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29화 (29/131)

29. 아…… 나 찾아온 거 맞나봐.

중추절이 나흘 뒤로 바짝 다가왔다.

명절에 열리는 진연 준비로 궁인(宮人)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과장 하나 없이 바닥에 엉덩이 한번 대고 앉지 못할 만큼 바빴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은 아직 태산처럼 많이 남아 있었다.

간신히 일과를 마치고 자선당으로 돌아오니, 어느덧 시각은 해시초(亥時初: 밤9시)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후아, 힘들다.”

캄캄한 처소에 돌아온 라온은 불도 켜진 않은 채로 이부자리에 누웠다.

공주마마께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는 소리를 들은 이후, 마종자는 그야말로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날뛰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불통내시들을 들들 볶아댔다.

마종자의 닦달에 정신없이 궁 이곳저곳을 청소했던 탓인지, 온 전신이 비명을 내질렀다.

라온은 뻐근한 팔 다리를 길게 늘이며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오늘 고생 참 많았다. 내 팔다리야.”

삭신의 노고를 치하하다보니, 문득 단순히 몸만 피곤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는 마음마저도 몹시 곤한 날이었다.

명온 공주의 느닷없는 등장에 얼마나 놀랐던가.

갑자기 나타나 마종자의 머리통을 후려친 공주마마. 그녀의 출현에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바로 라온이었다.

명온 공주를 본 순간, 라온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고 등줄기가 꼿꼿해졌다.

그러나 우려했던 것과 달리 공주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뜬금없이 마종자를 후려치고는 그대로 라온에게는 말 한 마디도 없이 사라졌다. 심지어 스쳐가는 눈길로도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처음 보는 낯선 타인을 대하는 듯한 철저한 외면이었다.

그게 더 무섭다.

며칠 전, 영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지만 오늘 공주의 모습으로 보아 여전히 앙금은 남아 있는 듯했다.

그날 밤, 서늘하면서도 애달픈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공주의 눈망울이 지금도 선연하다. 더불어 목덜미에 와 닿았던 싸늘한 쇠붙이의 느낌도.

이대로 바닥으로 푹 꺼져 사라져 버리고 싶다.

“휴.”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왕세자 저하도 모자라 공주마마까지 피해 다녀야 할 상황이라니.

첩첩산중, 산 너머 산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공주마마께서는 왜 자신을 보고도 모른 체하셨을까? 차라리 무슨 벌이라도 내리면 속이라도 시원했을 텐데. 대체 무슨 마음이실까?

“어찌 쉬운 일이 하나도 없구……응?”

어둠 속에서 버릇처럼 대들보를 올려다보던 라온이 문득 눈매를 가늘게 여몄다.

“……어?”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왠지 모르게 익숙한 형체가 보인 듯도 했다.

라온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촛불에 불을 댕겼다.

잠시 후.

대들보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새어나왔다.

“김 형!”

언제 사라진 적이 있었냐는 듯,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병연이 대들보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를 발견한 라온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꽃처럼 피어났다. 어깨를 짓누르던 피로도 한순간에 사라진 듯 가벼웠다.

“김 형, 언제 오셨습니까?”

라온은 할 수만 있다면 대들보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표정이 역력한 얼굴로 병연을 반겼다.

“뭡니까? 말도 없이 그리 사라지시면 어찌합니까? 저 많이 서운했습니다. 그런데 일은 다 마치신 것입니까? 언제 오신 것입니까? 식사는 하신 겁니까?”

숨도 쉬지 않고 질문 공세를 퍼부었지만 돌아누운 병연에게서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기에 라온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저 그간 하고 싶었던 말을, 내내 가슴 속에 꾹꾹 눌러두었던 말을 내뱉기에 바빴다.

“김 형, 그거 아셨습니까? 글쎄, 화초서생이 세자 저하라고 하질 뭡니까. 제가 얼마나 놀란 줄 아십니까? 그런데 김 형…… 혹시, 김 형께서도 왕족이거나…… 하여간, 그리 높은 신분이십니까?”

“…….”

“네? 설마 김 형도 화초 서생처럼 세자 저하이거나, 그런 것은 아니시지요?”

“아니다.”

귀찮은 투가 역력한 짧은 대답.

