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12화 (12/131)

12.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왁자한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청양부부인(靑陽府夫人)의 탄일을 경하하기 위해 부원군 김조순의 집에는 아침부터 문지방이 닳을 만큼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러나 부부인의 탄일을 축하한다는 것은 구실에 불과했다.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안동김씨 일족이거나, 또는 부원군 대감에게 아첨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었다.

사잇문을 걷어 올린 긴 장방형 방 안에 모여 앉은 이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부원군 김조순에게 감미로운 말을 늘어놓았다.

아첨하면 어디에도 빠지지 않을 성 내관이 뒤짐 지고 있을 리 없었다.

“부원군 대감과 부부인 마님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나이다.”

성 내관이 부원군에게 술잔을 올렸다.

“고맙네, 성 내관. 듣자하니 연회 음식을 궁에서 준비하였다고?”

“부부인 마님의 탄일연회가 아니오니까! 소인, 내 집안의 일이다 생각하며 성심을 다해 준비를 하였사온데. 혹여 대감마님의 눈에 차지 않은지 걱정이옵니다.”

“이 사람, 내 눈에 차고 안 차고가 무어 상관이겠는가. 이리 신경을 쓴 자네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 허허허.”

흐뭇한 얼굴로 술잔을 비운 김조순이 성 내관과 눈을 맞추며 말꼬리를 이었다.

“헌데, 묵이에게 듣자하니 오늘 내 집에서 짓궂은 장난을 치셨다고?”

일순, 좌중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집중되었다.

성 내관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피어올랐다.

“장난이라니요? 소인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 삿된 장난질을 칠 수 있겠나이까?”

부원군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도리질 하며 다시 물었다.

“어린 내관에게 내 집 뒷산의 산닭을 잡으라 하였다던데? 내가 무어 잘못 들었는가?”

“아, 그 말씀이시옵니까?”

성 내관이 그제야 야살스런 미소를 입가에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이라면, 대감마님의 말씀대로 소인, 조금 짓궂게 장난을 쳤사옵니다.”

“그런가? 허허허. 헌데 그 산닭들, 일 년을 공들여 키운 산닭 중에서도 최고의 산닭들이지. 곧 조선을 찾을 청나라 사신들을 대접하기 위해 전국방방곳곳에 사람을 풀어 어렵게 구한 녀석들이라네. 사납고 날래기가 여간이 아닐세. 몸짓 잰 몰이꾼들도 잡기 힘든 녀석들이지. 어린 내관의 솜씨로는 한 마리도 잡기 힘들 것이야.”

“아이쿠, 어렵게 구하신 귀한 산닭들을 잡으라고 명했으니,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성 내관이 너스레를 떨자 부원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관없네. 내 비단 비싼 돈을 들여 어렵게 구한 닭이라고 하나, 오늘 같은 날 한두 마리 정도는 상에 올릴 수도 있겠지.”

“어리고 유약한 녀석이라 한 마리나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헌데, 어찌하여 그런 짓궂은 장난을 한 겐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 아이는 전 판내시부사의 천거로 들어온 아이이옵니다. 제 뒷배를 믿은 까닭인지, 자꾸만 편하고 쉬운 일만 골라 하려드는지라. 이참에 버릇을 고쳐두지 않으면 두고두고 화근이 될 것 같아 그리 명을 내렸사옵니다.”

부원군이 혀를 끌끌 찼다.

“위아래도 모르는 무도한 자인 모양이군. 예나 지금이나 그런 자들이 있지. 이참에 그 못된 버릇을 말끔히 고쳐주게나.”

“하여, 소인 산닭 백 마리를 잡으라는 명을 내렸사옵니다.”

“열 마리도 아니고 백 마리나? 이런이런. 그 어린 녀석이 오늘 제대로 고생 한번 해 보겠구먼.”

“이번 일로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에게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알게 해줄 참이옵니다.”

