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이 단단한 것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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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4
동궁전 마당에 앳된 소환내시 다섯이 일렬로 들어섰다.
라온을 비롯한 불통내시들이었다.
나무와 꽃을 심다 온 탓이라, 그들의 몸은 온통 흙투성이였다. 급한 대로 손과 발에 묻은 흙만 서둘러 씻어냈지만, 엉망인 모습이 깨끗해질 리 만무했다.
그들은 불안한 얼굴로 서로 마주 보았다.
“이런 꼴을 세자저하께서 보시면 뭐라 하시지 않을까?”“워낙 꼼꼼한 분으로 소문이 나서.”불통내시들이 동궁전을 찾은 이유, 바로 세자저하의 부름 때문이었다.
“대체 세자저하께서 우릴 왜 부르시는 걸까?”상열이 연신 동궁전을 두리번거리며 도기에게 물었다.
도기가 통통한 볼을 흔들었다.
“낸들 알겠는가. 혹시, 홍 내관은 뭐 아는 거라도 있는가?”“……글쎄요.”애써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라온은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자꾸만 영이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언제까지 도망 다닐 수 있을 거 같으냐?’아무래도 그 일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왕세자와 불통내시.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고 먼 관계가 아니던가.
아니, 전설 속의 봉황과 땅 속에 집을 짓고 사는 개미처럼 하등 무관한 관계다. 물론, 봉황의 발 디딤 한 번에 몰살을 당하는 것이 힘없는 개미의 입장이긴 하지만.
그 불평등하고도 불편한 관계를 떠올리니 더더욱 영이 했던 말이 목 안의 가시처럼 걸렸다.
“우리 불통내시들이 무어 저하의 심기를 거스른 건 아닐까?”상열이 나름 고민하여 추측을 내어놓았다.
도기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언제라도 한번 그분 시야 안에 든 적이라도 있었는가? 뭔가 보신 것이 있어야 심기를 거스르고 말고 할 것이 아닌가.”“그, 그렇지?”“당연히 그렇지.”도기의 대답에 어색하나마 미소를 짓던 상열이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왜 부르시는 거지?”“그건…… 나도 모르지.”세자저하의 성정, 얼마나 차고 냉정하신지 궁 안의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기에 왕세자의 부름을 받은 불통내시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처럼 파랗게 질려 있었다.
평소 웬만한 일에는 배도 긁지 않던 도기마저도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과거의 잘못들을 떠올리며, 혹여 그 일이 세자저하와 티끌만큼의 관련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전전긍긍했다.
“정말 별일 아니겠지?”도기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할 때였다.
“걱정할 필요 없네.”느닷없는 목소리가 불통내시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잔뜩 긴장하고 섰던 다섯 불통내시들의 고개가 일제히 뒤로 돌아갔다.
“최 내관님이 아니시옵니까?”저 멀리서 다가오는 늙은 환관을 향해 도기가 서둘러 허리를 접었다.
다른 이들도 그를 따라 머리를 조아렸다.
쭉 훑는 시선으로 불통내시들을 바라보던 최 내관이 뒷짐을 진 채, 말을 이었다.
“오늘 자네들을 부른 것은 따로 시킬 일이 있어서일세.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게나.”“그, 그렇군요. 그런 깊은 뜻도 모르고 괜히 불안에 떨었사옵니다.”최 내관의 인자한 말에 비로소 불통내시들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었다.
많고 많은 환관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자신들이지?
허구한 날 불통이나 받는 내시부의 골칫덩이들이 무슨 소용이 있다고 이리 따로 부르신 것일까?
그 의문에 답이라도 하는 듯 최 내관이 라온을 제외한 네 명의 불통내시들을 지목했다.
“거기 자네들은 여기 있는 윤 내관을 따라가시게.”최 내관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도기와 상열,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의 불통내시들은 윤 내관을 따라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최 내관이 묘한 눈길로 라온을 바라봤다.
이윽고 그의 주름진 입술이 열렸다.
“자네로군. 자네가 그 홍라온이로군.”의미심장한 한 마디와 함께 최 내관이 다시 한 번 라온을 위아래로 훑었다.
“네. 소인이 홍라온은 맞습니다만.”왜 그런 눈으로 보시는 것입니까?
“그래. 자네가 바로 그 홍라온이었어. 진짜 손끝 야무진 내관…….”과거의 실수를 상기하며 최 내관은 기어이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그때의 그 작은 실수로 왕세자 저하의 무언의 눈총을 얼마나 받아야 했던가.
늙으면 눈치도 없다더니. 자신이 꼭 그 짝이었다.
주군의 심기 하나 살피지도 못하는 환관이라니.