그럼에도 라온은 오랜만에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생각에 다시 한 번 환하게 웃었다.

“아, 네. 그렇지요. 세자는 오직 한 분뿐이지요. 그럼 김 형은 화초서생처럼 그런 분이 정말 아니란 말이지요? 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김 형마저 화초서생처럼 그리 존귀한 분이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함께 마음을 나누던 사람을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잃게 되는 건 아닌가, 그리하여 이 너른 자선당에 결국은 홀로 남겨지는 것은 아닌가 하여 정말로 걱정했었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안도하며 라온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치켜들고 병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이나 유심히 그를 올려다보던 라온이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김 형, 몸이 좀 축이 난 것 같습니다.”

“…….”

병연의 어깨가 보이지 않게 움찔거렸다.

“아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김 형, 기다리십시오. 저녁상 차려오겠습니다.”

“됐다.”

“아닙니다. 금방이면 됩니다. 그러니 기다리십시오.”

라온이 벌떡 일어나 저녁상을 차리려 방을 나가려 할 때였다.

“되었어.”

어느새 대들보 위에서 내려온 병연이 라온의 팔을 잡았다.

“김 형.”

며칠 만에 본 병연의 얼굴은 많이 꺼칠해져 있었다. 병치레를 하는 사람처럼 혈색도 영 좋지 않았다.

“김 형, 어디 아프십니까?”

놀란 라온이 병연의 이마를 짚으려 했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허무하게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김 형…….”“아픈 곳 없다.”“하지만 얼굴이 반쪽입니다. 일이 많이 힘드셨던 겁니까? 화초서생, 아니 세자 저하 말로는 민란의 주동자와 관련 있는 자들을 찾으러 가셨다고 하던데. 혹여 험한 자들과 만났던 것입니까? 무에 험한 일이라도 당하신 거예요? 김 형, 말씀 좀 해 주십시오. 갑갑합니다.”소낙비처럼 묻는 라온을 병연은 물끄러미 응시했다.

“너…….”묻고 싶은 말이 많은 것은 병연도 마찬가지였다.

가슴이 갑갑한 것은 되레 그였다.

하지만 저리 순수한 얼굴로 자신을 걱정하는 라온에게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어떤 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아니…… 확인하고 싶지 않다!

한참을 말없이 라온을 응시하던 병연이 불현듯 등을 돌려 방을 나갔다.

“김 형, 어디 가십니까? 같이 가십시오.”“성가시다.”라온은 병연의 뒤를 어미 뒤를 쫓는 병아리처럼 쫓았다.

“어?”그러나 자선당을 나선 순간, 병연의 모습은 신기루처럼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라온은 주위를 돌아보며 그를 찾았지만, 그 어디에도 그의 그림자조차 잡히지 않았다.

“김 형.”며칠 만에 돌아온 그에게서 뭔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시린 거리감이 느껴졌다.

왜 그러시지?

아아, 도통 알 수 없는 마음들뿐이다.

김 형의 마음도 그리고 공주 마마의 마음도.

***

다음 날.

푸른 새벽부터 내반원의 앞마당이 북적거렸다.

하루일과를 시작하기 전, 환관들의 집합을 알리는 연통이 돌았다. 궁의 환관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내반원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둥둥둥.

묵직한 북소리와 함께 성 내관이 내반원의 섬돌 위로 올라섰다.

“모두들 다 모였느냐?”그의 물음에 섬돌 아래에 모여 있던 백여 명의 환관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사흘 후가 중추절이니라. 이번 중추절 진연에는 종친들과 대소신료들은 물론이고 곧 한양에 당도할 청나라 사신들도 참석할 것이니. 준비에 만전을 다해야 할 것이야. 만약, 터럭만큼이라도 미흡한 부분이 보인다면, 치도곤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니 그리 알고 성심을 다하라.”말을 마친 성 내관이 섬돌 바로 아래 버티고 서 있는 마종자에게 눈짓을 보냈다.

마종자가 긴 두루마리를 펼쳐 그 속의 내용을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주상전하와 대소신료, 그리고 청나라의 사신들이 참석하는 외연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전에서 열릴 것이옵니다. 정전의 단장과 외연의 준비는 대전의 하 내관님께서 주도합니다. 다음은 내명부와…….”두루마리에는 환관들의 소속과 신분에 맞춰 각기 해야 할 일이 빼꼭하게 적혀 있었다.