“어디 하늘 높은 줄만 깨닫겠는가? 하늘이 노랗게 보이게 되겠군. 허허허허.”

부원군이 하하 소리나게 웃음을 터트리자 주위에 앉아있던 사내들도 덩달아 웃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사랑채로 커다란 뚝배기를 든 하인들이 들어왔다.

"이게 무엇이냐?"

부원군은 상 위에 뚝배기를 내려놓는 행랑아범에게 물었다.

“닭백숙입니다요, 대감마님.”

“닭백숙?”

부원군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닭백숙을 준비하라 명을 내린 적이 없었다.

“성 내관님의 명이라며 젊은 환관이 잔뜩 잡아왔습죠.”

“젊은 환관이?”

부원군은 상 위에 놓인 뚝배기를 내려다보았다.

백숙에 쓰인 닭은 유난히 살이 붉고 크기가 컸다.

윤기가 좌르르르 흐르는 커다란 닭이라…… 굳이 이것이 어디서 잡아온 닭이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분명, 청나라 사신단을 위해 어렵게 구한 산닭이렷다?

“허. 그 어린 내관이 요행히 몇 마리 잡은 모양이구나.”

조금은 의외라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자니 행랑아범이 무슨 소리냐는 듯 체머리를 저었다.

“고작 몇 마리가 아닙니다요.”

“몇 마리가 아니야?”

“네. 무려 백 마리나 잡아왔습니다요. 그 때문에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요. 궁에서 나온 숙수들께서 닭을 손질하고 백숙을 끓여내느라 정신이 없다고 합니다요.”

“무어라?”

부원군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거, 거짓말하지 마라.”

뜻밖에 소식에 당황한 성 내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배, 백 마리나. 그 녀석이 정녕 백 마리나 잡아왔단 말이냐?”

“네. 그, 그렇습니다.”

행랑아범은 성 내관이 갑자기 화를 내는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해하면서도 허리를 숙이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저, 정말이냐? 네가 무얼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냐?”

“쇤네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요. 분명 뒷산의 산닭이 분명하였습니다요.”

행랑아범이 직접 확인했다면 잘못 봤을 리가 없다.

“마, 말도 안 되는…….”

성내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조금 전, 부원군에게서 그 닭이 얼마나 귀한 물건인지 듣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 귀한 닭을 열 마리도 아니고, 백 마리나 잡다니.

백 마리면 부원군이 어렵게 구한 닭의 거의 전부였다.

“성 내관.”

부원군이 성 내관을 불렀다. 부르는 목소리가 아까와는 달리 차고 싸늘하기가 이를 데가 없었다.

“대, 대감…….”

성 내관은 황급히 바닥에 고개를 조아렸다.

부원군이 분노와 황당함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 닭이 어떤 닭인데. 사신단을 대접하기 위해 얼마나 어렵게 구한 것들인데.

부원군은 뚝배기에 담긴 산닭을 보며 불끈 주먹을 말아 쥐었다.

무려 백 마리의 산닭.

닭이 워낙 커서 그것을 다 먹으려면 연회에 참석한 귀빈들은 물론이고, 일하는 하인들에게까지 그릇이 돌아갈 상황이었다.

이거야말로 죽 쒀 개 준 꼴이 아니던가.

“어리고 유약한 녀석이라 한 마리나 잡을지 의문이라고? 허허허.”

돌연, 부원군 김조순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에 성 내관은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었다.

“허허허. 성 내관, 궁에 제법 쓸 만한 아이가 들어왔는가 보이.”

“부, 부원군 대감.”

부원군이 삼계탕을 성 내관에게 들이밀었다.

“들게. 좋은 닭으로 만든 것이니, 맛이 괜찮을 것이야.”

“대, 대감.”

부원군은 차가운 목소리로 성 내관을 재촉했다.

“들라 하지 않았는가?”

