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그 연서, 네가 쓴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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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4
박만충은 몇 번을 기웠는지 알 수 없는 남루한 도포를 입고, 갓 끈을 고쳐 맸다.
“어험. 이게 어찌 이리 비뚤어졌을꼬.”다 찌그러진 갓은 어떻게 써도 모양이 나지 않았다.
이쪽을 맞추면, 반대쪽이 기울고, 다른 쪽을 맞추면 또 엉뚱한 곳이 기우뚱해졌다.
그럼에도 박만충은 나름 모양새를 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때, 방 한구석에서 다듬이질을 하던 아내 김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그 꼴에 양반이라고.”아내의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에 박만충은 짐짓 훈계하듯 말했다.
“어허, 이 사람. 그런 말이 어디에 있는가? 내 꼴이 뭐가 어때서?”그러면서도 다시 한 번 갓을 고쳐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 잘난 양반이 과거엔 어째 번번이 낙방을 하시는 거요?”“자네는 선비가 학문에 정진하는 이유가 단지 과거시험 때문이라 생각하는 겐가?”“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어허, 이 사람. 사내대장부의 높은 뜻을 자네가 어찌 알겠는가. 본디 봉황이 하늘을 날려면 천년 동안 날갯짓을 연습해야 하는 법이라네.”남편의 말에 김 씨가 조소를 터트렸다.
“핫! 그놈의 봉황, 날갯짓만 하다가 늙어 죽겠소.”“말이 그렇다는 소리야, 말이.”“그래도 봉황이라는 놈은 언젠가 날기라도 하는가 보네요. 우리 집 식충이는 백날 밥만 축내고 날갯짓도 안 하는데 말이오.”가늘고 긴 눈초리로 박만충을 흘겨보던 김 씨의 다듬이질 소리가 한층 커졌다.
지금 다듬이질 하는 빨랫감이 남편이라도 되는 듯 김 씨는 내리치는 팔에 한껏 힘을 주었다.
“저런 작자도 남편이라고 일평생을 거둬 먹이고 있으니.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귓전에서 들려오는 아내의 말을 박만충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한동안 험험, 어색한 헛기침만 연발하며 그가 말했다.
“내 잠시 다녀오리다.”“이 야심한 시각에 어딜 가겠다고 그러는 게요? 또 어디 투전판에 끼어 볼 생각이시오?”“어허, 글공부하는 서생이 어찌 경망스럽게…….”“그놈의 서생타령은……. 개도 안 물어갈 서생 같은 건 때려치우고 어디 가서 돈이나 벌어 와요.”“어허, 이 사람이. 어찌 선비에게 돈벌이를 하란…….”일순 김 씨의 눈초리가 하늘 위로 치켜 올라갔다.
“험험. 거참, 사람 성정하고는. 내 윤 초시에게 좋은 자리가 있는지 한번 말이나 건네 보고 오리다.”박만충은 도끼눈을 한 아내를 피해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의 등 뒤로 아내 김 씨의 팔자타령이 이어졌다.
“아이고, 내 팔자야. 내가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 저렇게 찢어지게 가난한 양반을 만나서 이 모양 이 꼴로 사는지. 아이고, 내 팔자야.” 가슴을 치는 김 씨의 넋두리에도 박만충은 그저 불편한 헛기침만 연발할 뿐이었다.
과거공부를 한답시고 일평생 책만 파고 있으니, 아내 손에 물이 마를 일이 없다.
볕 뜰 날만을 기다리던 순박한 아내는 어느새 표독스러운 얼굴로 바가지를 긁어대는 악처가 되었고, 박만충의 어깨도 나날이 굽어만 갔다.
사립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지만, 마음이 편편찮은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를 보는 동네사람들의 눈빛이 곱지 않은 탓이다.
말이 좋아 양반이지, 일평생을 과거시험에만 연연하여 제대로 밥벌이도 못 하는 그가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이제는 돈으로도 양반 신분을 살 수 있는 시절이라.
몰락한 양반인 박만충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노골적인 냉대와 조롱이 가득 담겨 있었다.
박만충의 어깨가 더욱 굽어졌다.
먼 곳을 보던 시선도 축 처진 어깨와 더불어 느릿느릿 걷는 발끝으로 떨어지고야 말았다.
터벅터벅 힘없이 걷다보니 가지를 축 늘어뜨린 버드나무가 나왔다.
