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이상한 일
대숲에 바람이 일었다.
라온은 청량한 바람 한가운데 서 있었다.
얼굴 위로 쏟아지는 바람의 감촉에 라온은 길게 입술을 늘였다. 지그시 눈을 감고 온몸으로 바람을 느꼈다.
기분 좋아.
바람결에 은은한 향기가 전해졌다.
어찌 보면 사향노루의 향기 같고, 또 어찌 보면 여름 들판에 핀 여름 꽃을 닮은 향기다.
누구지? 이 향기의 주인은?
라온은 향기가 느껴지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주위의 풍경이 급격하게 변했다.
고귀한 기품이 흐르는 방 안이었다.
여긴……!
“뭐하는 게요? 홍 내관, 어서 머리를 조아려요.”
그때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장 내관이 바닥에 납죽 엎드린 채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곧이어 문밖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세자저하 납시오!”
라온은 서둘러 바닥에 엎드렸다.
문이 열리고, 낯선 발걸음 소리가 들어온다.
발소리와 함께 한 줄기 바람이 밀려들었다.
좀 전에 느꼈던 은은한 향기다.
라온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 향기.
무척이나 좋다.
사람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는 듯 따스하면서도 무언가 아련한 향기였다.
깐깐하고 무섭다는 세자저하의 향기가 따뜻하다고 느끼다니.
참으로 묘한 일이다.
그런데 이 향기…… 어디선가 맡아본 것 같은데…….
라온은 가물거리는 기억의 편린을 훑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고개를 들라.”
세자저하의 목소리가 라온의 뒤통수 위로 떨어졌다.
“감히 그럴 수 없사옵니다.”
라온이 대답했다.
그러나 단호한 명은 다시 이어졌다.
“고개를 들라.”
라온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아!”
문득 그녀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새어나왔다.
놀랍게도 라온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세자저하가 아닌 화초서생이었다.
“화초서생? 이곳엔 웬일이십니까?”
라온의 물음에 화초서생이 차가운 얼굴 위로 미소를 떠올렸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개구쟁이 같은 미소.
이상하게도 그 미소가 편안하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웃던 그가 불현듯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가락이 라온의 입술에 닿았다.
그리곤 그 손가락을 다시 자신의 입술로 가져간다.
라온은 당황하고 말았다.
“왜, 왜 그러시는 겁니까?”
“정말 기억나지 않느냐?”
설마, 입술이 스쳤던 그 일을 말하는 건가?
“그때의 일이라면 분명 사고였습니다. 화초서생께서도 그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그저 돌발적인 사고라고 말입니다.”
일순, 영의 표정이 일변했다.
그의 얼굴에 가득했던 천진한 웃음이 지워지고 대신 쓸쓸한 미소만이 남았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로구나.”
돌연, 그의 모습이 모래처럼 스러졌다.
“화초서생?”
놀란 라온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다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화초서생의 모습이 흐려지는 대신, 다른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들보 위에 올라앉은 채, 쯧쯧 혀를 차는 사내.
“성가신 녀석.”
“김 형!”
어째서 갑자기 김 형이 나타난 것일까?
의문이 들면서도 라온은 반갑게 그를 불렀다.
그 순간,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병연의 모습마저도 흩어놓고 말았다.
“김 형?”
라온이 깜작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순간, 바람에 흩어진 영과 병연이 눈부신 꽃가루가 되어 그녀를 포근하게 감쌌다.
***
“김 형! 화초서생!”
라온이 눈을 번쩍 떴다.
잠이 묻은 몽롱한 시선으로 라온은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텅 빈 대들보가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전신을 포근히 감싸주었던 화사한 꽃잎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 잠깐 졸았었나보네.”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며 라온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으하하아암……흐억!”
“이제 깼느냐?”
한껏 기지개를 켜는 찰나, 어깨 너머로 불쑥 유백색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화초서생이었다.
라온은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그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눈을 비볐다.
“아직 잠이 덜 깼나?”
“잠꼬대가 심하구나.”
아! 꿈이 아니다.
진짜 화초서생이었다.
이제야 어찌 된 상황인지 감이 왔다.
강경시험을 준비하며 공부하던 중에 잠시 졸았던 것이고, 그 사이 화초서생이 자선당을 찾은 것이리라.
생각하느라 눈만 깜빡이던 라온은 얼굴 가득 해사한 웃음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화초서생이었다.
조금 전 꿈에서 그를 봤던지라 반가움이 배는 더 했다.
그런데…….
방금 전에 나, 화초서생! 하며 잠꼬대 하지 않았나?