성 내관이 창백한 얼굴로 그릇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수전증에 걸린 듯 어찌나 손이 떨리는지, 국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 모습을 차갑게 지켜보던 부원군이 돌연 만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좌중을 돌아보았다.

“모두 듭시다. 귀한 재료로 만든 음식을 식게 내버려둬서야 쓰겠소?”

서늘한 권유에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수저를 들었다.

시끌벅적하던 좀 전과는 달리 음식을 먹는 내내 작은 기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무거운 적막이 성 내관의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

“그,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겨우 식사를 마친 성 내관이 부원군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냉랭한 외면뿐이다.

부원군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싸늘한 냉대에 성 내관은 그동안의 노력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문을 닫고 뒷걸음으로 사랑채를 나서자마자 눈매가 간사하게 찢어진 환관 하나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성 내관의 수족 노릇을 하는 한 내관이었다.

“심기가 많이 불편하시겠지만…….”

안쪽의 상황을 고스란히 엿들은 한 내관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 내관의 카랑한 목소리가 주위를 뒤흔들었다.

“홍라온. 그 망할 녀석은 어디에 있느냐?”

“후원에 있는 것을 보았사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한 내관이 냉큼 대답했다.

“부원군 대감 앞에서 감히 나를 물 먹였겠다! 내 이놈을 가만 두지 않을 것이야.”

성 내관은 바람을 일으키며 후원으로 향했다.

그러나 잠시 후.

잔뜩 인상을 찡그린 성 내관이 한 내관을 돌아보았다.

“저놈이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

후원 한 구석, 라온을 중심으로 예닐곱 명의 숙수들이 둥글게 원을 그린 채 쑥덕공론 하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것이…… 고민상담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하옵니다.”

한 내관이 머뭇대다 대답했다.

“고민상담?”

“네. 아까 산닭을 잡아 온 홍 내관이 백숙을 끓이는 숙수들과 이런저런 잡담을 하더이다. 그러다 정 숙수가 며칠 전 안사람과 싸운 얘기를 했는데, 저 어린놈이 뭘 안다고 몇 마디 입을 놀리지 뭡니까.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직후부터 다들 저렇게 모여들어서는…….”

“참으로 방자한 놈이구나.”

라온을 노려보는 성 내관의 눈빛이 뱀의 그것처럼 서늘해졌다.

곁에서 눈치를 살피던 한 내관이 물었다.

“당장 앞에 대령하오리까?”

“아니다. 내버려둬라.”

성 내관의 느닷없는 변심에 한 내관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 방자한 애송이를 내버려둔다고? 자신이 알고 있는 성 내관은 은혜는 잊어도 수모는 곱절로 갚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졸렬한 인간이었다.

그런 성 내관이 자신을 망신시킨 홍라온을 용서한다?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뜬다 해도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저놈, 아직 자선당에서 버티고 있으렷다?”

“그러하옵니다. 다른 자들은 하루도 못 버티는 곳에서 벌써 여러 날을 보내고 있다 하여 궁 안의 입 가벼운 자들이 연일 화젯거리로 삼고 있사옵니다.”

“내일부터 저놈도 다른 아이들과 함께 일과에 동참케 해라.”

자신에게 야멸치게 등을 돌리던 부원군을 떠올리며 성 내관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사려 문 그의 잇새에서 씹어뱉는 듯한 말이 새어나왔다.

“내가 생각을 잘못하였구나. 적막한 곳에 홀로 두면 외로움에 진저리를 칠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었나보구나. 저놈에게 진짜 내시의 생활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어야겠다. 그것이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 몸소 알려주어야겠어.”

라온을 향한 성 내관의 눈동자에 잔인한 기운이 깃들었다.

***

연회가 파(罷)한 지 한참이나 지났건만, 실수를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듯 성 내관은 부원군 대감댁의 온갖 허드렛일을 다 마친 후에야 비로소 내관들을 이끌고 환궁했다.

라온도 그 틈에 끼어 겨우 자선당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제보다 여윈 달이 하늘 정중앙 떠올랐다.

