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자네…… 왜 우는 겐가?
강경시험이 하루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시험공부에 매진해도 시간이 부족할 상황이었건만.
“전하…….”
박 숙의의 울음소리를 뒤로한 채 라온은 숙의전을 나섰다. 희정당으로 향하는 라온의 걸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벌써 이틀째, 희정당과 집복헌을 오가는 일을 반복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아무런 수확 없이 헛발품만 팔고 있자니,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이쯤 하였으면 그만 지칠 만도 하시건만.
숙의마마께서는 지치지 않고 주상전하께 서한을 보내고 있었다.
숙의마마의 서한에 대한 주상전하의 답신 역시 여전히 백지였다.
백지를 보내시는 주상전하의 마음일랑은 대체 어떤 것일까?
터덜터덜, 힘없이 걸음을 옮기던 라온은 희정당의 긴 담벼락 그늘에 쪼그리고 앉았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귀밑 자분치를 흔들었다.
“어느새 바람이 이리 차가워졌네.”
긴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라온은 담벼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가을볕에 온몸이 느른해졌다.
볼을 어루만지는 나른한 온기에 절로 졸음이 쏟아진다.
감은 눈 속엔 울고 있는 숙의마마의 잔영이 어른거렸다.
그 잔영 위로 귤빛 소화꽃이 겹쳐 보였다.
단 하룻밤 임금의 승은을 입고 다시는 찾지 않는 님을 기다리다 죽어버린 궁녀처럼, 숙의마마께서도 그리 버림받은 것일까?
유한한 삶 속에 사랑이란, 사람의 인연이란, 어쩌면 실낱같이 허망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 허망한 것에 목숨을 걸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여인이고, 사람이었다.
라온은 착잡한 마음에 쉽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울고 있는 숙의마마를 떠올리면 다시 몸을 움직여 주상전하가 계시는 희정당으로 가야 하지만, 가봐야 백지로 된 답신을 받을 것이 뻔하니.
‘어찌해야 할까?’
집복헌의 무거운 분위기가 라온의 가슴을 억눌렀다.
왜 내관들이 하나 같이 이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힘들여 서신을 보내봤자 돌아오는 것은 빈 백지이니.
부질없는 일을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아.”
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톡톡톡.
작은 새의 부리처럼 연약한 무언가가 라온의 어깨를 두드렸다.
“누구……?”
놀란 라온은 서둘러 눈을 떴다.
이윽고 그녀의 눈앞에 작고 조그마한 얼굴이 다가왔다.
조막만 한 얼굴에 눈, 코, 입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저 얼굴. 누구를 많이 닮았는데?
생각을 하며 라온은 흐릿한 눈을 서둘러 손등으로 비볐다.
그런 라온을 빤히 들여다보던 소녀가 불현듯 라온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왜?”
소녀의 느닷없는 행동에 라온은 의문을 터트렸다.
그러나 이내 소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여기서 뭐하는 것인가?’
작은 고사리 손이 라온의 손바닥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말을 못 하는 건가?
고개를 외로 기울이는 라온의 손바닥에 소녀가 연달아 무언가를 썼다.
‘어마마마의 서한을 전하러 희정당에 가는 길이 아닌가? 예서 이러고 있으면 어마마마의 서한은 언제 전하겠는가?’
어마마마의 서한?
잠시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러나 이내, 라온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올망졸망 모여 있는 저 이목구비.
수줍은 미소.
저 어린 소녀의 얼굴은 숙의 박씨를 그대로 빼다 박았다.
그러고 보니 숙의 박씨에게 열 살 남짓한 어린 딸이 하나 있다는 소리를 들었었는데.
숙의마마께서 낳으신 옹주께서는 어쩐 일인지 어릴 때부터 말이 어눌하여 좀처럼 전각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환관들끼리 속달거리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옹주마마이시옵니까?”
라온은 튕겨지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라온의 갑작스런 행동에 영온옹주가 놀란 듯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깨달은 라온이 미안한 웃음을 얼굴에 떠올렸다.
