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
그것은 그야말로 찰나지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낙숫물이 ‘똑’ 하고 떨어지는 순간만큼의 짧은 시간.
마른하늘에 번개가 번쩍 치는 찰나.
라온의 입술에 영의 입술이 닿았던 시간은 그렇게 짧았다.
하지만…….
그래도…….
입맞춤이잖아. 그것도 첫 입맞춤.
아직 내 낭군님과도 해 보지 못한 것을 화초서생이 가로채가 버렸다.
용수철처럼 튕겨진 듯 자리에서 일어난 라온은 원망이 가득한 시선으로 영을 노려보았다.
“지금……뭐하는 짓입니까?”
“상처가 있기에 보려던 것뿐이다.”
“거짓말…….”
“뭐라?”
“혹시 딴 마음이 있으셨던 거 아닙니까?”
제 옷고름을 살피며 라온이 말했다.
버릇처럼 영이 미간을 한데로 모았다.
잠시 훑는 시선으로 라온을 응시하던 영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설마…… 너, 내가 너를 어찌하려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아닙니까?”
조심스레 이어진 물음에 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내게도 취향이라는 것이 있다.”
넌 내 취향이 아니라는 뜻.
“그럼 지금 이 상황은 어찌 설명하실 것입니까?”
“사고다.”
“사고요?”
“그래. 어쩌다 생긴 돌발적인 사고. 나는 그저 네 얼굴의 난 상처를 보려 했던 것뿐이고, 그 와중에 네가 고개를 돌려 일어난 돌발적인 사고다.”
“돌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고의적인 거 아닙니까?”
라온은 가재미눈을 한 채 의심의 빛을 거두지 않았다.
“고의라니?”
“그야 뭐…….”
화초서생께선 사내를 연모하는 분이니까요.
차마 뒷말을 할 수가 없기에 라온은 우물우물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곱씹고 곱씹어도 억울한 마음, 한 가득이었다.
그런 라온에게 휙, 등을 돌리며 영이 말했다.
“사내놈이 그깟 일로 종알종알 말도 많구나. 생긴 것만 계집 같은 줄 알았는데, 하는 짓도 영락없이 계집이로구나.”
“…….”
“나 역시도 과히 좋은 기분은 아니다. 그러니 그런 억울한 표정일랑은 그만 둬라.”
“허…….”
‘기분 나쁜 사람이 누군데!’
그러나 예서 한 마디 더 했다간 행여 여인이라고 의심받을 것 같은지라. 라온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은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들끓고 있었다.
하필이면…… 화초서생이라니.
하필이면…… 첫 입맞춤의 상대가 사내를 좋아하는 사내라니.
게다가…….
저런 사내와의 입맞춤에 두근대는 이 물색없는 마음이라니.
잔뜩 억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라온을 뒤로한 채 영은 동창 밖을 응시했다.
그러다 버릇처럼 손등으로 쓱쓱 제 입술을 닦아냈다.
사내와의 입맞춤이라.
그리 유쾌할 것 없는 사고였다.
헌데, 이상한 것은 분명 유쾌한 사건은 아니건만,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거참…….”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미묘한 감정에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차마 속내를 드러내지 못한 영은 괜스레 먼 허공을 응시할 뿐이다.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억울함이 조금은 삭혀지자 이번엔 어색함이라는 감정이 라온을 덮쳐왔다.
입술을 찰나처럼 스치고 지나간 영의 입술이 자꾸만 생각나 두 뺨이 붉어졌다.
“흠흠.”
라온은 괜한 헛기침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해보려 애를 썼다.
그때, 내내 동창 밖을 응시하던 영이 라온을 돌아보았다.
“또 왔구나.”
“무슨 말씀입니까?”
“누각에서 울던 아이 말이다. 또 왔구나.”
영이 잡초로 무성한 자선당 마당을 손가락질했다.
이윽고 마당 저쪽으로 무엇인가 허여멀건한 것이 안개처럼 스며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것이 그 아이가 틀림없습니까?”
