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주상전하의 답신
산등성이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들판의 곡식이 누렇게 익어 고개를 떨어뜨렸다.
가배(嘉俳:음력 8월 15일)가 며칠 안 남은 열매달 초입.
강경시험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이른 새벽, 자선당을 나서는 라온은 연신 뭔가를 중얼거렸다.
며칠 동안 그녀는 귀인에게서 받은 족보 중에서 사서의 내용을 그야말로 닳도록 외우는 중이었다. 물론 <논어>는 제외하고 말이다.
귀한 족보를 얻게 되었으나 그걸 외울 시간이 부족했다. 하여, 라온은 잠자는 시간은 물론이고 교육장으로 향하는 자투리 시간마저도 공부하는 데 모두 쏟아 붓고 있었다.
라온이 교육장 마당으로 들어서자 마당 저쪽 끝에 있던 마종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이제 오는 것이냐?”
“네.”
오늘은 또 무슨 시빗거리를 잡으려 하는 것일까?
라온은 불안한 시선으로 마종자를 응시했다.
이윽고 마종자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문을 열었다.
“오늘부터 너는 소환내시 수업이 끝나는 대로 숙의전으로 가서 글월비자를 하라는 성 내관님의 명이시다.”
“숙의전이라 하셨사옵니까?”
“그래. 박 숙의마마의 전각 말이다.”
“숙의마마시라면 주상전하와 함께 온양행궁에 행차하신 것이 아니었사옵니까?”
“숙의마마께서는 온양행궁으로 가지 않으셨다. 허고, 행궁으로 납시었던 전하께서도 간밤 환궁하셨고.”
“아, 그렇군요. 하오면 숙의마마께는 몇 명이나 가는 것이옵니까?”
평소에는 불통패를 받은 다른 소환내시들, 이른바 불통내시라 불리는 이들과 함께 움직였기에 이번에도 그런가하여 물었다.
마종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월비자 노릇을 하는 환관은 하나면 족할 것이다.”
“하오나…….”
글월비자가 무엇인가?
궁궐 밖으로 문안 편지를 전달하던 궁녀가 아니던가. 그런데 어찌하여 그것을 궁녀가 아닌 환관에게 시키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라온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글월비자라는 것이 본디 궁녀들이 하는 것이 아니옵니까? 하옵고 궁녀라면 숙의마마 전각의 궁녀들이 있사온데, 어찌하여 절 더러 글월비자 노릇을 하라고 하시는 것인지요?”
저 내시입니다. 물론 자를 것이 없어 자르지는 못했지만, 엄연히 소환내시 교육을 받는 조선의 내시입니다.
속엣 말을 꾹꾹 누르며 애써 웃는 낯으로 마종자를 보고 있자니, 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훈계하듯 말했다.
“어째서 내가 이런 시시콜콜한 이유까지 네놈에게 설명해줘야 하는지 모르겠다만. 정히 궁금하다면 알려주마. 숙의마마께서 서한을 주상전하께 전할 환관이 필요하다 하신다. 그러니 잔말 말고 숙의전으로 가도록 해라.”
숙의마마의 서한을 주상전하께 전할 환관이라.
조금은 이해가 되질 않는 상황에 라온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더 물었다간 마종자의 눈빛이 찔러 죽을 것 같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명을 받자옵니다.”
라온이 고개를 숙이니 그제야 마종자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마종자의 저 웃음은 성 내관의 웃음만큼이나 불길한데…….
대체 무슨 속셈이기에 저리 웃는 것일까?
***
숙의마마의 거처는 집복헌(集福軒)이라는 현판이 붙은 작고 소담한 전각이었다.
진달래 꽃잎으로 물을 들인 듯 짙은 분홍빛으로 벽을 칠한 집복헌을 향해 라온이 바쁜 걸음을 옮길 때였다.
집복헌의 대문 앞에 막 다다랐을 즈음.
“홍 내관!”
낯익은 목소리가 그녀의 걸음을 붙잡았다.
어디를 다녀오는 길인지 장 내관이 손을 흔들며 라온에게로 다가왔다.
“아, 장 내관님.”
라온은 덩달아 손을 흔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장 내관님, 오랜만에 뵈옵니다. 여긴 어쩐 일이시옵니까?”