최 내관은 스스로를 향해 가볍게 혀를 찼다.
뭔가 북받쳐 오르는 듯한 최 내관을 보며 라온이 물었다.
“왜 그러시옵니까?”“뭐, 그런 게 있다네. 홍 내관, 자네는 나를 따라 오게나.”최 내관은 더 이상 어떤 설명도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라온 역시 그 뒤를 열심히 쫓았다.
동궁전을 나서던 최 내관이 흘리듯 말을 걸어왔다.
“내 자네를 찾아 여러 번 발걸음을 했었는데. 그때마다 번번이 없더군.”가슴이 뜨끔한 라온은 부러 먼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의 명으로 최 내관이 자신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때마다 이리저리 도망 다녔던 탓에 최 내관은 번번이 허탕을 쳤던 것이다.
뜻하지 않게 그를 골탕 먹인 셈인지라.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음엔 어딜 갈 때, 꼭 주위 사람들에게 행선지를 알려주도록 하게. 그래야 헛걸음을 하지 않을 게 아닌가?”다행히 최 내관은 라온이 일부러 도망 다닌 것은 모르는 눈치였다.
“꼭 그리하겠습니다.”이번에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뛰어봤자 벼룩이라는 사실을요.
그리 열심히 도망 다녔건만, 세자저하의 명이라는 한 마디에 순순히 영의 앞으로 가고 있는 참이다.
이것이 바로 권력의 힘이란 것이군.
그렇게 최 내관의 뒤를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얼마 전 청소했던 부용지를 지나친 두 사람은 후원의 안쪽 깊숙한 곳으로 들어섰다.
후원의 좁은 오솔길로 발걸음을 내딛으며 라온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후원의 깊은 안쪽은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곳이라고 했는데?
처음 궁에 들어오던 날, 장 내관은 궁의 이곳저곳에 대해 세세히 설명해주었다.
그때 장 내관이 궁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곳이라며, 절대 얼씬도 하지 말라고 언급한 곳이 바로 이곳, 후원의 안쪽 숲이었다.
이 숲은 오직 허락 받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왕실의 사람들과 왕족들, 그리고 그들이 허락한 자들을 위한 은밀한 공간. 그 비밀스러운 곳에 발을 디딘 라온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울창한 숲은 가을 향기로 가득했다.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붉은 빛깔의 단풍잎이 가득했다. 숲의 골짜기에서는 맑고 청아한 물줄기가 흘러 내렸고, 곳곳에 아름다운 호수와 정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물오른 소나무와 애틋한 붉은 단풍나무가 어우러진 후원은 여름과 가을이 공존했다.
웅장하되 화려하지 않았고, 단아하되 소박하지 않은 절경에 라온은 넋을 잃었다. 에두르는 눈길로 가을 옷을 입은 숲을 연신 두리번거리며 한참을 걸었다.
그렇게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즈음.
드디어 폄우사라는 현판이 붙은 작은 정자 앞에서 최 내관이 걸음을 멈춰 세웠다.
“폄우사?”“어리석음을 쫓아낸다는 뜻이라네.”“여긴 어디입니까?”“세자저하께서 즐겨 찾는 곳이지.”“하온데 어찌하여 저를…….”“여기서 기다리게. 저하께서 곧 오실 것이네.”라온을 남겨둔 채 최 내관은 후원 저 편으로 사라졌다.
마당에 홀로 남은 라온은 정자를 둘러보았다.
ㄱ자 모양의 작고 소박한 정자는 텅 비어 있었다.
“화초서생…… 아니, 세자저하께선 언제 오신다는 거야?”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라온은 뒷짐을 진 채 마당을 어슬렁거렸다.
그렇게 일다경이 흘렀다.
고즈넉한 숲의 한가운데서 홀로 있으려니 참으로 무료했다.
괜스레 하릴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니 마당 한쪽에 징검다리 모양으로 박혀 있는 반석이 눈에 들어왔다.
일정 간격으로 놓인 반석의 모양은 사람의 발자국을 닮아 있었다.
“어? 신기하네.”본디 호기심이 많은 라온이었다.
“돌이 반질반질한 것을 보니 누군가 꽤 밟은 것 같은데. 왜 굳이 이런 걸 만든 거지?”라온은 조심스럽게 반석 위에 발을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순서대로 걸음을 옮겼다.
“아하!”라온은 이내 반석의 용도를 깨달았다.
이 반석, 걸음걸이를 연습하는 것이었군.
반석 위의 발자국을 따라 걸음을 옮기니, 양반가 사내의 당당한 팔자 걸음걸이가 절로 되었다.
“반석이 놓인 폭이 작은 것을 보니, 아마도 아이였을 때 사용하는 모양이네.”반석 위로 걸음을 옮기며 라온은 쿡쿡 웃었다.
