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얼굴이 마음에 안 들어!
늦은 밤 찾아온 라온을 숙의전의 오 상궁이 의아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숙의마마를 뵙고 싶단 말인가?”
라온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중요한 일이옵니다.”
잠시 숙의 박씨의 침소를 돌아보던 오 상궁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늦은 시각이네. 그만 돌아가시게나.”
“잠시면 되옵니다.”
“아니 되네. 숙의마마께선 이미 잠자리에 드셨다네. 그러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고 내일 다시…….”
오 상궁이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을 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처소 문이 열리고 박 숙의가 모습을 드러냈다.
“숙의마마.”
오 상궁이 서둘러 머리를 조아렸다.
박 숙의는 그런 오 상궁을 무시한 채 라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인가?”
박 숙의가 열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라온을 보고 있지만 텅 빈 눈동자엔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다.
영혼 없는 허깨비.
사랑을 잃은 박 숙의는 그렇게 하루하루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한 사내를 향한 조갈로 그녀의 입술은 하얗게 마르고, 복사꽃빛으로 빛나던 얼굴은 제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라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주상 전하께서 보내신 서한을 소인에게 보여주시면 아니 되겠사옵니까?”
“무어라 했니?”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전하께서 숙의 마마께 보내신 답신을 소인에게 보여주시옵소서.”
그 당돌한 대답에 박 숙의의 얼굴에 어이없는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이내 웃음기를 지은 박 숙의가 말했다.
“버렸다.”
짧게 대답한 박 숙의는 그대로 침소 안으로 몸을 움직였다.
라온은 황급히 그녀를 다시 불렀다.
“마마.”
주상 전하의 답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박 숙의의 얼굴에 여전히 미련이 가득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황급히 바닥에 머리를 묻은 라온이 말했다.
“어쩌면 전하께서는 매번 답을 보내신 것일지도 모르옵니다.”
박 숙의의 걸음이 멈춰졌다.
그녀가 천천히 라온을 향해 돌아섰다.
“지금 무어라 했는가?”
“주상 전하께서는 매번 숙의 마마의 서한에 답신을 한 듯하옵니다.”
라온의 대답에 박 숙의가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열고 쥐어짜듯 말했다.
“그분께서는 매번…… 백지를 보내셨다. 그것을 답신이라고 하는 게냐?”
체념과 원망이 서린 목소리와 함께 내내 죽어 있던 눈빛에 새로운 감정이 떠올랐다.
분노.
좌절한 여인이 표출할 수 있는 극한의 감정이 화르르 피어올랐다.
그러나 분노는 이내 절망으로 변하여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을 짜내었다.
기어이 울음을 내놓는 박 숙의를 라온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나를 더는 괴롭히지 마라.”
“마마.”
“네 너의 말로 잠시 희망을 품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나를 버리신 것이 분명하구나. 그분은 이제 나를 잊었다.”
“아니옵니다. 그것이 아니옵니다.”
“허면?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야?”
따지듯 묻는 박 숙의를 향해 라온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마마. 잠시 주위를 물려주시옵소서.”
“……어찌하여?”
대답 대신 라온은 그저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박 숙의가 문 앞을 지키는 오 상궁을 향해 턱짓을 했다.
“잠시 물러가 있게.”
“하오나…….”
“물러가라 하였네.”
지금은 비록 주상 전하의 총애를 잃었다고는 하지만 내명부 종 2품의 위엄은 여전했다.
잠시 대립각을 세우던 오 상궁이 머리를 조아리며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아이들을 백 보 밖으로 물려라.”
“명을 받자옵니다.”
이내 부산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인기척이 멀어졌다.
잠시 서서 주위를 둘러보던 박 숙의가 라온에게 말했다.
"너는 나를 따라 안으로 들어와라."
침소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따라 라온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박 숙의와 라온은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않았다.
잠시 말없이 라온을 응시하던 박 숙의가 입을 열었다.
“내 한낱 내관에 불과한 너의 말을 듣고 이리까지 한 까닭은, 네가 다른 환관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너는 순진한 것인지, 어리석은 것인지, 열이면 열, 나의 명을 고대로 이행하더구나.”
“네?”
“지금까지 내가 대전으로 글월비자를 보낸 것이 몇 번이나 되는 줄 아느냐?”
“…….”
“아마도 천 번은 훨씬 넘을 것이다. 어찌 보면 한심한 여인네의 한심한 짓거리일 테지. 그래서일까? 지금까지 글월비자 노릇을 하던 환관들은 열이면 열, 몇 번 대전으로 가다가 그 이후로는 시늉만 하더구나.”
“어찌 그런 일을 하였겠사옵니까?”
라온의 말에 박 숙의는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굳이 보지 않아도 알아지는 것이 있는 법이다.”