“중궁전으로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이지요.”
“주상전하께서 환궁하셨다고 하더니. 중전마마께서도 돌아오신 것이옵니까?”
“바늘 가는데 실가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렇군요.”
“그러는 홍 내관이야말로 예는 어쩐 일이오?”
“오늘부터 숙의마마 전각에서 글월비자 노릇을 하라는 명을 받았사옵니다.”
“허억! 그럼 오늘부터 숙의마마의 글월비자가 홍 내관이란 말이오?”
장 내관이 해쓱한 얼굴을 한 채 물었다.
“그렇사옵니다만. 왜 그러시는지요?”
장 내관님의 이런 반응, 낯설지 않군.
이건 마치 처음 자선당으로 배정받았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라온이 묻는다.
“혹여 여기서도 누가 죽은 것이옵니까?”
“아니외다, 아니외다.”
“그런데 왜……?”
라온의 물음에 장 내관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쯧쯧 찼다.
“어허, 이거 참. 홍 내관, 아무래도 뉘에게 미운 살이 단단히 박힌 모양이오.”
“…….”
“홍 내관이 몰라서 그러는데, 오래전부터 숙의전의 글월비자 노릇은 딱히 정해진 사람이 없었소. 숙의마마의 청이 있을 때마다 내시부의 장번내시들 중에서 돌아가며 해오던 일이지요.”
“어쩐지 서로 미루는 듯한 느낌이옵니다만.”
“역시 우리 홍 내관. 눈치 하나는 알아주어야 한다니까요. 사실 내시부의 환관들 중에서 숙의마마의 글월비자 노릇을 하겠다고 자청할 이는 하나도 없소이다.”
“어찌하여 그런 것이옵니까? 혹여…….”
말끝을 흐리며 잠시 생각하던 라온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숙의마마의 성정이 상당히 엄하시다거나, 아니면 표독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누구 못지않게 까다로우십니까?”
“아닙니다. 숙의마마로 말씀드리자면 궁궐 안에서 심성 곱고 너그러우시기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분이시지요.”
“그럼 왜 다들 숙의마마의 글월비자 노릇을 회피하는 것이옵니까?”
“굳이 답을 하자면 두 가지 이유가 있소. 그 첫 번째가 바로 숙의마마가 다름 아닌 주상전하의 하나밖에 없는 후궁이기 때문이오.”
장 내관의 말에 라온은 왼고개를 기울었다.
"주상전하가 후궁을 들이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요?"
“당연하지요. 본디 왕실의 부흥을 위해서 더 많은 후궁을 두어 후손을 번창시키는 것이 왕실의 법도지요.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오. 자, 우리 주상전하께서는 어째서 후궁이 단 한 분밖에 없는 것일까요?”
“중전마마를 너무 사랑하셔서?”
라온의 추리에 장 내관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정답은 우리 주상전하께서 중전마마를 무서워하신다는 것이오.”
“아, 그렇군요.”
말하자면 우리 임금님께서 공처가라는 얘기로군.
“하오나 듣자하니 선대왕들 중에서는 조정대신들의 주청으로 마지못해 후궁을 들인 적도 있다고 들었사옵니다만.”
“그것이 법도이긴 하오만. 지금 조정에 있는 조정대신들 대부분이 중전마마의 위세를 등에 업고 조정에 출사한 외척들인지라. 그런 분들이 어찌 감히 후궁을 더 들여 왕실의 번영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청을 드릴 수 있겠소?”
“아하, 그도 그렇겠군요.”
“또한, 중전마마께서 숙의마마와 주상전하께서 만나시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시니. 숙의마마께서는 함부로 주상전하를 뵙질 못하는 것이고, 우리 주상전하께서도 숙의마마께 걸음을 할 수 없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서한을 주고받으시는 것이로군요.”
“말하자면 그런 셈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숙의마마의 글월비자는 굳이 환관이어야 하옵니까?”
“그 또한 중전마마의 눈치가 보여서지요. 주상전하의 거처인 희정당(熙政堂)을 드나들 수 있는 궁녀라고는 중전마마의 윤허를 받은 늙은 궁녀들뿐라오.”
