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27화 (27/131)

27. 백지답신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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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03

궁궐의 다른 전각과 달리 집복헌은 작고 소박했다.

그러나 口자 모양의 작은 마당에는 사시사철 고운 꽃들이 피고 유난히 별빛이 고운 하늘을 볼 수 있어 선대왕들 중에서도 이곳을 찾는 분들이 많았다.

집복헌에 숙의 박씨가 터를 잡은 지도 어느새 10여 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 세월 동안 어린 소녀는 어느덧 여인이 되었건만, 그 마음만은 여전히 여리고 어렸다.

집복헌의 작은 하늘 위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날이 깊어짐에 볕도 제법 차가워졌다.

툇마루에 걸터앉은 숙의 박씨의 작은 어깨 위로 시린 볕이 고스란히 내려앉았다.

“마마, 날이 많이 차가워졌사옵니다. 이러다 고뿔이라도 들겠나이다.”곁에 있는 오 상궁이 속상한 얼굴로 아뢰었다.

주상전하께 서한 보내기를 중단하겠노라 선언한 지 이제 고작 이틀이 지났다. 비록 백지 답신을 받았을지언정, 주상전하께 보내던 서한은 박 숙의를 지탱하던 마지막 두 개의 기둥 중 하나였다.

그 중 하나가 무너져 내린 탓일까?

박 숙의의 눈동자엔 아릴 만큼 커다란 공허가 들어차 있었다.

눈앞의 오 상궁을 보고 있지만 실은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는 듯한 두 눈이 문득 건너편의 툇마루를 건너다보았다.

“오 상궁, 저기 전하께서 앉아계셨더랬지.”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리던 박 숙의의 시선이 이번에는 집복헌으로 들어서는 입구를 향했다.

“이렇게 볕이 고운 날에는 전하께서는 후원에 핀 들국화를 한 아름 꺾어 가져오시곤 하였었는데…….”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아득한 옛일을 더듬는 듯한 박 숙의의 입가에 아픈 미소가 피어올랐다.

***

박 숙의가 처음 궁에 들어온 곳은 다섯 살 어린 나이였다. 아직은 어미의 품에서 재롱을 떨어야 할 어린 나이. 그러나 그 어린 것을 품어줄 품은 어디에도 없었다.

술과 도박에 미친 그녀의 아비는 날이면 날마다 어린 자식과 아내를 때렸다. 남편의 폭력과 가난에 치를 떨던 어미가 박 숙의를 버리고 집을 떠난 것은 그녀가 네 살이 되던 해였다.

어미가 떠난 후, 아비의 폭력은 더욱 심해졌다. 그런 그녀를 가엾이 보던 이웃의 아낙이 궁의 아기나인으로 들여보내는 것이 어떻겠냐며 넌지시 아비에게 의사를 물었다.

궁핍한 생활 속에서 짐짝처럼 느껴졌던 여식이었던 탓일까? 아비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그녀를 궁으로 들여보냈다.

다섯 살의 어린 아이에게 궁은 지나치게 엄격했고, 또한 지독하게 냉랭한 곳이었다.

늙은 상궁의 시중을 들던 아기나인 시절부터 박 숙의는 밤이면 밤마다 울면서 잠이 들곤 했다.

이 밤이 지나면 어머니가 날 데리러 오실거야.

이 해가 지나면 아버지께서 날 보러 오실거야.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누구도 그녀의 시린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주지 않았다. 단짝패인 오 상궁과 함께 방을 쓸 때는 그나마 외로움이 조금은 달래지는 듯도 했다.

그러나 찬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질 때면 느닷없이 서글퍼지곤 했다.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미가 그리워 괜스레 눈가가 붉어지고는 했다.

그럴 때면 아궁이 앞에 앉아 몰래 눈물을 훔치곤 했었다.

행여 상궁마마님들께 우는 것이 들켜도 연기가 맵다거나, 불꽃에 눈을 쏘였다고 둘러댈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그때도 여느 때처럼 괜한 그리움에 눈시울을 적실 때였다.

