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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31화 (31/131)

31. 무슨 놈의 하루가 이리 다사다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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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7

영과 라온이 폄우사를 나선 것은 서쪽 하늘 끝으로 붉은 노을이 짙게 깔린 후였다.

폄우사 인근의 애련정에 다다랐을 무렵, 저 멀리로 검은 그림자가 아른 거렸다.

영이 눈가를 가늘게 여몄다.

“저 녀석이 예까지 왔구나.”“네? 누구요?”라온은 고개를 길게 빼며 영의 시선을 쫓았다. 이윽고 그녀의 눈에도 애련정 근처를 서성거리는 작은 그림자가 들어왔다.

“저 사람, 누굽니까?”“명온 공주다.”“히끅.”본능적으로 숨을 자리를 찾아 걸음을 옮기자니 영이 라온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너, 언제까지 숨어 다닐 참이냐?”“하오면 어찌합니까? 이리 숨기라도 해야지, 다른 방도가 없질 않습니까?”영에게 뒷덜미가 잡힌 라온이 맥없는 목소리로 푸념했다.

“어찌하면 좋을지 알려주랴?”“네. 알려주십시오.”“그럼 말이다…….”라온의 눈높이에 맞춰 고개를 숙인 영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잠시 후.

라온이 동그래진 눈으로 영을 올려다보았다.

“네? 정녕 그리 하란 말입니까?”“그래. 그리 해라.”“하오나…… 그리 할 수는 없습니다.”“하라니까.”“아무리 그래도…….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말도 안 됩니다. 그러다 정녕 공주마마께 미운 털 단단히 박히면 어찌합니까? 아니지, 아예 한을 품으면 어찌 합니까?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였습니다.”“서리 맞을 짓은 진즉에 한 것 같은데.”“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그러니 더욱더 그리해야지.”“하지만…….”“그럼, 네 생각은 무엇이냐? 숨어 다니는 것, 그것이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이냐?”“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법. 한동안 눈에 안 보이면 공주마마께서도 단념하실 것입니다.”“너로 인해 일평생 처음으로 상사병을 앓은 아이다. 너로 인해 오늘아침엔 두 시진이 넘도록 산보도 하였지.”“어떻게…… 아셨습니까?”“이 궁에서 일어나는 일 중, 내가 모르는 일이 있는 줄 아느냐?”“…….”자리에 앉아 천리 밖을 내다본다는 말, 아무래도 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말인 듯하다.

“내 생각엔 네가 숨으면 숨을수록 저 아인 더욱더 너를 찾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하라는 대로 해라.”“이건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서 여쭙는 것입니다. 그러다 공주마마께서 제게 다른 마음을 품으시면 어찌합니까?”“…….”영은 말없이 라온을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이미 환관이 되어버린 네게 무언가를 바랄만큼 연이는 어리석은 아이가 아니다.”“아, 그렇지요.”나, 환관이었지. 그 사실에 안심이 되는……상황이 아니잖아!

세자저하,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사람 아픈 곳을 그리 콕콕 찌르시다니.

라온이 무언의 항의를 담아 영을 응시했다.

“왜? 무어?”속내를 빤히 꿰뚫는 시선으로 라온을 마주보며 영이 물었다.

“아닙니다.”라온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불퉁해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뭐하는 것이냐? 어서 앞장서지 않고?”영이 주춤거리는 라온의 등을 떠밀었다.

“갑니다, 가요.”푹 고개를 숙인 라온이 발걸음을 뗐다.

***

사박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애련정 주위에 끊이지 않았다.

맴맴 맴도는 걸음을 모두 합치면 십리는 족히 넘게 걸었을 걸음이었다. 그리 오랜 시간을 애련정 근처를 서성거리던 명온이 어딘가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오라버니!”부르는 것은 제 오라버니인 영이었지만, 정작 명온의 시선이 향한 곳은 영의 뒤편이었다.

정확히는 영의 등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는 라온을 바라보았다.

힐끗, 누이의 시선을 쫓아 눈길을 돌리던 영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했다.

“아니, 너는 연이가 아니더냐. 예는 무슨 일이더냐?”무슨 말인가 꺼내려던 명온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능청스레 말했다.

“오랜만에 오라버니가 보고 싶어 왔사옵니다.”“그래? 네가 나를 보고 싶어 할 때도 있구나.”“당연하지요. 누이가 오라버니를 보고파 하지 않으면 누굴 보고 싶어 하겠습니까? 오늘 날씨가 너무 좋사옵니다. 하여, 뱃놀이라도 함께 하시는 것이 어떨까 싶어…….”“뱃놀이라. 듣기만 해도 좋구나. 허나, 어이한다?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 굴뚝이나, 지금은 내가 많이 바쁘구나.”명온 공주의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피어올랐다.