이리 뒷짐을 짚고 걷고 있자니 자신이 양반이라도 된 듯했다.
“이 반석, 제법이네. 그런데 이건 누굴 위해 이렇게 놓아 둔 거야?”“나를 위한 것이다.”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
화들짝 놀란 라온은 급히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그만, 다리가 꼬인 채 휘청거리고 말았다.
“어어!”뒤로 벌러덩 넘어지려는 찰나.
쿵.
뒤통수에 딱딱한 것이 닿았다.
“조심하지 않고.”정수리 바로 위에서 지청구가 들려왔다.
무심코 시선을 들어보니 아름다운 영의 얼굴이 시야에 꽉 들어찼다.
시리도록 서늘한 그의 눈동자가 라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뒤통수에 닿아 있는 이 단단한 것의 정체는…… 세자저하의 가슴팍?
***
영이 라온을 받아낸 것은…… 그래, 본능적인 것이리라.
기우뚱 넘어가는 물건을 보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바로 세우려는 본능, 누군가 낯익은 자가 몸을 허청거리면 도와주려는 그런 마음이리라.
그런데…….
녀석의 조그마한 머리통이 닿아 있는 가슴팍이 불에 덴 듯 뜨겁다.
어디 그뿐이랴?
라온의 말간 두 눈과 마주하자 이상하게도 저릿한 감각이 등줄기를 훑어 내려갔다.
‘이게……대체 어찌 된 일일까?’조금은 당황스러운 상황에 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찡그림을 불편한 심기의 표현이라 생각한 라온이 황급히 영에게서 몸을 뗐다.
순간, 영의 얼굴에 정체 모를 아쉬움이 자리 잡았다.
영은 놀란 토끼처럼 팔짝거리는 라온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묘한 녀석.
그러나 이 묘한 녀석은 묘한 만큼이나 둔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영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눈곱만큼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허둥대고 있을 뿐이다.
“세, 세자저하를 뵈…….”“그만 둬라.”영은 바닥으로 엎드려는 라온을 막았다.
예를 차리며 잔뜩 움츠려드는 라온이 거슬렸다. 맹랑해도 좋으니 예전처럼 따박따박 대들고 당찬 소리도 거리낌 없이 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굳이 차가운 바닥에 엎드릴 필요 없다.”“네?”“여긴 아무도 없다.”“네?”“여긴 너와 나, 두 사람뿐이라고 했다. 두 사람만 있을 때는 벗이라고 하질 않았느냐?”“하, 하오나.”어쩔 줄 몰라 하는 라온을 보며 영이 말했다.
“어째 오늘은 영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로구나. 네? 아니면 하오나이니.”“네?”“그 맹한 대답은 이제 그만 됐다. 따라 오너라.”영이 라온의 손목을 잡고 폄우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방 들창문이 열린 방은 아득했다.
코끝으로 파고드는 그윽한 나무 향이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는 듯했다. 그 향기에 조금은 긴장이 풀린 듯 라온이 물었다.
“이곳은 어딥니까?”“나만의 비밀공간이다.”“저하의 비밀공간이요?”영의 비밀공간이라는 소리에 라온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 안에 있는 집기라고는 아주 단출했다.
작은 서안과 다 해진 서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는 책장이 전부였다. 그리고 책장의 가장자리엔 사내아이들이 갖고 놀았음직한 목검이 놓여 있었다.
라온의 시선을 좇으며 영이 말했다.
“어린 시절 난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까 네가 밟았던 반석을 밟으며 걸음걸이를 연습하고는 했지.”그게 그런 사연이 있는 돌이었구나.
“그럼 이건 저하께서 갖고 놀던 목검입니까?”“내 벗이 처음으로 내게 선물했던 것이다.”“벗이라면…… 김 형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그래.”라온이 방 안을 둘러보는 동안, 어느새 영이 차를 내왔다.
“차도 직접 준비하십니까?”“비밀공간에 아무나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영은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찻잔을 건넸다.
“황공하옵니다.”왕세자가 친히 권하는 차였다.
임금께서 내려주시는 어사주 받은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아는 사람들도 있다던데.
그런데…… 나 이런 거 막 받아도 되나?
이거 마셨다간 급체할 거 같은데.
“마셔라.”“네.”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라온은 호록, 차를 마셨다.
잠시 후.
“맛있다.”차의 첫맛은 썼다.
하지만 이어지는 뒷맛은 새벽이슬을 머금은 것처럼 달콤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안에 고소한 잔향이 남았다.
영이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물었다.
