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19화 (19/131)

19. 궁의 융통성

다음날.

“어? 김 형! 김 형!”

잠에서 깬 라온이 놀란 음성으로 병연을 불렀다.

대들보 위에서 부스스 고개를 드는 병연을 향해 라온이 눈빛을 반짝였다.

“김 형, 이거 김 형이 해주신 겁니까?”

주석이 달린 서책을 팔랑이며 라온이 물었다.

“그깟 일로 자는 사람 깨운 거야?”

“그깟 일이라뇨! 무려 이런 일입니다.”

라온은 최고라는 듯 병연을 향해 양 엄지손가락을 세워보였다.

“성가신 놈.”

병연이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김 형.”

“…….”

"김 형."

“왜?”

“저는 김 형이 정말 좋습니다.”

“…….”

움찔.

병연의 어깨가 작게 흔들렸다.

“저는 김 형이 정말 좋습니다!”

라온은 자선당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다.

“성가신 놈이 간사하기까지 하구나.”

이윽고, 참다못한 병연이 불퉁하게 중얼거리며 라온을 돌아보았다.

찰나.

“어?”

라온의 입에서 다시 한 번 놀란 탄성이 새어나왔다.

“이번엔 또 왜?”

“김 형이 웃으셨습니다.”

“……!”

내가 웃었다고? 설마?

라온의 말에 병연은 얼굴에 떠올렸던 미소를 순식간에 지워버렸다.

“김 형, 웃으십시오. 웃으면 그리 멋진 분이 왜 안 웃으시는 것입니까?”

“요사스런 칭찬은 그쯤 해 둬.”

“정말 안타깝습니다.”

“무어가?”

“김 형의 미소를 저 혼자 본 것 말입니다. 여염집 아가씨들이 봤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아마도 그랬다면 다들 소리를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을 겁니다.”

“……일없다.”

여전히 냉랭한 병연의 태도에 라온이 손가락을 들며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씀하길, 사람은 말입니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해지는 거라고 합니다. 저는 말입니다…….”

“…….”

“김 형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병연이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런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행복해지는 것에 자격이 필요하답니까?”

항의하듯 소리쳤지만 등을 돌린 병연에게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김 형.”

병연의 너른 등이 오늘따라 더 외로워보였다.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바람의 냄새가 이 순간, 더 진하게 느껴지는 건 착각이려나.

***

“홍 내관, 좋은 아침이네.”

소환내시 교육장으로 들어서자 한쪽 구석에서 수다를 떨던 도기가 쪼르르 달려왔다.

“네, 좋은 아침입니다. 도 내관님.”

“그런데 강경준비는 잘 되고 있는 겐가?”

도기의 물음에 라온은 보란 듯 논어를 흔들었다.

주석이 빼곡히 달린 그것을 보고 도기가 감탄사를 연발했다.

“오오, 대단하구먼.”

“그렇지요?”

“헌데…… 논어는 어쩌자고 공부하는 겐가?”

“네? 이번 강경시험, 공자님 말씀 아닙니까?”

“누가 논어에서 시험이 출제된다고 했는가?”

“마 내관님이…….”

말을 하며 라온은 마종자가 있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저 자가!”

라온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도기가 마종자를 향해 눈을 흘렸다.

“왜 그러십니까?”

“내 말하지 않았는가? 마종자 저놈은 뒷배 없고 힘없는 소환내시가 경계할 자라고 말이야. 이런 식으로 새로 들어온 소환내시들을 골탕 먹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번 강경시험, 논어에서 출제되는 거 아닙니까?”

“논어를 제외한 나머지 사서에서 나온다네.”

“……!”

라온은 화르르 불길이 인 눈으로 마종자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시선을 느낀 마종자가 라온에게로 다가왔다.

“어디라고 감히 눈에 힘을 주는 것이냐?”

“마 내관님. 지난번에 제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사옵니까? 이번 강경시험은 논어에서 나온다고 말이옵니다.”

“내가 언제? 나는 분명 논어라고 했을 뿐, 강경시험이 거기서 나온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마종자는 뻔뻔한 말과 함께 유유히 마당 저 끝으로 사라졌다.

“……!”

저자가!

라온은 이를 악물었다.

이 시험.

라온에겐 그 의미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시험이었다.

다른 이들에겐 그저 지나가는 통과의례일지 모르나, 그녀에겐 가족과 만날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통로였던 것이다.

그런데 마종자의 장난에 그 소중한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마 내관님은 어째서 저를 미워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라온이 억울한 목소리로 도기에게 말했다.

“미워하는 게 아니라네.”

“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이리 골탕을 먹인단 말입니까?”

“저 개종자는 원래 그런 놈이라네.”

도기의 한 마디에 라온은 침묵하고 말았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놈’은 없다.

그것이 나쁜 방향이든, 좋은 쪽이든 ‘그런 사람’이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마 내관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종자, 저 나쁜 놈 때문에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 형께서 수고해준 것까지도 모두.

다른 무엇보다도 그게 가장 억울하게 느껴졌다.

이를 악문 라온의 눈에 글썽 눈물이 들어찼다.

