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라온의 선물
자선당의 우거진 풀숲으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부는 대로 몸을 뉘이는 잡초 위로 검은 어둠이 내려앉는가 싶더니, 이내 저 멀리 산등성이로 물 오른 상현달이 떠올랐다.
교교한 달빛이 풀숲을 어루만지는 자선당의 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고요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몇 명의 궁녀가 빠져 죽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연못 위로 하얀 달이 얼굴을 비췄다. 눈송이처럼 하얀 달빛 위로 바람이 불어와 찰랑거리는 파문을 일으켰다.
절로 감탄사를 자아낼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누각 위에서 흘러나왔다.
“흐윽……흑흑…… 흐윽…….”
울음소리였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울음소리가 고요한 자선당을 울려 퍼졌다.
“흐윽……흑흑……흑흑…….”
너무도 처연한 울음에 바람마저도 잠잠해질 즈음.
누각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들어섰다.
뚜벅거리며 걷는 발자국 소리는 곧장 울음소리를 향해 나아갔다.
잠시 후.
“어딜 갔는가 했더니, 예 처박혀 있었던 것이냐?”
차가운 달빛을 닮은 서늘한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화초서생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라온은 물기 가득한 얼굴을 돌려 영을 올려다보았다.
눈물, 콧물 범벅인 라온의 모습에 영이 눈가를 찡그렸다.
“무슨 일인데, 사내놈이 이리 징징 대는 것이냐?”
영의 지청구에 라온은 서둘러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쓱쓱 닦아냈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울긴, 누가 울었다고 그럽니까?”
“얼굴에 있는 눈물자국이나 제대로 닦아내고 우겨 대거라.”
영이 비단 손수건을 던지며 한 마디 했다.
그렇게 티가 났나. 그런데…….
라온은 영이 준 비단손수건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뭐하고 있는 것이냐? 얼른 닦지 않고서.”
“이거…….”
“왜?”
“꽤 귀한 비단으로 만든 것 같습니다.”
“하여?”
“눈물 닦기에는 너무 과합니다.”
이런 비단으로 손수건을 만들려면 대체 얼마나 돈이 있어야 하는 걸까? 머릿속으로 셈을 하던 라온은 손수건을 곱게 접어 다시 영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다 영을 돌아보며 눈을 깜빡했다.
“이제 알겠습니다.”
“뭘 알겠다는 거냐?”
“그 손수건, 보통 물건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이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손수건 한쪽에 수놓아진 문양을 눈치챈 모양이로구나.
그런데 정작 라온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엉뚱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혹시 돈 많은 양반 댁 서얼?”
영이 라온의 이마를 가볍게 콩 때렸다.
“대체 이 작은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 것이냐?”
“이번에도 틀렸습니까?”
“그래. 그보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한 것이냐?”
“귀한 손수건을 아무렇게나 쓰시니, 분명 돈은 많으신 것 같고. 그럼에도 이리 유유자적하시니, 뭔가를 책임질 필요가 없는 홀가분한 인생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돈 많은 양반 댁의 서얼이다?”
“가문의 적자라면 공부를 하건 일을 하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부지런을 떨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화초서생께서는 단 한 번도 그런 분주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셔서…….”
그렇게 보였던가?
책임이라. 아니다. 네가 틀렸다. 내 이 두 어깨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이 얹혀 있구나.
하지만 라온의 작은 머리로는 그의 부담과 책임감이 얼마나 막중한지 짐작조차 못 할 것이다.
“매번 틀리는구나. 그렇게 아둔해서야 어디 일이나 제대로 하겠느냐?”
“화초서생께서 모르셔서 그렇지, 나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밤마다 고된 잠을 쫓으며 불을 밝히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 나름 열심히 하고 계시는 환관나리께선 오늘 무슨 일로 그렇게 울고 있었느냐?”
녀석이 울고 있었다.
항상 밝던 녀석이라, 오히려 더 걱정이 되었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녀석인데.
“안 울었습니다.”
“허, 아무래도 여기에 정말로 귀신이 사는 모양이로구나. 울음소리를 들었는데, 정작 운 사람은 없다니.”
영이 라온의 눈 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짚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이하여 네 눈은 이리도 퉁퉁 부었을까? 이 또한 귀신의 장난이려나?”