할 일을 전해들은 환관들은 무리를 이룬 채 흩어졌다. 삼삼오오 열을 맞춰 흩어지는 그들의 얼굴에 긴장한 여색이 역력했다.

그 심상치 않은 기류에 라온이 작은 목소리로 도기에게 물었다.

“이번 중추절에 열리는 진연, 꽤나 중요한 행사인 모양이옵니다.”“말해 무얼 하나. 두 말하면 입 아프다네. 왕실에서 베푸는 연회 중에서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지. 게다가 이번엔 청나라 사신들까지 참석한다질 않는가? 윗분들이 긴장하는 건 그 때문이라네.”“청나라 사신들이 참석하는 것이 그렇게 큰일입니까?”라온의 물음에 도기가 자못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연회라고 하여 단순히 먹고 노는 자리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네. 사신들이 참석하는 연회란 한 마디로 말해 이 나라의 체면과 위신이 걸린 자리라고도 할 수 있지. 연회의 작은 실수조차도 사신들에겐 커다란 웃음거리가 될 터. 청국의 사신들에게 결코 얕잡아 보일 수는 없다네.”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궁에 감도는 묵직한 긴장감은 중추절 행사 때문이 아니라 청나라 사신들의 방문 때문이었다. 궁궐 전체가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조여진 느낌이다.

라온과 도기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일을 맡은 환관들은 속속 내반원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소환내시들의 차례가 되었다.

두루마리를 읽어 내려가던 마종자가 대열의 맨 끝에 서 있는 소환내시들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너희들은 지금 당장 정전과 통명전의 그림과 병풍들을 도화서로 보내거라. 나머지는 각 처소로 돌아가거라. 진연청에서 다음 명을 내릴 것이야.”그의 말끝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환내시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온 역시 그들과 함께 재게 몸을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 했다.

“어이, 그쪽 불통내시들.”마종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온과 도기를 비롯한 불통내시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종자 저 녀석이 또 무슨 심술을 부리려고.

아니나 다를까.

마종자가 뒷짐을 지고 거만한 표정으로 그들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입가엔 차디찬 멸시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너희 불통내시들은 지금 당장 단봉문으로 가거라. 거기에 오늘 하루 동안 너희가 궁에 심어야 할 나무와 꽃들이 있을 것이다.”마종자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도기에게 집어던졌다.

“나무가 일 백 그루, 꽃이 오천 포기다. 심어야 할 장소와 나무의 종류, 그리고 꽃의 종류와 색이 명시되어 있을 것이니. 한 치 실수가 없어야 할 것이야.”그의 말에 도기가 울상을 지었다.

“이 많은 것을 저희더러 다 심으란 말씀이옵니까?고작 하루 동안 불통내시 다섯 명이서 심기에는 턱없이 많은 숫자였다. 그러나 마종자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턱을 추켜세웠다.

“내가 이른 아침부터 흰소리나 하려고 네놈들을 부른 줄 아느냐?”“하오나…….”“이놈들이. 하등 쓸모없는 놈들이 말은 가장 많구나. 어서 움직이지 못하겠느냐? 네놈이 정녕 매를 맞아야 정신을 차릴 것이야?”도기를 쏘아보는 마종자의 기세가 험악해졌다.

“아닙니다. 가겠습니다.”라온이 서둘러 도기의 등을 떠밀었다.

두 사람의 뒤를 어깨를 축 늘어뜨린 불통내시들이 따랐다.

***

“에라이, 나쁜 개종자. 개도 안 물어갈 못된 놈 같으니라고.”통명전의 긴 담벼락을 따라 국화꽃 한 포기를 심을 때마다, 도기의 입에서 마종자에 대한 욕이 한 바가지씩 흘러나왔다.

그 옆에서 나무 심을 땅을 파던 라온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웃었다.

