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23화 (23/131)

23. 화초서생의 약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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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0

가배가 얼마 남지 않은 계절.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제법 서늘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옷차림도 제법 두툼해졌다.

서둘러 집으로 발길을 재촉하던 라온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뒤를 꼬빡연처럼 뒤따르던 영과 병연이 의아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라온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집에 가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습니다.”“어딜 가려는 것이냐?”“포목점에 들러야겠습니다.”“난데없이 포목점이라니?” “반 년 만에 집에 돌아가는 것인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질 않겠습니까. 울 어머니와 단희, 겨울 옷감 좀 사려 합니다.”차마 어머니와 단희에게 변변한 겨울옷 한 벌 없다는 이야기는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라온은 시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술시말(戌時末: 저녁 9시).

시전의 점포들은 이미 장사를 끝내고 문까지 닫아걸었다.

영은 불 꺼진 시전을 둘러보다 앞서 걷는 라온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이 시각에 문을 연 포목점이 있겠느냐?”“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라온이 버릇처럼 검지를 펼치며 말을 이었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하셨죠.”“무슨 소리더냐?”그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는 듯 라온은 어느 불 꺼진 포목점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영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런다고 한들, 이미 장사를 끝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줄 리가…….”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문 안쪽에서 날카로운 여인의 음성이 새어나왔다.

“누구시오? 오늘 장사 끝났소!”그때, 라온이 안쪽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아주머니, 저예요.”“아니. 이 목소리 설마…… 삼놈이냐?”“네. 아주머니. 저 삼놈이예요.”다시 문을 열어줄 리 없다는 영의 말과는 달리 벌컥 문이 열리고 중년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나, 이게 누구야? 삼놈이 아니야?”“네, 아주머니. 잘 지내셨어요?”“이게 얼마만이야? 갑자기 사라져서 다들 얼마나 걱정했다고. 듣자하니 궁에 들어갔다면서?”“네, 그리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주머니,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부탁? 무슨 부탁?”“지금 비단 좀 볼 수 있을까요?”“안 될 게 뭐가 있겠어? 들어와, 들어와.”흔쾌히 허락한 포목점 여주인은 서둘러 점포의 불을 다시 밝히고 문을 활짝 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주머니.”“아이, 삼놈이 부탁인데. 내가 뭘 못 해주겠어? 그런데…… 저 뒤에 서 계시는 분들은 누구야?”여주인이 라온의 뒤에 서 있는 영과 병연에게 시선을 던지며 관심을 보였다.

“아, 궁에서 절 도와주시던 분들입니다.”“아이쿠. 정말 고마우신 분들이네요. 우리 삼놈이 잘 부탁드려요.”찰나지간, 여주인이 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무방비 상태로 서 있던 영이 인상을 찡그려졌다.

그러나 너무도 순박한 여인의 표정에 차마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여주인에게 손이 잡힌 채로 영은 라온을 턱짓했다.

“저 아이와는 잘 아는 사이시오?”“말도 마세요. 잘 아는 정도가 아니라 제 은인이지요. 삼놈이가 아니었으면 과부신세를 면하지 못했을 겁니다.”“재가를 하시었소?”“다 이년의 팔자가 박복한 탓이지요.”긴 한숨과 함께 여주인의 넋두리가 이어졌다.

“이팔청춘 좋은 시절에 남편을 여의고 홀로 산 지 십 년이 넘었지요. 서방 없는 과부신세이다 보니 이놈 저놈 얼마나 집적대는지. 하루는 내 신세가 하도 박복해 울고 있는데 우리 삼놈이가 지나가다 우연히 내 모습을 보고 묻는 거예요. 왜 우느냐고…….”라온을 바라보는 여주인의 눈 속에 따스한 정감이 서렸다.

“우리 삼놈이 덕분에 내가 이렇게라도 사는 겁니다. 우리 삼놈이가 중간에 오작교 노릇을 단단히 해준 덕에 지금의 영감과 천생연분을 지을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댁들은 우리 삼놈이와 어떻게 되는 사입니까? 혹시…….”뭔가 알아챘다는 표정으로 여주인이 말끝을 길게 늘였다.

순간, 영과 라온은 긴장했다.