“그, 그런 거 아닙니다.”
라온이 소매로 눈을 비볐다.
그 모습이 괜한 고집을 부리는 아이 같아 보여 또 나름 귀여운 맛이 있었다.
자꾸만 잇새를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영이 다시 물었다.
“왜냐? 왜 울었던 게냐?”
“안 울었다니까요.”
“그래, 그렇다고 치고. 그럼 대체 무슨 일로 예서 밤바람을 맞고 서 있는 것이냐?”
“속상해서요.”
“무슨 일이 있느냐?”
“오늘 내시부에서 치르는 강경이 있었습니다.”
“…….”
“나름 열심히 공부를 했단 말이지요. 일평생 이번처럼 열심히 공부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았더냐? 사내놈이 그깟 일로 이렇게 징징 대고 있었던 거야?”
“그깟 일이라뇨? 제가 얼마나 노력을 했었는지 화초서생께서 몰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봤자 고작 며칠 공부한 것 가지고, 성과가 나오면 얼마나 나오겠느냐?”
“이것만 있으면 장원도 어려울 것이 없다고 귀인께서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라온이 품속에 있던 족보를 꺼내 영에게 보였다.
“이것은……!”
족보를 훑던 영이 돌연 그것을 돌돌 말아 라온의 머리를 톡 아프게 쳤다.
“왜 자꾸만 때리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서러운데......”
“그러니까 이런 것으로 공부하고 감히 장원을 할 생각이었단 말이냐? 이런 편법으로 해낸 장원이 떳떳할 성 싶었더냐?”
“화초서생께서 잘 모르시나 본데, 궁에선 다들 이리하는 거랍니다. 그건 편법이 아니라 궁의 융통성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융통성?”
찡그린 영의 얼굴을 보며 라온은 고개를 푹 숙였다.
“저도 압니다. 이리 공부하는 것이 떳떳하지 않다는 것을요. 그래도 이리해서라도 장원을 하고 싶을 만큼 절실하단 말입니다. 우리 단희가 그리 아프다고 하는데……. 어떻게든 장원을 해서 궁 밖으로 나갈 통부를 받아야 했습니다.”
라온의 말에 영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저 녀석의 절실한 마음일랑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이리라도 해서 어머니와 누이를 보고 싶었겠지. 게다가 어린 누이가 아프다 하니, 그 마음이 어떨지 능히 짐작이 갔다.
영은 들고 있던 서책의 책장을 휘리릭 넘겼다.
<사서>에서 발췌한 것이긴 하지만 한 권의 책을 며칠 사이에 외우기는 어려울 터. 장원을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너무 속상할 것 없다. 이 많은 것을 외우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으니까. 불통패 안 받은 것이 어디더냐?”
“정말 속상합니다. 뒷부분의 몇 장만 더 외웠으면 되는데. 시간이 없어 미처 훑어보지 못한 부분에서 문제가 나오는 바람에…….”
“잠깐! 방금 뭐라고 했느냐?”
“속상하다고요.”
“그것 말고. 뒷부분의 몇 장만 더 외웠으면 되는데? 허면, 너 이 두꺼운 책을 몽땅 외워버렸단 말이더냐?”
“그리하였습니다. 무에 잘못한 것입니까?”
눈을 깜빡이며 되묻는 라온을 영은 잠시 멍하니 응시했다.
“이번 시험에서 몇 등이나 한 것이냐?”
영의 물음에 라온이 손가락 세 개를 폈다.
“장원이 두 명이었고, 제가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조금만 잘했어도 장원을 할 수 있었는데.”
정말 아깝다는 듯 라온이 중얼거렸다.
콧물이 흐르는지 손등으로 코끝을 쓱쓱 비비는 그 모습에 영은 잠시 말을 잃고 말았다.
잠시 후.
“제법이구나.”
아무리 문제를 발췌해낸 서책이 있다고 한들, 저 많은 글귀를 외우려면 족히 한 달은 걸릴 것이다.
“위로해 주셔도 소용없습니다. 어차피 장원도 못 했는걸요.”
“아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다. 그 짧은 기간에 저 많은 것을 어찌 외웠단 말이냐?”
“어떤 분의 특훈 덕분입니다.”
“어떤 분?”