라온은 영을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언제 오신 겁니까?”
“네가 ‘너의 김 형’과 나를 애타게 찾을 때부터.”
영이 무감한 얼굴로 대답했다.
“……!”
하필이면 그때 그런 꿈을 꿀 건 뭐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에 라온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라온의 마음일랑은 알 리 없다는 듯 등 뒤로 다가온 영은 팔을 뻗어 책상 위의 서책을 가리켰다.
“이 문장…….”
“네?”
“이 문장의 뜻풀이가 잘못되었다.”
“그렇습니까?”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라온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해야 할 공부가 산더미란 사실을.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병연이 없어 혼자 공부를 하던 참이었다.
마침 잘 되었다는 생각에 라온은 책상을 끌고 영의 곁에 바싹 붙어 앉았다.
“하오면 이건 어찌 뜻풀이를 하면 좋겠습니까?”
“…….”
영의 목덜미로 라온의 숨결이 달라붙었다.
올려다보는 커다란 눈망울이 그의 입술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순간, 무감하던 영의 표정에 균열이 일어났다.
얼음이라도 된 듯 바싹 굳어 있는 영과는 달리, 라온은 연신 서책의 문장을 가리키며 질문을 이어갔다.
“화초서생, 그러니까 이 문장은…….”
“사내놈이! 어쩌자고 자꾸 달라붙는 것이냐?”
기어이 그의 입에서 퉁명한 지청구가 떨어졌다.
“아, 제가 그랬습니까? 죄송합니다.”
라온이 머쓱하게 웃으며 한 치 옆으로 물러나 앉았다.
그러자 이번엔 영의 입에서 못마땅한 헛기침이 새어나왔다.
“……흠.”
녀석이 바싹 붙어 있을 땐, 목덜미로 달라붙는 녀석의 숨결이 불편했다.
그런데 이렇게 녀석이 제 곁에서 떨어져 앉으니, 이건 이거 나름대로 마음 한구석이 언짢아진다.
잠시 미간을 찡그리던 영이 그녀의 옆자리로 다가앉았다.
“무슨 공부를 이리 열심히 하는 것이냐?”
“곧 강경시험이 있습니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된 것이, 내시들이 성균관 유생들보다 더 지독하게 공부를 하는 듯 보이는구나. 왜? 시험을 못 보면 뉘에게 혼쭐이라도 나는 것이냐?”
“불통을 받으면 교육장 쉰 바퀴를 돌아야 하지만, 딱히 그 때문에 이리 열심인 것은 아닙니다.”
“그럼 왜 이리 열심이야?”
“장원 한번 해보려고요.”
“장원? 훗."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보일 듯 말듯 웃던 영이 말을 이었다.
“아직 뜻풀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녀석이 꿈도 크구나.”
“한창 자라나는 새싹의 꿈을 그리 무참히 짓밟지 마십시오.”
“자라나는 새싹? 내 보기엔 군내 풀풀 풍기는 누런 고목 같은데?”
“우리 할아버지 말씀이,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라 하였습니다. 정신을 한데 모아 집중하면 못 이루는 일이 없다는 뜻이지요.”
“아무리 정신일도 해도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법이다.”
“사람 일이란 모르는 법입니다. 혹시 압니까? 지성이면 감천이랬다고, 제가 정말로 장원을 할지 말입니다.”
“…….”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저는 꼭 장원을 할 겁니다. 어떻게든 장원을 해서 우리 어머니와 단희 보러 나갈 겁니다.”
라온의 심각한 모습에 영은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러니까 이리 열심히 하는 이유, 네 어머니와 누이 때문이라고?”
“그렇습니다.”
“혹시 너, 궁에 들어온 이유도 그 때문이냐? 네 가족들 때문에?"
영의 물음에 라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긍정의 침묵.
영은 라온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고작 열일곱.
또래의 다른 사내들보다 훨씬 더 여려 보이는 녀석이건만.
그 어깨에 놓인 짐은 꽤나 무거운 모양이다.
“이제는 그 짐, 내려놓아도 되지 않겠느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 어머니와 누이 때문에 환관이 되어 궁에까지 들어왔으니. 넌 할 만큼 했단 뜻이다. 그러니 이제는 그들과 상관없이 네 인생을 살아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라온은 영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화초서생은 가족이 짐스럽습니까?”
“…….”
“제게 우리 어머니와 단희는 살아가야 할 이유입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으면 살지 못하듯이, 그 두 사람이 없으면 저도 없습니다. 짐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
일순, 자선당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영은 한참을 말없이 라온을 바라보았다.
