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단란했던 나의 삶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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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31
영은 새파랗게 날이 선 눈으로 어두운 지하실을 둘러보았다.
이윽고 그의 망막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라온이 맺혔다.
버릇처럼 미간을 찡그리는 그의 귓가에 명온 공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께서 여긴 어인 일이시옵니까?”“너야말로 예서 뭐하는 것이냐?”지금의 상황이 어찌 된 사연인지 구구절절 듣지 않아도 알고도 남음이었다.
누이에게 연서를 보낸 자가 뉘인지 궁금하여 직접 라온을 만나러 갔던 그가 아니던가.
라온이 연서를 대필한 것을 알고 공주가 알지 못하길 바랐다.
연서가 끊기면 그 마음도 접어질 줄 알았는데.
그런데 아니었다.
생각보다 연정이 깊었던 모양이다.
오라비의 물음에 명온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 이내 마음을 다잡고 라온을 보며 말했다.
“일전에 오라버니께 말씀드렸던 것, 기억나시옵니까? 제가 뉘와 서한을 주고받는다는 그 이야기 말이옵니다.”“기억한다.”“이자가 저에게 연서를 보낸 자이옵니다. 그런데…… 그런데 감히 무례하게도 대필을 하였다지 뭡니까.”상처 입은 마음을 숨기기 위해 명온은 애써 태연한 척했다.
그 모습을 무감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영이 물었다.
“그래서?”“그래서 지금 이자의 죄를 추궁하는 중이었사옵니다.”“허면, 넌 이자를 어찌할 생각이었더냐?”명온이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이자가…… 죄를 달게 받겠다 했으니 그리 할 생각입니다.”“그만 둬라.”“네?”“되었다.”“하지만 오라버니.”“그쯤 하였으면 이 아이도 제 잘못을 뼈저리게 깨달았을 터. 그만 놔 주거라.”“싫습니다.”“연아.”영이 명온의 아명(兒名)을 불렀다.
명온 공주를 그리 부르는 사람은 영이 유일했다.
오라버니가 이리 부르면 천하의 쇠고집 명온 공주도 제 고집을 꺾고는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명온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그럴 수는 없사옵니다. 아직 이자에게서 죄의 값을 받아내지 못하였사옵니다. 벌을 내릴 것이옵니다. 죗값을 치르게 할 것이옵니다.”영이 단호히 말했다.
“그럴 수는 없겠구나.”“어찌하여 그리 말씀하시는 겁니까?”“이 아이, 내가 들인 사람이다.”“네?”“내가 원하여 궁 안으로 들였다. 그러니, 내 사람이다. 내 사람을 네게 줄 수는 없다.”순간, 명온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 사람이다.’ 오라버니의 입에서 나온 저 말이 갖는 무게가 얼마나 큰 것인지 명온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믿지 않던 오라버니가 아니던가.
그 누구에게도 곁을 내어주지 않던 오라버니가 아니었던가.
대체, 저 사내가 무엇이관데.
명온은 이를 악물었다.
어쩐지 분했다.
저 사내를 오라버니에게 빼앗기는 것만 같았다.
“그리하면…… 그리하면 이자가 제게 지은 죄는 어찌한단 말이옵니까?”씻을 수 없는 이 마음의 상처는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누이의 처연한 눈빛에도 영은 흔들리지 않았다.
“저 아이의 죄는 차후에 내가 물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내가 데려가마.”“안 됩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명온이 양 팔을 벌려 영의 앞을 가로 막았다.
“오라버니는 모르시옵니다. 그간, 제가 어찌 지냈는지요.”수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웠습니다.
행여 이 사내에게서 소식이 전해 오는가 하여, 바람 소리에도 버선발로 처소를 뛰쳐나갔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내내 눈빛을 세우던 영이 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안다. 알기에 이러는 것이다.”“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이 아이에게 죄를 물으면 네 마음이 후련해지겠느냐?”“…….”명온은 입을 꾹 다물었다.
과연 후련해질까?
감히 자신을 희롱한 죄, 감히 왕족을 능멸한 죄, 죽어 마땅하다.
스스로도 죽음을 자청하질 않았던가.