“아직도 화가 나시옵니까?”“화가 난다네. 그 개종자가 우릴 골탕 먹이려고 이리 작정하고 덤비니, 화가 나지, 안 나겠는가.”“그만 화 푸십시오.”“안 풀린다네. 아니, 안 풀을 걸세.”“그래도 욕은 그만하십시오. 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욕은 듣는 이가 먹는 것이라 하였사옵니다. 그 어여쁜 꽃들이 무슨 죄랍니까. 세상에 태어나 어렵게 꽃을 피웠더니, 고작 돌아오는 것이 욕이라니. 얼마나 가엾습니까.”라온의 말에 도기는 연보랏빛 국화꽃을 가만히 응시했다.

여린 꽃잎을 하늘거리는 모양새가 정말로 나 욕먹어서 슬퍼요, 하는 모양새로 축 늘어져 있었다. 도기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깃들었다.

“어이쿠. 내가 너희에게 못난 짓을 하고 말았구나. 그러나 나를 원망하지 마라. 이게 다 그 죽일 놈의 개종자때문이다. 그러니 너희도 나와 함께 개종자 욕을 한번 해 보자.”“하하하하.”욕을 하지 말라 하였더니, 꽃과 더불어 욕을 함께 하자는 도기의 너스레에 라온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도기가 참으로 유별나다는 눈으로 응시했다.

“홍 내관은 화도 안 나는가?”“당연히 화가 납니다.”“그런데 어찌 그리 좋은 낯을 할 수 있는가?”“하지만 화를 낸다고 하여 달라질 것이 없질 않사옵니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웃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질 않겠습니까? 누군가를 미워하며 제 속을 볶아대는 것보단 차라리 이리 나무를 심고 꽃을 심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즐겁게 생각하려 합니다.”“생긴 거는 꼭 규방의 규수처럼 생긴 사람이, 마음 씀씀이는 진정 사내대장부로군. 그야말로 대인이야, 대인.”“하하하, 대인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그저 일평생 이름값하며 살아가려 노력하는 것이옵니다.”“이름값이라니?”“제 이름이 라온 아니옵니까? 즐겁게 살라는 의미로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지요. 즐겁게 살라 지어주신 고운 이름이니. 즐겁게 살아가려고요. 그리고 사실 요즘처럼 일평생 즐거웠던 적도 없습니다.”지금까지 라온에게 삶이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견디며 인생의 길을 한발 한발 어렵사리 내딛는 것.

그러나 궁에 들어와 병연을 만나고 화초서생과 재회하는 사이, 사는 것이 진실로 즐거워졌다.

어느 사이엔가 라온은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허허허, 그런가.”수면에 드리워진 햇살처럼 반짝거리는 라온을 보며 도기 역시 웃고 말았다.

라온의 말대로 이름에 어떤 주술적인 힘이라도 있는 것일까?

‘라온’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마다 마음이 즐거워지는 기분이다.

정말이지 홍 내관은 주위를 환하게 만드는 기묘한 힘이 있단 말이야. 라온과 몇 마디 나누다 보니 어느덧 사나웠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다 문득 저 멀리로 시선을 던지며 도기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저분께서는 또 지나가시네.”“누구 말씀이옵니까?”라온이 고개를 들어 도기의 시선을 좇았다.

이윽고 그녀의 시야에 명온 공주의 얼굴이 맺혔다.

연분홍 당의와 푸른 스란치마를 입은 공주를 선두로 십여 명의 궁녀가 종종 걸음으로 뒤를 따르고 있었다.

라온의 얼굴이 절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라온은 본능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없을까?

명온 공주는 왕세자인 영보다도 오히려 더 피해야 할 상대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 몸을 숨기기엔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그 사이 명온 공주와 그 일행들이 두 사람의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공주의 행차에 근처에 있던 불통내시들이 황망히 고개를 숙였다. 라온도 도기를 따라 서둘러 머리를 조아렸다.

이윽고 타박거리는 걸음걸이와 함께 황금빛 모란꽃이 화려하게 수놓인 당혜가 눈에 들어왔다.

라온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공주께서 못다 부린 성화를 부리러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 생각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라온의 지척까지 다가왔던 명온 공주는 이번에도 그대로 쌩하니 그녀를 지나쳐가 버렸다.

“……응?”날벼락을 기다리던 라온은 조금은 멍한 표정으로 공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를 보러 오신 것이 아니었나?