속상한 마음이 컸던 탓일까?

기어이 그녀의 눈가로 눈물 한 방울이 흐르고야 말았다.

***

“김 형!”

일과를 마치고 자선당으로 돌아온 라온은 버릇처럼 병연을 찾았다.

그러나 대들보 위는 텅 비어 있었다.

요즘 병연이 자선당을 비우는 일이 잦아졌다.

무에 일이 있어서 그렇겠지, 생각은 하지만 텅 빈 처소로 돌아올 때면 왠지 허전했다.

사람 든 자리는 작아도, 난 자리는 크다는 말이 딱이었다.

병연이 있을 때는 행여 잠자는 동안에 제 정체를 들킬까 전전긍긍하였건만. 이렇게 막상 안 보이니, 이 커다란 자선당이 더욱 크고 휑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보면 언제나 대들보에 있는 사람이니. 오늘도 틀림없이 돌아오리라.

“그래도 오늘은 김 형 붙잡고 마종자 욕이나 실컷 하려고 했는데.”

라온은 아쉬운 얼굴로 작게 투덜댔다.

그러나 이내 이리 투덜댈 시간조차 없음을 상기했다.

마종자의 장난질로 그간의 노력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병연이 큰마음 먹고 주석을 달아준 것이 헛된 일이 돼 버리고 만 것이다.

그 생각을 떠올리니 절로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이를 갈며 라온은 방 한쪽에 쌓여 있는 서책들을 들고 왔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이 한 줄을 희망의 불빛으로 삼은 채 라온은 처음 접하는 문장들을 하나하나 곱씹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자정이 오래 전에 지났을 무렵.

라온은 가족과 만나야 한다는 필사적인 각오로 여전히 책을 붙들고 있었다.

그때.

“쯧쯧쯧.”

등 뒤에서 느닷없이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 형이다. 김 형이 돌아왔다.’

반가운 마음으로 라온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런데…….

“누구……십니까?”

병연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웬 노인 하나가 서 있었다.

낯설지 않은 노인의 모습에 라온은 잠시 눈동자를 굴렸다.

누구지? 분명 아는 사람 같은데? 누구……!

문득 라온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귀인 어르신이 아니십니까?”

라온은 용수철처럼 튕겨지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노인이 뉘이던가.

전(前) 판내시부사 박두용이 아니던가.

사소한 문서라면서 혼서에 수인하게 하여 자신을 이곳까지 오게 한 바로 그 사기꾼!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귀인께서 여기엔 어찌 오신 것입니까? 아니, 마침 잘 만났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따질 말이 많았습니다.”

어금니를 악문 라온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런 라온을 향해 쯧, 혀를 차던 박두용이 휘 에두르는 시선으로 자선당을 훑어보았다.

“가라는 곳은 아니 가고 예서 뭐하는 것이더냐?”

“네?”

“뭐, 그건 됐고.”

품속에서 작은 서책을 꺼내든 노인이 휘리릭 책장을 넘겼다.

“불통, 불통, 불통, 연일 불통이라.”

탁, 서책을 접어 다시 갈무리한 박두용은 마뜩찮은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이래서야 내 체면이 말이 아니겠구나.”

“네?”

“따라 나오너라. 내, 특별한 가르침을 내려줄 것이니.”

“네?”

“네놈은 ‘네?’밖에 할 줄 모르더냐?”

“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박두용을 따라 자리를 옮기자마자 라온이 따지듯 물었다.

“내가 뭘?”

“사소한 문서라면서요? 그냥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되는 일이라면서요? 내시가 되는 게 사소한 문서입니까? 내시가 되는 게 그냥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되는 일입니까?”

“거참, 요즘은 도통 귀가 안 들려.”

박두용은 딴청을 부리며 귀를 후비적거렸다.

라온은 찌르는 듯한 시선으로 노인을 노려보았다.

“더 속이는 것은 없으십니까?”

“뭘?”

“빚만 갚으면 궁에서 나가는 것 맞지요?”

“…….”

“이 자리에서 약조해 주십시오. 3년 후, 빚만 다 갚으면 두말 안 하고 궁을 떠나도 좋다는 약조 말입니다.”

잠시 생각하던 박두용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 약조하마. 대신…….”

박두용이 라온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너도 약조 하나 해라.”

“뭘요?”

“제대로 내시 노릇하겠다고 말이다.”

“열심히 하고 있는 중입니다.”

“열심히 하는 걸로 부족하다. 제대로 하란 말이다. 너를 천거한 것이 다름 아닌 나란 말이지. 그런데 이게 무어냐? 자세불통, 시선불통, 걸음걸이불통, 기본소양불통……쯧쯧. 이래서야 내 체면이 말이 아니지 않겠느냐.”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다른 이들은 걸음마를 배울 때부터 내시의 걸음걸이를 익혔다고 합니다. 글자를 떼면서부터 기본소양과목을 교수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 이들과 경쟁하는 중입니다. 저도 죽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쯧쯧. 그리 미련한 방법으로 어찌 저들을 이길 수가 있겠느냐?”

“그럼 어찌합니까?”