하지만…… 좀처럼 명을 내릴 수가 없었다.
차마 죽이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 명온의 속내를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영이 말을 이었다.
“이 아이가 다치면…….”너도 마냥 마음 편하지 만은 않을 것이 아니냐. 누군가 말려주길 너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더냐?
“되었사옵니다. 그만 하시어요.”명온이 서둘러 영의 입을 막았다.
깊은 눈빛으로 누이를 바라보던 영이 불현듯 라온을 돌아보았다.
“뭣하고 있는 것이냐? 어서 일어나지 않고.”“하오나…….”“예서 정녕 죗값이라도 치르겠다는 것이냐? 그럴 것 같았으면 진즉에 내 손으로 너의 죄를 물었을 것이다.”영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라온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그만 가자.”영의 완력에 이끌려 지하실을 나서며 라온은 명온을 돌아보았다.
라온과 눈이 마주친 명온이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하여, 라온은 보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는 명온의 얼굴에 안도하는 기색이 번지는 것을.
***
영은 라온의 손을 잡고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입구를 지키고 섰던 율이 그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하마터면 늦을 뻔했구나.”“그저 지켜보라고만 하셔서…….”율의 고지식한 대답에 영은 보이지 않게 미간을 찌푸렸다.
“다음에는 조금 더 일찍 내게 고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네가 직접 나서서 일을 무마시켜라.”영의 말에 율이 다시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세자익위사의 우익위 한율.
그는 영을 지키는 것을 천명으로 알고 살아온 자였다.
그러기에 라온을 지켜보라는 영의 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군에게서 완전히 시선을 떼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하여, 라온의 납치에 대한 보고를 늦게 올리게 된 것이리라.
율의 그런 마음을 알기에 영은 더 이상 그를 추궁하지 않았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지하실을 나온 영은 한동안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라온이 그 뒤를 종종 걸음으로 뒤따랐다.
보이지 않는 끈에 매인 듯 그의 뒤를 따르고 있긴 했으나, 마음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화초서생.
지금까지 그의 정체는 라온이 풀지 못했던 가장 큰 수수께끼였다.
그저 하는 일 없이 자선당에서 허송세월만 보내는 사람이라 생각했건만. 그런 그가 이 나라의 왕세자라니.
라온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그래, 뭔가 착오가 있을 거야.’어쩌면 이 모든 것이 화초서생이 꾸민 장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차고 냉정하기만 한 그가 장난을 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차라리 정말로 그가 벌인 짓궂은 장난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모든 정황이 말하고 있었다.
영이 왕세자라는 것을.
화초서생이 이 나라의 국본임을.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그때였다.
앞서 걷던 영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 라온을 돌아보았다.
“괜찮은 것이냐?”“네?”“어디 다친 곳은 없는 것이야?”“화초서생, 아니…… 세자저하.”라온이 고개를 들어 영을 올려다보았다.
제법 서늘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에선 뿌옇게 열기가 올라왔다.
처음 지하실에 나타났을 때의 영이 떠올랐다.
턱까지 올라 찬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어깨까지 들썩이던 그의 모습은 라온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설마, 내 소식을 듣고 그리 뛰어왔던 것일까?
“많이 늦더구나.”“무슨…… 말씀입니까?”“한참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아 걱정하였다.”“…….”걱정하였다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라온은 가슴 한쪽이 따뜻해져왔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그러나 이내 웃음기를 지우고 정색한 표정을 짓는다.
‘지금 웃을 때야? 좋아할 때냐고?’ 그간 영에게 건넸던 무람한 말과 행동들이 라온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때는 그를 화원이라 생각했고, 서얼이 아니냐며 물었으며, 심지어는 그에게 갖는 관심을 말복이에게 비유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화초서생!
존귀하신 국본을 감히 화초서생이라며 반쯤 놀리듯 불러댔으니.
‘내가 미쳤구나, 미쳤었어. 죽으려고 환장을 했어.’라온은 주먹을 들어 제 이마를 콩콩 때렸다.
