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소녀의 정체
툭.
어깨에 떨어진 낯선 감촉에 영은 고개를 내렸다.
그의 서늘한 눈동자에 라온의 작은 얼굴이 맺혔다.
어린 새의 깃털처럼 보드라운 것이 어깨를 간질이는 듯한 느낌.
영은 반사적으로 어깨에 닿아 있는 라온을 떨쳐 내려했다.
분명 머릿속에서는 그리 하라고, 당연히 그리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햇솜처럼 따사로운 감촉에 굳어버린 몸이 그의 이성을 배반한다.
“감히…….”
결국, 영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공허한 한 마디가 전부였다.
차마 잠든 라온을 떨쳐내지 못한 그는 처음의 꼿꼿한 자세 그대로 술잔을 기울였다.
아마도 은은한 달빛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벽향주의 알큰한 술기운 때문일지도 모른다.
철두철미한 성정으로 모든 궁인(宮人)들을 두렵게 했던 그가, 조정대신들마저도 감히 범접하지 못할 위엄을 지닌 그가, 이 조막만 한 녀석에게만은 이토록 관대한 이유.
분명 이 밤의 느른한 정취에 취한 탓일 것이다.
자신의 생경한 감정에 대해 스스로 자위하고 있으려니 병연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잠이 든 라온을 데리고 처소로 돌아가려함이었다.
그러나 병연의 손이 라온의 몸에 채 닿기도 전.
영이 예의 차가운 목소리로 그를 말렸다.
“그냥 두어라.”
“하오나…….”
“되었다. 잠시 어깨 좀 빌려준다 하여 어찌 되는 것도 아닐 터이니.”
“…….”
문득 병연은 시선을 들어 영을 바라보았다.
영의 이런 모습은 너무도 생소했다.
마치 처음 보는 이를 만난 듯 낯설었다.
“불편하지 않으시옵니까?”
병연의 물음에 영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너야말로 이 녀석과 지내는 것이 불편하지 않으냐?”
“귀찮고 성가시긴 하지만…….”
잠시 말을 끊은 병연이 잠든 라온을 보며 대답했다.
“딱히 불편하진 않사옵니다.”
“그래?”
방금 전, 병연이 지었던 표정이 이번엔 영의 얼굴에 고스란히 그려졌다.
의외라는 듯 병연을 보던 영은 술잔에 술을 따르며 질문을 이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럴 것이냐?”
“무엇을 말이옵니까?”
“이곳엔 이제 너와 나 둘뿐이야. 언제까지 그리 거북한 말투로 나를 대할 것이냐? 내 분명히 말하지 않았어? 너는 내가 인정한 단 하나의 벗이라고 말이다.”
오래전, 서로에게 유일한 벗이 된 두 사람은 허물없이 지내기로 약조한 터였다. 하여, 그들은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서로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곤 했었다.
영의 지청구에 병연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난 더 이상, 저하의 유일한 벗은 아닌 거 같군.”
“무슨 소리야?”
“오늘 저하께 또 다른 벗이 생긴 거 같아서 말이야.”
병연의 말에 영은 자신의 왼쪽 어깨에 기대고 있는 라온을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맹랑한 녀석.”
그러나 이 녀석의 맹랑함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마치 어린 아우의 투정 같아 귀엽게 느껴졌다.
아우가 있다면 꼭 이런 기분이겠지.
유독 라온에게만 관대한 이유를 또 하나 찾아낸 영은 기분 좋은 얼굴로 병연에게 물었다.
“이번엔 언제 떠날 거야?”
“글쎄.”
당장이라도 떠난다는 말을 할 줄 알았던 병연의 입에선 뜻밖에 대답이 흘러나왔다.
“오늘 여러 번 사람을 놀라게 하는군.”
“한동안은 궁에서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궁이란 곳은 무료하기 이를 데가 없다며? 하루하루 버티는 것이 곤혹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번에 돌아와 보니 생각보다 그리 심심하지 않은 곳이더군.”
“심심하지 않아?”
“뭐, 그리 되었어. 또한, 궁금한 것도 생겼고 말이야.”
“설마 너도 아까 보았던 소녀가 어찌하여 그리 울었는지 궁금하다는 것은 아니겠지?”
웃자고 한 농이었다.