라온이 고개를 길게 빼내며 묻자 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다 싶어 라온은 서둘러 방을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영과 한 공간에 있었던 것이 어색했는데, 때마침 적당한 핑계거리가 나타났던 것이다.
“어딜 가는 것이냐?”
“지난번에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왜 울고 있는지 직접 물어보라고요. 이리 왔으니, 물어봐야지요.”
***
라온은 뒤꿈치를 들고 하얀 소복차림을 한 월희의 뒤를 밟았다.
조심조심 한껏 숨을 죽인 채.
그렇게 다다른 곳은 다름 아닌 자선당 동쪽의 누각.
유백색의 달빛이 유성우처럼 쏟아지는 달빛 아래, 오롯이 서 있던 월희는 경계하듯 휘휘 주위를 에둘렀다.
풀숲에 숨어 지켜보던 라온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난밤에 도망가 다시는 아니 올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다시 나타났다. 대체 무얼 하려는 것일까?
궁금해하는 찰나.
지켜보는 이가 없다 생각 한 월희는 안심하고 품에 안고 있던 것을 조심스레 누각 난간 위에 내려놓았다.
깨끗한 물이 담긴 물그릇이었다.
월희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물그릇의 위치를 몇 번이고 옮겼다.
하늘 위의 달이 오롯이 물그릇 속에 담긴 후에야 만족한 듯 월희는 부산한 움직임을 멈췄다.
그것으로 끝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월희는 이번엔 옷매무새를 다듬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하얀 소복에 묻은 먼지를 털고 느슨해진 저고리 고름을 다시 단단히 맨 다음, 바닥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작은 얼굴을 들어 하늘의 달빛을 올려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그 큰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흐르기 시작했다.
“흐윽……. 흑흑…….”
조금은 우습고, 또 어찌 보면 귀엽기까지 한 일련의 과정은 이 설운 울음을 위한 준비과정이었던 것이다.
지켜보던 라온의 표정이 망연해졌다.
한밤의 느닷없는 울음, 저것은 분명…… 망자를 위한 곡이었다.
문득 라온의 뇌리로 영의 목소리가 스치고 지나갔다.
‘달밤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소복을 입은 채 울고 있는 이유라면 단 하나밖에 없을 듯싶구나.’
화초서생은 진즉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저 아이, 아직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서러운 혼령을 위해 울고 있다는 사실을.
라온은 영의 날카로운 관찰력에 감탄하는 한편, 월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월희의 작은 어깨가 바람에 나부끼는 연한 잎새처럼 바들거렸다.
저 흐느끼는 작은 뒤태가 흡사 자신의 어린 동생을 떠올리게 하여 서글펐다.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울지 마십시오.”
저도 모르게 누각 위로 오른 라온이 월희를 향해 속삭였다.
“그만 우세요.”
제 슬픔에 갇혀 금방이라도 바스라 질듯 휘청대는 월희를 향해 라온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흑……!”
문득 울음소리가 뚝하고 멈췄다.
잔뜩 눈물이 고인 채로 월희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내 그녀를 내려다보는 라온과 눈이 마주쳤다.
“아…….”
경계하는 눈빛과 함께 놀란 탄성이 새어나왔다.
“겁내지 마세요, 월희 의녀님.”
“…….”
“자선당을 지키는 환관 홍라온이라고 합니다. 원혼이 아닙니다. 월희 의녀님을 책망하러 온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니 두려워 마세요.”
두려워 차마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지 못하는 월희를 내려다보며 라온은 하얗게 웃어보였다.
***
“저 사실은…… 홍 내관님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저를 알고 있어요? 어떻게요?”
“홍 내관님, 궁에서는 유명한 분입니다.”
“그래요?”
“홍 내관님을 두고 궁녀들 사이에서 내기가 한창이랍니다.”
“내기라면, 어떤 내기요?”