“허, 너도 내자의 타박을 받았더냐? 어깨가 많이 굽었구나.”박만충은 측은하다는 듯 버드나무를 토닥여주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보고 쯧쯧 혀를 찼다.
나무 아래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그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구수한 냄새가 진동하는 주막을 지나 어수선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좁은 골목을 얼마나 걸었을까?
으슥한 골목 안쪽에 작은 대문 하나가 나타났다.
잠시 두리번거리던 박만충이 대문에 있는 동그란 문고리를 잡아 몇 번 두드렸다.
똑똑똑.
작은 두드림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누구시오?”“선음(蟬吟)이오.”매미울음 소리를 뜻하는 선음은 박만충의 호이며, 또한 암어(暗語)였다.
자신의 모습이, 한여름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긴 세월을 땅 속에서 보내는 매미와 같다 하여 스스로 그렇게 지은 것이다.
이내 문이 열리고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알았네.”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박만충의 얼굴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달라 있었다.
구부정한 어깨는 팽팽한 활시위처럼 활짝 펴지고, 뒷짐을 지고 성큼 성큼 걷는 걸음에도 힘이 넘쳤다.
무기력하게 늘어졌던 얼굴에 활기가 피어나고, 축 처졌던 입매엔 자신만만한 미소가 가득했다.
만약, 지금 그의 모습을 마을의 누군가가 보았다면 같은 사람인가 의심할 정도였다.
유약하고 무능력한 양반의 가면을 벗어낸 그가 날카로운 눈매로 주위를 둘러보며 안쪽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입니다.”그를 안내한 사내가 낡은 문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누런 한지를 바른 문엔 투박하게 그려진 둥근 원 하나가 있었다.
이 둥근 원이 사실은 달(月)을 의미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조선팔도에 꼭 백 명밖에 없었다.
그리고 선음 박만충 또한, 그 백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박만충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이윽고 장방형의 긴 방 안에 아흔 여덟 명의 사람들이 길게 두 줄로 마주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흔아홉 번째로 대열에 합류한 박만충은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오늘밤은 박만충이 속해 있는 백운회(白雲會)의 비밀회합이 있는 날이었다.
비밀리에 결성된 이 조직은 조선팔도,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이뤄져 있었다.
오늘 이 비밀회합에 모인 아흔아홉 명은 각기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자들이었다.
몰락한 양반인 박만충은 정보수집에 능한 자였다.
그의 오른쪽 자리에 앉아 있는 사내는 역관 출신의 거상이었고, 박만충의 왼쪽 자리에 앉아 있는 여인은 함경도 지방에서 알아주는 무녀였다.
젊은 유학자와 상인, 그리고 내쳐진 양반과 여인으로 구성된 이 기이한 모임은 새로운 조선을 만들기 위해 이미 오래 전에 만들어진 비밀조직이었다.
이들의 젊은 생각과 새로운 사상은 오랜 세월, 외척들의 농간에 놀아나는 조선을 바로 세울 것이다.
박만충은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과 소리 없는 눈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불현듯 맨 앞쪽의 문이 벌컥 열리고 짙은 무채색의 무복을 입은 젊은 사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일순, 방 안에 모여 있던 아흔아홉의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운회를 이끌어가는 정점.
아흔아홉의 사람들이 충성을 맹세한 한 사람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삿갓을 깊게 눌러쓴 사내를 향해 아흔아홉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회주님을 뵈옵니다.”바닥에 부복하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둘러보던 사내가 쓰고 있던 삿갓을 천천히 벗어 내렸다.
이윽고 사내의 새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흔들리는 촛불에 붉은 입술이 유난히 선명해 보이는 사내는…… 다름 아닌 병연이었다.
***
축시가 가까워오자 맑던 하늘에 먹장구름이 드리워졌다.
바람결에 비 냄새가 섞여 있었다.
“가을비가 오려는가 보군.”홀로 낡은 정자에 앉아 있던 영은 술잔을 기울였다.
쓰디 쓴 술을 입에 머금은 채 그는 저 멀리 불 켜진 저택을 응시했다.
백운회의 비밀회합이 열리는 곳이다.
병연이 회주로 있는 백운회는 앞으로 그가 도모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될 조직이었다.
물론 그 이유 때문에 병연을 곁에 두는 것은 아니었다.
병연은 영과 같은 길을 걷는 동반자였고, 또한 그의 아픔을 공유한 유일한 벗이었다.