“어찌 우는 것이냐?”아궁이 앞에서 훌쩍이는 그녀의 등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 숙의는 서둘러 눈가를 닦고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그녀의 눈에 검은 당혜가 들어왔다. 그리고 보이는 붉은 곤룡포.

이건…… 이것은…… 이 나라의 주인이신 왕이 아니신가!

불에 덴 사람처럼 놀란 그녀는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 그녀에게 왕이 다시 물었다.

“어이하여 우느냐 물었다.”“그, 그것이…… 눈에…… 눈에 잔불씨가 날아들어…….”여느 때처럼 거짓말로 변명하는 그녀에게 왕이 말했다.

“거짓말.”“네, 네? 아, 아니옵니다. 소인 연기에 눈이 매워 눈, 눈물을 흘리고 말았나이다.”“거짓말이다. 너는 참말로 거짓말쟁이로구나.”너무도 단호한 단정(斷定).

그 느닷없는 일격에 당황한 그녀는 감히 용안을 올려다보는 무례를 저지르고 말았다.

단호한 목소리만큼이나 단호한 눈씨가 저를 맞이할 줄 알았다. 하지만……왕께서는 웃고 계셨다. 굽어보는 얼굴에 어미 품을 닮은 포근한 웃음이 맺혀 있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눈물로 얼룩진 커다란 눈 속에 왕의 미소가 맺히는 그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외롭던 삶이 따뜻해졌고, 더는 홀로 잠들어야 했던 밤이 무섭지가 않았다.

왕께선 어느 날은 어린 장난꾸러기 같았고, 또 어느 날은 가슴 너른 오라비 같았다.

일평생 처음으로 행복이라는 것을 맛보았다. 자신과는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던 삶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녀가 옹주를 잉태했을 때, 왕께선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영온옹주가 태어나던 새벽엔 온전히 밤을 새운 채 산실 앞을 지켜주었다.

행복이 졸음처럼 쏟아졌다.

이 느닷없는 행복에 그녀는 불안했다. 이 벅찬 행복이 실은 몽혼한 꿈결의 한 자락은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언젠가 사라져버리고 말 신기루가 아닐까 하여 언제나 불안했다.

그러나 그렇게 불안해할 때면 왕께선 언제나 말했다.

“걱정마라,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 할 것이다.”그것은 하나의 주술(呪術)이 되어 그녀의 불안을 순식간에 잠식시켰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었다.

영원할 거라, 언제나 변치 않을 거라 생각했던 사랑은 어느 순간 색이 바래졌다.

어느 순간부터 왕께서 그녀에게 향했던 걸음을 멈춰버린 것이다.

도홧빛으로 가득했던 그녀의 나날이 점차 흐린 잿빛으로 변해 갔다. 아이처럼 환하게 웃던 얼굴에 어느 순간부터 눈물자국이 선명해졌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어린 아이처럼 박 숙의는 집복헌의 툇마루에 앉아 왕을 기다렸다.

이 밤이 지나면 왕께서 오실 것이야.

이 달이 이울고 나면 왕께서 오실 것이야.

이 계절이 깊어지기 전에 그분께선 꼭 오실 것이야.

스스로에게 했던 헛된 약조가 점점 힘을 잃어갔다.

그립다, 보고프다 전하는 그녀의 서찰에 왕께선 하얀 백지로 대답을 회피했다. 지나가버린 계절을 되돌릴 수 없는 듯, 이미 떠나버린 왕의 마음은 더는 그녀에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

“오 상궁…….”박 숙의는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제 곁을 지키고 있는 오랜 벗을 나직하게 불렀다.

오 상궁이 박 숙의의 가녀린 어깨에 홑이불을 둘러주며 고개를 조아렸다.

“네, 마마.”“전하께선 지금 무얼하고 계신다 하는가?”“마마…….”“전하께선 왜 나를 아니 찾아오신다 하시는가?”“…….”“전하께선…… 왜 그 굳은 맹약을 깨셨다는 겐가? 지켜주겠다고 하셨으면서…… 언제나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셨으면서…….”“마마, 고정하시옵소서.”“진짜 거짓말쟁이는 바로 전하라네. 이리 마음 변하실 줄 알았으면…… 이리 쉬이 변하는 마음인 줄 알았으면……흐윽.”기어이 여린 입술 끝에서 서러운 울음이 터져 나왔다.