“설명을 듣고 나니 그것 역시 이해가 되옵니다. 하오나 숙의마마의 전각에도 글월비자 노릇을 할 환관은 있을 것이 아니옵니까? 왜 굳이 내시부에 환관을 청하시는 것이옵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 환관들이 숙의마마의 글월비자 노릇을 꺼려하는 두 번째 이유지요.”
“네?”
“그 두 번째 이유는 직접 겪어보면 알게 될 것이오.”
일순, 장 내관의 얼굴에 의미모를 안타까움이 스며들었다.
뭐예요? 그러니까 더 불안하잖아요.
불길한 표정으로 장 내관을 바라보던 라온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다시 물었다.
“그런데 장 내관님. 만약에 숙의마마께서 갑자기 주상전하가 보고 싶으면 어찌합니까?”
중전마마의 윤허 없이는 궁녀조차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 희정당이라 하였다.
그럼 만약 숙의마마께서 주상전하가 보고 싶어지기라도 한다면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기다려야지요.”
두말 하면 잔소리라는 듯 장 내관이 잘라 말했다.
“기다려도 아니 오시면 어찌하옵니까?”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지요. 그것이 후궁의 삶이라오.”
“그렇게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아니 오시면요?”
“끝이겠지요. 오죽하면 소화꽃이라는 서러운 꽃이 생겼겠소?”
소화꽃이라면 라온도 알고 있었다.
여름이면 귤빛 꽃망울을 활짝 피우는 능소화를 다르게 부르는 말이 아니던가.
오래전 어느 나라에서 임금의 하룻밤 승은을 입은 ‘소화’라는 궁녀가 다시는 자신을 찾지 않는 왕을 기다리다 기어이 상사병으로 죽어 다시 피어난 꽃이라 하여 소화꽃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그나저나 이 궁궐이라는 곳은 어찌 이리 격과 식이 까다롭고 엄격한 것일까? 그리운 이의 얼굴 하나도 마음대로 보지 못하는 곳이라니.
라온의 입에서 절로 혀 차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런 라온을 장 내관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홍 내관, 지금 남의 걱정 할 때가 아닌 것 같소만.”
“그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장 내관은 대답 대신 라온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힘내시오, 홍 내관.”
“장 내관님. 대체 왜 그러시는 것입니까? 네?”
라온이 물었지만 장 내관은 ‘곧 알게 될게요.’라는 의미심장한 말만을 남긴 채 종종 걸음으로 사라졌다.
라온은 집복헌의 현판을 올려다보며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글월비자라 하여 그저 서한이나 전해주는 편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닌가? 대체 저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기에 장 내관님의 표정이 그리 심각했던 것일까?
궁금증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직접 겪어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
“이번에 새로 들어왔다고?”
라온에게 묻는 박 숙의의 목소리는 자분자분 곱기도 하였다.
고운 것은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조막만한 얼굴에 올망졸망 모여 있는 눈, 코, 입은 눈에 확 띄는 엄청난 미인은 아니어도 곱고 선한 것이 보면 볼수록 매력이 있었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진한 눈망울 때문일까?
박 숙의의 나이, 올해로 서른둘이라고 하였지만, 보이는 모습으로는 이십대 초반이라고 하여도 믿을 정도로 어려 보였다.
복사꽃이 화사하게 수놓인 연분홍색 당의를 입은 박 숙의는 소녀같은 미소를 입가에 지은 채 라온을 응시했다.
그런 박 숙의를 향해 라온이 머리를 조아렸다.
“홍가 라온이라고 하옵니다.”
“그래, 홍 내관. 앞으로 잘 부탁하겠네.”
“부탁이라니요? 그 어인 말씀이오십니까? 명만 내리시옵소서. 받잡겠나이다.”
“고맙네.”
고개를 끄덕이던 박 숙의는 라온의 뒤편에 있는 중년의 상궁을 건너보았다.
“오 상궁.”
그녀의 눈짓부름에 오 상궁이 한달음에 라온의 곁으로 다가와 서한이 담긴 봉투를 내밀었다.
“이걸 대전에 전하시게.”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옵니까?”
“그것이…….”
잠시 박 숙의의 눈치를 살피던 오 상궁이 한 호흡 숨을 들이마신 후에야 말을 이었다.
“답신도 받아와야 하네.”
“답신이란 말이지요.”