두 사람을 번갈아보던 여주인이 입가에 짙은 미소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혹시 우리 삼놈이한테 고민 상담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아주 사람 제대로 찾은 겁니다. 우리 삼놈이가 남녀 문제라면 못 푸는 게 없어요. 이 운종가 아낙들이 우리 삼놈이를 뭐라 부르는지 알아요? 바로 월하노인……아니, 아니지. 월하청년이라 한답니다. 호호호호.”“흠…….”여주인의 끝나지 않는 수다에 영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변해갔다.

맞받아쳐주는 변죽도 없이 어찌 혼자 저리 잘 떠드는 것인지.

그저 말만 하면 좋으련만. 손까지 잡혀 있으니 불편함이 배는 더 가중되었다.

그러던 중 라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머니, 이거 어떻게 해요?”내내 영의 앞을 떠나지 않던 여주인이 라온에게로 달려갔다.

“아유, 우리 삼놈이는 역시 안목도 좋아. 그거 청나라에서 방금 도착한 따끈따끈 신품이야. 청나라 심양의 유명한 장인이 공 들여 만든 비단이지.”“엄청 비싸겠네요?”“한 폭에 한 냥.”“헉!”“하지만! 우리 삼놈이한테 그렇게 받을 수는 없지. 세 폭에 한 냥만 내.”“그렇게 주셔도 괜찮겠습니까?”여주인의 통 큰 인심에 라온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눈빛을 반짝거리며 양 손에 비단을 꼭 쥔 모습이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내가 삼놈이한테까지 이문을 남기면 사람이 아니지.”“그럼, 열다섯 폭만 주십시오.”“그런데 왜? 옷이라도 새로 지어 입으려고?”“저 말고 어머니와 단희 겨울 옷 좀 장만해 주려고요.”“에구. 우리 삼놈이, 얼굴만 잘생긴 줄 알았더니 어쩜 이리 마음씨도 고와? 이런 아들 하나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겠어. 그런데 그거면 되겠어? 이건 어때?”여주인이 근처에 있는 다홍빛 비단을 들어보였다.

“그것도 좋아 보이네요.”우리 단희한테 잘 어울리겠다.

하지만 라온의 수중에 있는 돈이라곤 집을 떠날 때 어머니가 비상금으로 챙겨 주셨던 다섯 냥이 전부였다. 방금 주문한 비단을 사면 한 푼도 안 남았던 것이다.

그런 라온의 심중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여주인이 말했다.

“이건 덤이야.”“아니요, 됐습니다.”“가져가라니까. 자투리 천이라 어차피 팔지도 못하는 건데 뭐.”“그러시면 제가 너무 미안하잖아요.”“삼놈이가 사내라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옷 한 벌 제대로 지으려면 이런저런 이유로 자투리 옷감이 꽤 많이 들어. 기왕 짓는 옷, 이거 가져가서 예쁘게 지어 입어. 우리 짠돌이 영감 없을 때나 내가 챙겨줄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어여 챙겨.”포목점의 여주인은 라온이 고른 비단 열다섯 폭과 더불어 이것저것 줄 수 있는 자투리 천을 모아 한데로 묶었다.

라온이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시선으로 여주인의 분주한 손길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실례합니다.”조용하던 점포 안으로 한 무리의 여인들이 들어왔다.

“비단 좀 살펴도 될까요?”갑자기 밀어닥치는 손님들에 여주인이 흥이 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우리 가게에 재신(財神)은 납시셨나? 어서 보세요. 한양 최고의 비단이 있습니다. 청나라에서 갓 들어온 따끈따끈한 신품이 여기 있습니다.”

***

점포 안이 갑자기 왁자해지자 병연은 삿갓을 눌러쓰며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점포는 늦은 시간에도 손님이 많군.”낮은 혼잣말이었건만.

어찌 들었는지, 기다렸다는 듯 여주인이 그의 면전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평상시에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지요.” 의미심장한 눈길로 병연과 영을 번갈아보던 여주인이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호, 아유 내 살다살다 나비가 꽃을 보고 날아드는 것은 봐도 꽃이 나비를 보고 달려드는 건 처음보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포장된 비단을 받으며 셈을 치르던 라온이 물었다.

여주인이 영과 병연을 눈짓하며 대답했다.

