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14화 (14/131)

14. 그들이 사는 세상 (上)

태만(怠慢)하면 아니 된다.

탐욕(貪慾)하면 아니 된다.

통정(通情)하면 아니 된다.

망언(妄言)하면 아니 된다.

눈을 감으면(蔽目) 아니 된다.

눈을 뜨면(開目) 아니 된다.

웃으면(譁笑) 아니 된다.

울면(落淚) 아니 된다.

화를 내면(怒) 아니 된다.

감(感)하고, 상(想)하면 아니 된다.

중희당(重熙堂)의 동쪽.

낮은 담벼락을 따라 걷다보면 소박한 중문이 하나 나왔다.

“여긴가?"

중문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라온은 까치발을 들고 담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담장 너머의 너른 마당에 내시관복을 입은 어린 내시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맞게 찾아왔구나.

라온은 방자 형의 행랑채로 둘러싸인 마당으로 들어섰다.

내반원 부속의 이곳은 환적(宦蹟)에 오르지 못한 소환내시들의 생활공간이자 교육장이었다.

19살 이전의 소환내시들은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정식내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라온이 마당으로 들어서자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던 어린 내시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쏠렸다.

더러는 호기심 어린 눈빛도 있었고, 더러는 경계하는 듯도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라온이 주위를 둘러보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허무한 메아리뿐이었다.

환영받지 못한 자리에 초대된 느낌.

머쓱해진 라온은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지은 채 마당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섰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뎅뎅.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징소리에 운집해 있던 백여 명의 소환내시들이 일제히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 하사받은 품계가 없는 임시직이었지만 나름의 서열은 분명히 있었다.

궁에 들어온 순서와 나이, 그리고 모시는 주인의 힘의 크기가 서열을 정하는 기준이었다.

소환내시들은 길게 두 줄로 갈라섰다.

눈치를 살피던 라온도 열의 맨 끝으로 주섬주섬 자리를 옮겼다.

잠시 후.

교육장의 문이 열리고 초로의 환관이 안으로 들어왔다.

일순, 교육장 안에 있던 소환내시들의 등이 일제히 굽혀졌다.

“굽히세요.”

라온이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멀뚱히 서 있자 옆에 있던 통통한 체구의 소환내시가 서둘러 손짓했다.

“네?”

“이렇게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조아리세요."

소환내시의 손짓에 따라 라온 역시 허리를 굽혔다.

뚜벅뚜벅뚜벅.

소환내시들의 교육을 맡고 있는 진 내관은 양 옆으로 길게 도열한 어린내시들의 모습을 예리한 눈빛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정체불명의 말이 새어나왔다.

“통(通).”

낮지만 명료한 목소리.

통을 받은 소환내시는 한껏 의기양양해져 그의 뒤를 따랐다.

그 이후로도 정체불명의 말은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약(略)!”

“조(粗)!”

“불통(不通)!”

약과 조를 받은 내시들 또한 진 내관의 뒤를 따라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불통을 받은 소환내시들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긴 행렬을 이끈 진 내관이 드디어 라온의 앞에 섰다.

“네놈이 홍가 라온이더냐?”

“그러하옵니다.”

일순, 소환내시들 사이에서 작은 술렁거림이 일었다.

자선당의 환관, 홍라온.

그녀의 존재는 궁궐 사람들 사이에서 화젯거리였다. 귀신이 나온다는 자선당에서 벌써 며칠이나 버티고 있는 환관으로.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진 내관이다.

“조용!”

그는 단호한 한 마디로 소환내시들의 술렁거림을 단박에 잠재웠다.

잠잠해진 사위를 둘러보던 진 내관이 못마땅한 시선으로 라온을 훑었다.

그리고 잠시 후.

“복장 불통! 자세 불통! 시선 불통!”

불통이라 쓰인 세 장의 종이가 라온의 이마에 붙여졌다.

“큭큭.”

누군가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진 내관의 매서운 눈초리에 쏙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어린 내시들을 돌아보던 진 내관이 고저 없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환관이란 무릇 궁실의 아침을 열고, 밤을 갈무리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왕과 왕족들의 가장 믿을 수 있는 심부름꾼이며 왕명부터 왕실의 가장 은밀한 이야기까지 알고 있는 자들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 환관들은 궁실의 재산과 치안을 맡고 있으며 후궁들을 보호하고 궁녀들을 관리 감독 한다.”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며 진 내관은 이마에 불통이라 쓰인 종이를 붙이고 있는 내시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시선을 던졌다.

