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15화 (15/131)

15. 그들이 사는 세상 (中)

라온은 마 내관을 따라 동궁전으로 향했다.

“우와.”

동궁전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라온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동궁전 소속의 내시였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안으로 발을 디뎌보지 못한 라온의 앞에 또 하나의 완벽한 세계가 펼쳐졌다.

한 나라의 국본, 다음 보위를 이을 왕세자의 거처인 동궁전.

투명한 황금빛 아침 햇살이 길게 드리워진 그곳은 궁궐의 엄격한 격(格)과 식(式)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붉게 옻칠한 기둥에서 위엄이 느껴졌다.

동서남북 사방에 놓인 기물들은 하나같이 정갈하고 우아했다.

생명이 없는 사물마저도 어떤 우월감을 띠고 있었다.

비범함을 넘어선 그 어떤 경이로움이 라온의 목을 옥죄었다.

흡사 이 세상이 아닌 땅에 발을 디디는 기분이다.

문 앞을 지키는 문차비는 물론이고, 노둣돌 아래 허리를 조아리고 있는 어린 나인들의 얼굴에서도 존귀한 분을 모시는 자 특유의 자긍심이 느껴졌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라온은 마 내관을 따라 성정각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세자저하의 침소에 다다르자 중년의 상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은 이 아이인가?”

동궁전의 한 상궁은 미덥지 못한 시선으로 라온을 위아래로 훑었다.

“성 내관께서 특별히 보낸 아이입니다.”

“그런가?”

마종자의 말에 한 상궁이 알만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을 바라보는 한 상궁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세자저하의 서연(書筵:왕세자에게 경서를 강론하는 자리)이 끝나는 진시초(辰時初:아침 7시)까지는 청소를 마쳐야 한다. 그러니 서둘러라.”

짧게 명을 내린 한 상궁은 마 내관과 함께 회랑 저편으로 사라졌다.

나인들마저 그 뒤를 쫓아가니, 침소엔 라온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무얼,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하나?

라온이 난감해할 찰나였다.

“홍 내관!”

등 뒤에서 장 내관이 불쑥 나타났다.

“장 내관님이 아니시옵니까?”

장 내관이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있을까?

라온은 타향에서 고향사람이라도 만난 듯 장 내관을 반겼다.

“장 내관님께서 이곳엔 웬일이십니까?”

“그새 잊으셨소? 나 역시 이곳, 동궁전 소속의 내관이라는 것을요.”

아참, 깜빡 잊고 있었다.

이 살벌한 동궁전에서 5년이나 버터 낸 유일한 내관이 바로 장 내관이라는 사실을.

그리 오래 버틸 수 있었던 방법은 오직 하나, 눈에 띄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과연, 라온은 이곳으로 오는 동안 장 내관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심지어 같은 방에 있으면서도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홍 내관, 그러는 홍 내관은 여기에 무슨 일이오?”

“저하의 침소를 청소하라는 명을 받았사옵니다.”

“홍 내관이?”

장 내관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네?”

“저하의 침소는 아무나 청소할 수 있는 곳이 아니오. 아, 그렇다고 홍 내관이 아무나란 뜻은 아니지만…… 그래도 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이가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닌데.”

잠시 생각하던 장 내관은 뭔가 짚이는 것이 있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이런이런.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는가 보군.”

“…….”

네. 성 내관이라는 첫 단추를 잘못 꿴 덕분이지요.

그런데…….

“어쩌다 세자저하의 침소청소가 뭔가 큰 잘못을 한 사람에게 내리는 벌이 된 것이옵니까?”

“내 진즉에 말하지 않았소. 우리 세자저하, 매사에 자로 잰 듯 철두철미하시니. 침소의 청소라고 다를 리 있겠소? 그분의 마음에 흡족할 만한 청소를 할 수 있는 환관이 이 궁 안에 없을 지경이라오.”

“그 정도입니까?”

그냥 청소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

어쩐지 세자저하 침소 청소한다는 말에 다들 놀라는 표정이더라니.

이제 어찌한다?

라온이 걱정하고 있자니, 처세술의 달인 장 내관이 어깨를 펴며 큰 소리쳤다.

“걱정 마시오. 내가 누구요? 무려 5년이나 이 동궁전에서 버텨낸 장 내관이오. 이제부터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시오.”

“말씀만 하십시오.”

라온은 비장한 표정으로 소매를 걷어 올렸다.

“우선 문을 열어 환기부터 해야 합니다.”

창을 열던 라온이 장 내관에게 물었다.

“물건의 위치도 미리 기억해 놓는 게 좋겠지요?”