“송구하옵니다, 옹주마마. 너무 놀라서…….”
서둘러 고개를 조아리는 라온을 보며 어린 옹주가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이라는 것이 너무 여리고 힘이 없어,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라온에게 영온옹주가 다시 손 글씨를 썼다.
‘어마마마께서 전하의 답신을 기다리고 있어.’
“옹주마마.”
‘가서 주상전하께 어마마마의 서한을 전해주게나.’
“하오나…….”
‘나도 알고 있네. 똑같은 답신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주상전하께서 어쩌면 이번에는 다른 답신을 내려주실지도 모르지 않겠나? 그러니 수고롭겠지만 자네가 한 번만 더 고생해주게.’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이라도 하는 듯 어린 옹주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주상전하께서 계시는 희정당의 높은 담벼락을 올려다보는 옹주의 눈 속에는 어린 소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쓸쓸한 기운이 가득했다.
‘허면, 내 자네만 믿을 것이네.’
마지막 손 글씨를 남긴 영온 옹주는 작은 몸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라온은 잠시 멍한 채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버림받은 것은…… 숙의마마 한 분이 아닌 듯했다.
주상전하의 마음을 기다리는 것은 숙의마마 한 분이 아니었다.
어린 옹주마마의 작은 뒷모습이 바람이 불면 훅 사라져버릴 듯 아스라해 자꾸만 눈가가 뜨거워졌다.
“하여간 사내들이란…….”
저도 모르게 불퉁한 목소리를 흘리던 라온은 주상전하께서 계시는 희정당으로 재게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저녁 무렵.
라온이 전한 주상전하의 답신을 읽은 박 숙의의 얼굴에는 예의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전하…….”
흐느끼는 박 숙의를 보는 순간, 라온은 다른 나인들처럼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했던 마음이 역시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주상전하께서는 이번에도 빈 백지를 답신으로 보내신 것이다.
자신이 그런 답신을 보낸 것은 아니었지만, 백지를 답신으로 가져왔다는 죄책감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라온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숙의마마의 얼굴 위로 귤빛 소화 꽃과 어린 영온옹주의 얼굴이 겹쳐 보여 자꾸만 코끝이 맹맹해졌다.
라온은 서둘러 얼굴에 얼룩진 물기를 닦아냈다.
오 상궁을 비롯한 집복헌의 나인들 모두가 울고 있었다. 이곳에서 자신마저 울 수는 없었다.
라온은 밝은 목소리로 박 숙의에게 아뢰었다.
“숙의마마. 서한을 주시옵소서. 소인, 내일 다시 희정당을 찾아갈 것이옵니다.”
박 숙의의 주상전하를 향한 지치지 않는 마음을 알기에 고한 말이었다. 하지만 숙의마마의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되었네.”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겨우 내뱉은 말은 결국 ‘체념’이었다.
“숙의마마…….”
라온을 비롯한 처소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박 숙의에게로 향했다.
그런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듯 열린 동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박 숙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는 올 것 없네. 이제 서한은…… 그만 보낼 것이야.”
그 말을 끝으로 박 숙의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지금까지 그녀를 지탱하고 있는 무언가가 한 순간에 끊어져 버린 듯한 느낌이다.
문득 눈앞에 있는 박 숙의의 모습이 안개 속에 휩싸인 듯 아스라해 보였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져 버릴 듯 위태로운 그녀의 모습에 라온은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하여, 박 숙의의 거처를 나온 다음에도 라온은 집복헌 대문 앞에서 오래도록 서성거려야 했다.
***
희붐한 새벽이 밝아왔다.
숙의마마에 대한 생각으로 밤을 새운 라온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자선당을 나섰다.
오늘은 강경시험이 있는 날이다.
서둘러 소환내시 교육장으로 가야 했건만. 절로 집복헌으로 걸음이 옮겨졌다. 그러나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집복헌의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숙의마마, 소인이 알아보겠습니다. 어찌하여 전하께서 그런 답신을 보내신 것인지. 그러니 너무 빨리 체념하지 마십시오.”