“한 마디로 말해, 환관이란 궁궐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너희가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은 통제이며, 자기 절제다. 하지만 너희들은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안 되는 놈들이다. 특히 너!”

진 내관이 라온을 검지로 가리켰다.

움찔 놀란 라온이 등을 꼿꼿이 편 채 진 내관을 응시했다.

“네 이놈!”

순간, 진 내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무릇 환관이란 절대 등을 곧게 펴서는 아니 된다.”

진 내관의 지적에 라온은 서둘러 등을 굽혔다.

“우리는 왕과 왕족들의 그림자다. 그러니 항상 낮은 자세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또한, 절대 소리 내어 걸어선 아니 된다. 언제나 시선은 발끝으로 향하며, 걸음을 걷는 보폭은 한 자를 넘어서는 아니 되느니. 알겠느냐?”

“명심하겠나이다.”

“좋다. 오늘 불통을 받은 자들은 기본자세로 교육장 마당을 돈다. 불통 한 장에 쉰 바퀴다. 나머지는 모두 나를 따라 오너라.”

진 내관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행랑채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의 뒤를 소환내시들이 종종 걸음으로 뒤따랐다.

그렇게 그들은 찍어내듯 똑같은 자세와 걸음걸이로 사라졌다.

***

“휴.”

내내 긴장하고 있던 라온의 입에서 겨우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랫도리만 자른다고 해서 모두 정식 내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작금의 내시부엔 총 200명가량의 환관들이 있었다.

그들 중 환적에 올라 벼슬을 받은 내시의 수는 고작 62명.

나머지는 벼슬을 받지 못한 소환내시들로, 정식내시가 되기 위해서는 내시부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정식내시가 되기 전까지는 이렇게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환관의 자세와 마음가짐, 그리고 자질향상을 위해 <사서(四書)>와 <소학>, <삼강행실도>등을 교육 받았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시의 마음가짐과 자세였다.

내시부 역사상 가장 엄격하기로 소문난 진 내관은 매일아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소환내시들의 자세를 평가했다.

그는 통, 약, 조, 불통이라는 네 단계로 소환내시들을 평가했고, 불통을 받은 자들은 제대로 된 자세를 갖출 때까지 다른 수업을 받을 수 없었다.

진 내관을 위시한 우등생들의 행렬이 사라지고, 교육장 마당에는 불통을 받은 열등생들만 남았다.

안면이 있는 자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있는 무리의 한가운데.

라온만이 혼자 멀뚱히 서 있다.

모두들 서로 눈치만 살필 뿐 선뜻 라온에게 다가오는 자는 없었다. 다만, 저희들끼리 귓속말을 쑥덕댈 뿐이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통통한 체구의 내시가 라온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대가 홍 내관이군요.”

아까 라온에게 허리를 조아리라고 조언을 해 줬던 환관이었다.

“저는 도기라고 합니다. 올해로 열여덟이 되었지요.”

“홍라온이라 합니다. 저는 열일곱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생긴 것에 비해 나이가 많습니다, 그려. 하하하하, 그런데 내가 한 살이 더 많으니. 내가 형님이 되려나? 그럼 내, 말을 편하게 해도 되겠는가?”

도기는 은근슬쩍 하대(下待)하며 라온의 눈치를 살폈다.

“아, 네. 그러십시오.”

“사실, 내시부 사람들 모두 홍 내관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한다네.”

“그랬습니까?”

“당연하질 않겠는가. 소환내시인데도 불구하고 자선당으로 배치된 것도 그렇고. 게다가 홍 내관이 있는 자선당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는가?”

“자선당 연못에 궁녀가 넷이나 빠져 죽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넷? 나는 여섯으로 들었는데.”

도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

어째 자선당에 빠져 죽은 궁녀의 수가 점점 불어나는 것 같군.

“어찌 되었든 그리 으스스한 곳에서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니. 곱상하게 생긴 것과 달리 배짱이 두둑하구먼.”

“생각보다 그리 으스스한 곳은 아닙니다.”

“그래?”

“네. 한번 와 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것입니다.”

“하하하, 됐네. 홍 내관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굳이 그걸 확인하려고 자선당 안으로 들어가 볼 생각은 없네. 그건 그렇고, 홍 내관. 신참례를 준비하지 않았다고?”

“…….”

