴 리 없어요. 항상 저만 보면 고함을 지르고, 눈을 부라렸어요. 단 한 번도 자상하게 대해주지 않으셨는걸요.”“사내들 중에는 좋아하면 오히려 짓궂게 구는 사람도 더러 있다 합니다.”“왜요?”“글쎄요.”그건 저도 알고 싶습니다. 대체 왜 그리 괴롭히는 것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인지.
***
영과 병연의 기세 때문일까? 최재우는 처음과는 달리 기세가 많이 꺾인 상태였다.
처소로 돌아와 그와 마주앉은 라온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월희 의녀를 좋아하십니까?”최재우의 얼굴이 단박에 붉어졌다.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그의 속마음이 어떤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낮게 한숨을 쉬던 라온이 입을 열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여인이란 깨지기 쉬운 그릇이라 하였습니다.”“무슨 말이야?”최재우가 인상을 썼다.
“깨지기 쉬운 그릇을 함부로 다루면 쉬이 깨지는 것처럼, 여린 여인을 험악하게 대하면 되레 겁을 먹는 법입니다.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너무 거칠게 마음을 표현하면 두려워 도망치는 것이 여인입니다. 특히나 월희 의녀님처럼 여린 분께서는 더더욱이요.”“하지만 내 친우들이 말하기를, 여인은 나쁜 사내를 좋아한다 했다. 너무 잘해주면 오히려 싫어한다고…….”라온이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강조하듯 말했다.
“사람의 얼굴이 각기 다르듯 여인의 취향도 다양한 법입니다. 나쁜 사내를 좋아하는 여인도 있지만,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내를 좋아하는 여인도 있는 법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종사관께서 그리 거칠게 대하셨을 때, 월희 의녀님께서 좋아하던가요?”“하, 하지만 그건 그저 내숭이라고, 괜히 좋으면서 싫어하는 거라고 하던데.”“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내 친우들이…….”라온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어설프게 아는 사람이 제일 무서워.
여기저기서 흘려들은 이야기로 여인은 이럴 것이다, 라는 편협한 시선으로 여인을 보고, 점점 실제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조언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내숭이 아닙니다. 여인이 싫다고 할 때는 정말로 싫어서 그리 말하는 겁니다. 종사관께서 그리 험히 대하시니 월희 의녀께서는 자신을 싫어해서 그러는 줄 알고 계신단 말입니다.”“그런……!”최재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그의 기세가 금세 온순해졌다. 큰 눈을 끔뻑거리는 것이 순한 암소를 연상시켰다.
라온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참으며 말했다.
“진심을 밝히세요. 의외로 직접 말로하지 않으면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하지만 그리하면 여인들은 오히려 싫어한다고.”“단언컨대! 친우들의 말은 무시하시는 게 좋습니다.”“하지만 내 친우들로 말하자면 한양의 내로라하는 기생집은 두루 다녔던 자들이다. 여인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정통하다고…….”“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월희 의녀님과 잘 되고 있습니까?”라온의 물음에 정곡을 찔린 최재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잠시 후, 그가 우직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말씀하십시오.”“월희 의녀와는 어떤 관계냐?”그의 물음에 망설이지 않고 라온이 대답했다.
“월희 의녀님과 저는 좋은 동무입니다.”“동무? 동무란 말이지?”최재우의 표정이 보름달처럼 환해졌다. 뭔가 한시름 놓았다는 듯 그가 라온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제 보니 자네, 참으로 좋은 사람이로구먼.”그때, 라온의 손을 잡고 있는 최재우와 그의 두툼한 손을 불편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병연이 슬쩍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지금 급한 건 이쪽이 아닌 것 같은데?”병연의 말에 시선을 돌려보니 어느새 월희가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라온과 최재우 사이의 대화를 모두 들은 것일까?
그녀의 얼굴은 노을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월희의 느닷없는 등장에 당황하던 최재우가 뭔가를 결심을 한 듯 그녀에게로 성큼 다가섰다.