“보고도 모르겠어? 이 늦은 시각에 저 여인들이 여긴 왜 왔겠어?”“아하.”눈치 빠른 라온은 여주인이 하는 말의 의도를 금세 눈치챘다.

아닌 게 아니라, 포목점 안에 있는 여인들은 비단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영과 병연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우리 삼놈이만 잘생긴 줄 알았더니. 더 잘난 사내들도 있었네.”여주인의 말에 라온이 어색하게 웃었다.

평상시에 자주 봐서 많이 무뎌지긴 했지만, 처음 영과 병연을 보았을 땐 라온도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도 저리 여인들이 드러내놓고 관심을 보이자 라온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 두 사람, 굉장히 불편해 보이는군.” 영은 여인들이 던지는 추파에 불편한 기침을 연발하고 있었다.

삿갓을 눌러쓴 병연은 어느새 점포 밖으로 슬그머니 물러난 상태였다.

“볼일 마쳤으면 그만 가자.”견디다 못한 영이 라온을 재촉하며 점포 밖으로 몸을 돌릴 때였다.

“어맛!”그에게 등을 보인 채 비단을 고르던 여인 하나가 황급히 돌아서다 그와 어깨를 부딪쳤다.

영이 버릇처럼 미간을 찡그렸다.

“오늘따라 여인들과 자주 부딪치는군.”라온을 따라 시전에 막 들어섰을 때도 마주오던 여인과 몸을 부딪칠 뻔했다.

너른 길을 놔두고 하필이면 자신이 있는 쪽으로 다가와 몸을 휘청거리던 여인을 떠올리며 영은 눈매를 가늘게 여몄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포목점으로 오던 중에도 골목 모퉁이를 도는 순간에도 앞을 살피지 않고 걷던 여인이 그대로 그를 향해 쓰러지는 일이 벌어졌었다.

순간, 빠르게 뒤로 몸을 빼지 않았더라면 영락없이 낯선 여인을 품에 안을 뻔했었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

우연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공교로운 일이다.

한양에 사는 여인들이 한꺼번에 어지럼증에라도 걸린 게 아니라면 의도적으로 부딪힌 것인데, 어찌하여 그러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그의 귓가에 라온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여인들이라구요?”무슨 소리를 하느냐며 묻는 라온에게 영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오늘 세 번이나 여인들과 부딪칠 뻔했다. 아까 큰 길에서 그랬고, 골목 모퉁이서, 그리고 이번에 이 점포 안에서 말이다.”영의 말에 라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여인들?

횟수는 세 번이었지만 화초서생과 부딪칠 뻔했던 여자는 단 한 사람이었다.

차고 싸늘한 영의 표정과 그의 전신에서 풍기는 고귀한 기운에 뒤를 졸졸 따르는 여인은 많았어도 쉽게 다가오는 여인은 없었다.

그나마 용기를 낸 여인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그런데 웬 여인들?

“지금 장난치시는 것이지요?”“장난? 무슨 장난?”영은 아예 라온이 하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부딪칠 뻔한 횟수는 세 번이 맞지만 화초서생과 부딪칠 뻔했던 여인은 오직 한 사람이었습니다.”“다른 사람, 아니었느냐?”영의 미려한 얼굴에 의아함이 들어찼다.

“네가 잘못 본 건 아니고?”“같은 사람이었습니다.”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항상 냉정과 평정을 잃지 않았던 화초서생에게서 처음 보는 당황스러움이었다.

“……그래?” “그렇다니까요. 관찰력이 엄청 좋으신 분이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화초서생에게 의도적으로 부딪치려고 했던 그 여인, 한번 보면 못 잊을 만큼 빼어난 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기억을 못 하시는 것입니까?”“기억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다.”영은 애써 태연한 얼굴로 변명했다.

하지만 라온은 그의 미간에 잡힌 한 가닥 주름을 놓치지 않았다.

“사실입니까?”“…….”영은 침묵했다.

그런 영을 미심쩍게 바라보던 라온이 입을 열었다.

“혹시 화초서생…… 사람 얼굴 제대로 못 알아보시는 겁니까?”“아니다.”강한 부정.

오히려 더 의심스러웠다.

“정말요?”라온이 의심의 눈길을 번뜩였다.