“뭘 하는 것이냐?”그런 라온을 영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네? 그, 그냥…… 과거의 몇 가지 일이 떠올라서…….”“과거?”“그러니까 이것저것…….”말끝을 흐리던 라온이 불현듯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감히 세자저하께 큰 무례를 저질렀나이다.”죄를 빌며 라온은 머리를 조아렸다.
순간, 영이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 라온의 절을 피했다.
“무례라? 하긴, 무례하기도 했지.”“죽을죄를 지었사옵…….”“벗이라 하질 않았더냐.”“네?”“넌 분명 나를 벗이라 칭하였다. 나 또한, 그런 너를 받아들였으니. 너와 난, 벗이 분명하질 않겠느냐.”“하오나…… 그때는 세자저하이신 줄 몰랐습니다.”“내가 세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그렇지만…….”“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면 신분을 감췄던 내게 있겠지. 나를 용서해 주겠느냐?”“저하…….”“새벽 공기가 제법 차구나. 그만 일어나거라.”영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라온 역시 그 뒤를 따랐다.
어쩐지 그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도 온기와 배려가 느껴져 옷 속을 파고드는 바람이 그리 차갑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라온이 영에게 물었다.
“김 형께서는 어디 계신 것입니까?”“잠시 한양을 떠났다.”“한양을 떠나요? 언제요? 어디로 가신 것입니까? 언제 돌아오는 것입니까?”“뭐가 그리 궁금한 것이냐? 이 역시도 이웃집 말복이가 갑자기 없어졌을 때 가졌던 관심 같은 것이더냐?”영의 말에 라온이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설마요. 말도 안 됩니다.”“그럼 무엇이냐? 대체 어떤 관심이더냐?”영은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내게 보내는 관심은 말복이에게 보내는 관심과 같은 것이라더니.
“화초서생…… 아니, 세자저하께도 알다시피 김 형과 저, 우리 두 사람은 동숙하는 사이가 아닙니까. 어찌 말복이와 비교가 되겠습니까.”“…….”물끄러미 라온을 응시하던 영이 답을 들려주었다.
“누구를 찾으러 갔다.”“누구를 말입니까?”“과거 민란을 주동했던 자와 관련이 있는 자들이지.”“아, 그렇습니까? 그럼, 혹여 위험한 것이 아닙니까?”“걱정되느냐?”“걱정됩니다. 민란을 일으킨 자들과 관련이 있다면서요. 혹여 거친 자들과 대면하진 않겠지요?”라온이 순진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물었다.
‘민란’이란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위험하진 않을 것이다. 걱정 마라.”영이 다시 걸음을 옮겼고 라온이 그림자처럼 뒤따랐다.
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라온의 눈에 문득 아쉬움이 서렸다.
이제는 감히 얼굴 마주할 수 없겠지?
무람없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우러러보기에도 목이 아픈 어려운 이가 되었다.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에 절로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때 영이 그녀를 불렀다.
“라온아.”“네.”“오늘따라 달이 무척 곱구나.”여느 때와 다름없는 달이었다.
하지만 영의 눈에는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라온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르스름한 새벽달이 구름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라온의 얼굴에 달빛을 닮은 하얀 미소가 맺혔다.
“그렇습니다. 오늘따라…… 달빛이 참 곱습니다.”두 사람의 어깨 위로 유백색의 달빛이 내려앉았다.
저벅저벅.
자박자박.
서로 보폭을 맞춰 걷는 두 사람의 뒤로 길게 그림자가 그려졌다.
흡사 너른 사내의 등에 업힌 여인의 모습을 닮은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
“헉!”라온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꿈을 꾸었다.
화초서생이 왕세자라는 말도 안 되는 꿈을 꾸었다.
몽혼한 자리를 떨치고 일어난 라온은 버릇처럼 대들보를 올려다보았다.
“김 형, 저 악몽을 꾸었습니다. 글쎄…… 화초서생이 세자저하라고 하질 뭡니까? 아, 정말 다시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한…….”불현듯 라온의 말끝이 흐려졌다.
텅 빈 대들보 위.
김 형이 없다.
그제야 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병연이 누군가를 찾기 위해 한양을 떠났다는 말이.
라온은 불안한 눈길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자선당이 이렇게 넓었던가?