“월희 의녀. 사, 사실…… 나는 당신을…… 사모하오! 예전부터 줄곧 사모하고 있었소!”부끄러운 마음을 감추려는 듯 최재우는 있는 힘껏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고백치고는 너무 큰 고함이었다.
놀란 월희가 양 귀를 두 손으로 막았다.
“목소리가 너무 커요.”그제야 제가 한 짓을 깨달은 사내가 겸연쩍은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건 미안하게 됐소. 그런데…… 내 마음을 받아주겠소?”최재우와 라온을 번갈아보던 월희가 돌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자선당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 어? 어?”작은 여인이 날다람쥐처럼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자 당황한 사내는 어쩔 줄 몰라 입만 벙긋거렸다.
보다 못한 라온이 최재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뭐하세요? 쫓아가셔야죠.”“그, 그런 것인가? 고마우이.”라온에게 고개를 꾸벅한 사내가 쿵쿵 발소리를 내며 달려 나갔다.
“월희 의녀, 월희 의녀!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내 말을 들었으면 대답을 해줘야 할 것이 아니요.”쫓고 쫓기는 두 사람을 보며 라온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여간 생긴 것만큼이나 우직한 분이군.”부끄러워서 도망가는 여인의 뒤를 쫓아가며 대답을 강요하다니.
그래도 어쩐지 월희처럼 작고 여린 여인에겐 저리 우직한 사내가 잘 어울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심 흐뭇한 마음에 라온은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참으로 특이한 녀석이구나.”어느 사이엔가 라온의 곁으로 다가온 영이 말문을 열었다.
“뭐가요?”“내가 보기에 저 의녀 말이다, 네 녀석에게 반한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본 것이냐?”“옳게 보신 것 같습니다.”언제부터인가 의녀 월희는 라온을 보면 얼굴을 붉혔다.
어쩌면 지금 저리 달아난 것도 사내를 피해 도망간 것이 아니라, 라온의 앞에서 고백을 받은 것이 부끄럽고 속상해 도망간 것인지도…….
그때 영의 물음이 이어졌다.
“왜?”“네?”느닷없는 질문에 라온은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너의 뭘 보고 여인들이 반하는 것일까? 그 의녀도 그렇고 연이도 그렇고. 어찌하여 여인들이 너에게 반하는 것이냐?”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영의 진지한 표정에 라온이 울컥했다.
“글쎄요, 여인들이 반할 만한 뭔가가 있지 않겠습니까?”“사내다운 멋이 느껴지는 얼굴도 아니고…….”“나름 귀여운 맛은 있지 않습니까?”“듬직한 품을 지닌 것도 아니고…….”“뭐, 기댈 만한 어깨 정도는 있습니다만.”“그렇다고 학식이 높은 것도 아니니.”“…….”이 양반이! 그리 정색하고 말씀하시면, 듣는 사람 기분 나쁜 거 아십니까?
“화초저하께선 도통 여인에 대해서는 모르시군요.”“여인을 몰라?”“반듯한 얼굴과 듬직한 품, 그리고 학식 있는 사내를 여인들이 좋아하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여인들이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내가 진정 여인들이 좋아하는 사내라는 것을 모르시군요.” “어찌 그리 확신하느냐?”“당연히 잘 알지요. 제가 바로 그 여인……흡.”하마터면 제가 여인입니다, 하고 말할 뻔했다.
얼른 입을 틀어막은 라온은 영의 눈치를 살폈다.
“여인……뭐?”“그러니까…… 제가 그리 여인의 속내를 훤히 꿰고 있으니, 보는 여인마다 저를 사모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말하려고 했습니다. 아하하하.”라온이 농을 하며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 티끌 하나 없는 웃음에 영은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웃음을 멈추고 말았다. 금세 얼굴에서 미소를 지운 영은 여느 때보다 더욱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표정을 굳히는 그를 보며 라온이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이제 알겠다.”“무슨 말씀이십니까?”“여인들이 너를 보고 반하는 이유. 바로 네 웃음이 원인이었다.”“제 웃음이 원인이라고요?”“그래, 그러니 어지간해서는 웃지 마라.”“웃음이 나면 어찌합니까?”“참아라.”“웃는 것도 참아야 합니까?”“무릇 환관이란 인내하는 법도 배워야 하느니. 그것도 모르느냐?”“억집니다.”“명이다.”“벗이라면서 툭하면 명이라고 하십니다.”“낯선 벗이라며?”“그때야 뭐…….”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라온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때, 자리를 털고 일어서던 영이 쓱 돌아보았다.