자로 잰 듯 철두철미하다 했으니, 물건의 위치가 조금도 어긋나면 안 될 것이다.

장 내관이 배시시 웃었다.

“그리 말할 줄 알았소. 이곳을 청소하다 혼찌검이 난 내관들이 모두 그리 생각했지요. 방 안의 물건 위치를 속속들이 기억하고, 먼지만 털어내고 본래 자리에 고스란히 놓는다. 다들 이렇게 단순히 생각하였지요.”

“아니옵니까?”

“당연히 아니지요. 중요한 건…… 사물의 배치가 이치를 따르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겁니다.”

“조화라고요?”

라온은 아리송해졌다.

고작 청소를 하는데, 이치를 따르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니.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자, 자세한 것은 청소를 하면서 설명하겠소이다. 일단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세자 저하께서 침소에 드시는 시각이오.”

“설마, 시각에 따라 물건의 위치도 달라진단 말씀이옵니까?”

“당연히 달라지지요. 아침에 쓰는 물건과 저녁나절에 쓰는 물건이 다르니, 당연한 것이 아니겠소?”

생각해보니 그렇다.

“염두 해 두어야 할 것은 시각만이 아니에요. 계절과 날씨도 신경을 써야하지요.”

이제야 그가 말한 이치와 조화가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장 내관의 조언에 라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머릿속에 새겨놓듯 세자의 침소를 하나하나 훑기 시작했다.

보료 뒤에 놓인 십장생 병풍은 물론이고 방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서로 묘하게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가 조금 이상하다?

장 내관을 비롯한 다른 환관들은 분명 세자저하께서 철두철미하신 분이라고 했다. 자로 잰 듯 반듯하며 궁의 격식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불호령을 내리는 깐깐한 분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침소 곳곳에서 그런 완벽한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질서가 눈에 띄었다.

침소에 배여 있는 은은한 잔향이 어쩐지 다른 이들이 말하는 세자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채 라온은 문갑 아래쪽의 먼지를 털어냈다.

그때였다.

조용하던 침소 밖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이내 또르르르 발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회랑 저편으로 사라져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던 나인들과 상궁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언제 자리를 비웠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제 자리를 지키고 섰다.

느슨했던 공기가 갑자기 팽팽하게 조여 왔다.

다들 왜들 저러지?

궁금해 하는 찰나.

“세자저하 납시오.”

중금의 낭랑한 외침소리가 라온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세자저하?

궁인들의 저승사자이자 이 완벽한 세계의 주인이신 분이 납시었단 말이야?

라온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상궁들과 내관들을 멍하니 응시했다.

“뭘 그리 멀뚱히 있는 게냐? 서둘러 머리를 조아리지 않고.”

그때 한 상궁이 낮은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처세술의 달인 장 내관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라온은 급히 장 내관의 옆자리에 앉아 머리를 숙였다.

이윽고, 벌컥 문이 열리고 아침 바람이 침소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거침없는 발자국소리와 함께 허공에 사각사각 비단자락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하얀 버선발이 라온을 지나쳐 침소 안쪽으로 사라졌다.

“이것이 여기 있었구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침소에 차가운 목소리가 파문을 일으켰다.

세자저하께선 잊고 있던 물건을 가지러 되돌아오신 듯했다.

이윽고 다시 방을 가로지르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가신 것일까?’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라온이 곁눈질로 동태를 살필 때였다.

저벅저벅저벅.

거침없는 발소리가 다시 방으로 되돌아왔다.

‘뭘 또 잊으신 것일까?’

궁금해 하는 라온의 앞에 하얀 버선발이 멈춰 섰다.

***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라온의 코끝으로 은은한 여름 꽃향기가 스며들었다.

이윽고.

마음을 흔들리게 만드는 아릿한 향기 사이로 세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문갑, 좌측으로 벗어났다.”

세자의 날카로운 지적에 라온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추궁하는 듯한 물음이 이어졌다.

“몰라 그리 한 것 같진 않고.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

목덜미로 떨어지는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 라온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여, 제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 미처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 방에 들어온 순간, 모든 물건이 가장 합리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사옵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처럼 말이옵니다.”

“있어야 할 자리? 허면, 지금 그곳이 그 문갑이 있어야 할 자리더냐?”

“그렇다고 생각하였사옵니다.”

“그래?”

세자의 목소리가 일순 뚝하고 끊겼다.

“…….”

죽었다.

딴에는 사물의 이치와 조화를 염두에 두고 한 행동인데, 아무래도 귀한 분의 심기를 언짢게 한 것 같았다.

저 까다로우신 분의 눈에 걸렸으니, 이제 내동댕이쳐질 일만 남았구나.