“마마.”보다 못한 오 상궁이 박 숙의의 작은 어깨를 끌어안았다.

“울지 마시옵소서. 눈물 흘리지 마시옵소서. 오실 것이옵니다. 전하께선 틀림없이 다시 마마를 찾으실 것이옵니다.”“오 상궁.”“네, 마마.”“그분이 보고 싶어. 이제는 내게서 마음 떠난 줄 아는데도…… 나는 여전히 그분이 보고 싶네. 이 어리석은 마음은 여전히 그분이 그립다고 하니. 나는…… 나는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제는 이 마음 접어야 하는데…… 이제는 정말 접어야 하는데…….”옴쳐드는 울음 속에 원망의 감정이 깃들었다.

사랑하는 만큼 원망스러웠고, 원망스러운 만큼 그리웠다.

“접어지지 않는 마음이라면 접지 마시옵소서.”그때였다.

흐느껴 우는 박 숙의의 어깨 위로 맑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무, 무슨 소리더냐?”오 상궁의 품에서 얼굴을 내민 박 숙의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내 그녀의 커다란 눈에 작고 하얀 얼굴이 오롯이 들어와 박혔다.

초록빛 관복을 입은 환관.

웃는 얼굴이 유난히 어여쁘다 생각했던 어린 환관이 그녀를 향해 웃음을 보였다.

그러면서 말했다.

“접지 마시옵소서.”“하지만…….”“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지 않사옵니까. 모래를 한 움큼 삼킨 듯 입 안이 서걱대 아무것도 못 드시고 계시질 않사옵니까. 다시는 서한 보내지 않으시겠노라 맹세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쓰시질 않으셨사옵니까.”“어찌…… 알았느냐?”라온은 대답 대신 먹이 묻어 있는 박 숙의의 손을 응시했다.

아마도 박 숙의의 처소 안에는 썼다 찢어버리길 반복한 서한이 가득할 것이다.

라온은 한쪽 무릎을 꿇고 박 숙의를 올려다보았다.

“그 서한, 소인에게 주시옵소서. 소인이 주상전하께 올리겠나이다.”기꺼운 마음으로 마마의 글월비자 노릇을 하겠나이다.

뒷말을 입안으로 삼키며 라온은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이 처음 만났을 때의 왕처럼 너무도 포근하고 따뜻한 것이라.

박 숙의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

한 시진 후.

집복헌을 나서는 라온의 손에는 주상전하께 보내는 숙의 박씨의 서한이 들려 있었다. 누군가는 부질없는 짓이라며 혀를 찼지만 라온은 상관하지 않았다.

“한 며칠 잠잠하여 이제는 마음 접었는가 싶었더니, 또인가?”희정당 앞에 다다라 서한을 전하자 대전의 내관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어차피 답신은 똑같을 것이다.”“그렇사옵니까?”“그렇다. 그러니 너도 헛발품 그만 팔아라. 내 너를 위해 한 마디 일러주마. 실은 다른 환관들은 서한을 전하는 척만 하였느니라. 어차피 서한의 답신일랑은 백지가 뻔한 터. 여기…… 이걸 가지고 돌아가.”대전의 내관은 한 묶음의 붉은 봉투를 라온에게 내밀었다.

주상전하의 답신이 들어 있던 봉투와 똑같은 것이었다.

“이것이 무엇이옵니까?”“보면 모르겠느냐? 주상전하의 답신을 넣는 봉투가 아니겠느냐? 다음에도 다시 숙의마마께서 서한을 보내시면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 적당한 백지를 그 안에 넣으면 될 것이다.”빙빙 에둘러 말하지만 결론은 요령껏 편법을 쓰라는 말이었다.

