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성가신 녀석
한 무리의 환관들이 내의원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 무리의 선두, 눈에 익은 얼굴이 라온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네놈은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참이 아니더냐?”
못마땅한 시선으로 라온을 노려보고 있는 자.
다름 아닌 성 내관이었다.
“예서 뭐하는 게냐? 오늘 번을 서는 환관들을 제외하고는 죄 모이라는 말, 못 들었느냐? 궁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상전의 명 알기를 지나가는 개 짖는 소리로 듣는 게야? 네놈이 정녕 단매에 죽어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
성 내관의 말도 안 되는 트집에 라온은 어이가 없었다.
뭘 들었어야 명을 거역하고 말고 하지.
그러나 못 들었다 변명한다고 한들, 저리 작정하고 달려드는 성 내관을 당해낼 수가 있을까?
그때 성 내관의 등 뒤에 서 있던 통통한 체구의 환관이 작게 속삭였다.
“저자는 자선당의 환관이옵니다.”
“그게 뭐가 어찌 되었단 게냐?”
성 내관이 버럭 고함을 쳤다.
“그것이 아니오라, 저는 다만…… 자선당의 환관이라고는 저자 하나뿐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이옵니다.”
환관이 하나밖에 없으니, 번을 서는 것도 오직 저자 하나뿐이다.
행여 성 내관이 무슨 실수라도 할까 싶어 귀띔한 건데.
제 딴에는 상관을 위해 한 일인건만. 되레 성화만 듣게 되자 환관은 울먹울먹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자기가 보내놓고선…….”
라온을 자선당으로 보낸 사람은 성 내관 본인이었다. 그런데 그새 그 사실마저도 잊어버린 것이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상기한 듯, 성 내관이 불편한 헛기침을 연발했다.
“흠흠, 그래? 내 잠시 착각하였구나.”
괜한 헛기침으로 주위를 환기시킨 성 내관이 뒷짐을 지었다.
“그나저나 자선당을 지켜야 할 놈이 예는 무슨 일이냐?”
“그것이…….”
“아, 되었다. 이리 한가하게 내의원이나 들락거리는 것을 보니 딱히 할 일이 없는가 보구나. 마침 잘 되었다. 일손이 부족하던 참이었으니. 따라나서거라.”
“따라오라시면, 대체 어딜 가시는 것인지요?”
갈 때 가더라도 어딘지 행선지는 알아야겠기에 물었건만.
성 내관은 상명하복(上命下服)이라는 논리로 라온의 물음을 깔끔하게 묵살해버렸다.
“따라오라면 조용히 따라오면 될 것이지. 어느 안전이라고 토를 다는 게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 내관은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줄을 맞춘 환관들이 줄줄이 종종 걸음을 옮겼다.
“대체 어딜 저리 가는 거야?”
이유라도 말해준다면 답답하지나 않을 것을.
고개를 돌려보니, 의녀 월희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라온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푸욱 내쉬고 말았다.
월희를 만나 그 사연을 들어보려 나선 걸음이거늘.
상황이 이리 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나중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서두를 거 없어. 그래도 누각에서 울던 소녀가 뉘인지는 알게 되었잖아.’
눈물의 곡절이야 나중에 물어보면 될 터였다.
작은 성과에 만족하며 라온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
굴비두름처럼 줄줄이 엮인 환관 일행이 도착한 곳은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 대감의 집이었다.
성 내관을 위시한 환관들은 곧장 후원으로 향했다.
이내 분주한 칼질 소리가 들려왔다.
땅땅땅땅땅땅.
서로 장단이라도 맞추는 듯 쉼 없이 들려오는 칼질 소리는 궁에서 나온 숙수들의 것이었다.
“거기, 불을 지피게나.”
“여기 어서 재료를 가져와.”
숙수들이 명을 내리자 곁을 지키던 사내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뜨거운 가마솥과 불과 기름이 난무하는 그곳은 연회에 올릴 음식이 만들어지는 곳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치열하게 음식을 만드는 모습이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그 뜨거운 현장 한가운데로 발을 디딘 성 내관이 사뭇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부부인(府夫婦) 마님의 탄일 연회가 있는 날이다. 허니 이제부터 너희들은 여기서 숙수들이 음식 하는 것을 도와야 할 것이야. 송 내관과 허 내관은 한 숙수를 도우면 될 것이다. 그리고 도기 너는 최 숙수를 돕고, 그리고 너희들 다섯은 사랑채로 건너가 부원군 대감께서 무에 필요한 것은 없는지 세심하게 보필토록 하여라. 알겠느냐?”