파김치가 된 라온은 녹지근하게 늘어진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일 년같이 길게 느껴졌던 하루였다.

자선당 마당으로 들어서니 처소 안에서 노란 불빛이 새어나왔다.

“김 형이십니까?”

라온은 한달음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 닭만 잡아주고 간다온다 말도 없이 사라져 고맙다는 말도 전해지 못했던 터라. 반가움이 배는 더 했다.

하지만…….

“이제 오는구나.”

라온을 맞이한 것은 병연이 아니라 영이었다.

“화초서생이셨네요.”

저도 모르게 실망한 라온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치레를 건넸다.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 탓에, 작은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너의 김 형이 아니라 미안하구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보다시피 서책을 읽고 있지 않느냐. 그러는 너는 하루 종일 어딜 다녀오는 것이냐?”

“일이 있었습니다.”

“어디 가서 닭이라도 잡고 온 모양새구나.”

“어찌 알았습니까? 냄새라도 납니까? 환궁하기 전에 깨끗이 씻었는데.”

라온은 소맷자락을 들어 킁킁 냄새를 맡았다.

“어디서 고양이 세수라도 하고 온 것이냐? 닭털이나 떼고 깨끗이 씻었다고 우겨대거라.”

영이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라온이 ‘어디요? 어디?’하며 부산을 떨었다.

짧은 팔다리를 허우적대는 것이 영 안쓰러워 영은 긴 팔을 뻗어 라온의 옷깃에 붙어있는 깃털을 떼 주었다.

“말도 하지 마십시오. 오늘 부원군 대감댁으로 가서 산닭을 백 마리나 잡았지 뭡니까?”

라온은 허물어지듯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산닭을 잡아? 네가? 그것도 백 마리를?”

“아, 물론 제가 다 잡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실 김 형이 아니었으면 백 마리가 다 뭡니까. 아마, 고작해야 한두 마리 잡는 것이 다였을 겁니다. 그런데 김 형이 나타나 그 녀석들을 잡아주시지 뭡니까.”

“그 녀석이 닭을 잡아 주었단 말이더냐?”

라온이 하는 말을 선뜻 믿기 힘들어 영이 다시 물었다.

“네.”

“순순히? 아무 대가없이 잡아주었단 말이냐?”

“화초서생 생각만큼 김 형은 그리 세속적인 사람 아닙니다. 물론, 제 영혼을 팔겠다고 했을 때, 짠하고 나타난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

영혼을 팔아? 이건 또 무슨 엉뚱한 소리야?

“그래도 뭔가 물질적으로 계산하고 그런 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말끝에 길게 하품을 붙이던 라온은 졸린 눈을 연신 비볐다.

쉬고 싶은 마음 굴뚝이었다.

반갑지 않은 불청객을 쫓듯 영을 향해 한 마디 했다.

“안 가십니까?”

“딱히 바쁜 일이 없어서 말이다.”

“바쁜 척하실 마음도 없으십니까?”

“오늘은 한량 흉내나 내련다.”

영은 들고 있던 서책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며 말을 덧붙였다.

“졸리면 여기 와서 자려무나.”

영이 툭툭, 자기가 앉아 있는 옆자리를 손으로 치자 라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내를 좋아하는 화초서생이다.

아직까지도 자신의 사람이 되라고 하는 사람인데. 자는 동안 무슨 일이 있을 줄 어찌 알고. 게다가 이리 피곤한 상태에서 잔다면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가 될 것이고, 그리되면…….

제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라온은 본능적으로 옷고름을 잡쥐며 소리쳤다.

“아닙니다. 하나도 안 졸립니다.”

말은 그리 했지만…….

졸려, 졸려도 너무 졸려.

아무리 애를 써도 하품이 나왔다.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자니 영과 눈이 딱 마주쳤다.

“……!”