라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송구하오나, 그럴 수는 없사옵니다.”“뭐라?”“소인은 숙의마마의 글월비자이옵니다. 서한을 전하고 답신을 받아가는 것이 소인의 책무이옵니다.”“어허, 그러지 않아도 된다질 않느냐.”대전 내관의 얼굴에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라온은 고집스럽게 숙의 박씨의 서한을 건네며 말을 덧붙였다.

“숙의마마께서는 계속해서 서한을 보내신다고 하셨사옵니다. 그리고 소인은 계속해서 숙의마마의 서한을 전할 것이옵니다.”그 당찬 말에 대전 내관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눈가를 찡그리며 돌아섰다.

“융통성 없는 놈.”“송구하옵니다.”대전내관은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며 희정당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후.

붉은 봉투를 안고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옜다!”대전내관은 징그러운 거머리를 보는 시선으로 라온을 보며 주상전하의 답신을 건넸다.

“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짓을 대체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지, 쯧.”들으라는 듯 못마땅한 말을 중얼거리던 내관은 이내 바람을 일으키며 희정당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온은 혀를 살짝 내밀며 웃었다.

미련하고 어리석다고 하여도 상관없었다.

누구나 삶을 지탱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라온에게 어머니와 단희가 곤한 삶을 이겨내는 힘이었듯이, 박 숙의에겐 이 부질없는 서한 보내기가 그러했다.

라온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손길로 답신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팔랑거리는 붉은 봉투 사이로 새콤하고 달콤한 향이 느껴졌다. 잘 익은 능금향을 닮은 그 향기에 절로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며 라온은 집복헌으로 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이번 답신에는 무엇인가 적혀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품은 채 재게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혹시나 하였으나 역시나 답신은 빈 백지. 그리고 전하께서 쓰시는 향낭의 냄새인지, 봉투 안에 머물러 있던 옅은 능금향기 뿐이었다.

허무하게 흩어지는 능금향기를 뒤로 한 채, 라온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숙의마마의 눈물이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대체 주상전하께서는 왜 백지를 보내시는 것일까?

차라리 아무것도 보내지 않으시면 그 마음 접는 것도 조금은 쉬워지련만. 어찌하여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백지를 보내시어 자꾸만 미련을 두게 만드는 것일까.

이건 혹시…… 나 갖기는 싫어도 내게서 마음 떠나는 꼴은 못 보는 사내들의 못된 심리가 아닐까? 아니, 아니. 그건 아닐 거야.

그럼 뭘까? 백지 답신에 담긴 뜻이 대체 무엇일까?

라온이 생각에 사로잡혀 걷고 있을 때였다.

툭툭.

누군가 뒤에서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옹주마마 아니시옵니까?”라온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떠올랐다.

그녀는 키가 작은 옹주의 눈높이에 맞춰 허리를 굽혔다.

“하온데, 소인에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계시옵니까?”묻은 라온의 손에 영온옹주가 손 글씨를 썼다.

‘고맙네.’“주상전하께 서한을 전한 것 때문에 그러시옵니까? 그것은 소인이 할 일이옵니다. 그러니 그리 마음 쓰시지 않으셔도 되옵니다.”라온이 말하자 영온옹주가 설레설레 고갯짓을 했다.

‘그래도 고맙네.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어미를 생각하는 옹주의 마음씀씀이에 가슴이 아렸다. 왕을 기다리는 숙의마마만큼 옹주께서도 아비의 손길이 그리우리라.

그러나 그런 내색일랑은 조금도 없이 그저 어미를 생각하는 마음뿐이었다.

라온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걱정 마시옵소서. 소인, 언젠가 제대로 된 답신을 받아올 때까지 발이 닳도록 글월비자 노릇을 할 것이옵니다. 행여 숙의마마께서 정말로 서한을 아니 보내시겠다고 해도 소인, 졸라서라도 서한을 보내시라 할 것이옵니다.”라온은 가슴을 활짝 펴며 말했다.

영온옹주가 그런 라온의 손바닥에 한 자 한 자 힘주어 글씨를 썼다.

‘자네를 믿네.’영온의 환한 미소를 마주보며 라온도 덩달아 웃음을 보였다.