그때 두 사람을 지켜보던 박 숙의가 쐐기를 박듯 단단히 일렀다.
“꼭 답신을 받아와야 한다. 알겠느냐?”
“알겠사옵니다.”
다시 고개를 조아리는 라온을 박 숙의가 온화한 얼굴로 응시했다.
그러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 오 상궁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뒷걸음질로 박 숙의의 처소를 나온 라온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집복헌은 주인의 성정을 고대로 빼다 박은 듯 정갈하고 따사로운 분위기였다. 전각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이나 꽃들이 초가을의 정취를 그대로 자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집복헌을 지키고 있는 나인들과 환관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입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린 채 전각 곳곳에 서 있는 그들의 얼굴에서 웃음기라곤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 전각 안에서 웃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박 숙의뿐이었다.
음울한 표정의 사람들을 뒤로한 채 라온은 희정당으로 잰 걸음을 옮겼다.
***
집복헌에서 일다경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희정당은 그 위세부터가 남달랐다. 희정당 대문 앞을 지키는 수문장의 날카로운 기세가 창칼처럼 라온을 찔러왔다.
그 살벌한 눈씨에 절로 주눅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서한을 전하러 왔다가 그대로 물러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불끈 주먹을 말아 쥔 라온은 목청을 높였다.
“숙의마마의 서한을 전하러 왔사옵니다.”
“숙의마마의 서한?”
라온의 말을 곱씹던 수문장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이윽고 덥수룩한 수염으로 뒤덮인 입에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또냐?”
“네?”
되물었지만 더 이상의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눈빛으로 라온을 보던 수문장은 이내 곁에 있는 젊은 병사에게 작은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그의 명을 받은 병사가 대문 안쪽으로 쏜살같이 달려 들어갔다.
다시 돌아오는 병사의 뒤쪽엔 짙은 녹색 당의를 입은 대전내관이 혹처럼 따라 나왔다.
“숙의마마의 서한을 가져왔다고?”
거만하게 턱을 치켜든 대전내관이 라온에게 물었다.
“네. 숙의마마께서 주상전하께 올리는 서한이옵니다.”
라온은 품속에 갈무리하고 있던 하얀 봉투를 대전내관에게 건넸다.
“알았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서한을 받아든 대전내관이 등을 돌렸다.
그 등에 대고 라온이 급히 소리쳤다.
“숙의마마께서 답신을 받아오라 하셨사옵니다.”
돌아서서 걷던 대전내관이 고개를 돌렸다.
“뭐라?”
“숙의마마께서 꼭 주상전하의 답신을 받아오라 하시었사옵니다.”
“귀찮게…….”
라온의 다급한 외침에 대전내관은 작은 목소리로 투덜댔다.
그러나 이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알았으니 예서 기다려라.”
그 말을 끝으로 내관은 안쪽으로 사라졌다.
“휴우.”
그제야 한숨 돌린 라온은 길게 날숨을 내쉬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탓인지, 온몸이 뻣뻣하게 경직될 지경이었다.
주상전하라니.
숙의마마라니.
궁 밖에서는 먼 하늘나라의 이야기인 듯 아득한 이름들이었다. 그저 꿈속의 사람들처럼 일평생을 가도 얼굴 한번 볼 수 없는 귀한 분들이라고만 생각하였다.
그런데 오늘 그 귀한 분들 중에 한 분을 가까이에서 뵈었다.
어디 그뿐일까?
숙의마마의 서한을 주상전하께 전달까지 하였으니.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면 단희에게 들려주어야겠다. 그 아이, 유난히 이런 이야길 좋아하니. 들으면 분명 좋아할 것이다.
그나저나 답신은 언제 받을 수 있으려나?
라온은 연신 희정당 대문 안쪽을 기웃거렸다.
그렇게 일각이 지나고, 이각이 지나가고…… 어느덧 한 시진이 훌쩍 흘렀다.
한 시진을 오롯하게 대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더니,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픈 허벅지를 통통, 가볍게 두드리던 라온은 뻣뻣해진 다리를 풀기 위해 대문 앞을 오락가락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주위를 지키는 병사들의 지청구가 들려왔다.
“거참, 번잡하게시리. 저기 다른 곳에 가서 기다려라.”
결국 라온은 희정당 담벼락 아래로 쫓기듯 밀려난 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시진이 또 훌쩍 흘렀다.