“정말로 아니다.”그때, 병연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영의 비밀을 폭로했다.

“사람의 얼굴은 기억하지. 다만, 여인의 얼굴만 알아보지 못할 뿐이야.”“네?”라온의 두 눈에 놀란 기색이 들어찼다.

영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먼 허공을 응시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한 순간.

라온은 풋 참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정말요? 하하, 정말 그런 것입니까?”완벽한 화초서생에게 이런 약점이 있었다니.

뭔가 재미난 것이라도 발견한 듯 라온이 눈을 반짝거렸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초서생, 여인의 얼굴은 구별 못 한다고 하지 않았나?

이상하다.

그럼…… 나는 어떻게 알아봤던 거지?

***

일각 후, 세 사람은 라온의 집으로 향하는 고갯마루에 섰다.

“저기 아래가 저희 집입니다.”언덕 아래, 작은 초가를 가리키며 라온이 말했다.

“집?”“저기요. 저기 작은 집말입니다.”“저것이 네 집이란 말이구나.”달그림자 아래, 다 쓰러져가는 낡은 초가 한 채가 웅크리고 있었다.

영의 미간이 한데로 모아졌다.

녀석의 형편이 이리도 안 좋은 줄은 미처 몰랐다.

문득 그의 눈에 안쓰러운 기색이 들어찼다.

그러나 이내 감정을 숨긴 영은 예의 무심한 표정으로 라온을 돌아보았다.

“알았다. 그럼 앞으로 세 시진 후에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 파루가 치기 전에 돌아가야 하니, 절대 늦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알겠습니다.”꾸벅 머리를 조아린 라온은 날듯이 언덕 아래를 뛰어 내려갔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발견한 아이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섰던 영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어머니란, 가족이란…… 저런 것인가 보군. 저리도 그립고 반가운 존재인가 보군.”“…….”그의 혼잣말에 병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연의 시선은 라온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영도 병연과 마찬가지로 라온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두 사람은 라온이 집 안으로 들어간 이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못 박혀 있었다.

***

“어머니.”고갯마루에서 집까지, 그야말로 숨 한 번 쉬지 않고 달려왔다.

라온은 작은 오두막 안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보며 작게 혼잣말을 읊조렸다.

문풍지 위로 그려지는 어머니의 모습.

그리움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라온은 물기가 가득 배인 음성으로 어머니를 불렀다. 너무 기쁘고 벅찬 나머지 목소리가 입 안에서 웅얼거렸다.

그러나 그 작은 부름을 들은 것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어머니의 그림자가 고스란히 보였다.

“어머니!”눈가에 눈물을 가득 매단 채로 라온은 다시 어머니를 불렀다.

잠시 후, 벌컥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라…… 라온이니?”떨리는 목소리로 라온의 이름을 부르며 최 씨는 어둠 속을 더듬었다.

처음에는 환청을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얼마 전, 궁에 들어갔던 허 서방이 라온의 소식을 물어다 준 이후로 단 일 각도 라온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여, 최 씨는 자신이 환청을 들은 거라 여겼다. 여식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그려낸 헛된 망상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들려오는 선명한 목소리.

그것은 분명 라온의 것이었다.

“어머니…….”마당 끄트머리에 서 있던 라온이 한달음에 어머니의 앞으로 달려갔다.

“라온아!”“어머니!”버선발로 마당으로 뛰쳐나온 최 씨가 라온을 품에 안았다.

“아가…… 라온아.”이제 고작 열일곱.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장성한 자식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최 씨에게는 여전히 여리고 작아 보이기만 하는 아이였다.

“어찌 된 것이야? 한동안은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하더니.”“어머니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영영 돌아온 게야? 이제 어미와 집에서 함께 살 수 있게 된 게야?”눈물이 뒤범벅이 된 채로 최 씨가 물을 때였다.

열린 문 안쪽에서 후다닥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깡마른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희였다.

“언니? 라온 언니?”“단희야!”툇마루 끝에 서 있는 단희는 작은 미풍에도 휩쓸릴 듯 앙상해 보였다.