“그럼 차라도……”그때, 영이 재빨리 누이의 말허리를 가로챘다.

“그 역시도 안 되겠구나. 대신 이 아이는 어떠냐? 나와 비교할 수는 없어도, 제법 대화하는 재미가 있는 아이다.”명온공주의 입가가 절로 살짝 벌어졌다.

그러나 잠시 후, 저도 모르게 웃던 공주는 이내 짐짓 토라진 얼굴로 고갯짓을 했다.

“싫어요, 저는 오라버니가 아니면 싫어요.”“이번만 봐 다오. 중추절의 진연으로 이 오라비가 무척이나 바쁘구나.”“그럼 어쩔 수 없지요. 그런데 오라버니. 저 환관이 뭐라고 이리 특별히 생각하시는 것이옵니까?”명온의 물음에 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특별한 인연으로 만난 아이다. 그러니 너도 특별하게 생각해 다오.”“오라버니껜 특별 할지 몰라도, 제겐 그저 그런 환관처럼 보이옵니다.”“그래? 그럼, 어쩔 수 없…….”“하지만 오라버니께서 정히 그리 바쁘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부족하겠지만, 저 자에게 차 시중이라도 들라고 해야겠사옵니다.”큰 인심 쓰듯 말하는 명온을 보며 영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명온의 차 시중을 들 사람이야 라온이 아니더라도 차고도 넘칠 터였다.

당장 공주의 뒤를 따르는 궁녀와 환관들의 숫자만 하더라도 십여 명이 족히 넘었다.

그럼에도 굳이 라온에게 차 시중을 들게 하겠다? 그것도 어쩔 수 없이?

속이 빤히 보였지만 영은 모르는 척 눈 감아 주었다.

“그렇게 하려무나.”등 뒤에 있던 라온이 울상이 된 채로 작게, 아주 작게 도리질을 했다.

“저하…….”“그럼 너는 연이의 차 시중을 들도록 해라.”“정녕 이대로 혼자 두고 가시려는 것은 아니시죠?”라온은 명온 공주가 듣지 못하도록 낮게 속삭였다.

“할 일이 태산이다.”“저하…….”“그럼 나는 이만 간다.”“세자저하!”이렇게 가시면 열 걸음도 못 가서 발병 나실 겁니다.

눈으로 말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못 본 척 시치미 뚝 뗀 영은 그대로 라온을 지나쳐 후원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작은 조각배 한 대가 관람지에 띄워졌다. 두 사람이 겨우 마주 앉을 만큼 작은 배였다.

그 배에 두 사람이 앉아있었다.

다름 아닌, 작은 찻상을 사이에 둔 라온과 명온 공주였다.

묵묵히 노를 젓던 라온이 힐끗 명온 공주를 응시했다.

우연일까?

공주와 눈이 딱 마주쳤다.

이제나 저제나 공주께 말을 걸 기회를 찾던 라온은 이때다 싶어 웃음 띤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공주마마.”“…….”그러나 그런 노력이 무안해질 만큼 명온은 콧방귀를 뀌며 라온을 외면했다.

‘아직도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네.’라온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해 라온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를 드리운 나무들은 붉은 색으로 곱게 물들어 푸른 하늘과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높은 하늘과 아름다운 단풍, 그리고 찰랑거리는 물소리.

그야말로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이렇게 단풍을 즐겨본 적이 있었던가? 곱씹어 생각해보아도 일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리 여유롭고 호젓한 시간이라니.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상에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너, 참으로 태평하구나.”카랑한 목소리가 라온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아, 공주마마.”라온이 서둘러 시선을 명온 공주에게로 돌렸다.

공주가 가운데 놓인 찻상을 눈짓했다. 찻잔에 차를 따르자 명온은 말없이 잔을 들어 맛을 음미했다.

그렇게 한 잔, 또 한 잔.

석 잔째 말없이 차를 마시던 공주가 불현듯 물었다.

“그런데 너, 오라버니와는 어찌 알게 된 사인 게야?”“공주마마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뭐?”“예전에 공주마마와 주고받던 연서가 끊기기 전, 공주마마께서 김 도령을 보자고 서신을 보내시고, 김 도령을 대신하여 소인이 그곳에 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하를 뵙게 되었습니다.”그 사건으로 한동안 김 도령이 사귀던 사람이 영이라고 오해했었다.

잠깐만!

라온의 표정이 불현듯 심각해졌다.

생각해보니 김 도령과 연서를 주고받은 사람은 사실 영이 아니라 명온 공주였다. 그 말인즉, 영은 사내를 좋아하는 사내가 아니란 말인가?

‘그건 아니야.’라온은 고개를 저었다.

장 내관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세자저하께서 장 내관님을 총애 하는 것 같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저하께서도…….