영은 처음 병연과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도 녀석은 특유의 시큰둥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세상 앞에서 조금의 두려움도, 그렇다고 낮게 깔보지도 않던 녀석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병연은 다른 이들과 달리 왕세자인 자신에게 아첨하지 않았다.
어디 그뿐일까?
감히 그에게 일탈을 종용했다.
그런 병연이 영은 너무도 좋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이리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녀석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때 그 사건이 벌어졌을 때, 녀석이 곁에 없었다면 나는 어찌 되었을까?’상념에 빠진 채 영은 다시 술잔에 술을 따랐다.
또로록.
맑은 술이 술잔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불현듯 또 한 명의 벗이 떠올랐다.
“낯선 벗이라.”자신을 감히 낯선 벗이라 칭하는 맹랑한 녀석.
지금쯤 무얼 하고 있으려나? 아마도 어미와 누이를 만나 어린 아이처럼 들떠 있겠지.
라온의 얼굴에 화사하게 피어나던 웃음꽃을 떠올리며 영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뭘 그리 혼자 웃고 있어?”어둠 속에서 병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회합은 잘 끝난 것이냐?”질문에 답하는 대신 병연은 영의 손에서 술병을 낚아챘다.
술병째 몇 모금 술을 마신 그가 영을 돌아보았다.
“전하께서 곧 성심을 만천하에 공포하실 거라더군.”“알고 있다.”“중궁전의 움직임은 어때?”“아직 큰 움직임은 없다. 그러나 아바마마께서 성심을 굳히셨다는 것을 아시면 어떤 행동을 취하시겠지.”“외척들이 움직이겠구나.”병연의 말에 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지켜보던 병연이 정자 난간에 등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그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는 것이 이번 일의 성사를 좌우할 거야.”영은 시린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걱정 마라. 그들에게 난 그저 까다로운 성정의 왕세자일 뿐, 지금은 조금도 위해가 되지 않을 상대로 보일 것이다.”“나중에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그자들의 표정, 어떨지 정말 궁금하군.”말을 하던 병연이 문득 품속에서 서찰 한 장을 꺼내 영에게 내밀었다.
“함경도에서 온 자가 이런 것을 가지고 왔어. 그 서찰에 적힌 것이 다시 돌기 시작한다더군.”영이 서찰을 펼쳐 읽었다.
<일사횡관(一士橫冠)하니 귀신(鬼神)이 탈의(脫衣)하고, 십필(十疋)에 가일척(加一尺)하니 소구유양족(小丘有兩足)하는 것이 어떠하겠소.>
순간, 영의 눈동자에 푸른 이채가 서렸다.
그가 난간에 기대앉은 병연을 돌아보았다.
“그것은 임신년에 홍경래가 일으켰던 민란을 예언했던 파자(破字)가 아니더냐.”‘파자’란 한자의 자획을 풀어 나누는 것으로, 양반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일종의 놀이었다.
지난 임신년의 민란이 일어나기 전, 홍경래는 위와 같은 파자를 퍼트려 민심을 선동했다.
선비사(士)에 한일(一)을 삐딱하게 얹혀 있으니 임(壬)이 되고, 귀신(鬼神)이 옷을 벗었다 하여 옷의(衣)와 비슷한 시(示)를 빼면 신(申)이 되며, 달릴 주(走)자에 척(尺)자를 더하면 일어날 기(起)가 되었고, 언덕 구(丘)에 양쪽에 발이 있으니 군사 병(兵)이 되어 <임신기병(壬申起兵)>.
즉, 서찰에 적힌 내용을 풀이하면 임신년(1812년)에 군사를 일으키겠다는 뜻이 된다.
파자를 퍼트려 민심은 선동했던 홍경래의 민란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민란의 실패는 민란을 주도했던 자들에게만 큰 타격이 되었던 것이 아니었다.
홍경래가 일으켰던 민란은 이 나라 조선이 외척의 손아귀로 들어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병연이 가져온 서찰의 내용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서찰의 말미에 적힌 작은 파자는 남달랐다.
<임(林)과 이별(離別)하니 언덕(皐)에 바람(風)이 부는구려.>
영은 파자의 말미에 쓰인 수수께끼 같은 구절에 시선을 집중했다.
숲이 이별하니, 나무 목(木)자 하나가 남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남는 글자는 목(木) 고(皐), 풍(風), 세 글자.