영의 눈썹이 휘어졌다.
“너의 김 형에게서 받은 특훈이더냐?”
“아닙니다.”
“그럼?”
“장 내관님이시라고. 기억력에서는 독보적인 재주를 가진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는 데만 천재적인 재주를 지닌 분이시지요.”
“그것이 특훈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냐?”
“그분이 쓰시는 암기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그림?”
“네. 예를 들면 여기 <대학>에 나오는 구절을 암기할 때, 이것을 글자로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그림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림을 보듯 글자 전체를 커다란 그림으로, 그리고 글자에 달린 작은 주석들은 작은 그림으로 인식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니 한권을 외우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허, 그런 식으로 기억하는 법도 있었던가?
그러나 단순히 별난 기억법만으로 책 하나를 통째로 외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홍라온, 이 녀석이 특별하거나 그것이 아니면…….
‘그만큼 필사적이었다는 거로군.’
어미와 누이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 이 녀석을 그리 필사적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불과 며칠 만에 책 한 권을 통째로 외워버리게 만들 만큼.
그런데 잠깐! 아까 저 녀석이 말하길, 기억력에 독보적인 재주를 지닌 자가 있다고 했던가? 그자의 이름이 장 내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혹시 장 내관이라는 자, 어느 전각의 내시인지 아느냐?”
영의 물음에 라온이 대답했다.
“동궁전의 내시입니다.”
“동궁전?”
역시!
누군지 짐작이 가는 바.
버릇처럼 미간을 찡그리며 영이 중얼거렸다.
“손끝 야무진 그 내시로군.”
“어? 혹시 화초서생께서도 장 내관님을 아십니까?”
“오다가다 몇 번 본 적은 있다.”
“아, 그러시군요.”
“헌데 그자가 그런 재주가 있단 말이냐?”
“그뿐만이 아닙니다. 장 내관님은 그 견디기 어렵다는 동궁전에서 5년이나 버텨내신 처세술의 달인이십니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는 그 능력을 인정받아 세자저하의 침소를 청소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분이시지요.”
마치 제 일인 듯 라온은 신이 나서 말했다.
“그래?”
언제나 웃는 낯으로 방실거리는 젊은 내시가 그리 대단한 처세술을 지녔단 말인가? 다음엔 좀 더 유심히 지켜봐야겠군.
“그런데 너는 그 장 내관이라는 자를 어찌 그리 소상히 알고 있는 것이냐? 제법 친한 모양이구나.”
“네.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로 친분이 쌓였다고나 할까요.”
“속내를 털어놓을 만큼?”
“네. 제게 궁 밖으로 나갈 방도를 알려주신 분도 바로 장 내관님이십니다.”
“그렇구나. 그런데 그 장 내관이라는 자가 혹시 세자저하에 대해 무슨 말을 하진 않았느냐?”
“세자저하에 대해서요?”
“그래. 방금 전에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동궁전의 침소를 청소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무슨 말 안 하더냐?”
혹시나 둘이서 자신에 대해 무슨 이야기 한 것이 없을까 하여 영은 은근한 질문을 던졌다.
설마해서 물어본 말이었는데, 라온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연신 영의 눈치를 살피며 입술을 달싹이던 라온은 무슨 일인지 도리질을 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 말씀도 없었습니다.”
말은 그리했지만, 워낙에 속내를 숨길 줄 모르는 사람이라.
라온의 얼굴은 뭔가 할 말이 있어도 크게 있다는 표정이었다.
눈치 빠른 영이 놓칠 리 없었다.
“무슨 이야기더냐?”
"아닙니다.”
“사실 이런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세자저하의 일이라면 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니 너무 경계하지 말고,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털어놔 봐라.”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혹시…….”
“혹시 뭐?”
“세자저하하께 남다른 취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분, 화초서생과 같은 취향이라고 하십니다.
라온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켰다.
영의 물음이 이어졌다.
“남다른 취향?”
“혹시 모르셨습니까?”
‘아차’ 하는 얼굴로 라온이 제 입을 틀어막자, 영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나도 이미 알고 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요즘 세자저하께서 장 내관님께 비상한 관심을 보이시는 것도 알고 계십니까?”
“설마?”