궁에 들어온 첫날, 동궁전 밖으로 내동댕이쳐지던 성 내관의 모습이 라온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내던져지면 무척 아프겠지?

긴장감에 심장이 야생마처럼 날뛰었다.

라온은 두 눈을 질끈 감고 곧 이어 있을 날벼락을 준비했다.

그러나…….

하얀 버선발은 라온의 앞에서 잠시 서성이다 그대로 침소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응? 이걸로 끝?

뭐야? 듣던 거보다 까칠하신 분은 아닌 거 같은데?

라온은 문득 세자가 나간 처소 밖을 응시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아까 말씀하시던 세자저하의 목소리…… 어쩐지 귀에 익은 듯한데…….

대체 누구지?

***

아청색의 익선관과 가슴에 황금빛 금사조원룡보가 수놓인 곤룡포를 입은 왕세자 영은 턱을 괸 채 생각에 빠져 있었다.

서연을 위해 몸은 성정각에 와 있지만, 그의 생각은 라온이 있는 자신의 침소에 머물러 있었다.

녀석이 왜 내 침소에 있었을까.

보아하니 청소를 하는 듯했는데.

녀석이 벌써 그 정도로 신임을 얻었단 말인가?

세자의 침소에 출입할 수 있는 환관은 적어도 동궁전 섭리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 자여야 했다.

그런데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라온이 들어오다니.

어찌된 일인지 궁금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 보다 더 큰마음은…….

반가움이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녀석을 보는 순간,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매만지며 빙그레 미소를 짓던 영은 얼른 표정을 굳혔다.

언제부터인가 녀석을 생각하면 절로 입술로 손이 갔다.

녀석의 입술과 마주했던 감촉이 영 지워지지 않았다.

그건 그저 불미한 사고였을 뿐이라며 무감하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근래에는 부러 자선당을 찾지 않기도 했다.

아니, 가끔은 저도 모르게 그곳으로 향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자신을 호되게 나무랐다.

그래서일까?

오늘 뜻하지 않은 녀석의 모습이 너무도 반가웠다.

사내놈을 보고 반갑다는 생각이 들다니.

어이없는 상념에 빠지는 스스로를 질책하며 영은 서책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어느새 그는 다시 라온을 떠올리고 말았다.

저를 향해 무람없이 화초서생이라 부르는 그 녀석이 자꾸만 생각 나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까 침소에서 녀석을 만났을 때, 너무 반가워 하마터면 녀석의 이름을 부를 뻔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녀석에게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세자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녀석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가 되겠지. 내 앞에서 고개 조아리며 나를 두려워하겠지.'

싫다.

녀석의 커다란 눈에 두려움이 깃든다고 생각하니 언짢아졌다.

지금처럼 맹랑하게 구는 것이 백 배는 더 보기 좋으리라.

문득 영의 미려한 얼굴 위로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홍라온, 녀석을 골려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 …….저하. 저하.”

그때 그의 앞에 있던 좌부빈객(左副賓客) 조중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오?”

뒤늦게 정신이 든 영이 좀 전과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보는 이의 심장마저도 얼려버릴 듯한 차가운 얼굴.

그 서늘한 표정을 감히 마주하기 어려워 조중만은 서둘러 머리를 조아렸다.

“서연을 마치겠다고 말씀드렸사옵니다.”

“벌써 시간이 그리 되었소?”

라온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어느새 서연이 끝나 있었다.

천하의 이영에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고작 어린 내관에게 정신이 팔려, 지금 이 자리가 경서를 강론하는 시간이라는 것도 새카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은 황망한 표정이 된 영은 방을 나가는 조중만을 지켜보았다.

좌부빈객이 문 밖으로 사라지기 무섭게 성정각 안으로 늙은 내관이 들어왔다.

동궁전 붙박이, 최 내관이다.

“대추차이옵니다.”

최 내관은 잣을 띠운 붉은 대추차를 영의 앞에 내려놓았다.

대추의 붉은 색이 삿된 것들의 범접을 막고, 대추 특유의 달콤함이 세자저하의 날카로운 신경을 안정시켜 밤잠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길 기원하는 늙은 내관의 마음이 한 잔의 대추차에 담겨있었다.

차를 마시던 영이 문득 최 내관에게 물었다.

“그 일은 어찌 되었느냐?”

앞 뒷말이 모두 생략된 질문이었다.

그러나 용케도 알아들은 최 내관이 서둘러 대답했다.

“이번에도 역시나…….”

“역시 그렇군. 수월하게 성사될 일은 아니었다. 쉽게 포기할 일도 아니고. 다시 한 번 사람을 보내거라.”