“홍 내관님이 언제 죽을지 알아맞히는 내기이옵……아차!”
뒤늦게 제 입을 막은 월희는 커다란 눈동자를 움직여 라온의 눈치를 살폈다.
“홍 내관님, 들으셨습니까?”
“다 들었습니다.”
아, 그래서 다들 날 보고 슬금슬금 피했던 거구나.
이제야 궁인들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홍 내관님, 화 나셨사옵니까?”
“화 안 났습니다. 뭐, 그깟 일로 화를 내겠습니까? 하하하.”
라온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활짝 웃어보였다.
그러나 월희는 미안함과 걱정스러움이 뒤범벅인 된 얼굴로 변명했다.
“너무 언짢아하지 마셔요. 자선당은 궁 사람들에겐 아주 무서운 곳이거든요. 이곳에서 원혼을 보았다는 사람들도 많았고. 그 원혼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다는 소문에 그리들 한 것이니까요. 오죽했으면 어린 생각시를 겁줄 때 자선당에 보내버리겠다고 하겠사옵니까?”
“그렇군요. 하온데, 월희 의녀님은 그리 무서운 곳에서 왜 울고 계신 것입니까?”
“헤헤, 대답하면 분명 바보 같다고 흉보실 것이어요.”
“말해 보세요.”
“실은…….”
잠시 망설이던 월희가 말문을 이었다.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곳이 이곳밖에 없었거든요.”
“왜 우는 것입니까? 혹여…… 누가 월희 의녀님을 괴롭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라온의 물음에 월희의 작은 콧방울이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할머니가 돌아가셨거든요.”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까? 이런…… 어쩌다? 아니, 그것보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서둘러 집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못 가요.”
“어째서요?”
“우리 할머니, 돌아가신 지 일 년이 지났거든요.”
월희의 대답에 라온은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 기울였다.
“대체 무슨 사연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라온의 물음에 월희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제가 나고 자란 곳은 밀양이라는 곳이어요. 부모님은 제가 걸음마도 떼기 전에 전염병으로 돌아가시고, 할머니 손에 자랐지요. 할머니가 장터에 나물을 팔러 가실 때마다 저를 데려가셨어요. 그때 우연히 알게 된 의원 댁에서 의술을 배우게 되었지요. 그리고 운이 좋았는지, 이렇게 내의원까지 들어오게 되었고요.”
“그랬군요.”
“그런데 지난해 여름, 갑작스러운 홍수로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
“하지만 그 홍수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었던지라. 일가붙이라고는 오직 저 하나밖에 없었던 울 할머니의 죽음은 누구도 관심 가져주지 않았어요. 흐윽, 그래서…… 그래서 제가 할머니의 소식을 들었을 땐, 고을에서 마련한 합동장례가 끝난 지 한참이나 지난 후였지요.”
“저런…….”
“울 할머니, 누구하나 울어주는 사람 없이 이 세상 떠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가슴이 미어져 견딜 수가 없었답니다. 할머니가 절 어떻게 키워주셨는데…… 그런 은혜에 보답하기는커녕 저는 아직 할머니 묘소에도 가보질 못했어요.”
“왜요? 어째서요?”
“여기서 밀양은 천릿길이랍니다. 아무리 재촉한다고 해도 제 걸음으로 다녀오려면 족히 열흘은 걸릴 거예요. 하지만 저 같은 견습 의녀가 열흘이나 자리를 비울 수는 없거든요.”
“그래서 이리 우는 겁니까?”
“이승 떠나실 적에 울음 한 자락 듣지 못하신 울 할머니, 이렇게라도 해야 외롭지 않을까 해서요.”
“저건…… 무엇입니까?”
라온이 물그릇을 눈짓했다.
“변변한 젯상이라도 마련해 드리고 싶었는데…… 보시다시피 형편이 여의치가 못 합니다.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인걸요.”
저 물 한 그릇이 할머니를 위해 차린 젯상이라는 말이었다.