붉게 칠한 대문을 올려다보며 라온은 나직이 읊조렸다.
들어주는 이 없이 한 혼잣말이기에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쩌면 숙의마마의 앞에서 이 말을 하였다 해도 ‘그만 되었네.’라는 대답만이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슬픔과 체념으로 얼룩진 박 숙의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소환내시 교육장으로 걸어가는 내내 천근의 추라도 달린 듯, 발걸음이 무거웠다.
“홍 내관!”
교육장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
멀리서 라온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통통한 체구의 내관이 볼살을 출렁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도 내관님.”
“늦었네. 늦었어.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알고나 있는 겐가?”
“강경시험이 있는 날이 아니옵니까?”
“그걸 알고도 이리 늦었는…….”
핀잔을 하던 도기가 미간을 찌푸렸다.
라온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발견한 것이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가?”
“아, 아닙니다.”
라온은 얼룩을 지우듯 서둘러 소매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본래의 해맑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오늘 시험을 치르는 날이 아니옵니까? 아무래도 긴장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것치곤 표정이 영……. 아니, 아니네. 자네가 별일 아니라니, 별일 아니겠지."
“그러시는 도 내관님이야말로 표정이 좋지 않으시군요.”
라온의 말에 도기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나도 자네처럼 시험 때문에 걱정이 되어 그렇다네. 게다가 오늘 시험성적은 기록이 되었다가 향후 있을 정식내관이 되는 성적에 반영된다고 하니.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되레 이상할 것이네.”
도기뿐만이 아니라 시험을 앞둔 소환내시들의 표정 대부분이 어두웠다.
정식내관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첫 번째가 19살이 넘어야 했다.
두 번째가 체력시험이다. 이것은 유사시에 왕과 왕족들을 보필할 수 있는 힘과 체력을 시험하는 과목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소환내시 시절에 보는 시험의 성적이었다. 시험 성적이 우수하면 우수할수록 유리했다.
그러나 지금 벼슬을 하는 환관들 대부분이 이런 정식 시험보다는 개인적인 연줄, 즉 뇌물을 바치고 환관벼슬을 사거나, 든든한 후원자를 등에 업은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돈 없고 뒷배 없는 소환내시들에겐 시험의 결과는 여전히 중요했다.
그러기에 아침부터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라온은 도기의 뒤쪽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있는 불통내시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른 새벽부터 그들은 무릎 위에 작은 책자를 올려놓고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다들 뭘 보고 계신 것이옵니까?”
라온의 시선을 좇아 눈길을 던지던 도기가 대답했다.
“시험을 앞두고 볼 게 족보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족보라고요?”
라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준 것과 다른데…….’
라온은 얼마 전, 전 판내시부사 박두용에게서 족보를 얻었다.
꽤나 귀한 족보를 얻었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그저 기쁘기만 하였다. 그러나 그 귀한 것을 혼자서만 본다는 사실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귀인께서는 그런 것쯤은 궁의 융통성이라며 신경 쓰지 말라 하였지만, 족보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거리는 불통내시들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결국 라온은 도기를 비롯한 불통내시들에게 족보를 공개했다.
족보라는 말에 불통내시들은 꿀을 본 벌떼처럼 앞 다퉈 족보를 필사해갔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족보라는 것은 라온에게서 필사해간 것과는 전혀 다른 물건이었다.
“적통 족보일세.”
“적통 족보라고요?”
족보에 무슨 혈통이 있는 것도 아닐진대, 적통 족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본래 소환내시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돌고 있는 족보가 있다네. 그게 해가 가면서 보강되고 또 첨가되어 제법 그럴듯한 족보가 완성되었지. 그동안 있는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구할 수 없었던 것인데…….”
도기가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불통내시 중의 하나가 큰돈을 써서 어렵게 구한 모양일세. 다들 그걸 필사해서는 그 후로는 줄곧 그 족보만 보고 있다네.”