기다리다 못한 라온이 수염 덥수룩한 수문장에게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답신 가져다주는 것을 깜빡 잊으셨나 보옵니다. 잠시만 안으로 들어가면 아니 되겠사옵니까?”
“예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가겠다는 것이냐?”
“하오나…….”
두 사람이 실랑이를 할 때였다.
영영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았던 대전내관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어찌 이리 시끄러운 것이냐?”
날카로운 눈매로 라온을 쳐다보던 내관은 큰 선심이라도 쓰는 듯 붉은 봉투를 내밀었다.
“옜다.”
“감사하옵니다.”
꼬박 두 시진이 넘게 걸려 받은 답신이었다.
라온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래도 이번에는 일이 빠르게 처리되어 해 지기 전에 답신을 받은 것이라고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말했다.
임금님의 그림자조차도 볼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답신을 받았으니.
맡은 바 임무는 잘 해낸 것이라 기뻐하며 라온은 숙의전으로 돌아왔다.
***
숙의 박씨의 처소인 집복헌은 아까 라온이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음울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웃으십시오.’라고 외치고 싶었다.
대체 왜들 저리 우울한 표정들인 것인지?
고개를 갸웃하며 라온은 숙의마마의 앞으로 나아갔다.
“이것이 전하의 답신이로구나.”
라온이 주상전하의 답신이 든 붉은 봉투를 전하자 박 숙의의 얼굴에 화사한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마치 처음 연서를 받아보는 어린 소녀처럼 발그레 붉어진 얼굴을 한 채 붉은 봉투를 양손에 꼭 쥐었다. 그리고는 그 봉투를 가슴께에 끌어안은 채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감은 채 주상전하의 답신을 꼭 그러안고 있던 박 숙의가 드디어 봉투를 열고 서찰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박 숙의의 까만 두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거렸다.
라온은 흡사 자신이 연서를 받은 듯한 느낌에 덩달아 가슴이 뛰었다.
아마도 달콤한 연서가 분명할 터.
연서를 읽은 숙의마마의 얼굴에 피어날 수줍은 웃음을 기대하며 라온은 연신 곁눈질을 했다.
그러나…….
“……전하.”
답신을 들고 있는 박 숙의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주상전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슴벅한 물기가 가득했다.
왜?
라온의 머릿속에 의문표가 채 그려지기도 전, 박 숙의의 턱 끝으로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그것과 동시에 곁에서 지켜보던 오 상궁이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마, 숙의마마…….”
오열하는 오 상궁의 목소리가 신호라도 되는 듯 처소 안의 나인들은 물론이고 문 밖의 나인들마저 일제히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마마……. 마마…….”
나인들의 울음소리가 집복헌의 작은 마당을 메아리쳤다.
그 서글픈 메아리 속에 갇혀버린 박 숙의가 소리 없는 통곡을 흘렸다.
눈물로 뒤범벅이 된 박 숙의의 작은 얼굴을 보며 라온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는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모두가 울고 있었던 탓에, 물어볼 수가 없었다.
뭡니까?
다들 왜 이러는 거예요? 네?
***
라온이 숙의전을 나왔을 땐, 어느새 사위에 짙은 어둠이 내린 뒤였다.
“에고…….”
라온은 무거운 마음으로 손에 들고 있는 서한을 내려다보았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주상전하께 다시 서한을 올려달라는 당부와 함께 박 숙의가 건넨 서한이었다.
주상전하와 숙의마마,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것인가?
라온이 고개를 갸웃하며 집복헌의 대문을 넘어설 때였다.
“이보시게.”
조금 전까지 박 숙의의 곁에서 눈물을 찍어내던 오 상궁이었다.
잰 걸음으로 라온에게 다가온 오 상궁은 뜻밖의 말을 건넸다.
“홍 내관. 숙의마마의 서한, 굳이 주상전하께 올리지 않아도 되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어차피 주상전하의 답신은 똑같을 터이니. 번거롭게 일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이네.”
“하오나…….”
오 상궁의 말에 라온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체 무슨 말일까?
궁금해하는 찰나.
오 상궁이 품속에서 붉은 봉투를 꺼내 라온에게 건넸다.
“읽어보게.”