월희의 처연한 사연에 라온은 마음 끝자락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부부인의 화려했던 탄일 연회를 떠올리던 라온은 물 한 그릇이 고작인 초라한 젯상을 응시했다.
하찮은 미물보다 못한 것이 가난한 백성의 삶이라.
살아생전 서러웠던 인생은 죽어서도 외롭고 가엾긴 매한가지였다.
살아생전 배고팠던 인생은 죽어서도 매양 허기가 졌다.
뭐가 이래? 뭐가 이리 불공평해?
괜스레 심화가 솟구쳐 발끝으로 누각 바닥을 콩콩 두드리던 라온은 불현듯 자리를 떨치고 일어섰다.
“잠시만 기다려보십시오.”
***
자선당으로 달려온 라온은 잰 몸짓으로 벽장 안을 뒤졌다.
“무얼 찾는 것이냐?”
영이 관심을 보였다.
라온은 벽장에서 찾은 종이와 붓을 그의 앞에 흔들어 보였다.
“종이와 붓이 아니더냐? 그걸로 무얼 하려고?”
“젯상을 만들려 합니다.”
“젯상?”
“화초서생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무엇이?”
“월희 의녀님이 입고 있는 옷, 소복이었습니다. 지난 해 홍수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요. 그때 월희 의녀님의 할머니도 돌아가셨답니다. 그런데…… 궁에 매여 있던 터라, 할머니의 염을 지키지 못하였답니다. 그래서 할머니 제삿날에 맞춰 그분 떠나실 적에 못해 드린 곡(哭)을 이제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구나. 헌데 젯상이라니?”
“저 의녀님이 가진 것이라곤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뿐입니다. 젯상이라고 차린 것이 고작 물 한 그릇이 전부이지 뭡니까. 도와주고 싶은데. 보다시피 저 역시 가진 것이 없는 터라. 하여…… 이렇게라도 해주려고요.”
애써 밝게 말하고 있지만 두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쓱쓱, 눈가를 문질러 습기를 닦아낸 라온은 종이를 펼쳐들었다.
그리고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맨 위쪽에 사당(祠堂)을 그리고 그 앞에 커다란 탁자를 그린다.
탁자의 양 끝에 불 켜진 초 두 자루를 그리고, 빈 여백에 빼곡하게 그림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영의 눈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라온이 지금 그리고 있는 저 그림, 분명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였다.
집안에 사당이 없는 양반이나, 외지에 나가있어 제사를 지낼 형편이 안 되는 자들이 저런 그림으로 젯상을 대신하여 제사를 지내곤 했다.
제대로 제사상을 차리지 못하는 어린 궁녀를 위해 감모여재도를 그린다?
라온을 바라보는 영의 눈빛이 사뭇 깊어졌다.
‘제법 생각이 깊구나.’
그런데…….
“혹여, 지금 그리고 있는 그것이 사과는 아니렷다?”
“왜 아니겠습니까? 딱 봐도 사과 아닙니까?”
“그럼 그 옆에 있는 것은 생선이 맞는 것이냐?”
“네.”
너무도 당당한 대답에 영은 그만 고개를 돌려버렸다.
제법 훌륭한 글씨를 쓰는 녀석이라, 그림도 잘 그릴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닌 모양이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아무리 그림으로 그리는 젯상이라도, 제법 먹음직하게 그려야 하거늘. 라온이 그린 사과는 배와 구분이 되지 않았고, 생선은 비루했으며, 그 옆에 심혈을 기울여 그린 닭은 아래에 닭이라고 주석을 달아주고 싶을 만큼 엉망진창이었다.
보다 못한 영이 라온을 옆으로 밀어냈다.
“비켜봐라.”
“무얼 하시려고요?”
“네가 그린 감을 보고 뉘가 감이라고 하겠느냐? 이 닭은 또 어떻고? 이 그림을 보고 제대로 먹을 수 있는 혼령이 몇이나 되겠느냐?”