라온은 어린 동생의 앙상한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괜찮은 거야?”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단희의 낯빛이 좋지 못하다는 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불안이 그림자처럼 따라 붙었었다. 행여,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닐까 하여, 밤잠을 설쳐가며 공부를 했던 것이다.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거니?”“괜찮아요, 언니. 나 이제는 많이 건강해졌어요.”“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허 서방의 말처럼 낯빛은 여전히 창백했다. 하지만 단희의 눈빛이 예전보다 많이 단단해져 있었다. 라온을 바라보는 표정에도 산 자의 생기가 흘러넘쳤다.

“예서 이럴 것이 아니라. 우선 안으로 들어가자꾸나.”곁에서 지켜보던 최 씨가 두 아이들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라온의 안부부터 물었다.

“어디 아픈 곳은 없고?”“건강해요. 저보다 어머니와 단희는 어떻게 지내셨어요?”“우리야 잘 지내고 있지.”“단희 넌? 넌 정말 좋아지고 있는 거야?”“걱정 마요. 언니 덕분에 하루가 다르게 건강해지는 중이니까요.”“그런데 안색이 어찌 이리 창백해?”“의원 말로는 병이 낫기 전에 보이는 명현(瞑眩)이래요. 안색만 안 좋을 뿐이지, 옛날과 달리 이제는 운신하는 데 아무 무리가 없어요.”단희가 양 팔을 불끈 들어 보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그동안 가슴을 옥죄던 불안이 말끔하게 씻겨 내려갔다.

라온은 한숨 돌리며 벽에 등을 기댔다.

제 팔에 매달린 채 곁을 떠날 줄 모르는 단희와 안쓰러운 기색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얼굴.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어머니와 단희를 다시 만났다는 사실이 이제야 비로소 실감이 되었다.

내내 눈물을 머금고 있던 라온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얼음물이 녹듯 한껏 풀어진 그녀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

“그런데 이것들은 다 무어야?”최 씨가 라온이 가져온 비단 꾸러미를 보며 물었다.

“아참. 오는 길에 어머니와 단희 겨울옷감 좀 샀어요.”“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포목점 아주머니께서 싸게 주셨어요. 마음에 드세요?”어머니가 비단을 펼쳐보았다.

“참 곱기도 하구나.”말을 하는 최 씨의 목소리에 다시 물기가 들어찼다.

이걸 구하려고 또 무슨 고생을 했을꼬.

여식을 향한 어미의 눈길에 안쓰러움이 가득 깃들었다.

어머니의 눈가에 물기가 스미는 것을 보고 단희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우와, 곱기도 해라.”라온이 가져온 비단을 이리저리 몸에 대보던 단희가 해맑은 표정으로 최 씨를 돌아보았다.

“어머니, 남는 자투리 천으로 향주머니 만들어도 될까요?”“그러려무나.”고개를 끄덕이는 최 씨를 보며 라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향주머니?”“아차. 언니한테 말하는 걸 깜빡했네.”혀를 살짝 내밀며 웃던 단희가 방 한쪽에 놓인 문갑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왔다.

“이건 향주머니 아니야?”예전에 집을 떠났던 라온에게 주었던 향주머니와 같은 모양이었다.

“요즘 구 영감님 담뱃가게에서 이걸 만들어 팔고 있어요.”“진짜?”“잘 팔리는 날에는 하루 두 푼도 거뜬히 벌어요.”“대단하구나, 우리 단희.”“벌써 주문이 스무 개도 넘게 밀려 있어요.”단희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손바닥만 한 향주머니를 차곡차곡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언니도 어머니와 내 걱정 너무 하지 말아요.”“단희야.”“몸이 더 건강해지면 향주머니도 더 많이 만들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지금보다 벌이도 더 좋아질 거고. 어머니와 둘이서 먹고 사는 데 큰 지장 없을 거예요.”“우리 단희, 다 컸네.”언제나 어린 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병석에서 일어난 단희는 생각보다 야무진 아이였다.

대견하고 고마운 마음에 라온은 말없이 단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내 라온은 활기찬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

금쪽같은 시간을 이리 침묵으로 허비할 수는 없었다.

못 봤던 만큼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들려주고픈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단희야, 언니가 궁 이야기 들려줄까?”궁이라는 말에 단희의 눈에 호기심이 반짝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묻고 싶었지만, 차마 염치가 없어 물을 수가 없었다.

