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25화 (25/131)

25. 이건 진짜 말도 안 돼!

별점10.03,806명 참여 | 댓글406

2013.12.27

사방이 꽉 막힌 어두운 지하실.

바닥에서 음습한 냉기가 올라왔다.

의자에 앉은 명온은 서릿발 같은 눈빛으로 휘장 너머를 응시했다.

그곳엔 지난 몇 달간 그녀를 들뜨게 했고, 또한 나락으로 떨어트린 장본인이 있었다.

명온은 아랫입술을 사려 물었다.

“네가 정녕 그 연서를 쓴 자이더냐?”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긍정의 침묵이었다.

명온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참으로 무료한 나날이었다.

만인의 부러움 속에 태어난 고귀한 신분.

일국의 공주라는 존귀한 몸으로 세상에 태어났지만…… 명온에게 그것은 황금으로 만들어진 족쇄에 불과했다.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했을 때부터, 해도 되는 일보다 해서는 안 되는 일들에 대해 더 많이 듣고 배웠다.

공주이기에…….

이 나라의 천금이기에…….

한 걸음을 옮기는 일에도 수많은 시선들과 제약이 뒤따랐다.

창살 없는 감옥.

백성들의 눈에 궁은 황금으로 만들어진 천상의 세계였지만, 그녀에게 그곳은 살아 있는 자들의 무덤이었다.

깊은 물속에 잠긴 것처럼 목이 턱턱 막혀왔다.

긴 한숨을 쉴 때마다 버릇처럼 하늘을 보았다.

해와 달에게서 외로움이 느껴졌다.

차라리 허망하게 흩어질망정 한 줄기 바람이고 싶었다.

구름과 벗하는 바람은 저리도 자유롭거늘, 나는 어찌 공주로, 여인으로 태어났을까?

하늘을 부유하는 구름이, 손에 잡히지 않는 바람이 한없이 부러웠다.

여인이라는 운명에서, 공주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범나비처럼 훨훨 날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날아든 서찰 한 통이 무료한 그녀의 삶을 통째로 뒤흔들어 놓았다.

병을 핑계 삼아 외가댁에 며칠 묵었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보름 날, 다리밟기를 나갔던 수표교에서 자신을 본 한 사내가 보내온 것이라 하였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내의 서한에 명온은 코웃음을 쳤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연서를 보내온 사내는 숱하게 많았다.

유치하고 따분한 작자들.

저열한 문장과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간지러운 글귀들.

그들은 서로 약조라도 한 것처럼 꽃처럼 곱고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사랑과 불타는 마음을 속삭였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글 속엔 마음이 담겨 있지 않았다.

명온은 그 서찰 역시 다른 것들과 다를 바 없다고 지레짐작했다.

‘자, 너는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조금은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서찰을 펼쳐들었다.

그러나…….

<어찌하여 사람의 눈은 두 개인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작은 호기심으로 연서는 시작하고 있었다.

<눈이 하나라면 오직 당신만이 보일 것이니, 내 인생이 허망하게 느껴질 것이고, 눈이 셋이라면 나를 향한 당신의 무심함마저 보일 것이니, 어찌 내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사람의 눈은 둘인 것입니다.>

연서의 내용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랑을 속삭이지도 않았고, 부질없는 꽃과 나비와 하늘의 무수히 많은 별로 자신의 마음을 치장하지도 않았다.

그저 적당히 먼 곳에서 작은 호의와 호기심을 품고 말을 걸어왔을 뿐이다.

한 걸음.

그는 단지 한 걸음만큼만 다가왔다.

넘치지도 과하지도 않게, 그저 한 걸음만.

처음엔 그저 웃었다.

보다 보다 별 괴이한 연서도 다 보겠구나.

그렇게 웃었다.

그러나 그 서찰이 싫지는 않았다.

적어도 자신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뭇 사내들보다는 흥미로웠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심장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작은 설레임.

그날부터 닷새에 한통씩, 어김없이 연서가 날아왔다.

사내는 여전히 사랑은 입에 담지도 않았다.

그저 작은 호기심만을 담은 짧은 글귀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작은 호기심만을 던져주던 그의 연서가 이제는 가벼운 안부를 물어왔다.

명온은 그의 연서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반가운 안부 인사에 처음으로 답신을 보냈다.