아, 그래서 적통 족보라는 거군.
한 마디로 말해 공인된 족보란 뜻이었다.
문득 도기의 얼굴에 미안한 표정이 서렸다.
“정말 미안하네. 사실은 자네에게도 미리 귀띔해 주었어야 하는 것인데. 자네가 숙의마마의 일로 워낙 바빠 얼굴조차 볼 수 없어 내 미처 전하지 못했다네.”
“아니옵니다. 이해할 수 있사옵니다.”
설사, 도기나 다른 불통내시에게서 소식을 들었더라도 이제와 다른 족보로 공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뒤늦게 다른 족보를 공부할 시간도 없었을 뿐더러, 행여 시간이 충분하였다고 해도 자신을 생각해서 귀한 것을 넘긴 박두용을 배반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족보를 이용해 시험을 치르는 것이 아무래도 편법인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는데. 저리 다들 자신만의 족보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때, 도기가 가슴을 소리 나게 치며 말했다.
“그래도 나만은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네.”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니요?”
“난 저들처럼 적통족보를 공부하지 않았다는 말일세. 난…….”
도기가 품에서 보란 듯이 서책 하나를 꺼냈다.
라온에게서 필사해간 바로 그 족보였다.
“난 오로지 이 녀석으로만 공부를 했지.”
곁에서 그 말을 들은 상열이 불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게 어디 의리 때문인가? 새로 필사하는 게 귀찮아서 그랬던 것이지.”
“험험.”
도기가 불편한 헛기침을 연발했다.
“어찌되었건 난 자넬 배반하지 않았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점이지. 알겠는가?”
라온이 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알겠습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을 빤히 쳐다본 도기가 고개를 꺄웃했다.
“이상해. 정말 이상하군.”
“뭐가 그리 이상하단 말씀이십니까?”
“좀 전에 다 죽어가는 사람 같은 표정이더니, 지금은 만개한 꽃처럼 환하군.”
“그렇습니까? 모두 도 내관님 덕분입니다. 도 내관님과 대화를 나누다보니 마음의 근심이 조금 가시는 것 같습니다.”
“허허. 나 때문이라니 기분이 좋긴 하네만…… 그래도 너무 풀어지지는 말게나. 시험을 앞두고 적당히 긴장하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일세.”
라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왕에 피할 수 없는 것이면 마음만이라도 즐겁게 가지려 하옵니다.”
라온의 얼굴에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웃음이 한 가득이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말씀하셨다.
어렵고, 까다롭고, 싫은 일임에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즐기라고 말이다.
숙의마마의 문제는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았고, 강경시험 준비를 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낙심하지 않았다.
찡그린다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차라리 웃는 것이 훨씬 나으리라.
“그래서 그리 싱글벙글이란 말인가.”
라온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도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왕에 치루는 시험인데. 심각해질 필요는 없겠지.”
도기가 입매를 길게 늘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억지로 지은 것이라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한 순간, 서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라온과 도기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보를 터트리고 말았다.
“하하하하.”
“우하하하하.”
한바탕 시원하게 웃고 나니까 긴장이 조금 풀렸다.
배가 아프도록 웃던 도기는 라온을 돌아보았다.
‘저 녀석, 묘하단 말이야.’
홍라온, 저 녀석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밝은 해를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함께 있으면 주위가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
어떻게 하면 저렇게 구김살 하나 없이 웃을 수 있는 것일까. 한 번도 불행한 일 따위는 겪어본 적 없는 사람처럼.
처음 저런 모습을 보았을 땐, 아주 잠깐 강샘도 했더랬다.
라온의 밝은 모습이, 티 없이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 괜스레 샘이 나고는 했었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저리 환히 웃을 수 있는 것은 행복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
남들보다 더 많이 힘들고, 더 많이 아팠기에 웃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이쯤은 가볍게 툭툭 털어버릴 수 있다는 듯이.