그런데 나. 너무 큰 소리 탕탕 치는 거 아냐?

이러다 제대로 된 답신을 못 받아내면 어찌 되는 거지?

***

“어찌 되긴 무얼 어찌 되겠는가? 일평생 글월비자노릇을 하거나…….”

“하거나?”

라온이 두 눈을 빛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도기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해보였다.

“소임을 다하지 못한 죄로 교수되거나 참수되겠지.”

이 사람이! 툭 하면 목 떨어진다는 소릴 하는군.

저도 모르게 목을 어루만지던 라온은 도기를 흘겨보았다.

두 사람은 지금 다른 불통내시들과 함께 영화당 앞의 부용지를 청소하는 중이었다.

연못에 내려앉은 낙엽들을 치우며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던 도기가 문득 부용지로 들어오는 의춘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저 분은……?”

“누구요? 아는 분이십니까?”

덩달아 고개를 돌리며 라온이 물었다.

“동궁전의 최 내관님이 아니신가. 최 승언색께서 이 시각에 예는 무슨 일일까?”

동궁전이라면, 왕세자 저하의 거처가 아니던가.

그곳의 승언색이라면 세자 저하의 최측근.

서늘한 영의 눈빛이 떠오르자 라온의 표정이 단박에 해쓱해졌다.

“도 내관님, 잠시만 어딜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사옵니다.”

“어딜 말인가?”

“갑자기 급한 용무가 생겨서 말입니다.”

“급한 용무라니?”

도기의 물음에 대답할 생각도 잊은 채 라온은 손사래를 치며 다급한 걸음으로 자리를 피했다.

“허허, 저 사람 대체 무슨 일인데 저러는가.”

쯧쯧 혀를 차던 도기가 문득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측간에 간 모양이군.”

겉보기에는 딱 음전한 도련님처럼 보이는 라온도 다른 사람들처럼 먹고, 자고, 싸는 사람이었구나.

도기가 통통한 볼을 긁적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이보게.”

누군가 그를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최 내관의 주름진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도기가 서둘러 고개를 조아리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최 승언색이 아니시옵니까."

최 내관은 도기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에 혹 홍 아무개라는 소환내시가 있는가?”

“홍 내관을 찾으시옵니까?”

도기가 아는 척을 하자 최 내관이 반색했다.

“그렇다네. 그 홍 내관, 어디에 있는가?”

“홍 내관은 지금 측간에 갔사옵니다만.”

“측간?”

“네. 하온데 무슨 용무인지 여쭈어도 되겠사옵니까?”

평소에는 작동하지 않던 도기의 오감이 본능적으로 촉을 세웠다.

동궁전의 승언색께서 불통내시 홍라온을 찾고 있다?

뭔가 냄새가 난다. 그것도 상당히 흥미로운 냄새가…….

자칭 궁의 정보통이라 자부하는 도기가 눈빛을 반짝거렸다.

그러나 동궁전의 승언색이라는 자리는 투전판에서 공으로 따낸 자리가 아니었다. 오랜 경험과 연륜으로 무장한 최 내관이 주름진 얼굴을 단호히 저었다.

“별일 아니니, 관심 끄게.”

최 내관은 도기를 뒤로한 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측간이라…….”

뒷짐을 진 그가 향한 곳은 당연히 근처의 측간이었다.

하지만 라온은 그곳에 없었다.

최 내관이 이곳에 온 이유일랑은 뻔했다. 영의 명으로 라온을 데려가기 위함이었다.

그 사실을 미리 짐작한 라온은 진즉에 저 멀리로 줄행랑을 쳤다.

***

톡톡톡.

중희당에 앉아 있는 영의 표정이 영 밝지가 않았다.

톡톡톡.

습관처럼 손가락으로 서안을 두드리는 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저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시옵니까?”

그의 곁에 시립하고 섰던 율이 조용히 물었다.

“고민?”

“네. 한숨을 쉬지 않으셨사옵니까?”

“내가 한숨을 쉬었더냐?”