공주 마마의 깊은 저의를 알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참으로 이상하단 말이지.”도기가 통통한 턱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뭐가 말이옵니까?”“좀처럼 바깥나들이 하지 않던 분께서 요즘 부쩍 바깥출입이 잦아지셨으니 이상하다는 것이네.”“병석에 오래 누워 계시질 않으셨습니까. 갑갑하셨던 모양이지요.”그래, 그렇게 믿고 싶다.

절대 자신을 찾아온 것이 아니리라.

“아니, 그럴 분이 아니니 말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오늘만 벌써 저분을 두 번째 뵙는 것이니.”“두 번째라고요?”“몰랐는가? 하긴, 나도 처음에도 하도 빨리 지나쳐 가시기에 알아차리지 못하였다네. 그런데 아까 단봉문에서 뵈었던 분도 공주 마마가 확실하다네.”“그, 그랬습니까? 혹시 산보라도 하는 것이 아닐까요?”“처음 공주 마마를 뵌 것이 묘시(卯時:아침5시)였다네. 게다가 지금이 사시초(巳時初:아침 9시)니. 산보라고 보기엔 너무 긴 시간 같은데.”“그렇군요. 산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네요.”“거참, 정말 이상하단 말이지. 평소에는 창덕궁으로는 잘 걸음하지 않던 분이셨는데. 근자에 들어서는 너무 자주 뵙게 되는군.”“그러게요. 너무 자주 뵙네요.”도기의 말에 맞장구치며 라온은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아…… 나 찾아온 거 맞나봐.

그런데 왜 자꾸만 그냥 지나치시는 것일까?

***

“공주 마마, 공주 마마.”보모상궁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명온을 불렀다.

“공주 마마, 조금만 천천히 가시옵소서. 아니, 이제 그만 가시옵소서.”기어이 공주의 당의 자락을 붙잡으며 보모상궁은 통 사정을 했다.

“왜 그래?”그제야 명온이 걸음을 멈추고 보모상궁을 돌아보았다.

“산보를 권한 건 보모상궁이잖아.”보모상궁은 턱까지 차 오른 숨 사이로 겨우겨우 말을 뱉었다.

“하, 하오나 이리 심하게 하시라 올린 말이 아니었사옵니다. 이러다 다시 자리에 누우실까 참으로 저어되옵니다. 힘들지 않으시옵니까? 벌써 두 시진째 걷고 계시옵니다.”“벌써 그리 되었나?”그러고 보니 다리가 아픈 듯도 하다.

벌써 두 시진째라니.

그저 마음이 답답하여 가볍게 산보나 하자고 나선 것인데. 다시 정신을 차려 보니 두 시진이나 걷고 있었던 것이다.

명온은 새침한 눈매로 제 신코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미련한 발아, 어쩌자고 자꾸만 그쪽으로 가는 것이야?’한참을 발끝만 내려다보던 명온은 이윽고 말끔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래. 오늘은 그만하자꾸나.”말이 끝나기 무섭게 명온은 창경궁에 있는 자신의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네, 마마. 오늘은…… 오늘이라고요?”저도 모르게 만세를 외치던 보모상궁은 뭔가 걸리는 표정으로 황급히 명온의 뒤를 따랐다.

“공주마마, 설마 내일도 이리 산보를 하실 생각은 아니시지요?”“아니. 하려고. 할 거야, 산보.”순간, 보모상궁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공주마마, 왜 이러시옵니까? 아직도 어디 미령하신 것이옵니까? 내의를 부르라 하올까요?”“왜? 내가 이상해?”“아니…… 그것이 아니라…….”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보모상궁이 눈동자를 황급히 돌렸다.

“이상한가 보네.”두 시진이나 산보를 하고 있으니 이상하지 않을 리 없다.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지.

어째서 이러는 거야? 설마, 아직 그 녀석에게 미련이 남은 것이야?

“아니, 난 그저 그 녀석의 비천한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야.”“네?”명온의 혼잣말에 보모상궁이 미련하게 눈을 끔뻑였다.

“아무것도 아니야.”고개를 흔든 명온 공주가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걷는 방향이 처소가 있는 창경궁 쪽이 아니었다.