“쯧쯧, 어쩌려고 그리하였는가? 무릇 사람은 줄을 잘 타야 한다는 말, 모르는가? 특히 궁처럼 상하, 위계질서가 확실한 곳에서는 누구를 뒷배로 뒀느냐가 앞으로의 인생을 좌우하지"

"그런 것입니까?”

“그렇다니까. 내, 선배 된 입장으로 한 마디 하자면, 지금이라도 신참례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게야. 내시부 어른들 눈 밖에 나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어.”

“하지만 전 신참례를 할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씁쓸한 현실에 라온은 마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허, 홍 내관. 그리 고집 피울 일이 아니라니까. 우리라고 여유가 있어 신참례를 치렀겠는가? 내시부의 관례라고 하니, 하기 싫어도 어쩌겠는가. 하는 수밖에.”

“하지만 아무리 관례라고 해도 그리 큰 부담을 안으면서까지 해야 하는 것이옵니까? 원래 신참례라는 것이 그리 어마어마한 행사였습니까?”

라온의 물음에 도기가 포동포동한 턱살을 긁적였다.

“자네가 그리 물으니 하는 말이네만, 사실 신참례라는 게 환적에 오른 내시들에게나 하던 것이 아니던가.”

“그런 것이었습니까?”

“그렇다네. 원래 신참례란 벼슬길에 오른 사람들이나 하던 일종의 통과의례였다네. 그런데 요즘은 환적에 오르지 못한 소환내시들한테까지 신참례를 강요하고 있다네.”

“그건 올바르지 못한 일이 아닙니까?”

“옳은 일은 아니지. 하지만 그 누구도 이런 부당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네. 왜 그런 줄 아는가?”

“왜 그런 것입니까?”

“괜히 나섰다간 찍히기 십상이거든.”

“네?”

“한번 찍히면 미래가 없는 곳이 바로 궁이란 곳이라네.”

“무시무시하군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궁에서는 첫째도 줄서기요, 둘째도 줄서기야. 줄서기 한번 잘못하는 순간, 만년 소환내시 신세를 벗어나질 못할걸세.”

“아무리 그래도 저는 신참례 준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자네도 참 고집불통이구먼. 아주 고집이 황소고집이야."

쯧쯧 혀를 차던 도기가 불현듯 눈빛을 반짝거렸다.

“혹시 자네…… 무어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겐가?”

“네?”

“듣자하니 자네, 전 판내시부사의 천거로 궁에 들어왔던데.”

“천거가 아니라 사기였습니다.”

“뭐?”

“아, 그런 게 있습니다.”

“자네가 이렇게 배짱 좋게 나가는 이유가 혹여…….”

말끝을 흐리며 주위를 살피던 도기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뒷배를 봐주는 특별한 누군가가 있는 것인가?”

“뒷배를 봐주는 특별한 누군가요?”

“왜 그렇고 그런 사람 있잖은가.”

“그렇고 그런 사람이라면?"

라온이 영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하자 도기가 답답하다 듯 가슴을 쳤다.

“이 궁에 자네가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 있느냐는 말일세.”

“아, 그런 것입니까? 그런 사람이라면 있긴 있습니다.”

“있어? 역시 그럴 줄 알았네.”

도기는 급 호기심을 보이며 라온의 턱밑으로 바싹 다가섰다.

“누군가? 어떤 벼슬을 하시는 분이 자네의 뒷배인가?”

“화초서생과 김 형이라고. 딱히 어떤 벼슬을 하고 계시는 줄은 모르겠지만, 궁에서 제가 의지하는 분들이긴 합니다.”

“뭐라? 어떤 벼슬인지 몰라? 그럼 무슨 일을 하는 줄은 아는가?”

“한 분은 하루 종일 대들보 위에 매달려 계시고, 다른 한 분은 딱히 하는 일은 없어 뵈는데, 항상 바쁘다 하시는 분이시죠.”

“대들보 위? 하는 일이 없어 보여?”

라온의 말에 도기는 흥미가 식은 표정이 되었다.

“들어보니 별 볼 일 없는 양반들 같군.”

“궁에 그런 분들이 많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 두 사람이 뭘 하는 사람들인지 궁금했던 차였다.

라온이 되묻자 도기가 짧은 목을 끄덕이며 알은 체를 했다.

“그런 이들이 더러 있다네. 서얼 출신의 무관이거나 또는 세도가에 줄을 대지 못한 시골출신의 벼슬아치들이 종종 한직으로 물러나 무위도식한다고 들었네.”