“명 받잡겠나이다.”
환관들은 각자 명받은 곳을 향해 재게 몸을 놀렸다.
그 뒤에 홀로 덩그러니 남은 라온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소인은 무얼 하면 되옵니까?”
성 내관이 못마땅한 얼굴로 라온을 향해 턱짓했다.
“너는 나를 따라 오너라.”
“어디로 말이옵니까?”
“내 너를 위해 특별히 준비해둔 일감이 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 성 내관은 걸음을 옮겼다.
아, 뭐지? 저 웃음.
불길한데.
***
얼마나 걸었을까?
앞서 걷던 성 내관이 작은 나무문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췄다.
무슨 꿍꿍이속인지 라온을 돌아보는 그의 입아귀가 보기 싫게 틀어져 있었다.
“여기가 네가 오늘 일할 곳이다.”
말과 함께 성 내관이 나무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잠시 후, 그야말로 보기 힘든 광경이 라온의 눈앞에 펼쳐졌다.
“아……!”
라온은 묘한 의미의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야트막한 야산에서 정체불명의 조류 수백 마리가 모이를 먹고 있는 광경이 펼쳐졌던 것이다.
“이것이 다 무엇이옵니까?”
“보면 모르겠느냐? 닭이지 않느냐?”
“하지만 저리 날고 있는데요?”
아닌 게 아니라, 모양은 꼭 닭처럼 생긴 것들이 나무 위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물론, 새처럼 훨훨 나는 것이 아니라, 바쁘게 날개를 흔들며 나무와 나무 사이를 넘나드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나는 것은 나는 것이다.
어디 그뿐일까?
뛰는 것도 보통의 닭처럼 되똥되똥하는 게 아니라 다다다다다 뛰었다.
“산닭이라는 것이다. 보통 집에서 기르는 것과 달리 산에 풀어놓아 기르는 것이지. 야생에서 자라는 놈들이라, 잡아서 탕을 끓여놓으며 그 씹는 맛이 쫄깃한 것이 일반 닭과는 비견할 바가 아니다.”
“그렇사옵니까? 하오면 제가 예서 무얼 하면 되올지요?”
“잡아야지.”
“네?”
“오늘 탄일 연회에 오신 내빈들께 삼계탕을 올린다고 하더구나. 그러니 네가 그 식재료를 준비해야겠구나.”
말인즉, 자신이 새인 줄 착각하는 저 닭들을 잡으라는 것이다.
“얼마나 말이옵니까?”
라온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많이는 아니고…….”
성 내관이 손가락 하나를 펼쳐 보였다.
“한 마리 말이옵니까?”
“아니다.”
“하오면 열 마리?”
“오늘 오신 내빈의 수가 있는데, 그 정도로 되겠느냐?”
“설마 백 마리는 아니겠지요?”
“왜 아니겠느냐. 더도 말고 딱 백 마리만 잡아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성 내관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닭 잡는 칼 한 자루를 라온에게 던져주었다. 얼결에 그것을 받아 쥔 라온이 행여 무얼 잘못 들었나 하여 다시 물었다.
“정녕 백 마리를 잡으란 말씀이옵니까?”
“그렇대도.”
“저 혼자 말이옵니까?”
“그럼 여기 누가 또 있느냐?”
어깨를 으쓱해보이던 성 내관은 비릿한 웃음을 입가에 단 채 돌아섰다.
“아참, 요리하는 데 두어 시진은 족히 걸린다고 하는구나. 허니, 한 시진 안에는 재료 준비를 끝내놔야 할 것이다.”
“하오나…….”
“어허! 이놈이! 어느 안전이라고 따박따박 토씨를 다는 것이더냐? 하라면 하는 것이지. 뒷배로 들어온 놈이라 그런가? 그저 쉽고 편한 일만 하려 드는구나. 쯧쯧. 내 이참에 네놈의 못된 버릇을 고쳐야겠구나. 한 시진 후에 돌아와 볼 것이야. 행여 명을 이행하지 못했다간 장(杖) 열 대로 네놈의 죄를 물을 것이다.”
말을 하는 성 내관의 얼굴에 야비한 웃음이 내걸렸다.
