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장 내관의 근심
마종자가 소환내시들을 이끌고 간 곳은 궁의 무기고였다.
무기고 앞에는 열 대 가량의 수레가 서 있었다.
수레 안에는 무기고로 날라야 할 창(槍)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다들 뭐하고 있는 것이냐? 한 시각 안에 무기고 안의 무기를 정리하고, 수레에 있는 창을 모두 안으로 옮겨 놓도록 해라.”
마종자가 멀뚱히 서 있는 소환내시들을 재촉했다.
궁의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것이 내시들의 주된 업무라는 사실은 진즉에 알았다.
하지만 그 온갖 허드렛일 중에서도 힘들고, 위험하고, 더러운 일에 불려가는 것은 다름 아닌 교육장에서 불통을 맞은 소환내시들이었다.
어제는 궁궐 전각에 앉은 새똥 치우는 일을 하라고 하더니, 오늘은 무기고 안을 청소하고 새로 들여온 창을 들여놓으라고 한다.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무기고 안을 들여다보며 소환내시들은 울상을 지었다.
“어찌하여 표정들이 그러하냐? 그리 억울하면 너희들도 통을 받으면 될 것이 아니더냐?”
비아냥거리던 마종자가 라온을 향해 눈알을 번뜩였다.
“농땡이 부리는 놈이 있으면 가만 안 둘 것이다. 꼭 한 시각 뒤에 다시 돌아오마. 그때까지도 일을 끝마치지 않으면 다들 경을 칠 것이야.”
단단히 으름장을 놓은 마종자는 부러 라온의 어깨를 툭 치고는 저쪽 끝으로 사라졌다.
“저런 개종자를 보았나.”
그의 뒷모습을 향해 도기가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자네,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마종자에게 치인 어깨가 조금 시큰 거리긴 했지만, 일을 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어서 움직여야겠습니다. 행여, 시간 안에 일을 못 끝내면 또 무슨 불벼락이 떨어지질 모르지 않겠습니까?”
라온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먼지 자욱한 무기고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삼놈이 아니여?”
친숙한 이름을 들었을 때, 라온은 처음엔 무에 잘못 들었나 생각했다.
무기고 청소를 끝내고, 새로 들여온 창을 들여놓는 일을 하는 중이었다.
“이봐, 삼놈이.”
툭, 어깨를 치는 강한 힘에 라온은 고개를 돌렸다.
험악한 인상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허 서방 아저씨?”
반촌에서 대장간을 하는 허 서방이었다.
“정말 허 서방 아저씨세요?”
“자네야말로 내가 아는 삼놈이가 맞는 것이여?”
허 서방이 두툼한 손등으로 연신 눈을 비비며 물었다.
“네. 아저씨. 저 삼놈이입니다.”
“아이고, 삼놈이! 자네가 없어져 운종가 사람들이 을매나 섭섭해 했는 줄 알어? 그나저나 어쩌다 내시가 된 것이여?”
“뭐, 그리 되었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잘 지내지. 그러는 자네는? 잘 지내는 것이여? 누가 괴롭히는 놈은 없는 것이여?”
허 서방이 험악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부러 큰 소리로 소리쳤다.
“그런 사람 없어요.”
있다하면 정말 누군가의 멱살이라도 잡을 태세라.
라온은 서둘러 허 서방을 조용한 자리로 데리고 갔다.
물어볼 말이 있었던 까닭이다.
“허 서방 아저씨, 혹시 우리 어머니 뵌 적 있으세요?”
혹시나 해서 물어본 말에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있다 뿐이여?”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 어머닐 뵌 적이 있어요?”
“삼놈이, 자네 어머니, 지난달부터 구 영감 담뱃가게로 나와 일을 시작했다니께.”
“울 어머니가 구 영감님 담뱃가게에요? 무슨 일을 하신데요? 아니, 그보다 우리 단희는 어찌하고 어머니가 일을 다니는 겁니까? 우리 단희의 병세는 차도가 있다 합니까?”
봇물처럼 터져 나온 라온의 물음에 허 서방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미련한 얼굴로 눈만 끔뻑대던 허 서방이 말했다.