“아하. 그렇군요.”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김 형과 화초서생도 나처럼 줄서기를 잘못한 사람들이구나.

어쩐지 두 사람에게서 동변상련의 아픔이 느껴졌다.

라온이 조금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자니 도기가 돌연 손가락 세 개를 펼쳐들었다.

“이 궁에 힘없고, 뒷배 없는 우리 같은 내관들이 조심해야 할 세 사람이 있다네. 첫째가 대비전의 성 내관이시고.”

아, 첫 번째로 조심해야 할 사람에게 벌써 찍혔구나.

라온이 낙심하고 있자니 도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두 번째가 중궁전의 방 내관이시지. 방 내관님으로 말씀드리자면, 이 내시부의 실질적인 1인자시라네. 그리고 세 번째가…….”

도기가 막 말을 하려는 찰나.

앙칼진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곁으로 인상 사나운 환관이 다가왔다.

“거기, 너희 둘. 무슨 수다가 그리 많아? 기본자세로 교육장 마당을 돌라는 명을 잊은 것이냐?”

그 사나운 기세에 도기가 몸을 움츠리며 라온에게 속삭였다.

“저 녀석이라네. 교육생들을 관리하는 마 내관이라는 잔데. 이 궁에서 조심해야 할 세 번째 인물이지. 이름은 마종자, 성질머리 더럽기로 소문난 자라 우리끼린 개종자라고 부른다네. 괜히 부딪히며 일진 사나워지니까 자네도 조심하게나.”

말을 마친 도기는 마 내관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종종 걸음 쳤다.

“거기 너. 첫날부터 농땡이 부릴 생각 하지 마.”

라온의 면전으로 다가온 마 내관이 눈을 부라렸다.

라온을 향한 마 내관의 눈에는 마뜩찮은 기색이 가득했다.

“…….”

어쩐지 나, 조심해야 할 세 번째 사람에게도 벌써 찍힌 느낌인걸.

서둘러 허리를 굽히고 시선을 발끝에 둔 라온은 종종 걸음으로 마당을 돌기 시작했다.

***

환관이란 궁실의 아침을 열고, 밤을 갈무리하는 자들이라는 진 내관의 말은 사실이었다.

고된 일과는 궁문이 닫힌 다음에야 끝이 났다.

지친 몸을 이끌고 자선당으로 돌아오니 대들보 위에서 무심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이제 오는 거냐?”

“네.”

힘없이 대답하며 라온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대들보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김 형.”

“…….”

“김 형께서도 신참례를 안 해서 찍힌 겁니까?”

“무슨 헛소리야?”

“그럼 혹시 서얼 출신이십니까?”

“어디서 무슨 소리라도 들은 것이냐?”

“아니. 궁금해서 그럽니다. 김 형께선 무슨 이유로 이런 폐허에 계시는지 말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역시 대답하기 싫은가 보군.

라온은 대답 듣기를 포기한 채 피곤한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때 대들보 위에서 나직한 읊조림이 들려왔다.

“……나 같은 사람에겐 이런 곳이 어울리니까.”

문득 하던 행동을 멈춘 라온이 고개를 들어 병연을 올려다보았다.

“김 형 같은 분이 어떤 분이신데요?”

“…….”

“김 형.”

“잔다. 더는 귀찮게 하지 마.”

병연은 라온에게서 등을 돌린 채 눈을 감았다.

“김 형.”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로 보이지 않는 단단한 벽이 세워진 듯했다.

그 두텁고 높은 벽 앞에서 라온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소환내시들의 아침은 새벽별이 채 사라지기도 전부터 시작되었다.

희붐한 새벽.

교육장 마당 위로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통! 불통!”

이마에 붙은 두 장의 불통.

그래도 라온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두 장이다. 내반원 백 바퀴만 돌면 된다.

첫날보다 하나 줄어든 불통의 숫자에 라온은 내심 기뻐했다.

“한심한 놈.”

불통을 받고도 저리 해사한 웃음이라니.

한심한 시선으로 라온을 응시하던 진 내관이 예의 우등생 행렬을 이끌고 행랑채 안으로 사라졌다.

그 뒤에다 대고 꾸벅 고개를 숙인 라온은 내시의 기본자세를 취했다.