숙의 마마, 나름 육감이 좋으신 분이네.
내심 놀라 혀를 내두르고 있자니, 박 숙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헌데, 너는 다른 자들과는 달리 매번 다른 답신을 가져오더구나. 비록 속의 내용은 같다하더라도. 매번 이리 내 명을 곧이곧대로 따른 환관은 네가 처음이다. 하여, 특별히 이번만은 너의 말을 따라 주위를 물린 것이다.”
“황공하옵니다.”
“허니, 말해 보거라. 어찌하여 주위를 물리라 하였느냐?”
“그 전에…….”
라온은 혀끝으로 입술을 축였다.
“마마, 소인에게 주상 전하의 답신을 보여주실 수 있으시옵니까?”
라온의 말에 박 숙의는 머리맡에 놓여 있는 자개함을 열었다.
수북이 쌓여 있는 붉은 봉투.
그 속에 든 것은 하나같이 하얀 여백의 답신이었다.
낮게 한숨을 쉬던 박 숙의가 그 중 맨 위의 것을 라온에게 건넸다.
역시나 하얀 백지.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라온이 문득 백지 위에 얼굴을 묻었다.
그 괴이한 행동에 박 숙의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대체 뭐하는 것이냐?”
박 숙의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라온이 말했다.
“소인의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무릇 세상만물의 물건에는 나름의 모양과 색과, 향기가 있다고 하였사옵니다. 말인 즉, 그 물건이 갖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그런데 주상 전하의 서한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사옵니다.”
“이상한 점?”
“답신으로 보내신 것은 그저 하얀 빈종이. 그런데 그 종이에서 매번 새콤한 능금 향이 났사옵니다.”
라온의 말에 박 숙의가 종이를 들어 냄새를 맡았다.
“그렇구나. 네 말대로 능금향이 난다. 그런데 이건 능금향이라기엔 너무 시게 느껴지는구나.”
박 숙의의 말에 라온은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소인의 할아버지께선 세상의 재미있는 것을 참으로 많이 알고 계신 분이시옵니다. 소인은 어린 시절을 할아버지와 함께 보냈는데, 그때 할아버지께선 재미있는 것을 많이 알려 주셨사옵니다.”
“그것과 이 냄새와 상관이 있는 게냐?”
“소인, 주상 전하의 서한에서 나는 능금냄새를 맡는 순간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주고받던 서한이 생각났사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언젠가 할아버지께서 수수께끼라며 백지로 된 서한을 소인에게 주신 적이 있으셨지요.”
“네 할아버지께서도 꽤나 짓궂었던 모양이구나.”
“그런 것이 아니었사옵니다.”
“그럼?”
“그것은 비밀서한이었사옵니다.”
“비밀서한?”
박 숙의의 얼굴에 의아함이 피어올랐다.
찰나.
라온은 방 안에 켜져 있는 촛불 위로 서한을 가져갔다. 서한은 금방이라도 촛불에 화르르 타 버릴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놀란 박 숙의가 날카로운 음성으로 소리쳤다.
“네놈! 대체 이게 무슨 짓…….”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가 채 허공에 퍼지기도 전에.
그저 하얀 백지에 불과했던 서한에 거짓말처럼 글씨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이것이 대체…… 어찌…… 어찌 된 게냐?”
박 숙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라온과 서한을 번갈아보았다.
금세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그녀의 앞으로 주상전하의 글씨가 써진 서한이 놓여졌다.
“소인이 비밀서한이라 하질 않았사옵니까?”
라온의 얼굴에 생긋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꽃이 지는 봄은 첫 가을과 같네. 밤이 되니 은하수도 맑게 흐르네. 한 많은 몸은 기러기만도 못한 신세, 해마다 임이 계신 곳에 가지 못하고 있네.>
백지 속에 숨겨진 주상 전하의 마음은 그리움이었다.
기세등등한 중전마마의 살벌한 눈초리에 밀려 차마 내놓고 말하지 못한 마음이라. 그 마음을 받아든 박 숙의의 얼굴에 또 다른 의미의 눈물이 맺히고 말았다.
“이게…… 이것이 어찌 된 것이냐?”
“능금으로 만든 식초로 쓴 서한이옵니다.”
“전하…… 전하…….”
임께서 저를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 임께서도 아직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 그녀를 벅차오르게 했다.
박 숙의의 얼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과는 다른 기쁨의 눈물이었다.
물끄러미 지켜보던 라온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복헌을 나서는 그녀의 귓가에 언젠가 영이 했던 말이 아른거렸다.
‘화초서생, 아니…… 세자 저하. 흐르는 것이 세월이고, 세월의 물결 속에 사랑의 기억조차도 흘러가 버린다고 하셨습니까? 하지만 틀리셨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사랑의 기억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기억은 사람의 머릿속에 새겨지지만 추억은…… 영혼에 각인되는 법이니까요.’