“뭐냐? 그 표정은.”“웃지 말라고 명하시지 않으셨습니까.”“그건…… 그거 나름대로 보기 싫군.”“어쩌란 말씀입니까. 이것도 싫으시다, 저것도 싫으시다. 저보고 어쩌란 말씀입니까? 제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그러니까…….”라온을 바라보는 영의 말끝이 잦아들었다.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구나. 네가 웃는 것도, 그렇다고 불퉁한 모습도 싫으니…….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영이 문득 눈빛을 빛냈다.
툭!
영은 이불을 들어 라온의 머리에 푹 뒤집어씌웠다.
“그거나 덮고 잠이나 자라.”“뭐하시는 겁니까?”항의했지만 어느새 영은 문을 열고 자선당 밖으로 사라진 뒤였다.
“대체 왜 저려서? 한 나라의 국본께서 어찌 저러실까? 장차 이 나라가 어찌 되려고.”그때 대들보 위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특유의 눈빛으로 라온을 내려다보던 병연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피해버렸다.
“김 형. 좀 전엔 고마웠습니다. 김 형께서 나서주시지 않았다면, 정말로 큰 봉변을 당할 뻔했습니다.”“신경 쓰지 마라.”평소보다 더 불퉁한 대답이 돌아왔지만 라온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말은 저리 해도 병연은 라온이 필요한 순간엔 어김없이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다. 때로는 엄한 아비처럼, 그리고 때로는 든든한 오라비처럼 말이다.
라온은 병연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런데…… 어디 문이라도 열린 것일까? 갑자기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졌다. 라온은 영이 덮어준 이불을 머리 위까지 푹 뒤집어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추웠다.
***
보랏빛 어둠 속에서 병연이 눈을 떴다. 아직은 어둠이 깊어 잠에서 깨기엔 이른 시각이었다.
그러나 대들보 아래에서 나는 소리에 그는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뒤척이는 소리와 함께 간간히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잠시 망설이던 병연은 대들보 아래로 훌쩍 뛰어 내려갔다.
이윽고 어둠에 익숙해진 그의 시야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라온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불 아래 파묻히듯 깔려 힘겹게 숨을 토해내는 모습이.
라온의 머리맡으로 다가간 병연은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이마에 댄 손바닥이 금세 불덩이를 쥔 듯 뜨거워졌다.
물에 흠뻑 젖어서 들어오더니, 아마도 그것이 화근이 된 모양이다.
병연의 손길에 잠이 깼는지 라온이 힘겹게 눈을 떴다.
“김 형.”“어디 아픈 거냐?”“아닙니다.”“성가신 놈.”“하하하. 그리 말씀하시니 이제야 제가 아는 김 형 같습니다.”이 와중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라온이 웃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병연은 불퉁한 지청구를 날리고 말았다.
“시끄럽다.”“하하하.”웃음소리에 뜨거운 열기가 섞여 있었다.
차가운 물이라도 한 바가지 뒤집어쓰면 정신이 번쩍 날 것 같은데.
라온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금세 머릿속을 핑 도는 어지럼증에 반쯤 주저앉은 채 휘청거리고 말았다.
“어디 가려는 거냐?”“일하러 가야지요.”“아직 동도 트지 않았다. 그냥 누워 있어.”병연은 고집을 부리는 라온의 어깨를 눌러 강제로 자리에 눕혔다.
“안 됩니다. 오늘부터 무척 바쁘단 말입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나오라 하였단 말입니다.”“조금 늦어도 상관없을 테니, 그냥 누워 있어라.”병연의 단호한 한 마디에 라온은 어쩔 수없이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
나른한 기운과 으슬으슬한 한기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갑자기 몰아닥친 한기에 라온은 턱을 덜덜 떨며 이불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기력이 죄 빠져나갔는지, 고작 이불 하나 끌어당기는데도 힘이 들었다.