“이 궁에서 살아남으려면 나름 융통성을 발휘해야 한단다.”

“융통성이라고 하면?”

“자…… 우선 이것부터 받아라.”

박두용이 품속에서 서책 하나를 꺼냈다.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지난 30년 동안 내려온 내시부의 시험문제다. 우리끼리는 족보(族譜)라고 부르는 귀한 물건이지.”

“족보요?”

“그렇다. 이것만 있으면 내시부의 시험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지.”

“그래서야 사서의 깊은 진리를 배울 수가 없질 않겠사옵니까?”

“사서의 깊은 진리? 그딴 거 익혀서 뭐하게?”

“네?”

“그런 진리는 집현전의 학자들이나 익히는 것이고. 우리는 그저 주상전하를 비롯한 왕족들께서 하시는 말씀의 말귀나 알아들을 정도면 족하느니.”

“그런 것이옵니까?”

“당연하지. 학문으로 치자면 이 조정에 날고 기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우리의 소임은 그저 왕실의 안녕과 평안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도 말입니다.”

“또 뭐냐?”

"이건 엄연한 편법입니다.

라온의 말에 박두용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라고요.”

“그렇다. 절대 아니다.”

라온은 어이없는 얼굴로 족보를 가리켰다.

“그럼, 이것은 무엇입니까?”

“융통성이지.”

노인의 담담한 대답에 라온의 표정이 굳어졌다.

“제가 보기엔 편법으로 보입니다만…….”

어떤 시험 문제가 나올지 훤히 알고 시험을 치른다면, 모르는 사람보다 당연히 유리할 수밖에 없다.

박두용이 혀를 끌끌 찼다.

“얼굴은 계집 여럿 울리게 생긴 녀석이 속은 어찌 이리 답답할까. 벼슬자리도 사고파는 세상에 이 정도가 뭐라고 그리 마음 쓰는 것이냐. 궁에선 이정도 편법은 융통성이라 부른단다. 그리고 이 정도 융통성은 너 말고도 다른 이들도 다 발휘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환관들로 이런 족보를 갖고 있는 것입니까?”

“당연하지.”

“하오면 이건 제게 별 소용이 없는 물건이옵니다.”

“왜? 어째서?”

당장에라도 머리를 조아리며 고맙습니다, 할 줄 알았는데.

라온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박두용이 당황했다.

“소인은 이번 강경시험에서 장원을 해야 합니다.”

“장원?”

“네. 강경시험에서 장원을 한 소환내시에겐 하루 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통부를 내어 준다고 들었습니다.”

“내시부의 오랜 관례지.”

“어르신 때문에 울 어머니와 누이를 못 본 지 벌써 여러 달이 흘렀습니다. 누이의 병세가 안 좋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궁 밖으로 나가야 하고요. 그러니 저는 어떻게든 장원을 해야 하는데, 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길 다른 환관들도 이런 족보를 갖고 있다고 하시니. 제게는 소용없는 물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남들과 같아서는 절대 그들을 이길 수 없다.

라온이 하고자 하는 말의 핵심은 바로 그것이었다.

“흠. 그런 뜻이더냐? 하하하하.”

박두용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일순, 웃음을 멈추고는 라온에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잘 들어라. 이건 다른 놈들이 갖고 있는 것과는 격이 다른 물건이지.”

“어떻게요?”

“훗, 지난 30년간 내시부의 시험문제를 낸 자가 뉘인 줄 아느냐?”

“그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바로 나다.”

라온은 놀란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박두용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다른 놈들은 어떤 범위 안에서 문제가 출제될 것이다, 정도만 알고 있겠지. 그러나 내가 갖고 있는 이 족보는 딱 나올 문제만 꼬집어 놓은 거란 말이지. 다시 말하자면 다른 놈들이 다섯 문장을 외워야 할 때, 넌 그저 시험에 나올 한 문장만 외우면 된다는 말이다.”

“그 말씀인즉, 훨씬 시간도 절약되고, 장원을 할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뜻이겠네요?”

“그렇지.”

“…….”

라온의 표정이 꽃봉오리처럼 부풀어 올랐다.

환해지는 얼굴 가득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감사하옵니다.”

“그래.”

“이번 강경시험, 꼭 장원을 하고야 말 것이옵니다.”

“그래야지. 그래야 널 궁에 들여보낸 내 체면도 설 것이고.”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하하하.”

“하하하.”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

라온에게 족보를 넘긴 박두용이 걸음을 옮긴 것은 저승전 근처의 작은 전각이었다.

전각 마당에 쭈그리고 앉은 채, 먼 곳을 바라보던 노인이 그를 반겼다.

그의 오랜 벗이자 전(前) 상선이었던 한상익이다.

“다녀왔는가?”

박두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족보를 넘겼네.”

한상익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두 손을 소매 속으로 넣었다.

“과연, 그 아이가 제대로 해 낼 수 있을까?”

“글쎄. 지켜보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질 않겠느냐?”

“아무리 족보를 가졌다고 해도 이번 강경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긴 힘들 것이야.”

“그렇겠지.”

한상익의 말에 박두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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