그러나 정곡을 찔린 병연은 말없이 술잔만 들이켰다. 그러다 변명하듯 되물었다.
“저 녀석이 정말로 그 소녀를 찾아낼지도 모르잖아?”
“불가능한 일이다. 찰나의 순간에 본 인상착의로 어찌 사람을 찾을 수 있겠어?”
“저 녀석 말처럼, 혹시 아는 이를 만날 수도 있잖아.”
“수백 명의 궁녀들 중에서 그 여인이 뉘인지 꼭 집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절대 존재하지 않아. 절대로……!”
***
“어찌 생겼다고요?”
다음날 아침, 자선당 대문 밖.
장 내관과 라온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솟을대문 앞에 나란히 쪼그려 앉아 있었다.
매일 아침, 장 내관은 라온을 찾아와 내반원에서 내려온 명(命)과 라온이 필요한 생필품을 전해주고는 했다.
어제까지는 장 내관이 불러서야 겨우 자선당 밖으로 나왔던 라온이었지만, 오늘은 장 내관이 오기 전부터 대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어제 밤에 보았던 소녀의 정체. 자칭 궁궐 마당발이라 칭하는 장 내관에게 물어보면 알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 때문이었다.
라온은 장 내관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소녀의 인상착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밤이라 자세히 보지는 못했는데, 키는 제 어깨만큼 올까요? 한 이정도 쯤. 유난히 맑은 눈이 얼굴의 절반을 차지 할 만큼 엄청 컸습니다. 그리고 코는 요렇게 야무지게 오뚝하고, 입술은 앵두처럼 귀여운 여인이…….”
설명을 하다 보니 문득 한심하단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눈에 오뚝한 코, 앵두 같은 입술.
소녀는 분명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궁 밖에서나 통할 말이었다.
궁 안에는 어제 본 소녀만큼의 미녀는 손가락, 발가락을 다 동원해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저런 특징 없는 인상착의로는 절대 소녀를 찾지 못하리라.
설명을 하던 라온은 문득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녀의 한숨이 채 끝나기 전.
“의녀 월희로군요.”
별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장 내관이 말했다.
라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 놀라 내쉬던 날숨을 그대로 딱, 턱 끝에 매단 채 라온이 급히 물었다.
“누구라고요?”
“지금 홍 내관이 설명하는 궁녀, 내의녀 월희이오만.”
“정말요?”
에이, 말도 안 돼. 이런 특징 없는 설명만으로 어찌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낸단 말인가?
“눈이 엄청 크고, 코가 요렇게 야무지게 오뚝한 아이, 의녀 월희가 틀림없소.”
장 내관이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침 내의원에 볼일이 있어 가야 했는데. 함께 가지요. 내의원으로. 월희 그 아이, 지금쯤이면 내의원에 있을 게요.”
유쾌한 얼굴로 큰 소리 탕탕 치는 장 내관을 따라 라온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내의원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라온은 괜한 짓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장 내관이 호언장담하기에 조금은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자선당에서 내의원까지 오는 동안 반신반의(半信半疑)하던 마음은 반의(半疑)쪽으로 현격하게 기울었다.
월희와 흡사하게 생긴, 눈 크고 코 오뚝한 궁녀들을 너무 많이 봤던 것이다.
화초서생의 말이 맞았다.
이 넓은 궁궐, 저 많은 궁녀들 중에서 어제 보았던 여인을 찾는 것은 한양에서 김 서방 찾기보다 힘든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간밤에 어떻게든 붙잡아 물어보는 것인데. 어찌하여 그리 아프게 울었던 것인지.
허나, 후회는 언제나 늦었다.
이리 후회한다고 해서 간밤의 여인을 다시 만날 수는 없으리라. 무슨 방법을 쓴다고 해도 다시 만날 수 없겠지? 다시 만날 수…… 어라?
뭐야? 만날 수 있었네?
라온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내의원 마당 한 가운데, 말린 약초 소쿠리를 든 채 종종걸음 치는 저 어린 여인.
간밤에 자선당 동쪽 누각에서 그리 섧게 울던 소녀가 틀림없었다.
***
“홍 내관이 찾는 그 여인이 맞소?”
“맞습니다.”
라온은 의녀 월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대답했다.
틀림없었다.