“이것은…….”
“나흘 전, 주상전하께서 숙의마마께 보내신 답신이라네.”
“……?”
읽어보라는 말에도 머뭇거리는 라온에게 오 상궁은 또 하나의 붉은 봉투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레 전에 주상전하께서 숙의마마께 보내신 것이지.”
라온은 황당한 얼굴로 두 개의 붉은 봉투를 번갈아보았다.
오 상궁이 라온을 재촉했다.
“읽어보게나.”
“하오나 감히 소인이 어찌 이것을 읽을 수가 있겠나이까.”
“걱정 말고 읽어보게.”
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다들 이러는 것일까?
망설이던 라온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서한을 펼쳐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서한을 읽던 라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이것은……!
놀란 라온은 또 다른 서한을 펼쳤다.
그러나 이것 역시…….
“아무것도 없군요.”
그야말로 백지.
주상전하께서 숙의마마께 보낸 서한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
“다녀왔습니다.”
자선당으로 돌아온 라온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오는 것이냐?”
보료 위에 비스듬히 누워 서책을 읽던 영이 라온을 향해 손을 들어보였다.
“화초서생 오셨습니까.”
주상전하의 서한을 본 충격으로 내내 늘어 있던 라온의 신경이 영을 보는 순간 다시금 팽팽하게 조여졌다.
그 돌발적인 입술 접촉사고 이후로 영을 보면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저 사람은 사내를 좋아하는 사내라고,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각인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물색없는 심장은 자꾸만 두근거렸다.
차라리 안 보면 좋겠건만.
그런 라온의 마음을 알 리 없다는 듯 화초서생은 요즘 들어 매일같이 자선당을 찾아왔다.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영의 시선을 회피하기 위해 라온은 괜스레 대들보 위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언제나처럼 병연이 등을 보인 채 누워 있었다.
“김 형.”
“……왔느냐.”
무뚝뚝한 한 마디.
그러나 그 한 마디에 당겨진 시위처럼 팽팽했던 감각이 조금은 느슨해지는 듯했다. 든든한 아군을 등 뒤에 두고 있는 듯 편안한 느낌이었다.
‘김 형과 같은 분이 내 오라버니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쉬움이 가득 배인 눈길로 병연을 바라보던 라온은 긴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영이 툭 한 마디 했다.
“어찌하여 저 녀석 볼 때와 날 볼 때의 눈빛이 전혀 딴판이구나.”
말하는 영의 목소리에 은근하게 가시가 돋아났다.
참으로 요상한 것이 라온이 ‘김 형, 김 형’ 할 때마다 영은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어미 닭을 찾는 병아리처럼 처소에 돌아오기 무섭게 김 형, 김 형 찾아내는 모습이라니.
“그리…… 보이셨습니까? 제가 오늘 좀 피곤해서 그런가 봅니다.”
“피곤해? 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숙의마마의 글월비자 노릇을 하다 돌아오는 길입니다.”
“숙의전?”
영이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라온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하루 종일 헛발품만 팔았겠구나.”
“어? 어찌 알았습니까?”
“숙의전에서 글월비자 노릇을 하는 환관이라면 주상전하께 서한을 전하는 것일 터. 주상전하께서 숙의마마께 보내는 서한의 답신일랑은 궁 안의 공공연한 비밀이니. 그런 답신을 들고 다녔으니 헛발품 판 것은 당연지사가 아니겠느냐.”
영의 말에 라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주상전하께서 숙의마마께 어떤 내용의 답신을 내렸다는 것도 모두 아신다는 말씀입니까?”
“말하지 않았느냐? 두 분 사이에 오가는 서한의 내용은 궁 안의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궁의 소문에 둔한 너 같은 사람 빼고는 다 아는 사실이다.”
“설마요? 아무리 궁이라고 해도 어찌 그런 것까지 소문이 돌 수 있단 말입니까?”
“주상전하께 올리는 모든 문서는 환관들이 미리 살핀다는 것을 모르느냐? 궁의 환관이란 녀석이 어찌 그런 것은 모르느냐?”
“공식적인 문서는 그리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주상전하의 지극히 개인적인 서한입니다. 설마 이런 것도 환관들이 살핀다는 말씀입니까?”
“한 나라의 주군에겐 개인적인 일이란 없는 법이다.”