“설마가 아니라니까요. 장 내관님 말씀으로는 세자저하께서 장 내관님의 일상에 대해 매번 꼬치꼬치 캐물으신다고 합니다. 그것이 관심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장 내관님의 근심이 여간 큰 게 아닙니다. 그나저나 세자저하께서는 어찌하여 여인도 아닌 내시에게 성심을 기울이신 것인지.”
라온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내시에게 성심……!”
듣고 있던 영의 얼굴에서 혈색이 빠져나갔다.
라온의 안부가 궁금하여 몇 마디 물어본 것이 그런 오해를 불러 일으켰는가 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감히 나를 그런 사내로 오해를 해?
“그랬단 말이지.”
영은 장 내관을 떠올리며 어금니를 지그시 사려 물었다.
그때였다.
“……큭.”
누각의 어두운 그늘 아래서 애써 참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라온과 영의 시선이 일제히 웃음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돌아갔다.
이윽고 달빛이 만들어내는 그늘 아래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김 형!”
내내 침울한 표정이었던 라온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언제 오신 것입니까?”
“아마도 내가 여기 오기 전부터 이곳에 있었을 걸.”
병연을 대신하여 영이 대답했다.
“그럼 다 보셨습니까?”
제가 그리 망측하게 우는 것을요?
부끄러운 마음에 라온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때, 커다란 손이 라온을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렸다.
라온이 놀란 시선으로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병연이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잘했다.”
“네?”
묻는 라온에게 병연은 내시부의 방을 보여주었다.
오늘 강경시험의 등수가 써진 방문이었다.
앞쪽에서 세 번째.
비록 장원은 아니었지만 짧은 시간 안에 이뤄낸 결과치고는 훌륭한 것이었다.
칭찬하는 병연의 말에 라온이 얼굴을 붉혔다.
“노력한다고 열심히 했건만. 아무래도 하늘님이 노하셨는지, 하필이면 공부하지 않은 부분에서 문제가 나오질 뭡니까. 어리석은 편법으로 장원을 하려고 했더니. 하늘님이 괘씸해하실 만하였습니다.”
라온은 전 판내시부사 박두용이 준 서책을 병연에게 보이며 말했다.
그러나 병연은 괘념치 않았다.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라온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가족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으로 안간힘을 썼는지 말이다.
애써 밝게 웃음 짓고 있지만, 가족을 만나러 나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인지 라온의 입매가 자꾸만 아래로 처졌다.
무심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병연이 불현듯 말했다.
“가자.”
“어딜 말입니까?”
“정신일도 하지 않아도 하사불성 하게 해 줄 터이니. 가자.”
“어딜 가자는 말씀입니까?”
“어머니와 누이, 만나고 싶다며?”
“네? 그 말씀은 설마, 궁 밖으로 나가자는 말씀이십니까?”
라온이 묻자 병연은 대답대신 영을 돌아보았다.
“때가 된 것 같군요.”
그의 물음에 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때가 되었다.”
병연이 라온에게 시선을 던지며 다시 물었다.
“한 사람 더 낀다고 하여도 상관은 없겠지요?”
영이 라온을 잠시 바라보았다.
“어차피 나가는 길이니. 일행이 하나 더 는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겠지.”
두 사람 사이로 라온의 다급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통부가 있어야만 궁 밖으로 나갈 수가 있다고 하던데요?”
“통부가 없어도 궁 밖으로 나갈 방도가 있다.”
병연의 말에 라온이 불안한 시선을 돌려 영을 응시했다.
“어떻게 말입니까?”
“문으로 안 나가면 될 것이 아니냐.”
“네?”
“한 마디로 말해 몰래 나가자는 것이지.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융통성이지.”
“하지만 그러다 들키면요?”
“안 들키면 되는 거야.”
라온의 불안한 마음을 잠식시켜주듯 영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리 확신하듯 말하는 것을 보니 실언은 아닐 테고.
라온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나갈 방법이 있는데, 나 그동안 뭐 한 거야? 그것보다, 이참에 궁 밖으로 나갈 길을 잘 익혀서 수시로 어머니와 단희를 만나야겠다.
결심하는 찰나.
그녀의 속내를 훤히 꿰뚫는 듯한 얼굴로 영이 말했다.