단지 한 사람이 없을 뿐임에도, 자선당이 휑하게 느껴졌다.
“가신다면 가신다고 말이나 해주실 것이지.”작별 인사도 없이 떠난 병연에게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야.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라온은 서둘러 단장을 마치고 자선당을 나섰다.
알아봐야만 할 일이 있었다.
종종 걸음으로 라온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동궁전이었다.
존귀하신 왕세자저하의 거처.
주상전하께 문안인사를 드리러 가는 세자저하의 모습을 보기 위해 라온은 동궁전을 기웃거렸다.
예전 같았으면 꿈에서라도 생각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궁인들의 저승사자인 세자저하를 보겠다고 이리 까치발 들고 동궁전 앞을 서성거릴 줄 어디 상상이나 했을까.
그러나 확인해야 했다.
화초서생이 세자저하가 아니라는 것을.
아니, 절대 아니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왕세자는 라온이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존재였다.
비록, 영은 예전과 다름없이 벗으로 지내라 하였지만, 감히 그럴 수는 없었다.
라온은 영이, 이 나라의 왕세자가 아닌 그저 지금처럼 아무 하릴없이 자선당에서 시간을 소일하는 화초서생으로 남아있길 바랬다.
그런 미련이 담긴 시선으로 라온이 연신 동궁전 안쪽을 힐끔거릴 때였다.
“왕세자저하 납시오.”중금의 낭랑한 목소리가 푸른 새벽 공기를 뒤흔들었다.
이윽고 수십 명의 환관들과 상궁들을 거느린 세자의 행렬이 동궁전의 문턱을 넘었다.
라온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입안으로 마른 침이 고였다.
세자저하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가 화초서생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두려웠다.
그때.
“이른 아침부터 동궁전엔 무슨 일이더냐?”‘……!’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라온의 귓전을 두드렸다.
힐끔 고개를 드는 그녀의 두 눈에 왕세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박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영의 얼굴.
화초서생이라 라온이 놀리던 바로 그 사내였다.
간절했던 염원이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런 라온의 마음을 알지 못한 영이 다시 나직히 입을 열었다.
“그럼 일보고 가거라.”그 말을 끝으로 영은 유유히 사라졌다.
“아…….”온몸에 들어찼던 공기가 일순간, 훅 빠져나가는 듯했다.
전신에서 힘이 쭉 빠졌다.
***
라온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왕세자의 침소 청소를 하기 위해 동궁전으로 향하던 장 내관이 라온을 보고 반색했다.
“홍 내관이 아니시오.”“아, 장 내관님.”“그런데 어딜 가는 것이오?”라온이 고개조차 돌리지 못한 채, 힘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집복헌으로 가옵니다.”“거긴 왜요? 숙의마마께서 더는 주상전하께 서찰을 보내지 않기로 하였다면서요?”“그리 쉽게 접어질 마음이겠사옵니까? 아마도 지금쯤 서찰을 쓰고 계실 것이옵니다.”장 내관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홍 내관은 숙의마마의 글월비자 노릇을 더 할 생각이란 말이오?”차마 장 내관은 쓸데없는 일이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라온이 아닌 그 누구라도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라온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지요. 할 생각입니다.”“어째서요?”장 내관의 물음에 라온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숙의마마께서 눈물을 보이셨으니까요.”더는 주상전하께 서한을 보내지 않겠다던 숙의마마의 모습은 미풍에도 날아가 버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살아있으되 산 자의 생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이후로 내내 그분의 눈물이 라온의 명치에 묵직하게 걸려 있었다.
하지만 집복헌으로 향하는 라온의 뇌리엔 숙의마마가 아닌 영의 얼굴로 가득했다.
천근을 추라도 매단 듯 내딛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였다.
“아, 이제 화초서생을…… 아니, 세자저하를 어찌 뵈어야 하는 거지?”라온의 입에서 한탄 섞인 넋두리가 절로 새어나왔다.
달빛 아래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미소 짓던 세 사람의 모습은 이제 영영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자선당에서의 오붓했던 시간도 이제는 추억으로 남겠지.
단란했던 나의 삶이여, 이젠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