“어, 어디로 가시는 것인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두 시진이나 계속된 산보의 충격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한 보모상궁이 해쓱해진 얼굴로 다급하게 물었다.

“산보는 아니야.”걱정 말라는 투로 명온이 말했다.

“그, 그렇사옵니까? 그럼 어디를…….”“잠시 가볼 데가 생겼어.”“어딜 말이옵니까?”보모상궁이 종종걸음 치며 물었지만 명온은 대답 대신 빠른 걸음으로 어딘가로 향했다.

***

내반원 집무실로 뜻밖의 객이 찾아왔다.

“공주 마마가 아니시옵니까?”진연과 관련하여 마종자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던 성 내관이 화들짝 놀라 방문 앞으로 달려갔다.

“공주 마마께서 이리 누추한 곳까지 어인 걸음이시옵니까?”성 내관이 서둘러 허리를 접었다.

“성 내관에게 특별히 청할 것이 있어 들렸네.”“마마, 그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청이라뇨? 명만 내리시옵소서. 이 성 내관,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공주 마마의 명을 이행할 것이옵니다.”“자네 몸이 부서질 필요는 없네.”“하하, 그렇사옵니까? 하오시면 말씀해보시옵소서, 마마. 무슨 명이시옵니까? 소인, 두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하겠사옵니다.”“내 전각에 힘쓸 자들이 필요하네.”“힘쓸 자들이라 하심은…….”“오래 병석에 누워 있다 일어난 탓인지. 우중충한 것이 싫어. 전각의 세간을 좀 더 화사한 것으로 바꾸고 싶네. 그러니 내시부의 아이들을 몇 명 보내주게나.”“아하, 그런 말씀이옵니까? 여부가 있겠나이까. 소인, 곧 쓸 만한 아이들로 추려 보경당으로 보내겠나이다.”“이런 일에 굳이 사람을 추릴 필요까지 있겠는가? 오는 길에 보아하니 적당한 자들이 눈에 띄더군.”“어떤 자들이옵니까?”명온이 열린 동창 너머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아까 오다 보니 통명전 담벼락에 꽃을 심는 자들이 있더군.”“통명전 담벼락에 꽃을 심는 자라면……?”성 내관이 공주께서 뉘를 지칭하는지 도통 갈피를 잡지 못해 말끝을 흐릴 때였다.

두 사람의 곁에서 쥐죽은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마종자가 성 내관의 귓전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무래도 불통내시들을 말씀하시는 듯하옵니다. 그자들에게 통명전 근처에 가을꽃을 심으라고 명을 내렸사옵니다.”“불통내시라면……!”성적이나 행동거지나 소환내시들 중에서도 가장 바닥인 골칫덩이들이 아니던가?

성 내관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공주 마마. 그 아이들은 아직 제대로 수련도 받지 못한 소환내시들이옵니다.”성 내관의 말에도 불구하고 명온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집을 꺾지 않았다.

“힘쓰는 일에 수련 같은 것이 무에 필요하겠나.”“하오나…….”“나는 그자들이면 되네.”명온은 ‘그자들’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이쯤 하였으면 눈치 빠른 성 내관이 안 들어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성 내관이 난처한 얼굴로 양손을 비볐다.

“왜? 무어? 문제라도 있는 것인가?”“그것이…….”“말해 보아. 뭐가 문젠가?”“그자들은 이미 다른 분께서 따로이 시키실 있다 하시어…….”성 내관은 지문이 닳도록 양손을 비비며 명온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도도하신 공주 마마의 양쪽 눈썹이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다른 분? 뉘더냐?”뉘가 있어 이 궁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방해할 자가 있단 말인가.

“……세자 저하이시옵니다.”잠시 뜸을 들이던 성 내관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명온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오라버니께서?”뭐야? 이번에도 또 가로채 가신 거야?

그때, 성 내관이 비굴한 웃음을 얼굴 가득 머금은 채로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하오면 공주 마마, 보경당으로 다른 환관들을 보내겠사옵니다. 불통내시들과는 격이 다른 영민한 녀석들로 추려서…….”성 내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명온 공주가 휙,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섰다.

공주는 내반원을 나서며 냉랭하게 말했다.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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