“한 번에 한 가지씩만 물어봐. 숨넘어가겠네.”
말은 그리 하지만 라온의 마음일랑은 이해하고도 남음이었다.
잠시 사람 좋은 웃음을 벙싯 웃던 허 서방이 라온의 물음에 하나하나 답을 시작했다.
“자네가 그리 갑자기 사라지고, 사흘이 멀다 하고 운종가 사람들이 구 영감을 들들 볶아대지 않았것어. 삼놈이 자네 찾아내라고 말이여. 참다참다 구 영감이 자네 집을 찾아 간 모양이여. 거기서 자네 어머니를 만났고, 삼놈이 자네가 누이 치료비 땜시 집 떠난 것도 알게 됐지. 구 영감이 보니 자네 어머니와 누이 사는 모습이 영 퍽퍽해보였던 모양이여. 그래서 자네 어머니께 적당한 일을 마련해준 거란 말이시.”
“구 영감님이요……?”
라온의 눈에 금세 슴벅한 물기가 들어찼다.
“감사하다고, 그 은혜, 절대 잊지 않겠다고 전해주세요.”
“그간 자네 덕분에 장사가 제법 솔찬히 됐던 모양이여. 그러니 그리 부담 갖지 말어.”
“그런데 아저씨, 혹시 우리 단희 소식은 모르세요?”
“왜 모르것어? 자네 어머니 따라 구 영감 담뱃가게로 함께 나오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지.”
“그래요? 그럼 우리 단희, 그리 돌아다녀도 될 만큼 몸이 좋아졌단 말입니까?”
“그런 속사정이야 내가 우째 알겠는가? 그런데 말이여, 이런 말해도 될란가 모르것어.”
“뭔데요?”
“삼놈이, 자네 누이 말이여.”
“네. 우리 단희가 왜요?”
“낯빛이 영 안 좋아.”
“네?”
“금방 죽을 사람처럼 낯빛이 아주 회반죽색이여. 거기다 삐쩍 곯은 것이, 영 사람 구실 못혀게 보인다고 여편네가 씨불여대더라고.”
“우리 단희가 그렇단 말입니까?”
쿵, 심장이 천길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신의의 치료로 병이 말끔하게 나았던 게 아니었어?
그 뒤로도 허 서방이 무어라 연신 말을 했지만, 더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궁궐의 높은 담벼락 너머, 먼 허공을 응시하던 라온이 허 서방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저씨, 부탁 하나만 드릴게요.”
“뭐시여? 삼놈이 부탁이라면, 목숨 내 달라는 부탁만 아니면 다 들어줄 것이여.”
“우리 어머니께 저 잘 지내고 있다고, 그러니 걱정 마시라고 전해주세요.”
“암만. 그런 건 부탁 안 해도 전해주고 말고.”
“그리고…… 다시 궁에 들어오실 땐, 우리 단희 소식 좀 제게 전해주시겠습니까?”
라온의 말에 허 서방이 난처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것이 말이여. 그건 좀 곤란하겠는데.”
“왜요?”
“이번엔 방 영감이 아프다고 해서 대신 들어오긴 했는데 말이여. 이 궁이란 것이 나 같은 것이 들어오고 싶다고 해서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말이시. 언제 들어올 수 있을지 영 기약을 할 수가 없다니께.”
허 서방이 오늘 궁에 들어온 것은 병조에 창을 납품하던 방 영감이 갑작스런 복통으로 궁에 들어올 형편이 안 되어 대신 들어왔던 것이다.
당연히 훗날을 기약할 수 없었다.
“그렇습니까?”
“그리 궁금하면 삼놈이 자네가 나오면 되질 않겠는가?”
“제가요?”
“내시라고 모두들 궁에만 붙박여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던데. 내시마을에 사는 내시들은 궁으로 출퇴근한다고 하던데 말이시.”
“그래요?”
“한번 알아봐. 분명 궁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여.”
“그래야겠네요. 한번 알아봐야겠어요. 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
라온의 머릿속으로 그 방법을 알고 있을 법한 한 사람이 떠올랐다.
***
동궁전에서 후원으로 이어지는 길.