낑낑, 안간힘을 쓰고 있자니, 듬직한 손이 두꺼운 이불로 단단한 바람벽을 쳐주는 것이 느껴졌다.
김 형…….
빙글빙글 어지러운 머릿속에서도 병연이 저를 위해 이불자리를 살펴주는 것이 그려졌다.
저도 모르게 입가를 길게 늘이던 라온이 문득 입매를 다잡았다.
“김 형.”“…….”“저한테 너무 잘해주지 마십시오.”“왜?”“자꾸만 기대고 싶어져서 안 되겠습니다.”“…….”“아픈 건 상관없습니다. 까짓, 며칠 앓고 나면 그만이니까요. 몇 끼 굶는다고 죽진 않습니다. 꼬박 열흘을 굶어도 봤는데,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의지했던 사람이 떠나니 죽을 것만큼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싫습니다. 그러니 김 형…… 제게 너무 잘해주지 마십시오.”라온의 목소리가 문득 잦아들었다. 뜨거운 열기에 잠식되어 버린 듯 라온은 순식간에 까무룩 잠이 들어 버렸다.
병연의 눈 속에 아련한 기운이 안개처럼 번져나갔다.
너도 꽤나 고된 삶을 살았는가 보다. 네 삶도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 편편치 않았는가 보다.
병연은 복잡한 눈빛으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그의 품속엔 지난 밤, 그에게 전달된 한 통의 서찰이 들어 있었다. 라온이 홍경래의 자손이 확실하다는 서찰이었다.
하지만…….
병연이 알게 된 라온의 비밀은 그것 하나만이 아니다. 그 비밀 또한 서찰에 담긴 내용만큼이나 골치 아픈 것이었다.
‘라온아, 나는 너를 어찌하면 좋을까?’라온을 향한 병연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성가신 녀석.”
***
얼마나 잔 것일까?
흐릿한 시야에 방 안의 풍경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노란 아침 햇살이 문지방을 막 넘어서고 있었다.
환한 햇살이 비쳐드는 아침의 풍경은 언제 보아도 가슴 설레는……응? 그게 아니잖아.
이렇게 환해졌다는 건 늦었다는 뜻!
라온은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내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지러워.”맥없이 휘청거리는 머리 위에서 무엇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이마에 놓여 있던 찬 물수건이 덮고 있던 이불 위로 떨어진 것이다.
“누가?”고개를 돌리니 머리맡에 앉아 있는 병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대앉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김 형…….”든든한 울타리가 등 뒤에 둘러진 듯했다.
누군가 등 뒤를 지켜주는 이 기분을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릿한 기운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도 이리 지켜주는 사람이 있노라, 누군가에게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때 잠든 줄 알았던 병연이 눈을 떴다.
“김 형.”“왜 벌써 일어난 거냐? 좀 더 자라.”“설마 밤새 그리 계셨던 것입니까? 괜히 저 때문에……. 죄송합니다.”“이럴 땐 고맙다고 하는 거다.”“네, 고맙습니다. 덕분에 다 나았습니다. 아주 말짱해졌습니다.”병연은 팔을 들어 보이며 너스레를 떠는 라온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넌 어리광도 부려본 적 없느냐?” “네?”“아직 어린 녀석이 왜 그리 꿋꿋해 보이려 애를 쓰는 거냐? 아프면 아프다고 하면 되는 거다. 억지로 참을 필요 없어.”“김 형, 저는…….”순간,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치솟아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괜스레 애꿎은 베갯잇만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병연이 라온의 머리를 꾹 눌러 다시 자리에 눕혔다.
“성가시다. 입 다물고 더 자.”불퉁한 말과는 달리 병연은 라온의 목 밑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라온의 머리맡에 앉은 채 눈을 감았다.
언제나 그곳에 있을 것처럼, 그는 그렇게 오래도록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