“행여, 혼자 궁 밖으로 나갈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마라. 밤이 되면 궁에 남아 있는 자들의 수가 대략 3,000명 정도가 된다. 그 중 궁을 지키는 병사의 수가 무려 2,000명이다. 행여 궁을 나가다 병사들에게 발각이라도 된다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것이야. 운이 좋아 어찌어찌 궁을 나간다고 해도 다시 돌아와야 할 터. 다시 들어오다 들키면…….”
“들키면요?”
“그때도 죽음밖에는 없겠지.”
“궁의 융통성이라면서요?”
라온이 소리쳤지만 대답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눈 깜짝 할 사이 자선당의 담장을 넘는 병연과 영을 보며 라온은 두 눈만 깜빡거렸다.
대체 저 두 사람, 정체가 뭐야?
***
반 시진 후.
“흠, 저잣거리 냄새.”
운종가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활기찼다.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풍경을 둘러보며 라온은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사대부의 사내처럼 너른 흑립을 쓰고 연둣빛 도포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제 것이 아니라 그런지 품이 헐렁하고 길이도 길어, 마치 아비의 옷을 입고 나온 어린 소년처럼 보였다.
“정말 좋지 않습니까? 궁궐하고는 공기부터가 다릅니다.”
잔뜩 들뜬 라온이 등 뒤를 돌아보았다.
라온의 뒤에는 변복(變服)한 영과 병연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그림자처럼 뒤따르고 있었다.
“그리 좋으냐?”
아이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저잣거리를 걷는 라온을 보며 영이 물었다.
빙글 몸을 돌린 라온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좋습니다. 너무 좋습니다. 이제 곧 어머니와 단희를 볼 수 있는데, 어찌 좋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문득 라온의 말끝이 흐려졌다.
그녀는 아까부터 잔뜩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병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김 형. 어디 불편하십니까?”
“…….”
“김 형. 왜 그러십니까?”
라온이 물었지만 병연은 고개를 돌릴 뿐 아무 말도 없었다.
두 사람 사이로 영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 녀석, 사람 많은 곳엔 잘 나서지 않는다. 사람들과 얼굴 마주하는 것을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녀석이거든.”
하여, 함께 잠행(潛行)을 나올 때마다 목적지를 정해 놓은 뒤 따로 움직이고는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병연은 라온과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세 사람 주위로 사람들이 물결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영은 의아한 눈빛으로 병연을 응시했다.
“왜요? 어찌하여 그러는 것입니까?”
물어보았지만 역시나 병연에게서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을 보았지만, 어쩐 일인지 이번엔 그마저도 입을 꾹 다물었다.
여느 때보다 병연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더욱 짙게 느껴졌다.
무슨 말 못 할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이래서는 앞으로 살아가는 것이 꽤나 고단하리라.
라온이 문득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주십시오.”
어딘가로 쪼르르 사라진 라온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갈대를 엮어 만든 삿갓 하나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김 형. 이걸 쓰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건 뭐야?”
라온은 까치발을 한 채 병연의 머리에 삿갓을 씌어주었다.
“궁 밖으로 데려와주신 것에 대한 작은 보답입니다. 이리 삿갓을 쓰고 다니시면 다른 사람들과 마주하지 않아도 되질 않겠습니까? 자, 되었습니다.”
그의 턱 끝에 나비매듭을 지은 라온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어떻습니까? 김 형. 마음에 드십니까?”
라온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머리에 씌워진 삿갓 끝을 만지며 병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이런 걸 성가시게 어찌 쓰고 다녀?”
말은 그리 불퉁하게 하지만, 병연은 라온이 씌워준 삿갓을 벗지는 않았다.
아까와는 달리 제법 편안해 보이는 병연의 표정을 보고 영이 라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제법 기특한 생각을 해 냈구나. 헌데…….”
“네?”
“내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아무것도 없느냐? 네가 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가장 큰 힘을 쓴 사람, 알고 보면 나란 말이다. 그러니 내게도 뭔가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돈도 많으신 분이 왜 그러십니까?”
“돈이 많은 건 많은 거고. 셈은 셈이지. 어찌하여 저 녀석은 주고 나는 안 주는 것이냐?”
“벼룩의 간을 빼 드십시오.”
영은 라온과 티격태격하며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 영이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듯 병연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물론, 삿갓은 절대 벗지 않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