“허리를 굽히고 시선은 발끝에, 그리고 보폭은 한 자를 넘지 않도록. 절대 발소리를 내지 않는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교육장 마당을 돌기 시작했다.

뒤쪽에선 수다쟁이 도기가 다른 소환내시들과 수다를 떠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궁전의 향금이와 돈화문 수문장이 정분(精分)이 났다는 소문과 함께 향금이의 평소 행실이 입방아에 오르내리는가 싶더니, 이내 이야기는 남녀상열지사로 이어졌다.

누가 누구와 눈이 맞았느니, 누가 누구를 찼다느니 하는 소소한 이야기 끝에 도기가 눈을 반짝이며 새로운 화젯거리를 꺼냈다.

“그런데 상열이. 그 소문은 들었는가?”

“무슨 소문?”

“공주마마의 병세가 심상치가 않은 모양이야.”

“이 사람, 그게 언제적 이야긴데 이제와 새삼스레 말하는가. 공주마마 발병하신 지 여러 날 되었다네.”

“자넨 벌써 알고 있었단 말인가?”

“알다 뿐인가. 공주마마께서 무슨 연유로 그리 자리보존하고 계시는지도 알고 있다네.”

“그 연유가 무엇인가?”

“그건 말이네…….아니, 아니네. 못 들은 걸로 하게나.”

“상열이, 이 사람아. 사람 궁금하게 하고 그러긴가.”

"이건 말하면 안되는데."

“말해보게. 내가 누군가? 나 도기일세. 자네와 제일 가까운 벗, 도기.”

“그래도 이건 비밀이라서 말이야.”

“자네 정말 이러긴가.”

“그럼 자네만 알고 있어야 하네. 이건 절대, 절대 비밀이라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상열이 잔뜩 옴쳐든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 공주마마께선 상사병에 걸리셨다네.”

“상사병?”

“쉿! 이 사람, 목소리가 너무 크네.”

“아, 알았네. 내가 너무 놀라서. 공주마마가 뉘시던가. 세상의 사내들이란 다 발아래로 내려다보시던 도도하신 분이 아니시던가. 그런 도도하신 분이 상사병이라니. 그런데 대체 누굴 연모하시기에 병까지 났단 말인가?"

“그걸 낸들 알겠나. 공주마마께서 조가비처럼 입을 딱 다물고 계시니. 누가 있어 그분의 속내를 알겠는가. 어쨌든 이건 절대 비밀일세.”

“걱정 말게. 내 입이 얼마나 무거운지 자네가 제일 잘 알고 있질 않은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라온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도기를 알게 된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의 입이 얼마나 가벼운지 라온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수다쟁이 도기가 공주마마의 병에 대해 알게 된 이상, 이제 궁에서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게 되리라.

그나저나 귀하디귀하신 공주마마의 마음을 훔친 사내는 대체 뉘일까?

그 귀하신 분께서 상사병까지 걸린 것을 보니 상대는 분명 헌헌장부일 터.

대체 뉘일까?

그 헌헌장부가…….

***

두 내시들의 수다는 그 이후로도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청나라에서 새로 들어온 백분(白粉) 이야기와 웬만해선 맞추기 힘든 세자저하의 까다로운 성정이야기가 이어졌다.

‘사내들의 수다가 끝이 없구나.’

좀처럼 끝나지 않는 두 환관의 대화에 라온은 혀를 내둘렀다.

장 내관을 두고 수다쟁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저 둘에 비하면 장 내관은 그야말로 새발의 피였다.

백 바퀴를 도는 동안 라온은 귀가 닳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덕분에 심심하지는 않았지만, 벌떼가 귓속에 들어온 듯 귀가 멍멍했다.

마당돌기 벌칙을 끝마친 라온은 질린 표정으로 행랑채 툇마루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때, 잠시 한숨 돌리는 그녀에게로 누군가 다가왔다.

라온이 궁에서 피해야 할 세 번째 인물인 마종자였다.

이른 아침부터 잔뜩 일그러진 표정의 마종자가 다짜고짜 라온에게 소리쳤다.

“홍라온.”

“네.”

아“오늘아침 세자저하의 침소 청소는 네가 하라는 성 내관님의 명이시다.”

순간, 수다를 떨던 환관들의 목소리가 뚝 멈췄다.

모두들 숨을 죽인 채 라온을 응시했다.

“……?”

왜 다들 그런 표정이십니까?

라온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송아지를 보는 눈빛이었다.

왜들 저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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