혹여 자신 때문에 그곳에서 갖은 고생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하여 말문을 열 수 없었던 것이다.

“네. 궁금해요. 궁은 어떤 곳이에요? 그곳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어요?”“그러니까…….”잠시 생각하던 라온이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좋은 사람들이 많은 곳이지.”“좋은 사람들이요?”“우선 거긴 가는 곳마다 이름이 있어. 운현각, 성정각, 중희당……이렇게 이름이 없는 곳이 없지.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자선당이라는 곳이야.”“자선당이요?”“응. 밤풍경이 굉장히 아름다운 곳이야. 특히, 달빛 좋은 보름밤엔 고마운 벗들과 어울려 담소를 나누기에 제격인 곳이지. 은은한 달빛이 연못을 비추고 사방에는 별빛을 닮은 꽃들이 가득 피어 있어. 가끔은 내가 하늘 세상에 놀러온 것은 아닐까 하고 착각까지 들 정도라니까.”“우와, 정말로 그런 곳이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언니, 그새 벗도 사귄 거예요?”“응.”“어떤 사람들이요?”“화초서생과 김 형이라는 분이신데…….”처음 병연을 자선당에서 만났던 이야기부터 영과 다시 만난 이야기, 두 사람과의 사소한 투덕거림을 단희에게 들려주었다.

라온의 이야기에 푹 빠진 단희는 ‘그래서요?’를 연발했다.

“그래서요?”“이놈의 닭들이 얼마나 날쌨는지 잡을 수가 없는 거야.”“하지만 언니는 뒷산의 꿩들도 제법 잡았잖아요.”“그래. 그래서 처음엔 만만하게 생각했지. 그런데 산닭이라는 것이 그냥 닭하고는 급이 다른 녀석들이었어. 이 녀석들이 얼마나 날래고 사나운지, 닭이 아니라 매인 줄 알았다니까.”“그래서요?”“다 포기하고 싶었지.”“그래서요?”“그래서 자포자기하고 말았어. 아, 이 닭들만 나타나면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했지. 바로 그때! 그분이 나타났어.”“김 형인가요?”“어떻게 알았어?”“어쩐지 그분이 나타날 것 같았어요.”라온이 두 손을 깍지 끼며 황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정말 너도 그 장면을 봤어야 했는데. 닭을 잡는 김 형의 그 화려하면서도 용맹한 모습이란. 마치 춤사위를 보는 듯 아름다운 광경이었어.” 라온의 표현에 단희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왜 웃어?”“화려하고 용맹한 춤사위 같은 동작으로 닭을 잡았다고 하는데, 그럼 안 웃겨요?”“그러게. 생각해 보니 웃기네. 하하하하.”라온이 단희와 얼굴을 마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한참을 웃고 있자니 단희가 말했다.

“그분,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하지만 은근히 언니를 챙겨주시네요.”“그런가?”“확실해요.”“잘생기셨어요?”“응. 무서울 만큼.”라온의 표현에 단희가 까르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무서울 만큼 잘생겼다는 건 대체 어떻게 생긴 거예요?”“정말정말 심각할 만큼 잘생겼다는 뜻이지.”“그럼 아까 말하던 화초서생은요? 그분은 어떻게 생기셨어요?”“그분은 말이야…….”잠시 생각하던 라온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소름끼치도록 잘생기셨지.”“아, 뭐예요.”라온의 말이 장난이라 생각한 단희가 다시 꺄르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두 분은 뭐하시는 분들이에요?”“글쎄.”나도 그게 궁금하단 말이지.

“어느 귀한 대감 댁의 자제분들이 아니실까?”“그렇겠죠? 그리 궁궐을 마음대로 활보하시는 분들이라면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단희의 경쾌한 목소리가 라온의 귓가에 노랫가락처럼 울려 퍼졌다.

가슴 벅찬 행복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느껴졌다.

이리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두 사람 덕분이었다.

화초서생과 김 형.

그 두 사람이 없었더라면 궁 밖으로 나오지 못했겠지. 그랬더라면 아마도 지금쯤 자선당 누각에 앉아 홀로 울고 있었으리라.

“고맙습니다.”라온은 눈에 보이지 않는 두 사람에게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그런데 그  두 분은 지금쯤 무얼 하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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