울울창창한 나무 숲 사이로 작은 오솔길이 나 있었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며 라온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 어디쯤 계시다고 하던데.”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얼마쯤 걸었을까?
커다란 바위 뒤편에서 작은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라온은 그림자를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장 내관님!”
바위 뒤, 땅바닥에 연신 뭔가를 썼다 지우던 장 내관은 느닷없는 부름에 놀라 바닥으로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다.
“아이쿠, 홍 내관.”
“놀랐습니까? 어디 다치진 않으셨습니까?”
“아니, 아니. 괜찮아요.”
서둘러 몸을 일으킨 장 내관은 발끝으로 바닥을 황급히 쓸었다.
덕분에 바닥에 써져 있던 글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체 뭘 저리 열심히 쓰고 계셨던 것일까?’
궁금했지만 애써 감추는 듯한 모습에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홍 내관, 예까지는 무슨 일이오? 혹여 나를 찾아온 것이오?”
“네. 여쭤볼 말이 있어서요. 그런데…….”
말끝을 흐리며 라온은 장 내관의 표정을 살폈다.
“장 내관님. 어찌 그리 풀 죽은 모습이옵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으시옵니까?”
요즘 장 내관은 세자저하의 침소를 청소하고 있었다.
세자저하의 까다로운 성정을 흡족케 한 장 내관의 야무진 손에 대한 소문으로 한동안 궁궐이 시끄러웠다.
더러는 언제쯤 장 내관이 동궁전 밖으로 패대기쳐질까 기대하는 사특한 무리도 있었지만.
그러나 장 내관은 보란 듯 아직까지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런 장 내관의 표정이 어찌 저러실까?
“혹여, 세자저하께 꾸지람이라도 들으신 것이옵니까?”
바위 한쪽에 걸터앉으며 라온이 물었다.
장 내관은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라온의 곁에 나란히 앉았다.
“하오면 왜 그러십니까?”
“걱정이오.”
“무엇이요?”
“세자저하 말이오.”
“저하께서 왜요?”
“나만 보면 자꾸만 한숨을 내쉰단 말이외다.”
“한숨을요?”
“그렇소. 그뿐이면 내가 이리 고민도 하지 않을 게요.”
“그럼 또 무슨 일이 있사옵니까?”
“저하께서 자꾸만 내 신상에 대해 꼬치꼬치 하문하시지 뭐요.”
“네? 저하께서 왜 장 내관님의 신상을 물으신단 말이옵니까?”
“그러니까 나도 그 연유를 모르겠단 말이오. 자꾸만 내가 뉘와 친한 것인지, 아침이면 누구를 만나는지, 자선당엔 매일 가는 것인지. 하문하시고 또 하문하시니……에휴.”
왕세자께서 궁금해 하는 것이 사실은 자신이 아니라 라온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장 내관은 고개를 흔들며 연신 한숨을 쉬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내,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려 했는데, 어쩌다 그만 세자저하의 마음까지 흔들어 놓고 말았나 봅니다.”
착각의 늪에 단단히 빠진 장 내관이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라온은 두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설마요. 장 내관님이 무얼 착각하신 것이 아니옵니까?”
“아니에요. 아닙니다. 내 직감 상 틀림없소.”
“그럼 정말 세자저하께서 장 내관님을?”
“아무래도 그런 것 같소.”
“하지만 저하께서 무엇이 아쉬워서……. 세자저하께서 정말 그러하단 말씀이옵니까?”
도무지 믿기지 않는지라, 라온이 다시 한 번 장 내관에게 물었다.
“한두 번 관심을 보이셨으면 내가 말을 안 하오. 매일이라오. 내 세자저하의 침소를 청소하기 시작한 이후로 곧잘 내 일상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으신단 말이외다.”
“그렇군요. 다른 분도 아니고 세자 저하라니. 장 내관님, 정말 고민이 많으시겠습니다.”
“고민이 많지요. 고민이 많아요. 아무리 군주는 무치(無恥)라 하지만. 옛 부터 임금이 여인에게 빠지면 나라가 기울고, 환관에게 빠지면 역사가 흔들린다 하질 않았소. 아! 이래서 조용히 그림자처럼 살려 했는데, 기어이 일을 벌이고 말았어요. 이를 어찌해야 할까요.”