그가 계절의 변화를 속삭였다.

말미에 답신을 잘 받았다는 글이 있었다. 왠지 모르게 기뻤다.

어느덧 그의 연서를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가벼운 의문과 호기심을 던지던 연서가 이제는 제법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어쩌다 한 번 보내던 명온의 답신도 매번으로 바뀌었다.

그의 서찰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그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만 같았다.

그와 함께 저잣거리에 나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석양이 드리운 호숫가를 나란히 거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기뻤다.

그리고 행복하였다.

왜 행복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동시에 의문도 들었다.

어찌하여 그는 여전히 사랑을 말하지 않는 것일까.

점점 애가 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연서가 오질 않았다.

내일이면 오겠지, 모레가 되면 오겠지.

그러는 동안 봄이 가고 여름이 갔다.

꽃이 피고 지는 줄도 몰랐다.

그녀의 마음은 온통 그 사내에게 향해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제는 내게서 마음이 돌아선 것일까?

내가 무얼 잘못한 것일까?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내였지만 그리웠다.

사무치게 그립고…… 그립고…… 또 그리웠다.

하여, 찾으라 하였다.

무슨 일로 내게 연서를 보내지 못하는 것인지, 찾아 알아보라 하였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지금껏 주고받았던 연서가 거짓이라는 것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던 사내의 마음은……모두 만들어진 허상이었다.

심장이 칼로 베인 듯 아파왔다. 격한 격통에 숨을 쉬는 것조차 힘이 들 지경이었다.

명온은 눈빛을 빛냈다.

말아 쥔 손가락이 손바닥을 아프게 후벼 팠다.

그러나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감히 나를 속여? 나를 농락해?”

***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라온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이 연서, 김 도령의 부탁으로 쓴 것이 틀림없었다.

같은 내용의 편지를 쓴 적이 없으니, 다른 사람일 리 없다.

‘큰일 났구나.’대신 연서를 쓰는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걱정했던 사달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김 도령과 연서를 주고받던 사람, 화초서생이 아니었어?

그게 아니라면 화초서생의 정체는 대체 뭐야?

엉킨 실타래처럼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때, 멍하니 서 있는 그녀의 턱 밑으로 서늘한 검 끝이 다가왔다.

“뉘 앞이라고 감히 머리를 쳐들고 있는 것이냐?”“네?”“공주마마시니라. 당장 고개를 조아리지 못할까?”귓가에 들려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라온은 차마 작은 신음조차도 내뱉지 못했다.

공주마마? 공주마마시라고?

라온의 뇌리로 그간 궁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공주마마께서 어느 명문가의 도령과 서한을 주고 받으셨다지 뭔가. 그런데 갑자기 그 도령에게서 서한이 뚝 끊기니. 가여우신 우리 공주마마께서 그만 상사병에 걸리셨다네. 헌데, 공주마마께 서한을 보낸 자가 실은 그 명문가의 도령이 아니라 다른 자라지 뭔가. 한 마디로 말해 대필자가 공주마마께 연서를 보낸 것이지.’그럼 김 도령이 연서를 보낸 사람이 다름 아닌 공주 마마……?

그리고 그 대필자가 바로 나라고?

“말도 안 돼.”라온이 비명 같은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였다.

“휘장을 걷어라.”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라온과 공주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하얀 휘장이 천천히 젖혀졌다.

이윽고 라온의 눈에 공주의 모습이 들어왔다.

붉은 매화꽃잎이 수놓인 연분홍 저고리에 아청색 스란치마를 입은 공주는 얼굴에 면사를 두르고 있었다.

횃불 아래 아른거리는 공주의 얼굴.

라온의 입안에 마른 침이 고였다.

꿀꺽 침을 삼키고 있자니 공주가 얼굴에 쓰고 있던 면사를 벗었다.

잠시 후, 드러난 공주는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아…….”라온은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림 속에서 툭 튀어나온 듯 아득한 아름다움이었다.

손에 묻어날 듯 하얀 얼굴은 한 손아귀에 들어올 듯 조그마했다.

오뚝한 콧날과 새치름한 입술,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망울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한 기품을 자아내고 있었다.

헌데, 저 눈.