“쉰 하고도 세 번이나 쉬셨사옵니다. 무슨 연유인지 감히 여쭤 봐도 되겠나이까?”

“아무것도 아니다.”

말과는 달리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구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

“혹여…… 자선당으로 가시는 것이옵니까?”

“어찌 아는 것이냐?”

“오늘 벌써 세 번째 걸음 하시었사옵니다.”

“내가 그리하였더냐?”

몰랐다.

하지만 그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그 밤, 자신이 뉘인지 알게 된 이유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최 내관에게 녀석을 찾아오라고 명을 내린 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하지만 녀석은 미꾸라지처럼 최 내관의 시야를 벗어났다고 한다.

분명 피하는 것이 틀림없음이렷다.

불퉁한 속내가 여과없이 얼굴에 드러났다.

눈치를 살피던 최 내관이 서둘러 조족등을 밝혔다.

“되었다. 혼자 걸음 할 것이다.”

서늘한 눈빛으로 최 내관을 뒤로 물린 영은 자선당으로 다시 한 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나 그를 맞이하는 것은 텅 빈 대청마루였다.

스산한 바람이 자선당 마당을 휩쓸고 지나갔다.

당장이라도 안에서 ‘화초서생’하며 밝게 웃으며 녀석이 달려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둠 속에 갇힌 자선당은 거대한 동굴처럼 음산한 기운만을 뿜어낼 뿐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은 동쪽에 있는 누각으로 몸을 돌렸다.

여문 씨앗을 품은 잡초 숲을 걷노라니 저도 모르게 자선당에서 다시 라온을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저 풀숲에는 달을 등지고 섰던 영을 향해 동그랗게 두 눈을 치뜨던 라온의 모습이 잔영처럼 남아 맺혀 있었다.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는 라온의 얼굴을 따라 풀숲으로 시선을 옮길 때였다.

무언가를 발견한 듯, 영의 한쪽 눈썹이 힐끗 올라갔다.

영의 시선이 지나쳐 온 길을 되짚어 돌아간다.

이윽고.

바람이 이는 풀숲을 휘 에둘러보는 그의 입가에 문득 실금 같은 미소가 드리워진다.

풀숲의 한곳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그가 문득 아무도 없는 텅 빈 허공에 대고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도망 다닐 수 있을 거 같으냐?”

허공에 대고 물었으니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영은 잠시 동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허공을 응시하다 그 자리를 떠났다.

***

영이 자선당을 떠나고 얼마나 지났을까?

쥐죽은 듯 조용하던 풀숲에서 작은 그림자 하나가 쏙 모습을 드러냈다.

라온이었다.

“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라온은 영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낮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머리 위로 여윈 반달이 떠올랐다.

가배가 가까워진 터라. 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고 고왔다.

시리도록 투명한 달빛을 보니 영의 서늘한 눈빛이 떠올랐다.

영은 예전처럼 편하게 지내라고 하지만, 그래서 그리 하려고 마음 먹어보지만. 막상 먼발치에서라도 그를 보게 되면 저도 모르게 몸이 굳고 말았다.

세자 저하와 환관.

두 신분 사이의 거리는 하늘과 땅처럼 멀고 아득하기만 했다.

감히 올려다보기에도 벅찬 사람. 그런 분과 어찌 벗을 한단 말인가. 그런 분과 벗을 했다가 여인이라는 것이 발각이라도 된다면…….

상상하기조차 싫다.

그런데…… 좀 전에 영이 보였던 마지막 미소가 왠지 모르게 마음에 걸렸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이,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비가 된 느낌이다.

“아, 불안해.”

작게 중얼거리던 라온은 곧 체머리를 흔들었다.

“괜찮아, 괜한 불안일 거야.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이렇게 한동안 눈에 띄지 않으면 저하께서도 곧 나를 잊으시겠지.”

낮게 중얼거리던 라온이 문득 시선을 동궁전으로 돌렸다.

세자에게 잊혀지는 것은 그녀가 원하는 일이었다.

헌데 왜일까? 이상하게도 그 말을 입에 담는 순간, 가슴 한쪽이 저릿했다.