하늘을 올려다보는 라온의 얼굴에 오랜만에 환한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
다음 날 아침.
라온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소환내시 교육장으로 향했다.
숙의 마마의 일이 해결되었기 때문인가.
내딛는 걸음이 유난히 가벼웠다.
그런데…….
걸음을 옮기던 라온은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희붐하게 새벽이 밝아오는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분명 누군가 뒤를 쫓는 것 같았는데. 내 착각이었나?”
좀 전부터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런데 정작 뒤를 돌아봐도 수상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네.”
고개를 갸웃하며 라온은 내시 교육장 안으로 들어섰다.
“홍 내관. 이제 오는가?”
라온을 본 상열이 손을 흔들었다.
불통내시라는 오명으로 라온으로 엮여진 이들은 언제부터인가 끈끈한 동료애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그를 필두로 여기저기서 아는 체를 해왔다.
일일이 고개를 숙이는 라온에게 도기가 통통한 몸을 흔들며 다가왔다.
“이보게, 홍 내관. 무에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겐가?”
“아닙니다.”
라온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난 또 허파에 바람 든 사람처럼 웃고 있기에 무에 좋은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네.”
“그렇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라온의 기분은 하늘을 날아갈 듯 가벼웠다.
내내 가슴을 짓눌렀던 숙의 마마의 일이 해결되었던 까닭이다.
아니, 엄밀히 따지고 본다면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숙의 마마는 여전히 오매불망 기다리던 주상전하와 만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분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어쩌면 이번에 밝혀진 비밀 서한으로 인해 오랫동안 못 나눴던 대화를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이 예까지 미치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돋아났다.
라온이 행랑채 툇마루에 엉덩이를 걸쳤다.
도기가 그 곁에 앉았다.
잠시 숙의 마마 일을 생각하며 빙싯거리고 있을 때였다. 하릴 없이 곁자리를 지키고 있던 도기가 은근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홍 내관, 자네 소문 들었는가?”
“소문이요?”
“요즘 궁 안이 뒤숭숭하다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옵니까?”
“이런 이런, 이리 궁 안 소식에 늦어서야.”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도기가 작은 목소리로 속달거렸다.
“이건 비밀인데 말이야, 내 자네에게만 특별히 말해주는 걸세. 다른 곳에 가서는 절대 발설해서는 아니 되네.”
검지를 입술에 세운 도기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비밀을 강조했다.
하지만 정작 도기가 알게 된 이야기 중에 비밀이 지켜진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무슨 일인데 그리 비밀이라 하시는 것입니까?”
“요즘 궁의 가장 높은 곳에 계신 분들 중 두 분의 심기가 어지럽다는 소문일세.”
“궁의 가장 높은 곳에 계신 두 분이라면 대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라온이 묻자 도기가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그는 얇은 입술을 열었다.
“이건 절대 비밀이네.”
저리 말해도 아마 이 교육장 안에서 이 이야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라온은 내색하지 않은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걱정 마십시오.”
“그럼, 내 홍 내관을 믿고 말해 줌세. 사실…… 그 두 분 중 한 분은 바로 세자 저하일세.”
순간, 라온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하고 말았다.
아…… 이거 병인가 봐. 요즘 세자 저하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 한구석이 뜨끔해진단 말이지.
“세자 저하께서 왜요?”
“글쎄.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 듯 신경이 날카로우시다는 소문이네.”
“그렇사옵니까?”
“그렇다네. 하여, 조정에 무슨 풍파가 일어날까 싶어 조정 대신들이 잔뜩 몸을 사린다고 하더군. 그러니 자네도 조심하게나.”
“…….”
이미 늦었습니다.
세자 저하인 줄도 모르게 낯선 벗이라 하질 않았나, 그분과 입술을 마주치지 않았나.
그것도 모자라 세자 저하를 말복이에 빗대 이야기까지 했으니.
되돌리기 힘든 짓을 한 것을 세어보자면 양손으로 다 꼽지 못할 지경입니다.
“내가 미쳤지. 죽으려고 환장했지.”
라온은 낮게 중얼거리며 주먹으로 제 머리를 콩콩 찧었다.
근래 들어 갑자기 생긴 버릇이었다.
놀란 도기가 통통한 얼굴을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자네, 왜 그러는가?”
“아, 아닙니다.”
어색하게 웃으며 라온이 다시 물었다.
“그럼 두 번째 분은 대체 뉘십니까?”
“두 번째 분은 바로…….”
도기의 입에서 그 두 번째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려는 찰나였다.
“어이, 거기 너희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라온과 도기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약조라도 한 듯 둘의 미간이 눈에 띄지 않게 일그러졌다.