‘계집처럼 곱상하게 생겨 마음도 마냥 여린 줄 알았는데, 제법 당차단 말이야.’
라온을 바라보는 도기의 눈빛이 새삼스러웠다.
그때였다.
“쯧쯧쯧.”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라온과 도기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성 내관과 마종자가 거만한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시험이 코앞인데 긴장하기는커녕, 유유자적 웃는 모습이라니. 이래서 안 될 녀석은 안 돼.”
성 내관의 비아냥에 미종자가 손바닥을 비비며 맞장구를 쳤다.
“본래부터 싹수가 노란 작자들이 아니옵니까? 결과가 뻔하니, 공부를 한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사옵니까? 그러니 저리 하찮은 여유라도 부리는 것일 테지요.”
“아둔한 놈들. 이 시험의 결과가 저희들의 평생을 좌우하게 되는지도 모르고. 이래서 근본 없는 녀석들은 안 돼.”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성내관이 문득 라온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떠냐? 공부는 할 만하더냐?”
“최선을 다하고 있사옵니다.”
“그래. 발악이라도 한번 해봐야지.”
성 내관이 피식 비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열심히 하도록 하여라. 뭐, 그래봤자 네놈이 갈 곳이라곤 진흙탕이 아니면 똥통이겠지만 말이야. 으하하하.”
성 내관이 냉소를 흘리며 라온을 지나쳤다.
그의 곁에서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던 마종자도 라온을 돌아보며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나 같으면 아예 포기를 하겠다. 노력을 하던 안 하든, 네놈이 갈 곳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말이다. 푸흐흐흐흐.”
두 사람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라온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분노를 삼켰다.
“에라이, 개종자. 이 나쁜 놈아!”
라온의 옆에 서 있던 도기가 이미 사라지고 없는 마종자에게 욕지거리를 날렸다. 그러다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라온을 돌아보았다.
“홍 내관, 자네 괜찮은가?”
라온은 말끔한 얼굴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열심히 노력한다면 하늘도…… 결코 저를 버리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땡땡땡.
멀리서 시험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마당 곳곳에 있던 소환내시들이 일제히 시험장 안으로 들어갔다.
“가세.”
내내 안쓰러운 표정을 짓던 도기가 라온에게 말했다.
라온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옮기는 사이에 라온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웃자. 고작 저런 작자들 때문에 울상을 짓는 건, 너무 억울한 노릇이니까.
왜 이렇게 날 미워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난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니까. 절대 쓰러지지 않아.
라온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로 시험장으로 발을 디뎠다.
쿵!
그녀의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그리고 한동안 그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
미시말(未時末: 오후3시).
영근 가을볕이 양 어깨를 따뜻하게 감쌀 무렵, 내시부 담벼락에 방(榜)이 붙었다.
오늘 있었던 소환내시들의 강경시험 결과를 알리는 방문(榜文)이었다.
내시부 앞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소환내시들이 일제히 그 앞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라온도 도기를 비롯한 불통내시들과 함께 그 앞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방문의 내용을 확인한 소환내시들의 입에서 탄식과 우울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때.
“후후후.”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도기였다.
어쩐 일인지 그의 표정이 전에 없이 밝았다.
“왜 그러는가?”
“성적이 잘 나온 모양이군.”
“아무렴. 이번엔 내, 제대로 실력발휘 한번 해 보았다네.”
도기의 말에 불통내시들의 시선이 이번에는 벽에 붙어있는 방에 쏠렸다.
“오! 과연 지난번보다 꽤 많이 올랐군.”
상열의 말에 도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체 어찌 된 겐가?”
상열의 물음에 도기가 품에 있던 족보를 팔랑 흔들어 보였다.
“다 이놈 덕택이라네. 여기서 문제가 죄다 나왔지 뭔가.”
“아, 이런.”
“나도 이놈의 적통 족보인지 뭔지를 보지 말고 저걸 볼 것을 그랬네.”