이해 할 수 있다는 듯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난감하시겠습니다. 제가 아는 분도 취향이 그쪽이라 참으로 난감했었답니다."
라온은 영을 떠올렸다.
화초 서생.
독특한 취향만 아니면 정말로 완벽한 사내인데.
아무래도 세자저하 역시 화초서생처럼 특별한 취향을 가진 분이신 것 같다.
그런데 의외로 그런 사내가 꽤 되나보네?
“헌데, 홍 내관. 좀 전에 보니 표정이 좋지 않던데.”
“여쭤볼 말이 있어 장 내관님을 찾던 중이었사옵니다.”
“나를요?”
“네. 오늘 우연히, 궁에 들어오기 전에 알던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요?”
“덕분에 우리 어머니와 어린 누이의 소식도 전해 듣게 되었고요.”
“아, 그러고 보니, 홍 내관에겐 나이 든 노모와 병든 누이가 있다고 했었지요.”
“네. 세상천지에 믿고 의지할 사람이라곤 저말고는 아무도 없는 사람들이옵니다. 이리 궁에 들어와 나가질 못하고 있으니, 우리 어머니와 단희, 잘 지내는지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오늘 듣자하니 우리 단희의 낯빛이 영 좋질 못하다고 하니…….”
“그리 걱정이 된다면 집엘 한번 다녀오면 되질 않겠소?”
뭐가 그리 걱정이라는 투로 장 내관이 말했다.
순간, 라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다녀올 수가 있습니까?”
“당연하지요. 통부(通符)만 있으면 언제든지 궁을 드나들 수 있소. 그렇지 않다면 궁 밖에 살고 있는 출입번 내시들이 어찌 궁을 그리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겠어요. 안 그렇소?”
장 내관의 말에 라온의 심장이 기대감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통부만 있으면 언제라도 궁을 드나들 수 있단 말이지요?”
“당연하지요.”
“그 통부, 어디가면 받을 수 있사옵니까?”
“왜요? 홍 내관도 받게요?”
“네. 궁 밖에 나가봐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옵니다.”
“허나…….”
“허나?”
“안타깝게도 홍 내관과 같은 소환내시들은 특별한 명이 있을 때만 통부를 받을 수 있지요.”
“네?”
잔뜩 기대하다가 안 된다는 말이 들려오자 맥이 탁 풀려버렸다.
“그러나 받을 수 있는 방도가 있어요.”
“그 방도가 무엇입니까?”
다시 귀를 쫑긋 세운 라온이 눈빛을 반짝였다.
“뭐,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니. 쉬이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 쉬운 방도가 무엇이옵니까?”
“곧 소환내시들을 상대로 강경이 있질 않소.”
“네. 이달 말에 있습니다.”
“거기서 장원을 한 소환내시에겐 집에 하루 다녀올 수 있도록 통부를 발부해 주는 것이 내시부의 관례라오.”
“……."
그게 쉬운 방도이옵니까?
“그 방도밖에는 없는 것이옵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웃전의 특별한 명으로 통부를 받는 것?”
“웃전께서 절 아실 리 없으니, 특별한 명을 받을 수도 없겠네요. 그것 외에는 없사옵니까?”
“그것 외에는……없소. 그러니 정히 궁 밖으로 나가고 싶다면 공부하시오, 공부.”
결국, 다른 방법은 없다는 말.
강경에서 장원하는 것, 그 외에는 어머니와 단희를 만나러 궁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그렇다면 까짓 거, 하면 되지. 장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라 하셨다.
정신만 한데 모은다면 못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지만…….
해야 할 공부의 양을 생각하던 라온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장 내관이 어깨를 두드리며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홍 내관, 너무 걱정 마시오. 글자 몇 개만 외우면 되는 것인데. 어려울 것이 무에 있겠소?”
“그러는 장 내관님께선 몇 번이나 장원을 해 보셨사옵니까?”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서며 장 내관이 변명하듯 덧붙였다.
“집보다 궁이 좋은 사람이라오. 하하하.”