기꺼이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살아가겠노라 말하는 녀석이 한편으로 대견하게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눈이 아릴 만큼 안쓰러웠다.
긴 침묵 끝에 영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벌써 가십니까?”
아쉬운 마음에 라온이 문을 나서는 영에게 물었다.
“가야지. 매번 말하지만, 나는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아참, 누이께서 아프시다 들었는데. 괜찮으신 겁니까?”
“시간이 약인 병이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미궁으로 빠져드는 말이라.
라온은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 기울였다.
“그런데 내 누이가 아프다는 건 어찌 알았느냐?”
“김 형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녀석 성격으로 하릴없이 주절주절 얘기했을 리 없고. 네가 물어본 것이더냐?”
“…….”
“왜?”
“뭐, 그러니까…….”
“한동안 나를 못 보았더니, 행여 보고 싶어지기라도 한 것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시오. 그건 그냥…… 맞습니다! 매일 보던 이웃집 말복이가 갑자기 안 보이면 궁금한 심정 같은 겁니다. 그런 티끌처럼 사소한 마음으로 물어봤던 것뿐입니다.”
영의 농에 라온이 버럭 소리쳤다.
그러다 제 반응이 너무 과했다 생각되었는지 서둘러 돌아앉아 애먼 서책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힐끗, 곁눈질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영은 소리 없이 웃었다.
저놈 하는 짓이 날이 갈수록 귀엽게만 느껴진다.
그러다 그는 정색했다.
저 녀석만 보면 자꾸만 웃게 되니.
이곳에 더 있다간 저 이상한 녀석의 마수에 영영 사로잡힐 것 같아 영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벌써 가는 거야?”
영이 자선당 솟을대문을 막 벗어날 때였다.
문득 담벼락 위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온 것이냐?”
“…….”
대답 대신 병연은 훌쩍 영의 옆자리로 뛰어내렸다.
“왔으면 들어오질 않고서.”
병연은 대답 대신 자선당 안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좀 더 놀다 가시지. 저 녀석, 제법 저하를 기다리던 눈치던데.”
“그래?”
버럭 성을 내던 라온을 떠올리며 영은 흐리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병연에게 물었다.
“그런데 혹시 말복이가 뉘인지 아느냐?”
“……큭."
병연에게서 옴쳐드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야? 왜 웃는 것이냐? 대체 말복이가 누군데?”
“저 녀석 이웃집에서 기르던 개 이름이라고 하더군.”
“무어라?”
영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감히 왕세자인 나를 한낱 개와 비교해?
만약 다른 이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면, 당장에 치도곤을 내렸을 터.
감히 왕세자를 농락한 죄를 물어 참수를 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작 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저 맹랑한 녀석의 하는 짓이 참으로 기가 막혔지만, 밉지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정말 이상한 일.
***
영을 배웅한 병연이 자선당 안으로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한 시진 후였다.
방 안에 들어서자 책상에 얼굴을 묻고 있는 라온의 뒷모습이 그의 시야에 맺혔다.
“홍라온.”
병연은 무릎을 굽힌 채 라온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밖에서 라온과 영의 대화를 모두 들었던 터라.
라온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예전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이 척박한 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발버둥치는 녀석이 오늘따라 더 안쓰럽게 느껴졌다.
“이봐, 홍라온.”
병연은 라온의 어깨를 조심스레 흔들었다.
“단희야, 조금만 기다려……. 어머니, 어떻게든 보러 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라온이 낮게 잠꼬대를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병연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야? 장원하겠다며 큰 소리 치더니, 그세 잠든 거야?"
피곤하기도 할 터였다.
이 작은 몸으로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종종 걸음 쳤으니.
어디 그뿐일까?
요즘은 잠자기 직전까지 책과 씨름하고 있었다.
병연은 요 며칠 라온이 공부하던 책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돌연 세필 붓을 집어 들었다.
예전엔 이 붓이 내 팔과 같았는데, 이젠 전혀 생소한 것처럼 어색하기만 했다.
병연은 고개를 돌려 잠든 라온의 얼굴을 보았다.
무슨 꿈을 꾸는지, 라온이 해사하게 웃었다.
아마 꿈속에서 그리운 가족들과 재회한 모양이다.
그 모습에 병연은 웃고 말았다.
저 작은 녀석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저리도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이까짓 것이 뭐라고 이리 연연해하는 것일까.
이윽고.
결심을 굳힌 병연이 들고 있던 세필붓을 거침없이 놀리기 시작했다.
라온이 작은 머리를 굴리며 그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공자님의 말씀이 단숨에 이해하기 쉽게 풀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