“목, 고, 풍…… 목, 고, 풍…….”문득 영의 미간이 한데로 모아졌다.
이것은……!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조각이 제대로 그림을 맞춰가기 시작했다.
그때,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긴 영의 귓가에 병연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함경도 지방의 민심이 심상치가 않아.”“어찌 생각하느냐?”“임신년의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장담은 할 수 없을 거 같군.”또 다른 민란의 예언이다.
병연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한 가지 정보를 덧붙였다.
“그쪽에서 올라온 정보에 의하면 지난 민란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홍경래의 핏줄을 찾는다고 하더군.”영이 눈빛을 빛냈다.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민란을 한 곳으로 모으려는 작정인 게로구나.”영은 불현듯 주먹을 말아 쥐며 고개를 저었다.
“민란을 빌미로 외척들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이제 겨우 외척들에게서 왕권을 되찾았는데. 이 와중에 다시 한 번 민란이 일어난다면…… 이 조선은 완전히 외척의 손아귀로 들어가게 될 것이야.”“어찌하면 좋을까?”“막아야지.”“어떻게?”“홍경래의 핏줄은 민란의 세력들에겐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 사분오열 흩어진 자들을 한곳으로 모으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니…….”잠시 말끝을 흐리던 영이 서늘한 눈으로 병연을 돌아보았다.
“네가 가서 그들을 막아라. 그들보다 먼저 홍경래의 핏줄을 찾아내야 한다.”“…….”깊게 가라앉은 눈을 한 채 병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병연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처마 끝으로 빗살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
쏴아아.
비긋는 소리가 거세지자 최 씨는 걱정스런 얼굴로 라온을 돌아보았다.
라온은 궁으로 돌아갈 차비를 하는 중이었다.
“비 그친 뒤에 가면 안 되는 거니?”“금방 다시 올 거예요.”“궁이란 곳이 그리 자유로이 오갈 수 없다는 것쯤은 어미도 알고 있단다.”“곧 나올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겁니다.”“라온아, 어미는 자꾸만 걱정이 되는구나. 행여 네가 여인인 것이 밝혀지면 어찌하니?”“걱정 마세요. 궁의 누구도 제가 여인인 것을 몰라요.”“…….”잠시 말없이 라온을 바라보던 최 씨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우리…… 도망갈까?”“네?”“우리 도망가자꾸나.”“어머니.”“너도 나도, 그리고 우리 단희도 도망질이라면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지 않니. 너를 궁에 들여보내 놓고 이 어미는 단 하루도 발 뻗고 잠을 수가 없었어. 그러니 라온아, 그냥 우리 세 식구, 어디 아무도 못 찾는 곳으로 도망가자꾸나.”어머니의 말씀대로 어린 시절부터 도망질이라면 이골이 나도록 했다.
영문도 모른 채 그리 살아왔다.
어머니는 언젠가 때가 되면 연유를 말씀해주시겠노라 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연유를 말씀해주지 않으셨다.
연유가 무엇이든, 이제는 도망질치는 삶은 그만하고 싶었다.
라온은 어머니를 향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도망치겠다고 마음 먹는다면 못할 것도 없겠지요. 하지만 어머니, 이제는 그리 살고 싶지 않아요.”“라온아.”“지금까지 그리 살았습니다. 그러나 일평생을 그리 살 수는 없어요.”“얘야…….”“그리고 우리 단희, 아직 완전히 나은 것이 아니잖아요. 앞으로도 신의의 치료를 꾸준히 받아야 한다면서요.”“내겐 단희도 중요하지만 너도 중요해.”“3년 입니다, 어머니. 3년만 버티면 빚진 것을 갚고 다시 우리 세 식구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라온이 씩씩하게 웃어보였다.
“미안하구나.”여식을 바라보는 최 씨의 얼굴에 죄책감이 서렸다.
모든 것이 자신의 업보였다.
지그시 눈을 감는 그녀의 뇌리에 남편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남편의 넉넉했던 웃음과 세상의 모든 풍파에서 자신을 지켜줄 것 같았던 단단한 가슴이 떠올랐다.
최 씨는 서둘러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지금의 자신을 보면 남편은 뭐라고 했을까?
라온을 사내로 자라게 했던 자신의 선택이 과연 잘한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 찰나의 선택이 여식의 운명을 비틀고 발목을 잡고 있는 듯했다.
저리 어여쁜 것이 일평생 거짓 사내노릇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어졌다.