라온은 내가 언제 하품을 했냐는 듯 서둘러 입을 다물고는 애써 또랑또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연신 해 댄 하품 덕에 눈가에 맺힌 눈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피식, 입가에 웃음을 단 채 영이 말했다.

“얼굴에 잠이 덕지덕지로구나. 그리 참지 말고 자거라.”

“안 잡니다. 아니, 못 잡니다.”

“왜?”

“제가 보기보다 예민해서 말입니다. 낯선 사람이 있을 때는 잠을 푹 못 잡니다.”

“낯선 사람? 어제는 나를 두고 벗이라 하더니. 오늘은 또 낯선 사람이라 하는구나.”

“그것이…….”

제가 생각해도 너무 어불성설에 제멋대로이었다.

무안한 얼굴로 잠시 생각을 굴리던 라온이 결론을 내렸다.

“화초서생과 저, 한 마디로 말해 조금 낯선 벗이라고나 할까요.”

“낯선 벗? 듣다듣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는구나.”

“허물없이 지내기엔 조금 어색한 사이를 말하는 것이지요. 사실, 따지고 보면 저와 화초서생, 우리 두 사람, 잠자는 모습까지 보여줄 만큼 허물없는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간밤에 내 어깨에 기대 침까지 흘리며 잔 놈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구나.”

“헛! 제가 침을…… 흘렸습니까?”

“코도 골았다.”

“정말입니까? 제가 코도 골았단 달입니까? 거짓말이지요? 화초서생께선 농이 지나치십니다.”

설마, 그럴 리 없다는 얼굴로 라온이 말하자 영이 정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농 같은 거 안 한다.”

그 진지한 대답에 라온은 푹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했네, 했어.”

저리 진지한 얼굴을 보니 내가 침도 흘리고 코도 곤 것이 틀림없으렷다. 겨우 일면식 한 사내 앞에서 그 무슨 추태였던가.

아무리 사내의 모습으로 살아왔다고 해도 그 본성은 여인인지라. 라온은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을 지경이었다.

“부끄러우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이미 볼 만큼 보았으니 안심하고 자도 된다고 하는 말이다.”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이라면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리 말씀을 하시니 더더욱 잠을 잘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째서?”

“침 흘렸다면서요, 코도 골았다면서요. 그런 흉측한 모습, 낯선 벗에게 어찌 또 보일 수 있겠습니까?”

“그리 흉측하지 않았다.”

사실은 조금 귀엽기까지 했단 말이다.

그러나 사내놈에게 이리 말했다가는 이상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을 터라. 영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킨 채 무심히 말했다.

“잊어주십시오.”

내내 황망한 고갯짓을 하던 라온이 불현듯 동그란 얼굴을 바짝 치켜들었다.

“뭐라?”

“어제의 그 모습은 잊어주십시오. 그건 어쩔 수없는 사고였습니다.”

“사고?”

“네. 사고였습니다. 술 때문에 생긴 돌발 상황이라고나 할까요. 어쨌든 그런 추한 모습일랑은 잊어주십시오.”

“굳이 그리 할 필요가 있느냐?”

“있습니다.”

“왜?”

“화초서생과는 그런 허물없는 사이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행여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간 사내를 좋아하는 화초서생이 무슨 엉뚱한 마음을 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영이 사내를 좋아한다는 것이 실은 저만의 오해라는 사실은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한 채 라온은 영이 파고들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 까다로운 모양새가 영의 심기를 건드렸다.

불뚝한 성미가 치솟은 영은 제법 매섭게 라온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아얏! 왜 때리십니까? 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못난 사내일수록 저보다 약한 자에게 힘을 쓰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망아지에겐 매가 약이란 말도 있다.”

인상을 찡그리는 라온을 뒤로 한 채 영은 보란 듯 꼿꼿한 자세로 앉아 읽던 서책을 다시 펼쳐들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돌려 라온에게 물었다.

“정녕 안 잘 테냐?”