“어떠하냐?”“후, 훌륭한 차라고 생각합니다.”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평생 두 번 다시 맛보지 못할 호사스러운 맛이 분명했다.
영이 픽, 옅게 웃었다.
“차 말고.”“하오면?”“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도망치지 못할 거라고.”“아, 그거 말씀입니까?”“그래. 말해보아라. 이리 나와 마주한 감상이 어떠하냐?”“…….설마 이런 식으로 권력을 이용하실 줄은 몰랐습니다.”잠시 망설이던 라온이 대답했다.
“왕세자인 것 또한 나다. 왕세자인 내가 권력을 이용한 것이 무에 잘못이냐?”“고작 환관 하나 불러내자고 그 대단하신 권력을 사용하신 것입니까? 그야말로 권력남용입니다.”“왕세자쯤 되면 권력을 남용해도 된다.”“훗.”영의 뻔뻔한 대답에 라온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네가 이제야 웃는구나.”“…….”아차!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라온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이미 흘러간 웃음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
정신 차려, 홍라온. 지금 눈앞에 있는 분은 네가 알던 화초서생이 아니야. 왕세자저하란 말이야.
예전처럼 속엣 말 툭툭 뱉고 웃었다간 언제 권력의 쓴맛을 보게 될지 모른다고.
라온의 표정이 굳어버리는 것을 보고, 영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이내 라온을 부른 용건을 꺼냈다.
“이번에 너를 여기까지 부른 것은 특별이 네게 명할 것이 있어서다.”“무엇입니까?”“곧 청나라 사신들이 오는 것을 너도 알고 있느냐?”“알고 있습니다.”“그 일로 너에게 긴히 부탁할 일이 있다.”“부탁이시라면?”“너도 알다시피 나에겐 사소한 결점이 하나 있질 않느냐?”라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단언컨대, 영은 지금껏 라온이 봤던 사내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사내였다. 미려한 외모와 뛰어난 머리, 게다가 이 나라 국본이라는 절대 권력까지.
또한, 다른 환관들의 입을 빌리자면 철혈의 피가 흐르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런 분에게 무슨 결점이 있다고 저러시는 걸까?
게다가 나도 알고 있……아! 그러고 보니 있다, 결점.
“여인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말입니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것이다.”“하온데, 그것과 저를 이리 부른 것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이번 사신단 중에 귀한 빈객이 몇이 있다. 그리고 빈객 중에 여인들도 몇 사람 포함되어 있다. 한 나라의 왕세자인 내가 내 나라를 찾은 빈객의 얼굴조차 구분하지 못한다면 체면이 뭐가 되겠느냐?”듣고 보니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자신을 부른 것은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
“그런 일이라면 적격인 분이 있습니다.”“혹시 장 내관을 말하는 것이냐? 그 손 끝 야무진 내관.”‘손 끝 야무진’이란 말에 유난히 가시를 세우며 영이 말했다.
라온이 속 모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바로 그분입니다. 장 내관님은 한번 본 사람의 얼굴은 절대 잊지 않는 분이십니다. 여인의 얼굴을 구분하는 것 때문이라면, 저보다는 장 내관님이 더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그건 안 된다.”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하여 그러십니까?”“내가 이 궁에서 믿는 사람은 오직 두 사람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나의 벗이다.”“…….”라온은 잠시 멍한 눈으로 영을 올려다봤다.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벗이라는 말보다는 그가 믿고 있는 두 사람 중에 하나라는 말이 왠지 모르게 기뻤다.
그러나 라온은 자꾸 풀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정신줄 놓지 마, 홍라온. 저분께서 저리 말씀하시는 건 그저 높으신 분의 한 순간의 유희 같은 거야. 네 주제를 알아야지. 저분은 왕세자고 넌…… 한낱 내시일 뿐이야. 저분에겐 사내도 계집도 아닌…… 그저 환관일 뿐이야.’라온이 마음속의 상념을 갈무리하는 사이, 영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 네가 이 일을 맡아줘야겠다. 네가 필요하다고 하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도 상관없다. 대신 넌 사신단이 조선을 떠날 때까지 내 곁에 머물러야 한다.”“하오나…….”“명이다.”“방금 전까지 벗이라 하질 않으셨습니까?”라온은 입술을 내밀며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영이 입매를 살짝 들어 올리며 미려하게 웃는다.
“그럼 벗의 부탁이라 해두지.”“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입니다.”“마음대로 생각해도 좋다. 그러나 이 일은 꼭 네가 했으면 좋겠구나.”영의 까만 눈동자가 라온의 두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거짓 없는 눈빛을 마주하자 라온은 마음이 흔들렸다.
뭐예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그리 보시면, 진짜로 제가 세자저하의 뭔가가 된 줄 착각한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