장 내관이 목젖이 보일 듯 크게 웃어젖혔다.
“…….”
말은 그야말로 청산유수.
라온은 먼 허공으로 시선을 돌려 장 내관의 웃는 얼굴을 외면했다.
***
같은 시각.
후원으로 가벼운 산보를 나온 영은 굳어진 얼굴로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저 멀리 바위 뒤에서 장 내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라온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하필이면…….”
이곳에서 라온과 마주칠 줄이야.
이곳은 궁이고, 환관인 라온이 궁을 활보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이 시각, 이 자리에 저 녀석이 있는 것인지.
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시선이 녀석에게로 향한다.
보는 재미가 있는 녀석이었다.
여인이 아님에도 자꾸만 눈길을 끄는 것을 보면 신기할 노릇이다. 녀석을 보면 자꾸만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도니.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차가운 사람이어야 한다. 녀석으로 인해 그의 오랜 계획이 무너지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몸을 돌리던 영은 문득 자신이 입술을 만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은 어쩌면 불가항력(不可抗力)이 아닐까?
“율아.”
영은 허공을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자 나선 산보라 주위를 지키는 자라고는 세자익위사의 우익위 한율 하나밖에 없었다.
그의 조용한 부름에 붉은 무관복 차림의 사내가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너라면 어찌 하겠느냐?”
“무엇을 말이옵니까?”
“마주하기 불편한 상대가 생겼을 때, 너라면 어찌하겠느냐?”
주군의 물음에 율이 조용한 눈매를 치켜들었다.
“소신이라면…….”
제 주군의 시선을 좇아 눈동자를 옮기며 율이 말을 이었다.
“싸워야 할 상대라면 힘껏 싸울 것이옵니다. 그리고도 아니 된다면 흐름에 순응해야겠지요.”
“그렇겠지? 이리 피해 다녀도 자꾸만 부딪힌다면, 사내답게 맞서 이겨내는 것이 옳은 것이리라.”
영은 라온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둬들이며 명쾌하게 읊조렸다.
지금껏 흐릿했던 머릿속이 일순간에 맑아진 기분이다.
피할 수 없다면 제대로 맞서 이겨내는 것도 한 방법일 터.
그래도 아니 된다면.
‘그래, 가끔씩은…… 아주 가끔씩은 바람이 흔드는 대로 몸을 맡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동궁전으로 돌아가는 영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
일을 마치고 자선당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라온은 병연부터 찾았다.
“김 형, 김 형!”
언제나 대들보 위에서 하는 일없이 잠만 자던 병연은 자선당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김 형, 대체 어디 가신 것입니까?”
손에 들고 있는 책의 무게가 오늘따라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러나 낙담하지는 않았다.
강경까지는 앞으로 닷새.
아직 시간은 있었다.
가장 시급한 것은 뜻풀이였다.
의미를 알아야 문장을 외우는 것도 한결 수월해 질 터.
“김 형이 돌아오는 대로 김 형과 머리를 맞대고 의미풀이를 하면 되는 거야. 지금까지처럼만 하면 사흘 안으로 이 책의 뜻풀이를 마칠 수 있을 것이고, 남은 이틀 동안 달달 외우면 되는 거지. 그래, 장 내관님 말씀대로 글자 몇 개 외우는 일인데 까짓, 장원이 무에 대수겠어? 할 수 있어, 홍라온. 넌 잘 할 수 있을 거야!”
스스로를 격려하며 라온은 의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멀리서 인경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올 때까지도 병연은 돌아오지 않았다.
빼곡하게 글씨가 써진 책장을 넘기며 라온은 긴 한숨을 흘렸다.
언제 이 많은 구절들의 의미를 해석한단 말인가.
그래도 내내 낙심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는 데까지 해 봐야지."
나지막하게 읊조리며 라온은 책장을 넘겼다.
그러나 채 몇 장이 넘어가기도 전에 라온의 고개가 옆으로 갸우뚱 기울어졌다. 곤한 일상에 지친 몸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잠의 나락으로 그녀를 이끌었던 것이다.
쿵.
서책 위로 라온의 고개가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자선당의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