라온에게서 붓을 빼앗은 영은 새로운 종이에 쓱쓱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정성스레 종이 위를 횡단하는 영의 붓끝에서 이런저런 음식들이 쏟아져 나왔다.
“우와, 정말 먹음직스럽습니다.”
영이 그린 그림을 보며 저도 모르게 꼴깍 군침을 삼키던 라온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무얼?”
“화초서생이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인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래?”
잠시 붓을 놓은 영이 라온을 돌아보았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보이느냐?”
“이리 그림을 잘 그리시는 것을 보니 화원이 분명하십니다. 제 말이 맞지요?”
확신하는 라온을 보며 영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틀렸다.”
“틀렸습니까? 하지만 이리 그림을 잘 그리는데요?”
“나는 글씨도 잘 쓴다.”
“그럼 글씨 잘 쓰는 화원?”
“…….”
“아닙니까? 그럼 화초서생께선 무얼 하시는 분이십니까?”
“알고 싶으냐?”
“네. 알고 싶습니다.”
“그럼…….”
영이 말끝을 길게 늘이며 라온을 응시했다.
저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라온이 집중하여 영의 입만 바라보았다.
이윽고 영의 입이 열리고.
“네가 직접 알아보려무나.”
열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네?”
“그리 궁금하면 직접 알아봐라.”
“그래서 직접 물어보고 있질 않습니까?”
“대답해주고 싶지 않다. 그러니 정히 궁금하면 네가 머리를 굴려 알아봐.”
냉정히 고개를 돌려버리는 영을 향해 라온은 입을 삐죽거렸다.
“치사해서 궁금해 하지 않으렵니다.”
“그러려무나.”
무심히 대답한 뒤 영은 다시 그림그리기에 열중했다.
“이제 축문(祝文)을 써야 할 터인데…….”
풍성해진 그림속의 젯상을 보던 영이 불현듯 고개를 뒤로 돌렸다.
“축문은 네가 쓰겠느냐?”
“제가 말입니까?”
라온이 자신을 가리키며 묻자 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너 말고, 저 뒤에 있는 녀석.”
영을 따라 시선을 돌리던 라온이 반갑게 소리쳤다.
“김 형!”
언제 왔는지 병연이 처소 한쪽 구석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채 서 있었다.
병연을 향해 영이 다시 물었다.
“써 보겠느냐?”
“…….”
병연은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녀석…….”
병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망자를 위한 축문을 써 내려갔다.
***
“할머니께서 좋아하실까요?”
영이 그려준 감모여재도와 축문을 들고 누각으로 돌아온 라온은 뒤늦게야 너무 유치한 짓을 한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어 월희에게 물었다.
월희가 크게 고개를 저어 라온의 걱정을 말끔히 몰아냈다.
“홍 내관님 덕분에 울 할머니, 모처럼 배부르시겠……어요.”
말끝에 처연한 물기가 묻어있었다.
작은 입술을 꼭 사려 물며 눈물을 참는 월희를 보며 라온은 그림을 누각 한쪽에 붙였다.
그렇게 특별한 젯상이 마련되고 있을 때였다.
툭.
누각 저 끝자락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누각 끝자락에 놓인 커다란 보퉁이와 그것을 놓아둔 채 사라지는 사내의 너른 등이 라온의 시야에 들어왔다.
“김 형.”
라온의 부름에도 병연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대신, 언제나처럼 불퉁한 목소리만이 들려올 뿐이다.
“풍성한 젯상에 술이 빠졌더구나.”
“네?”
그러고 보니 그림 속에 술이 빠져 있었다.
아, 중요한 걸 까먹었네.
머리를 긁적이던 라온은 병연이 가져다놓은 보퉁이를 열었다.
이내, 윤기 반지르르한 술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술병 아래의 나무찬합에는 모양 좋게 담긴 몇 가지 전(煎)과 나물 몇 가지, 여러 색으로 물을 들인 한과와 덩치 커다란 닭 한마리가 들어 있었다.