괜스레 속상하고 이상하게도 울적해지기까지 하다.

“모두 저 달 때문이야.”

하늘에 떠오른 달을 향해 라온은 저도 모르게 불퉁한 목소리를 뱉고 말았다.

그때였다.

“달이 홍 내관님께 무슨 나쁜 짓이라도 했나요?”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라온이 고개를 돌렸다.

“아, 월희 의녀님.”

언제 온 걸까?

의녀 월희가 라온을 따라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나타나다니. 이러니 원혼이라는 오해를 받지.

그렇지만 라온은 그녀의 출현이 한없이 반가웠다.

요 며칠 병연이 없어서인지 자선당이 텅 빈 듯 외롭고 쓸쓸했다.

“그간 어찌 지내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 후로 도통 얼굴을 못 뵈어 안부가 궁금하던 참이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라온은 월희의 손을 맞잡았다.

이내 월희의 얼굴에 붉은 홍조가 그려졌다.

그녀는 수줍은 듯 왼고개를 틀며 살며시 라온에게 잡힌 손을 뺐다. 그리고는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잘 지냈어요.”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홍 내관님께서 할머니의 제사를 지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때문인지 이렇게 달빛이 밝은 날에는 할머니 생각이 나서 자선당으로 걸음을 하곤 합니다.”

"아,그렇습니까? 하온데......"

라온이 월희의 등 뒤를 건너다보았다.

“장 내관님께서는 어쩐 일이십니까? 자선당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았잖습니까?”

월희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등 뒤에 장 내관이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다.

장 내관은 뭔가가 불안한 듯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에 월희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자선당 앞을 서성거리는 것을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서성거려요?”

라온의 시선을 받은 장 내관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아침에 말을 하다말고 헤어진 듯하여…… 숙의마마 일도 궁금하고 해서…… 그런데 이곳에 나온다는 원혼이 정말로 월희 의녀가 확실하오?”

“네. 확실합니다.”

“진정이오?”

“진정입니다.”

라온의 확답에도 장 내관은 여전히 불안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정말 여기에 원혼이 없단 말이지요?”

“물론입니다. 지금껏 자선당에서 지냈지만 원혼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 그럼 정말로 괜찮을지도 모르겠군요.”

말은 그리했지만, 장 내관은 겁먹은 자라처럼 목을 움츠린 채 오돌오돌 몸을 떨었다.

작은 풀벌레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는 것을 보니, 그에게 자선당은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자리를 떠나질 않았다.

장 내관은 자못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라온을 응시했다.

“홍 내관, 괜찮소?”

“무어가요?”

“좀 전의 한숨. 혹여 숙의마마 때문이오?”

장 내관의 말에 잠시 잊고 있던 박 숙의의 슬픈 얼굴이 떠올랐다.

라온의 표정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그렇습니다.”

물론, 조금 전의 한숨은 숙의마마가 아닌 왕세자 저하 때문이었다.

그러나 숙의마마 또한 라온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인 것만은 분명했다.

“오늘도 전하께서는 숙의마마께 텅 빈 백지만 보내시는 게요?”

장 내관의 말에 월희가 눈빛을 반짝이며 끼어들었다.

“아직도요?”

표정으로 보아 숙의마마와 관련된 이야기를 알고 있는 듯했다.

라온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그거 비밀 아니었사옵니까?”

“하하하. 궁에 비밀이 어디 있겠소이까.”

장 내관이 다소 과장되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두려움을 떨쳐내고 싶었던 까닭이다.

월희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왜 백지를 보내시는 걸까요? 아무래도 마음이 없으셔서 그리 보내시는 것 아닐까요? 나는 이제 아무 마음도 없다는 뜻이겠지요.”

라온이 고개를 갸웃하며 월희에게 반문했다.

“정말로 그러하시다면 왜 굳이 백지를 보내는 것일까요? 아무것도 안 보내면 그만일 텐데요.”

“그러니까 텅 빈 마음, 너에게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뜻으로 보내는 것이 틀림없어요. 정말 여인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도 가지가지라니까요.”