여기저기서 탄식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쓱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도기가 상열을 향해 말했다.
“이보게, 상열이. 너무 아쉬워하지 말게. 이제 난 불통내시라는 오명을 벗어버리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네들과의 추억은 잊지 않을 것이네.”
가드락가드락 우쭐대던 도기가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이내 그의 시야에 라온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런데…… 방문을 확인한 라온은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쯧쯧.”
도기의 입에서 절로 혀 차는 소리가 나왔다.
저리 될 줄 알았지. 마종자가 숙의마마의 글월비자로 보낼 때부터 이런 결과는 예상하고 있었다.
아무리 훌륭한 족보가 있다한들 하루 종일 그리 시달리니 제대로 공부할 시간이 있었겠는가. 그나저나 얼마나 성적이 안 나왔으면 저리 우는 것일까?
도기가 라온을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너무 실망하지 말게. 시험이 이번 한 번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젠가 자네도 좋은 성적을 거둘 날이 있을걸세. 개종자, 그 나쁜 녀석이 자네를 숙의마마에게만 보내지 않았어도 좋았으련만. 어찌 되었든 이미 지난 시험은 그만 잊어버리고 앞으로…….”
그때였다.
“허억!”
바로 옆에서 누군가의 숨넘어가는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까지 도기를 칭찬했던 상열이 벽보 위쪽을 올려다보며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이윽고 상열의 신음소리는 전염이라도 된 듯이 주위로 퍼져갔다.
“허억!”
“억!”
그 느닷없는 신음소리에 도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들 왜 그러는 거지?
도기가 상열의 시선을 좇아 방을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이런!”
도기의 입에서도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가 찢어질 듯 커진 눈으로 라온을 보며 물었다.
“자네…… 왜 우는 겐가?”
***
박두용은 전각의 툇마루에 앉은 채 영근 가을볕을 즐기고 있었다.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졸고 있는 그의 곁으로 한상익이 다가왔다.
“어느새 가을이네.”
“왜? 아쉬우냐?”
“나이가 드니 세상에서 가장 아쉬운 것이 세월 가는 것이다. 눈 한 번 끔뻑했더니 어느새 봄이고, 졸고 있어났더니 여름이 지나있으니. 가는 세월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구나.”
“쏘아올린 화살보다 빠른 것이 시간이라질 않느냐?”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빠르구나. 그만큼 죽을 날도 빨리 다가오는 것이겠지.”
아쉬운 마음에 한상익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를 곁눈으로 지켜보던 박두용이 다시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당연하듯, 태어났으니 죽는 것도 당연한 일인데. 무에가 그리 안타까운 것이냐. 네놈은 어릴 때부터 욕심이 많더니 죽는 순간까지도 욕심을 부리는구나. 그것보다, 알아보라고 한 것은 알아봤느냐?”
박두용의 물음에 한상익이 소맷자락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어린놈이 제법이더군. 아무리 족보가 있다고 해도 이리 잘 해낼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박두용이 종이에 적힌 것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늘 내시부에서 치른 강경시험의 결과였다.
어떻게든 장원을 하고야 말겠다며 결의를 다지던 라온의 이름을 찾기 위해 박두용은 침침한 눈을 한껏 찡그렸다.
잠시 후.
그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대단하군. 이리 해 낼 줄은 생각지도 못했거늘.”
박두용의 말에 한상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는데 말이야. 제깟 놈이 용을 써봐야 기껏 중간이나 갈까, 생각했건만.”
“것 봐라. 내가 뭐라 하였느냐. 그놈, 제법 싹수 있는 놈이라 하질 않았느냐?”
“싹수 노란 놈은 확실히 아닌 듯한데. 그래도 될 성 싶은 나무인지, 크다가 말 잡목인지는 좀 더 알아봐야 할 일이지.”
입맛을 쩝쩝 다시던 한상익은 박두용의 옆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렇게 두 노인은 가을볕을 이불 삼아 달콤한 오수(午睡)를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