‘마 내관님이다.’
‘개종자로군.’
“네놈들은 아침부터 예서 수다질인 것이냐?”
라온과 도기를 발견한 마종자가 먹잇감을 본 승냥이처럼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그는 두 사람을 향해 노골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을 보냈다.
뭐 트집 잡을 게 없나 하는 눈으로 라온과 도기를 번갈아보던 마종자가 문득 눈매를 가늘게 떴다.
“너, 복장이 그게 무엇이냐?”
찾다찾다 트집거리를 찾지 못한 마종자가 뜬금없이 라온의 복장을 문제 삼았다.
힐끔 눈치를 살피던 도기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홍 내관의 복장에 잘못된 것이라도 있습니까?”
도기의 물음에 마종자가 입술을 이죽거리며 억지를 썼다.
“고름을 잘못 맸다.”
“고름이요? 괜찮은 것 같은데…….”
“동정도 비뚤어.”
“그건 홍 내관이 다는 것이 아니라 침방나인이…….”
“시끄럽다. 어찌 말이 많아? 내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
마종자가 인상을 쓰며 윽박지르자 도기가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찌르는 듯한 시선으로 도기를 노려보던 마종자가 라온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숙의마마의 글월비자노릇을 다시 하고 있다고?”
“네.”
“왜? 거기 가서 농땡이라도 부릴 참이었느냐?”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냐? 어차피 백지 답신을 받아올 것이 뻔한데. 글월비자 노릇을 자청한 것을 보니 네놈이 궁 생활을 설렁설렁 하기로 작정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
전하께서 보내신 답신이 백지가 아니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기에 라온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마종자가 더욱 신이 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왜? 정곡을 찔리니 할 말이 없는 것이냐?”
라온의 이마를 찌르는 손가락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쿡쿡쿡.
마치 새의 부리로 쪼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자니,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마종자가 시비를 걸었다.
“왜? 뭐, 못 마땅한 것이라도 있는 게야?”
“아닙니다. 그런 거 없사옵니다.”
“그래? 그런데 네놈의 눈빛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라온을 노려보는 마종자의 눈빛이 사납게 번들거렸다.
먹잇감을 앞둔 승냥이.
강한 자에겐 약하고, 약한 자에겐 한없이 강한 비열한 자들만이 지을 수 있는 비아냥거림이 마종자의 입가에 드리워졌다.
눈앞에 있는 라온을 어찌 손을 볼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것인지, 마종자의 얼굴에 보기 싫은 미소가 그려졌다.
바로 그때였다.
따악!
마치 차돌 두개가 마주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마종자의 고개가 홱 옆으로 기울어졌다.
어디선가 느닷없이 나타난 그림자가 마종자의 뒤통수를 가차 없이 후려쳤던 것이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마종자의 눈이 뒤집혀졌다.
“누구야? 어떤 놈이 감히…….”
흡사 짐승이 울부짖는 듯 마종자는 잘근잘근 씹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코앞으로 유난히 뽀얀 얼굴 하나가 불쑥 다가왔다.
“나다.”
“헉!”
마종자의 입에서 마른 숨이 토해져 나왔다.
당장이라도 제 뒤통수를 때린 사람을 찢어발길 듯 눈매를 치뜨던 그의 얼굴이 단박에 토끼처럼 온순해졌다.
“공, 공주마마?”
흡사 땅에 코라도 박을 듯 마종자가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공, 공주마마 납시었습니까?”
명온 공주가 도도한 눈길로 그를 응시했다.
꼬리를 잔뜩 만 마종자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물었다.
“하. 하온데 소인에게 어찌하여 그러시는지…….”
공주마마께서 여긴 어인 걸음이실까? 아니, 그보다 어찌하여 갑자기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쳤는지 의문이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하였기에…….
“너! 너……!”
명온 공주는 분주한 눈길로 마종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이윽고 적당한 핑계거리를 찾아낸 공주가 입을 열었다.
“너, 얼굴이 마음에 안 들어!”
“네?”
얼굴이 마음에 안 들어요?
제 얼굴이요? 왜요?
망연한 표정의 마종자를 버려둔 채 명온 공주는 바람을 일으키며 소환내시 교육장을 나가버렸다.
일순, 교육장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충격을 받은 듯 마종자는 석상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힐끔대던 도기가 라온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그 두 번째 분이 바로 공주마마라네. 저분께서도 요즘 심기가 영 불편하시다는 소문일세.”
설명을 마친 도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공주마마께서 이곳엔 어인 일이시지? 평소엔 근처에도 오지 않으시던 분이신데.”
라온이 어색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공주마마께서 여긴 왜 오신 걸까요?”
설마, 날 보러 오신 것은 아니시겠지?
아…… 어머니가 도망가자고 했을 때 도망갈 걸 그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