라온은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을 가진 분께서 어쩌다가…….

그러나 이내 눈앞에서 눈빛을 세우고 있는 명온 공주를 보며 황급히 표정을 굳혔다.

“오라버니가 나가셨어? 내게 말도 없이?”공주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라온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르셨사옵니까?”“몰랐다. 그럼 갑자기 연락이 두절 된 이유도 그 때문인 게야?”“그렇사옵니다. 그때 그 일로 다시는 연서를 쓰지 못하게 되었지요.”“그럼…… 네가 환관이 된 것도 오라버니 때문이더냐?”명온의 시선이 라온이 입고 있는 관복에 머물렀다.

“딱히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그럼?”“첫 번째는 갑자기 큰돈이 필요했사옵니다.”“큰돈?”“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돈이 필요했사옵니다.”“그래서 스스로 내시가 되겠다고 하였단 말이더냐?”“스스로 자청했다기보단, 돈에 속고 사소한 문서에 속았다고나 할까요? 전 판내시부사 박두용이라는 어르신께서…….”“박두용! 그 늙은 노인네가!”박두용의 이름을 듣자마자 명온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배가 균형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아, 공주마마. 그리 갑자기 일어나시면 아니 되옵니다.”놀란 라온이 서둘러 명온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중심을 잃은 배는 그대로 뒤집혀버렸다.

“어푸푸푸.”“으앗!”다행히 깊지 않은 곳이라 위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입고 있던 옷은 물론이고 머리카락까지 그대로 물에 푹 젖어버리고 말았다.

“공주마마, 괜찮으시옵니까?”서둘러 몸을 일으킨 라온이 공주에게 물었다.

아무리 수심이 얕은 곳이라곤 하지만 분명 놀라셨을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명온 공주는 화들짝 놀라며 라온의 손길을 피했다.

“괘, 괜찮다.”“바닥이 미끄럽습니다. 제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괜찮다니까.”한사코 라온의 손을 거부한 명온이 허둥지둥 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물에 젖은 무거운 옷 때문에 허우적거리며 걷던 공주는 결국 쭉 미끄러지며 다시 한 번 물에 빠지고 말았다.

“공주마마!”라온이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다. 난 괜찮아.”명온 공주는 한사코 라온의 도움을 거절했다.

그 사이 멀리서 두 사람의 뱃놀이를 지켜보던 공주전각의 궁인들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공주마마.”“괜찮사옵니까?”호들갑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명온은 금세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귀하신 공주께서 행여 고뿔이라도 걸릴세라. 마음이 조급한 상궁들은 공주를 들쳐 업은 채로 달리기 시작했다.

“기다려라, 잠시만.”보모상궁의 너른 등에 매달린 채로 명온이 소리쳤다. 그러나 놀란 보모상궁의 귀에는 들리지 않은 듯했다.

그녀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호숫가에 서 있는 라온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갔다.

“그래, 그렇게 된 일이었구나.”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명온 공주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갑자기 연서가 끊긴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자세한 사정이야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라온의 뜻과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돈 때문이라고 했지? 내시가 된 것도 전 판내시부사 박두용의 계략 때문이라고 했고?

어쩐 일인지 라온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 속에 응어리진 무언가가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절로 입가에 미소를 맺혔다.

그러다 문득, 옷에 물기를 짜내고 있는 라온과 눈이 마주쳤다.

움찔 놀란 공주는 얼른 웃음기를 지우고는 보모상궁의 등에 얼굴을 콕 박았다.

***

“괜찮으시려나?”어느새 저 멀리로 멀어져가는 공주를 보며 라온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내 으스스 어깨를 떨며 몸을 움츠렸다.

젖은 옷자락을 파고드는 가을바람이 제법 차가웠던 탓이다.

“으으, 이러다 고뿔에 걸리겠네.”라온은 서둘러 자선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딛는 걸음마다 뚝뚝 물기가 흥건했다.

***

자선당에 밤이 찾아왔다.

영과 병연, 두 사람은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었다.

라온이 없는 탓인지. 두 사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선당에는 깊은 적막으로 가득했다.

무거운 적막을 깬 것은 영이었다.

영은 술잔을 입안에 털어 넣으며 병연에게 물었다.

“찾았느냐?”민란을 주도했던 홍경래의 핏줄을 찾았느냐 묻는 질문이었다.

“찾았어. 그런데…….”잠시 말끝을 흐리던 병연은 술을 입안에 머금은 채 라온을 떠올렸다.

그 작은 얼굴에 피어나던 해사한 웃음이 이상하게도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자신을 올려다보던 그 눈빛도.

머릿속에 가득한 라온의 잔영을 털어내려는 듯 체머리를 흔들며 병연이 말을 이었다.