“알겠나이다.”

“그리고…….”

“네. 저하.”

“궁녀들의 처우를 개선해야겠다.”

“궁녀들의 처우라 하시었사옵니까?”

세자저하께서 왜 갑자기 궁녀들의 일에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최 내관의 얼굴에 의문이 들어찼다.

“가까운 친족의 상(喪)을 당한 궁녀들에게 보름간의 휴가기간을 주도록 하라. 또한, 장례에 필요한 비용을 융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도록 하라.”

“명 받들겠나이다.”

“이것은 비단 궁녀에게 한하는 것이 아니라, 환관들에게도 적용토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미 왕세자가 참정(參政)한 지 오래라.

세자 영의 말은 이미 왕의 어명이나 진배없었다.

“하나 더!”

“…….”

“내시부에선 아직도 신참례를 거행하는 것이냐?”

속내를 꿰뚫어보는 듯한 눈씨에 최 내관이 고개를 조아렸다.

“아랫것들을 단속한다고 하는데도. 송구하옵나이다.”

“오늘 이후로 새로 들어오는 신래에게 밥풀 하나라도 얻어먹는 자가 있다면 삭탈관직 할 뿐만 아니라 장 백 대로 다스릴 것이라 하라."

“명심하겠나이다.”

머리를 조아리는 최 내관의 머릿속에 불현듯 의아함이 피어올랐다.

명을 내리는 세자저하의 목소리는 분명 차고 시리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저의는 따스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궁녀와 내관들을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얼음 칼날처럼 매사 차고 매섭기만 하셨던 분이 어쩐 일이실까?

동궁전 지밀나인들 말이 요즘은 가끔씩, 아주 가끔씩 혼자 계실 때 느닷없이 미소를 보이시기도 한다고 하였다.

저 얼음 빙벽에 온기가 불기 시작한 연유가 무엇일까?

최 내관은 문득 영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는 잘도 웃으셨는데.

그때는 이리 차가우신 분이 아니셨건만.

그 일만 아니었더라면…….

그때 저하의 곁을 어떻게든 지켰어야 했는데.

늙은 내관의 얼굴에 후회의 빛이 들어찰 때였다.

차를 다 마신 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정각을 나서던 영이 불현듯 최 내관을 돌아보았다.

“앞으로 내 침소의 청소는 오늘 청소를 맡았던 아이에게 맡기고 싶구나.”

“네?”

“제법 손끝이 야무져 뵈더군.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문갑을 옮긴 것이라며 말하던 라온이 떠올랐다. 녀석은 다른 환관들과는 달랐다.

그저 내리는 명에 복종하며 생각이라곤 할 줄 모르는 인형처럼 움직이는 다른 이들과 달리 라온은 제 생각이라는 것을 갖고 있었다.

명을 내린 영은 유쾌한 얼굴로 성정각을 나섰다.

“……명 받들겠나이다.”

검은 곤룡포 자락을 휘날리며 사라지는 주군의 모습이 오늘은 참으로 낯설어 보여 최 내관은 주름진 눈을 연신 깜빡거렸다.

최 내관이 세자를 모신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저하께서 먼저 관심을 기울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당황하던 최 내관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저 분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온풍의 이유가 혹시……!

***

다음날.

이른 아침, 서연을 위해 성정각으로 나갔던 영은 다시 침소로 되돌아왔다.

잊은 것이 있다 핑계를 대었지만 실은 다른 속내가 있음이다.

홍라온, 그 녀석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한창 청소에 열중하고 있을 라온을 떠올리며 영은 침소의 문을 열었다.

저 멀리, 침소 안쪽에 초록색 내시관복이 아른거린다.

침소 안으로 들어서는 영의 입가에 짓궂은 웃음이 내걸렸다.

오늘은 어찌 골려줄까?

고민하는 찰나.

내내 뒷모습만 보이던 환관이 인기척에 황급히 뒤돌아섰다.

순간.

“너, 뭐냐?”

영의 입에서 서늘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뒤돌아 선 환관의 얼굴, 그가 기대했던 라온의 얼굴이 아니었다.

저런 녀석이 있었던가?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의 환관이 서둘러 영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장 내관이라 하옵니다.”

“헌데?”

“네?”

“네가 어찌하여 이곳에 있는 것이더냐?”

“아! 잊으셨사옵니까? 소인, 어제 세자저하께서 특별히 말씀하셨던…….”

장 내관이 열 손가락을 활짝 펼쳐 보이며 말을 이었다.

“손끝 야무진 내관이옵니다.”

일순, 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앞에서 장 내관이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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