벼린 칼날처럼 날카롭고 시린 빛을 품고 있는 저 눈빛은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누굴 닮았는지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지금 당장은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라온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죽을죄를 지었나이다.”“과연, 네놈이 한 짓이 맞구나.”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라온의 뒤통수로 찌르는 듯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일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라온과 공주를 둘러싼 공기가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 무거운 침묵 속에 라온은 차마 숨조차 크게 쉴 수가 없었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손길이 숨통을 조이는 듯 느껴졌다.

어찌한다?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연서를 대필할 때는 그저 단희와 어머니만 생각했다.

어머니와 단희를 지킬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뒷일은 꼼꼼히 짚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했던 일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사건이 되어 돌아올 줄이야.

불현듯 김 도령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간도 크시지. 어찌 공주마마께 연서를 보내는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그럼에도 언질 한 번 안 주시다니.

언제고 만나면 따져 물으리라.

하지만…….

따져 물을 수 있는 것도 다 살아남았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라온은 언젠가 도기와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대필자. 잡히면 어찌 되는 것이옵니까?’‘글쎄. 아마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겠지.’‘둘 중 하나라면?’‘교수형(絞首刑)이나 참형(斬刑), 둘 중에 하나.’서늘한 기운이 라온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공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해보아라. 무슨 사정으로 이러한 짓을 하게 되었는지.”“그것이…….”잠시 망설이던 라온이 말을 이었다.

거짓으로 모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픈 누이가 있었사옵니다. 늙은 노모와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었나이다.”“아픈 누이와 노모.”명온이 라온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그래, 알겠다. 너의 사정도 알겠고, 어찌하여 연서를 보내게 되었는지도 이해하겠다.”이미 알고 있음이었다.

라온의 가족과 사는 사정에 대한 조사는 진즉에 끝낸 상태.

눈앞의 사내가 얼마나 궁핍한 상황이었는지도 알고 있다.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악처럼 허우적거렸다는 것을.

이해한다. 힘들었겠지.

하지만…….

깊은 침묵을 깨고 명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네가 한 일은 사람의 마음을…… 감히 날 희롱한 것이었다.”감히, 내 마음을 아프게 한 죄.

당장 그에게 가장 처참한 죽음을 내리고 싶다.

하지만…….

왜 이런지 모르겠다.

자신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내의 모습을 보는 것이…… 왜 이리 속상한 것인지. 왜 이리 화가 나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내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 한쪽에 얼음이 박힌 듯 시리고 아파왔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사내를 보고 여전히 마음이 아픈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화가 나는 건…….

“그런데 넌 어쩌자고 내시가 되었느냐? 왜 하필이며 하고많은 것 중에 내시가 된 게야?”고개 숙인 라온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명온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저도 모르게 속엣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야 말았다.

어쩌자고 이렇게 바보 같은 질문을 했을까.

갑자기 기운이 탁 풀려버렸다.

온몸의 생기가 발끝으로 새어나가는 듯했다.

명온이 힘없는 다시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감히 왕족을 희롱한 죄다.”“죽여주시옵소서.”묵묵히 죽음을 자청하는 라온을 보며 명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좋다. 죽여 달라니 그리 하마.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느냐?”“……!”일순, 라온은 머릿속이 아찔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을 묻는 것은 어쩌면 마지막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목숨이 오가는 절체절명의 순간.

어찌 대답해야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걸까?

‘난 아직 죽을 수 없어. 내가 이대로 죽으면 우리 단희와 어머니는 어찌 살아간단 말이야?’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왜 대답이 없느냐?”공주가 다시 다그쳐 물었다.

“…….”“그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겠지.”공주의 목소리에는 헛헛한 바람이 깃들어 있었다.

그 허망함이 고스란히 라온에게로 전이되었다.

처음으로 마음을 열어 보인 자에게 받은 상처로 피 흘리는 여인의 자닝한 속내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순간, 라온의 심장으로 저릿한 아픔이 밀려들었다.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칼로 베인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겠지만, 사람에게 베인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상처가 깊어진다는 사실을.

이리 상처 주고는 내 살 길만을 궁리하고 있었구나, 나는.

“죄송합니다.”내가 잘못한 것이다.

아무리 먹고 살기 위한 것이라지만, 다른 이의 연서를 대필한다는 것은 안 될 말이었다.

“그딴 말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정녕……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는 거야? 정녕?”명온이 다시 한 번 라온을 다그쳤다.