라온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달빛 맑은 날이라.
분명 이곳에서 어제처럼 한잔하고픈 마음으로 가져온 것이 틀림없었다.
“김 형!”
큰 부름에 병연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고맙습니다.”
그의 등을 향해 라온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힐끗 곁눈질로 돌아보던 병연이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성가신 놈.”
***
자선당으로 돌아온 병연은 동창 밖을 응시하는 영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섰다.
두 사내의 시선 끝엔 한 사람의 모습이 맺혀 있었다.
어린 의녀를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어린 내관.
“네 말대로 저 녀석, 지켜보고 있으면 심심하지 않구나.”
영은 라온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병연에게로 돌리며 말을 이었다.
“저 녀석 덕분에 일생에 한번 볼까 말까한 광경도 보았고 말이야.”
“…….”
분명 녀석에게 술병을 던져주고 온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병연이 겸연쩍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루 종일 어딜 갔었던 것이냐? 보이지 않아 궁을 떠난 줄 알았다.”
“잠시 일이 있었어.”
“일? 무슨 일?”
“어딜 좀 다녀왔어."
더는 대답하기 싫은 표정이라, 영도 더는 묻지 않겠다는 듯 눈길을 돌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디 가서 닭이라도 잡고 온 얼굴이군.”
“…….”
움찔.
아주 희미하게 병연의 어깨가 떨렸다.
힐끗, 그 모습을 보며 영이 입가를 길게 늘였다.
“자신이 일생을 바쳐 완성한 무공이 닭 잡는 데 쓰였다는 걸 아신다면, 돌아가신 네 스승께서 무덤을 박차고 나올 것이야. 하하하.”
“…….”
영의 유쾌한 웃음을 외면하기 위해 병연은 먼 허공을 바라보며 딴청을 부릴 뿐이었다.
얼마 후.
두 사람이 있는 자선당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라온이 있을 때의 번연한 온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 차가운 침묵을 깨며 병연이 입을 열었다.
“저하께선 어찌 생각해?”
“무얼?”
“저 어린 궁녀의 사연 말이야.”
“궁의 법도가 그러한 걸 어찌하겠느냐?”
“…….”
영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병연이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곁눈질하던 영이 지나가는 투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허나…… 어쩐지 오늘 이후부턴 조실부모한 궁녀가 의지하던 친인척을 잃었을 땐, 장례를 마칠 때까지 궁을 떠날 수 있는 새로운 방도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이 되는구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영은 자선당을 나갔다.
홀로 남은 병연의 얼굴에 잠시잠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금세 바람을 한껏 머금은 표정으로 되돌아간 병연은 창가에 기대어 앉은 채 달빛이 쏟아지는 누각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
다음날.
“홍 내관! 홍 내관! 아직 자는 게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장 내관의 활기찬 목소리가 라온의 아침을 깨웠다.
간밤에 늦게 잠자리에 들었던 탓에, 꾸벅꾸벅 졸던 라온은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갔다.
“장 내관님."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 라온과는 달리 장 내관은 통통 튀어오를 듯 생기가 가득했다.
“홍 내관, 내 기쁜 소식을 가져왔어요.”
“기쁜 소식이요?”
장 내관이 가져올 기쁜 소식이 무어가 있을까?
고민하는 찰나, 장 내관이 별안간 라온의 양 손을 맞잡았다.
“이제부터 홍 내관도 내시부의 일과에 참여하라는 명이 떨어졌소.”
“네?”
“오늘부터 홍 내관도 다른 소환(小宦)내시들과 함께 일과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이는 홍 내관을 기꺼이 우리 내시부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축하하오, 홍 내관. 진심으로 축하해요.”
제 일인 양 기뻐하며 해맑게 웃는 장 내관을 보며 라온 역시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가, 감사하옵니다.”
그런데…….
이거, 기쁜 소식이 확실한 거야?
왜 이렇게 오싹한 기분이 드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