“이미 그곳을 떠난 뒤였다.”영이 이채 띤 눈으로 병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뭔가…… 숨기는 것이 있다.

찰나지간, 병연의 얼굴에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감정이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것을 영을 놓치지 않았다.

갈등.

병연은 망설이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왜 그러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지금은 영에게 밝힐 때가 아니었다. 조금 더 조사해 봐야할 일이다.

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처음으로 내게 숨기는 것이 생겼구나.”“……!”정곡을 찔린 듯 병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사람, 이미 꿰뚫어보고 있다. 뭐라 변명해야할까?

그러나 영은 더 이상 세세하게 캐묻지 않았다.

“생각보다 복잡한 일인가 보구나.”“…….”“네가 이리 할 때는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터.”영이 술병을 기울여 병연의 빈 잔에 술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약속해 줘야겠다.”“무얼?”“언젠가 네 고민이 끝나면…… 반드시 그 이유를 말해 줄 것. 약속해 줄 수 있겠느냐?”영을 빤히 바라보던 병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지.”“믿는다.”두 사람은 다시 묵묵히 술잔만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이번엔 병연이 입을 열었다.

“요즘 궁이 떠들썩하더군.”“나흘 뒤에 청나라 사신들이 올 거야. 중추절 진연에 사신들이 참석할 것이고, 그때 내가 준비한 정재를 선보일 작정이다.”“드디어 시작하는 건가?”“이제 겨우 한 발짝 움직이는 것이지.”“외척들이 순순히 받아들일까?”“아무리 외척들이라도 청국의 사신들이 있는 앞에서는 어쩌지 못할 것이야. 그리고 이것을 시작으로 나는 실추된 왕권을 바로 잡을 것이다.”영의 눈빛이 형형한 빛으로 반짝거렸다.

“내 손으로 만들 것이다. 위와 아래가 제자리를 찾고,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나라. 이 나라, 조선을 그런 나라로 기필코 만들 것이야.”영은 텅 빈 허공을 힘껏 그러잡았다.

그런 영을 바라보며 병연이 물었다.

“그런데…… 그 문제는 어찌 되었어?”“그 문제?”“저하의 치명적인 결점 말이야.”“아, 그거.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결점이다.”“예전에 청나라에 갔을 때, 황녀와 후궁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큰일 날 뻔한 일이 있었잖아. 그 정도면 사소한 결점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영이 씁쓸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 사소한 결점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다. 홍라온, 그 녀석이 해결해 줄 거야.”“라온이가?”“그래. 녀석에게 연회가 열리는 내내 내 곁에 붙어 있으라고 했지.”“연회 내내란 말이지?”병연이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듯한 얼굴로 영의 말을 곱씹을 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고 검은 그림자가 터벅 방 안으로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왕세자, 영의 사소한 결점을 해결해 줄 당사자인 라온이었다.

무심코 라온을 돌아보던 병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라온의 머리가 푹 젖어있는 걸 발견한 탓이다.

거기다 추운 것인지 입술마저도 파랗게 질려 있었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어디서 이리 젖은 거냐?”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병연이 겉옷을 벗어 라온의 등에 걸쳐주며 물었다.

“그건…….”오는 길에 새 관복으로 갈아입었지만 젖은 머리만은 어쩔 수 없었다.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만지던 라온이 쓱 영을 돌아보았다.

“저분께 물어보십시오. 벗의 탈을 쓴 화초저하께 말입니다.”사실은 화초저하라는 말 대신 승냥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니면 원수거나.

하지만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라온이라 하더라도 감히 왕세자를 상대로 그런 막말을 할 수는 없었다. 벗이라 해도 말이다.

기껏 반항의 의미로 ‘화초저하’라 부르는 것이 고작이다.

“화초저하?”영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 매서운 눈매를 못 본 척 한 채 라온은 그대로 방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라온이 비 맞은 고양이처럼 이불 속을 파고들고 있자니, 영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벗이나 되어 주라 했더니 어느새 물장난까지 함께 하는 사이가 된 것이냐?”“물장난이 아니라 물에 빠진 겁니다.”“물에 빠져?”영이 자세한 연유를 물으려 할 때였다.

“홍라온!”범이 울부짖는 듯한 고함소리와 함께 문풍지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아로새겨졌다.

이윽고 쾅, 방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쿵쿵 발소리를 내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사내는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라온의 멱살을 잡았다.

“홍라온, 네 이놈!”“컥! 왜 이러십니까?”부지식간에 사내에게 멱살을 잡힌 라온은 허공에서 발을 버둥거렸다.

뭐야? 이건 또 무슨 일이야? 무슨 놈의 하루가 이리 다사다난해?

“홍라온! 네 이놈! 네놈이 그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라온은 눈을 휘둥그레 치떴다.

파렴치한 짓? 내가 또 무슨 일을 저지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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