월희의 추론에 라온은 검지로 볼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괴롭히려고 일부러 백지 답신을 보낸다.

주상 전하께서 그리 잔인한 분이실까? 하루아침에 사랑이 식어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이젠 미워한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왜?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때였다.

“혹시 암호가 아닐까요?”

라온과 월희가 주고받는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장 내관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암호요?”

“그러니까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은밀하게 표식을 하였다거나.”

장 내관의 말에 월희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요. 그 분이 뉘십니까? 이 나라의 주인이십니다. 조선에서 가장 높은 분이란 말이에요. 그런 분께서 남의 눈을 의식하실 이유가 없어요.”

왕이란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다.

가장 귀하고,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유일무이하신 분.

그런 분께서 다른 이의 눈치를 본다고?

이치에 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장 내관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전하께서는 물론 천하에서 가장 높은 분이시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은 아니랍니다. 예를 들자면 왕대비마마나 중전마마 같은 분들은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오.”

장 내관의 설명에도 월희의 의문은 여전했다.

“설사, 전하께서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셨다 한들, 굳이 암호를 보낼 필요가 있나요? 필요하면 직접 찾아가서 말해주면 될 일이고요.”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있어요. 사내들은 그럴 때 그런 식으로 신호를 보내곤 하지요.”

“하지만 장 내관님은 사내가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게 사내의 마음을 짐작하시는지…….”

월희의 말에 장 내관이 가슴에 화살이라도 맞은 듯 몸을 휘청거렸다.

“아니, 어찌 그리 심한 말을?”

장 내관의 격렬한 반응에 월희가 순진한 눈망울을 보였다.

“저는 그저 별 뜻은 아니고. 내시는 사내가 아니라고 혜민서의 의녀님이 말씀하신 것이 생각나서…….”

그때 장 내관이 가슴을 활짝 펴며 소리쳤다.

“내 비록 몸은 이러하지만 마음만은 사내 중의 사내라오.”

그러나 가는 목소리와 가녀린 몸 때문에 별 설득력은 없었다.

월희가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장 내관님. 너무 재미있으시어요.”

“재미요?”

“네. 너무 재밌는 분이시어요.”

“이런이런, 그렇게 웃으시는 걸 보니, 월희 의녀께서도 이 몸의 매력에 흠뻑 빠지셨나보오. 허나, 나는 이미 귀하신 분의 선택을 받은 몸이라…….”

“아하하하.”

“사실, 말이 나와 하는 말이지만. 내 지금은 내시가 되었으나 궁에 들어오기 전에는 친우들 사이에서 방화범으로 불렸었다오.”

“방화범이요?”

“그렇소. 나를 한번 본 여인들의 가슴에 족족 불을 지른다고 하여 친우들이 방화범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지요.”

“아하하하, 가슴에 불이라뇨. 방화범이라뇨. 아하하하.”

월희가 장 내관의 가슴을 주먹으로 콩콩 두드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와중에도 라온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까부터 몇 가지 단어가 맴맴 머릿속을 맴돌며 떠나지 않았다.

백지, 암호…… 백지…… 방화범……백지, 암호, 방화범, 능금향기.

전하께서 보낸 백지 답신에 장 내관과 월희가 나누는 농담이 한데 뒤섞인 것은 우연이었다.

그러나 이 기묘한 우연으로 인해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했던 뒤틀린 얼개가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방화범…… 불…… 능금향. 백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생각의 언저리를 잡기 위해 라온은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불……불? 암호, 백지, 능금향기와…… 불!

“아, 맞다.”

내내 앉아 있던 라온이 불현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란 장 내관이 휘둥그레 눈을 치떴다.

“왜, 왜 그러오?”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뭐, 뭘 말이오?”

“지금 당장 집복헌으로 가야 합니다.”

“집복헌에는 왜요?”

“숙의마마의 눈물, 어쩌면 멈출 수도 있을 것 같사옵니다.”

허공에 목소리가 채 퍼지기도 전에 라온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달리는 그녀의 얼굴에 은근한 기대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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