“안 졸립니다.”

라온이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

멀리서 자시(子時: 밤12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영은 서책의 맨 끝장을 덮으며 굳어있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벌써 시각이 이리 되었나?”

중얼거리며 영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때 등 뒤에서 툭, 둔탁한 소음이 들려왔다.

영의 시선이 뒤로 돌아갔다.

라온이 쓰고 있던 내시 관모가 영의 발치로 도르르 굴러왔다.

안 잔다고, 절대 안 졸립다며 소리치던 라온이 꾸벅꾸벅 졸다 관모를 떨어트린 것이었다.

그의 눈에 잔뜩 옹송그린 채로 잠이 든 라온의 모습이 들어왔다.

“조그마한 녀석이 고집은 아주 황소고집이구나.”

간밤엔 잘도 제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던 녀석이, 이제와 새삼스레 허물이니 뭐니 하니 어이가 없었다.

지난밤엔 이 녀석에게 잠시만 어깨를 빌려준다는 것이 인시(人時:새벽3시)까진 꼬박 그 자리에 붙잡혀 있어야 했다. 떨쳐내려고 마음만 먹었으면 언제든지 떨쳐낼 수도 있음이었다. 하지만 곤한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아까 라온에게 말한 것처럼 지난 밤, 녀석은 침을 흘리고 코를 골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것이 용하다 여겨질 만큼 녀석은 곤하디 곤하게 잠이 들어 있었다.

“간밤엔 어깨가 뻐근한 것도 감수하고 곁자리를 내어주었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낯선 벗?”

다시 생각해도 마음 언저리가 언짢아져 저도 모르게 불퉁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영은 잠든 라온을 조금 매서운 눈씨로 내려다보았다.

간잔지런하게 감긴 눈.

옅은 홍조가 핀 두 뺨과 새치름한 입술.

사내라고 보기엔 과하게 고운 얼굴이다.

거세한 사내라 그런 것일까?

궁 안의 환관들을 떠올리던 영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거세한 사내라고 하여 모두 이리 곱지는 않았다.

아마도 이 녀석이 조금은 특별한 것이리라.

사내놈의 얼굴이 이리도 고우니, 그 팔자가 드세진 것이겠지.

라온을 바라보는 영의 눈빛이 풀어진다. 그의 얼굴에 조금은 안쓰러운 기색이 들어찼다.

그러다 한 순간.

영의 반듯했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 녀석 얼굴에 웬 생채기던가?’

시간이 지나면 절로 사라질 정도로 작은 상처.

그러나 피딱지가 굳은 채로 방치된 상처를 보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편치가 않았다.

“피라도 닦던가. 무어가 그리 바빠서 제 몸 하나 제대로 못 살피는 것이더냐. 헌데, 이 작은 얼굴에 무슨 생채기가 이리 많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영은 상처를 살피기 위해 잠든 라온의 얼굴로 제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바로 그때.

잔뜩 옹송그린 채 잠들어 있던 라온이 불편한 듯 몸을 뒤척였다.

“으으으음.”

길게 허리를 펴며 라온은 벽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반대편으로 옮겼다.

찰나.

문득 입술 끝에 생경한 감촉이 느껴졌다.

어린 새의 깃털처럼 부드럽고, 연한 새싹을 머금은 듯 촉촉하면서도 너무나도 감미로운 느낌.

꿈이라면 무척이나 다사롭게 아득한 꿈이었다……고 하기엔 너무 생생하잖아?

잠들어 있던 라온이 반짝하고 눈을 떴다.

“……!”

이내 시린 얼음을 한껏 머금고 있는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 속에 오롯이 담겨 있는 저 얼굴은 라온, 자신의 것이 분명했다.

어디 그뿐일까?

화초서생의 우뚝한 콧방울은 자신의 볼을 간질이고 있었고, 그의 말랑한 입술은 제 입술에 닿아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야?

혹시 이거……입맞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