그렇지 않아도 저놈을 그냥 둬 마음 한쪽이 찜찜하던 참이었다.
감히 자신에게 예를 차리지 않은 놈이렷다. 그 끝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 단단히 본보기 삼아 다른 환관들의 주위를 환기시키리라.
다시는 궁에 저놈과 같은 맹랑한 놈이 생기지 않도록 일벌백계(一罰百戒)하리라.
한 시진 후, 명을 이행하지 못해 울상을 짓고 있을 라온을 떠올리며 성 내관은 입아귀를 비틀었다.
얄밉게 라온을 한번 흘겨본 그가 유유히 나무문을 향해 돌아서는 찰나였다.
“아니, 이게 뉘신가? 성 내관이 아니신가?”
나무문 뒤에서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청포도색 도포자락이 보이는가 싶더니 넓은 흑립을 쓴 젊은 사내가 성 내관의 앞을 막아섰다.
“하하하, 사간(司諫:종3품의 벼슬)나리가 아니시옵니까?”
방금 전까지 라온을 향해 인상을 쓰던 성 내관의 얼굴에 금세 야살스러운 웃음이 피어올랐다.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마냥 사내에게 쪼르르 달려간 성 내관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성 내관께서 예서 뭐하고 계시는 거요?”
“아랫것에게 요리에 필요한 산닭을 잡으라 명을 내리고 있었사옵니다.”
“그렇소? 허나, 저놈들은 어지간히 몸놀림 빠른 자들도 잡기 힘든 것인데.”
“하여, 소인 궁에서 특별한 아이를 선별하여 데려왔나이다.”
성 내관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을 고했다.
“그렇소? 겉으로 뵈기엔 그렇지 않은데.”
사내가 라온을 보기 위해 성 내관의 어깨 너머로 삐죽이 고개를 내밀었다.
“보기보다 강단 있는 아입지요. 사간께선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성 내관은 라온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내를 서둘러 나무 문 밖으로 안내했다.
“헌데 성 내관, 근자에 들어 그대를 궁보다 집에서 더 많이 보는 것 같소? 이러다간 대비전의 섭리가 아니라 부원군 댁 섭리라는 말이 나오겠소.”
“그 어이 서운한 말씀이시옵니까? 부원군 대감이 어디 남이옵니까?”
“아니, 성 내관. 우리 집안과 인척이었소?”
“아이고, 사간께서는 농도 잘하시옵니다. 하하.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사간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부원군 대감을 생각하는 소인의 마음이 핏줄을 생각하는 것 이상이라는 뜻으로 올린 말이었사옵니다. 소인, 궁궐의 웃전들을 섬기는 마음으로 부원군 대감과 그 가솔들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시옵소서.”
참기름을 발라놓은 듯한 아부가 성 내관의 입에서 쉼 없이 흘러나왔다.
“그 마음일랑 내 어찌 모르겠소. 허나…….”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아주 아부하는 건 천부적으로 타고 나셨네.”
홀로 남은 라온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성 내관을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러나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산닭 백 마리라.”
야산을 멋대로 뛰어다니는 닭들을 돌아보자니 나오는 것은 한숨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장 열 대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이대로 줄행랑이라도 쳐?
잠시 고민하던 라온은 이내 체머리를 흔들며 가슴을 활짝 폈다.
그럴 수야 없지. 어리석은 생각일랑은 저 멀리로 치우고 해보는 데까지 힘껏 해보자.
라온은 소맷자락을 척척 걷어 올렸다.
어떻게든 해보는 데까지 해 볼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라온이 살아온 방식이었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금주미주는 천계혈(金樽美酒 千鷄血)이요.
옥반가효는 만계고(玉盤佳肴 萬鷄膏)라.
촉루락시에 계루락(燭淚落時 鷄淚落)요.
가성고처에 원계고(歌聲高處 怨鷄高)라.
“금잔의 술은 닭의 피요, 옥쟁반에 좋은 안주는 닭의 기름이라. 촛농 떨어질 때, 닭의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닭 울음소리도 높더라.”
담장 너머로 흥겨운 풍악소리가 들려왔다.
풍악소리가 높아질수록 라온의 한숨소리도 높아졌다.
어느새 시간은 반 시진을 훌쩍 지나 있었다.
지난 반 시진 동안 라온은 자기들이 새라고 착각하는 닭들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그동안 잡은 산닭은 고작 한 마리뿐.