“네?”
“식사를 하실 때도, 잠을 잘 때도 군주에겐 사생활이란 없다. 그것이 궁의 법도다. 심지어는 여인과 사랑을 나눌 때마저도…….”
영의 말끝이 씁쓸했다.
“그리 지극히 사소한 것마저도 누군가의 눈길을 받아야만 한다면…… 그렇다면 주상전하께서도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시겠군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너무하신 것입니다.”
라온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뭐가 너무해?”
병연이 대들보 위에서 뛰어내리며 물었다.
“주상전하께서 매번 숙의마마께 백지로 된 답신을 내리셨다 합니다. 어찌 그리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까?”
“이번에도 백지더냐?”
병연의 물음에 라온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백지였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백지로 된 서한을 보내시는 것일까요?”
“글쎄.”
병연은 한쪽 벽에 기대앉으며 말을 이었다.
“액면 그대로 하고픈 말씀이 없으시니 그런 것을 보내시는 것이겠지.”
“하고픈 말씀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마음이 없으니 더는 하고픈 말이 없다는 것 아니겠어?”
병연의 시큰둥한 말에 라온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 말의 뜻은 전하께서 정녕 숙의마마께 마음을 접었다는 말씀입니까?”
“…….”
병연은 대답 대신 침묵했다.
“설마요…….”
라온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눈물이 가득했던 박 숙의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면 안 되는데. 정말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라온은 백지상태의 서한을 펼쳐들고 울상을 지었다.
그때, 영이 서책을 한쪽으로 치우며 말했다.
“흐르는 것이 세월이고, 그 세월의 물결 속에 사랑의 기억도 흘러가는 것이다. 과거의 애틋했던 사랑도 세월의 물살에 빛이 바래지는 법이지. 그리움조차도 말이다.”
그 차가운 단정이 라온의 마음을 아프게 찔러왔다.
“그런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괜스레 속상한 마음에 라온은 영을 향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뭐라?”
“세월의 물결 속에 사랑의 기억도 흘러간다고 하셨습니까? 하지만 사람마다 세월의 흐름은 다른 것입니다. 숙의마마의 세월은 아직 주상전하께 고여 있는 호수란 말입니다. 주상전하께 숙의마마는 빛바랜 과거의 사랑일지 모르겠지만 숙의마마께 주상전하는 여전히 아름다운 연인이십니다.”
라온은 주상전하의 답신을 받아들고 소녀처럼 들뜬 표정을 짓던 박 숙의를 떠올렸다.
“이미 흘러간 사내의 마음은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사랑은 느닷없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느닷없이 사라지기도 하는 법. 그 사랑이 함께 끝나지 않았다고 하여 울며 안달 내 봤자 소용없는 일이지.”
“그럼…… 그렇다고 말씀이라도 하여 주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제 끝이 났다고, 기다리지 말라고 언질이라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함께 사랑을 했던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누가 감히 임금에게 예를 논한단 말이더냐? 군주에겐 그런 예를 차릴 이유도, 필요도 없다.”
“군주는…… 주상전하는…… 사내가 아니랍니까.”
라온의 목소리에 습한 기운이 들어찼다.
이건 불공평한 처사였다.
감히 올려볼 수도 없을 만큼 높은 곳이 있는 분의 사랑이란 그런 것입니까?
감정이 북받친 라온은 기어이 눈가에 눈물을 매달고 말았다.
그때 내내 말없이 있던 병연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런데 주상전하께서는 어째서 빈 백지를 보내시는 것일까?”
뒤이어 화초서생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기도 하군. 정말로 숙의마마께 마음이 떠났다면 답신을 보내지 않으면 그뿐일 텐데. 백지를 보내신다? 왜?”
“그러게요. 왜 그런 걸까요?”
행여 영이나 병연이 제 눈물을 보았을까 싶어 라온은 서둘러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물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영이 휙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리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보면 되겠구나.”
“……네.”
이 소리 왜 안 하나 했다.
그래, 까짓것. 알아보지 뭐.
대체 무슨 연유로 숙의마마께 백지로 된 서한을 보내시는지.
주상전하의 진심, 알아보면 되지 뭐.
그런데 어째 궁금증의 난이도가 점점 높아지는 것 같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