“울지 마세요, 어머니.”라온은 어미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해사하게 웃어보였다.
“그래, 안 울게. 울지 않으마.”서둘러 눈물 자국을 지워낸 최 씨가 여식을 따라 힘겹게 웃음을 보여주었다.
“어머니, 이제 정말 가봐야겠어요.”라온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단희가 그 뒤를 강아지처럼 졸졸 뒤따랐다.
“언니.”“단희야. 누구보다 건강해져야 한다.”“네.”“어머닐 부탁할게.”“걱정 말아요. 어머닌 제가 잘 모실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부터 언니는 언니 걱정만 해요.”“그래.”단희 덕분에 라온은 처음 집을 나설 때보다는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시 떠날 수 있었다.
***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는지 모른다.
어머니와 단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고갯길을 달음박질하여 올라오면서도 라온은 집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석상이 된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서 있던 어머니와 단희의 모습이 어둠속으로 잠식되었다.
더 이상 보이지 않았음에도 라온은 두 사람이 있는 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머니…… 단희야…….”기어이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두 사람 앞에선 애써 참았던 눈물이 이제야 흘렀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쓱쓱 눈물을 지워냈다.
“홍라온, 기운내자.”즐겁게 살라는 이름처럼 즐겁게 살아야지.
우리 가족들이 다 함께 모여 사는 그날을 위해 어떻게든 즐겁게 살아내야지.
라온은 어둠 속에 잠긴 집을 향해 함박웃음을 지었다.
“다시 또 올게요, 어머니. 곧 돌아올게, 단희야.”낮게 속삭이던 라온은 애써 미련을 잘라내며 궁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약조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화초서생과 김 형이 자신을 기다릴 거란 생각을 하니, 우울했던 기분이 거짓말처럼 말끔하게 걷혔다.
‘서둘러야겠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몇 걸음 떼기 무섭게, 라온은 다시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목덜미에 와 닿는 서늘한 감촉.
어둠 속에서도 희게 번뜩이는 그것은 분명, 잘 벼려진 검(劍)이었다.
“헛!”라온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낮은 비명을 토해냈다.
그때, 귓가로 위협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홍가 라온이 맞더냐?”“…….”라온은 또르르 눈동자를 굴렸다.
날 알고 있다.
그렇다면 돈을 노리고 접근한 도적은 아니란 의미였다.
“맞, 맞습니다만. 대체 무슨 일이기에…….” 라온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뒤통수에서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라온의 의식은 새카만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의식을 잃는 와중에도 라온은 화초서생과 김 형을 떠올렸다.
안 되는데…….
화초서생과 김 형이 기다릴 텐데.
내가 안 가면 걱정할 텐데.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극심한 두통에 라온은 절로 인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으음.”신음을 흘리며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사방에 횃불을 밝힌 음침한 실내가 시야에 들어왔다.
‘여기가 어디지? 아니, 그보다 내가 어쩌다 이곳에 누워 있게 된 거야?’ 두리번거리던 라온의 뇌리로 정신을 잃던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아 맞다. 갑자기 누군가의 위협을 받았었지. 그러다…….’라온은 손을 들어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윽!”뒤통수에 주먹만 한 혹이 만져졌다.
시큰한 통증에 절로 눈물이 찔끔 맺혔다.
대체 이런 곳으로 날 끌고 온 사람은 누굴까? 그보다 나…… 납치당한 거야? 왜? 어째서?
도무지 풀리지 않은 의문에 골치가 아파올 때였다.
“깨어난 것이냐?”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놀란 라온은 서둘러 상체를 일으켰다.
이윽고 하얗게 발이 쳐진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발 너머로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자세히 볼 순 없었지만, 하얀 발 위에 어룽 맺히는 그림자로 보아 여인이 분명했다.
여인? 여인이라고?
더더욱 이해가 가질 않는다.
여인이 대체 왜 나를 납치한 것일까?
그때, 라온의 발치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곱게 접혀진 서안이었다.
라온은 그것을 펼쳐들었다.
얼마 후, 서안을 들고 있는 라온의 손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것은…….”재동 김 진사 댁 막내도령인 김 도령을 대신해서 써 준 연서였다.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지? 혹시…….’문득, 불길한 예감이 라온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발 너머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연서, 네가 대필한 것이 맞느냐?”“……!”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다시 묻겠다. 그 연서, 네가 쓴 것이냐?”라온의 안색이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