결코, 라온의 무능의 소치에서 나온 결과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산닭의 움직임은 상상초월이었다.
그에 반해 라온이 지닌 장비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본래 산닭은 전문 몰이꾼들이 그물과 함정을 사용하여 잡을 만큼 잡기 힘든 녀석들이었다.
그런 녀석들을 라온이 혼자서, 그것도 고작 닭 잡는 칼 한 자루 들고, 한 마리도 아니고 백 마리나 잡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어불성설,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큰일이네.”
이러다간 백 마리는 고사하고 열 마리도 못 잡을 것이 뻔했다.
흐르는 시간이 야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닭아. 닭아. 어찌하면 네 형제들을 잡을 수 있을까?”
라온이 유일하게 잡은 닭과 눈을 맞추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러나 닭은 제 일신의 안녕을 위해 친족을 팔아치울 수 없다는 듯, 눈을 반개한 채로 꼬꼬꼬꼬 울 뿐이다.
“에라, 하는 데까지 해보자.”
라온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된 이상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였다.
라온은 소매를 걷고, 풀숲에 낮게 엎드렸다.
산닭을 잡기 위해 야산을 헤집었던 탓에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얼굴이며 손등에 나뭇가지에 긁힌 작은 상처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상처를 살필 틈이 없었다.
한 마리라도 더 잡기 위해 라온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 기회를 엿봤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라온의 눈앞으로 경계심이 느슨해진 닭 한 마리가 다가왔다.
일순, 라온은 숨조차 쉬지 않았다.
‘좀 더 와라. 좀 더…….’
그렇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자니 녀석과의 거리는 어느덧 손만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라온은 마지막으로 전력을 가다듬으며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은 할아버지께서 알려주신 일격필살의 묘용을 발휘할 때였다.
‘하나.’
꼬꼬꼬꼬.
‘두울.’
꼬꼬꼬.
‘세엣!’
속으로 숫자를 세던 라온은 양 손을 앞으로 쭉 내민 채 붕, 닭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
허공을 향해 힘껏 도약했던 라온은 바닥에 쭉 사지를 벌린 채로 널브러졌다.
퍽!
“아…….”
라온은 바닥에 얼굴을 박은 채 꼼짝하지 않았다. 아니, 꼼짝할 수가 없었다.
“더는 못 해. 죽인다 해도 못 해.”
자포자기한 그녀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그깟 장 열 대, 그래 맞자. 맞지 뭐. 설마 죽기야 하겠어?”
라온은 벌렁 하늘을 향해 돌아누우며 호기롭게 외쳤다. 그러나 이내 목소리에 풀기가 사라졌다.
“죽진 않겠지만, 무지 아플 텐데.”
이럴 때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는 도깨비 방망이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 누가 저 녀석들 백 마리만 잡아주면 영혼이라도 팔 텐데.”
양팔로 두 눈을 가리며 라온은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정말이야?”
뜻밖에 목소리에 라온은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천천히 내렸다.
“정말 이 녀석들 잡아주면 영혼이라도 팔 테냐?”
***
이 목소린!
설마…… 내 간절한 소원을 들은 하늘님이 땅 위로 내려오기라도 하신 건가?
하지만 햇살 사이로 어룽 비치는 저 얼굴은…….
“김 형!”
“이제 네놈의 영혼은 내 것이 된 건가?”
특유의 무심한 투로 말을 하던 병연이 어깨에 메고 있던 것을 툭 던졌다.
검은 보퉁이 안에서 날갯짓을 하고 있는 저건!
방금 전까지 라온의 애간장을 태우며 도망 다니던 새, 아니 자신들을 새라고 착각하고 있던 닭들이었다.
“김 형!”
용수철처럼 튕겨지듯 몸을 일으킨 라온이 병연의 양 손을 맞잡았다.
방금 전까지 시들어가던 라온의 얼굴에 하늘 꽃처럼 화사한 웃음꽃이 만개했다.
“…….”
순간, 뜨거운 여름햇살에 눈을 찔린 사람처럼 병연은 시린 눈을 감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동안 라온에게 잡힌 채 멍하니 있던 병연은 어느 순간 맞잡고 있던 손을 휙, 뿌리쳤다.
돌아서는 그의 입에선 어느덧 습관이 되어버린 한 마디가 새어나왔다.
“성가신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