‘미안하다’는 뻔하디 뻔한 말이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듣고 싶었던 말은…… 그녀가 정녕 듣고 싶었던 말은…….

“그리고 진심이었습니다.”내내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라온에게서 진실로 듣고 싶었던 한 마디가 흘러나오자 명온은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런 명온에게 라온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진심이었습니다.” 되돌아보면 공주에게 보냈던 연서는 라온에게도 각별한 것이었다.

연서를 주고받는 동안 김 도령의 대필이 아니라, 라온 자신이 그녀와 대화하며 즐겁게 웃는 것만 같았다.

김 도령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끝내 보내지 못한 마지막 연서.

‘사모합니다.’라는 글귀로 시작되는 그 연서는 차마 보낼 수가 없었다.

사모한다는 말 대신 진정한 벗이 되어달라고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라온은 그때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때의 마음, 그 심정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었다.

“공주마마를 향한 제 마음은 진심이었습니다.” “거짓말 마라.”“그 연서, 김 도령님을 대신하여 쓴 것이긴 했지만…… 연서에 담긴 마음만은 제 것이었습니다.”라온이 고개를 들어 명온을 응시했다.

명온이 정면으로 그 얼굴을 마주했다.

그때였다.

라온의 얼굴에 웃음이 맺혔다.

그 해사한 웃음을 보는 순간, 명온의 심장이 두근 뛰었다.

“뭐…… 뭐야? 죽음을 자청한 놈이 어찌하여 그리 웃는 것이야?”당황하는 명온에게 라온의 목소리가 나비처럼 사뿐하게 날아들었다.

“궁금하였습니다.”“뭐가?”“어찌 생긴 분이시진요. 그런데…… 참으로 고우신 분이십니다.”그것은 살기 위해 하는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사실 연서를 쓰는 동안 많이 설레었습니다. 잘못된 일인 줄은 알았지만 병든 누이를 위해 그리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연서를 읽을 때면 행복했습니다. 하여……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답신을 적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언제나 궁금하였습니다. 이런 글을 쓰시는 분은 어찌 생긴 분이실까 하고 말입니다.”“너…… 글만 번지르르한 줄 알았더니. 입에 발린 말을 잘도 하는구나.”“그리 생각하셨다면 그 또한 제 잘못이겠지요. 하지만 이 또한 저의 진심입니다.”진심으로 공주마마의 연서가 반가웠습니다.

진심으로 공주마마와 대화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명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런 명온을 향해 라온이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을 털어놓으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앞으로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여전히 두려웠다.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었다.

처음부터 귀한 댁의 아가씨를 속일 때부터 이런 위험은 감수하고 있지 않았던가.

어머니와 단희가 걱정되었지만…….

라온은 두 사람을 떠올렸다.

그나마 다행이다. 단희의 병이 많이 완쾌되어서. 내가 없어도 우리 어머니와 단희, 서로를 의지하며 잘 살아갈 수 있겠지.

마음의 정리를 끝낸 라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벌을 내려주십시오.”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 하는구나. 그런다고 내가 너를 쉬이 용서할 줄 아느냐?”“무슨 벌이든 달게 받겠사옵니다. 제가 죽어 공주마마의 노여움이 풀릴 수만 있다면…….”하얗게 마른 입술을 축이며 라온은 떨리는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기꺼운 마음으로 죽겠사옵니다.”명온의 얼굴 위로 싸늘한 기색이 내려왔다.

한참을 말없이 라온을 쏘아보던 명온이 휙,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섰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좋다. 네가 정히…… 정히 그리 원한다면…….”그때였다.

“불허한다.”어둠 속에서 숨이 턱까지 올라온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지하실 입구로 향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그림자 하나가 안으로 들어섰다.

눈가를 찌푸리던 명온이 작게 읊조렸다.

“오라버니.”오라버니? 그럼 왕세자 저하? 그분께서 여긴 왜? 무슨 일로?

덩달아 고개를 돌리던 라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라온의 의문성이 허공에 채 퍼지기도 전.

지하실에 있던 공주의 호위무사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세자저하!”그 우렁찬 외침을 듣는 순간, 라온은 잠시 멍해졌다.

이윽고, 황망하여 열없이 벌어진 그녀의 입에서 한숨 같은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화초서생?”이건 진짜 말도 안 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