저 커다란 눈, 앙증맞은 이목구비.
이리보고, 저리 보아도 간밤에 자선당에서 울던 여인이 확실했다.
라온은 놀라운 눈으로 장 내관을 돌아보았다.
“대체 정체가 무엇이옵니까?”
장 내관이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가드락가드락 우쭐대며 대답한다.
“내가 바로 조선의 내시요.”
그건 알고 있고 있습니다.
“조선의 내시라고 모두 장 내관님처럼 대단한 안목을 지닌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대체 어찌하신 것입니까? 몇 가지 안 되는 특징으로 어찌 이리 족집게처럼 찾아낸단 말이옵니까? 듣자하니 궁녀의 수가 500명이 넘는다고 하던데요.”
“정확히는 596명이라오.”
“그 많은 궁녀들 중에서 어떻게 제가 말한 여인이 월희 의녀님인지 단박에 알 수 있으셨습니까?”
“홍 내관이 말하길, 유난히 맑고 커다란 눈동자를 지닌 궁녀라고 하질 않았소?”
“그랬지요. 하지만 자선당에서 내의원으로 오는 동안 보았던 궁녀들 중에서도 커다란 눈동자를 지닌 궁녀는 손으로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았사옵니다.”
라온의 말에 장 내관이 검지를 좌우로 까닥거렸다.
“아니지요, 아니지요. 큰 눈이라고 해도 다 큰 눈은 아니지요. 특히 유난히 맑은 눈동자를 가진 아이라고 하면, 대비전의 윤덕이와 중궁전의 향금이, 그리고 의녀 월희 정도지요. 그런데 홍 내관 또래로 키가 이 정도 되는 아이는 의녀 월희가 유일하니. 단박에 알 수가 있는 것이 아니겠소.”
“장 내관님.”
“뭐, 궁금한 것이 더 있소?”
“설마…… 596명의 궁녀들을 다 기억하고 계신 것은 아니시겠지요?”
“왜 아니겠소.”
“그렇다면 궁궐 사람들을 죄다 기억하고 계신단 말씀이시옵니까?”
“그건 아니외다.”
뻣뻣하던 장 내관의 목에 조금 힘이 풀렸다.
“궁 안의 사람들은 대부분 기억하오만, 수시로 바뀌는 노비들의 얼굴은 절반밖에 기억하지 못한다오.”
“……!”
노비들을 절반밖에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어깨를 늘어뜨리는 장 내관을 보며 라온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뭡니까? 고작 몇 사람 기억 못 하는 걸로 그리 의기소침하지 마세요. 뒤집어 말하면 궁을 드나드는 사람들, 대부분을 기억한다는 소리잖아요.
아니, 기억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몇 가지 특징만으로도 단박에 뉘인지 파악할 수 있는 비상한 재주를 지닌 사람이었다.
혹시 장 내관은 궁의 숨은 실력자?
아니, 그런 것도 아니라면 환관들 대부분이 장 내관과 같은 능력의 소유자란 말인가?
상상의 나래를 펴던 라온은 장 내관을 향해 양 엄지를 치켜세웠다.
“대단합니다.”
“별거 아니오.”
“아닙니다. 정말로 대단하시옵니다.”
“헌데, 홍 내관. 월희는 왜 찾는 것이오? 혹시…….”
장 내관이 의미심장한 눈길을 라온에게 보냈다.
‘혹시 월희를 마음에 품고 있기라도 한 것이오?’
그 어이없는 오해에 라온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하하,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젊은 내시가 궁녀를 연모하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라오. 그러니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시오. 그런 것도 없다면 따분한 궁궐 생활을 어찌 버티겠소.”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오?”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찾은 것입니다.”
“묻고 싶은 것이라면?”
“어젯밤에 자선당에서 어찌하여 그리 서럽게 울었는지 묻고 싶어서 말이옵니다.”
“월희가 울었다고요? 그것도 자선당에서?”
“네. 간밤에 자선당 동쪽 누각에서 울고 있었지요.”
“동쪽의 누각이라면? 혹시 연못가의 누각 말이오?”
“네. 연못가 누각에서 머리를 풀고 울고 있었사옵니다.”
“머리를 풀고…… 울고 있는…… 허억!”
“왜요?”
“역시 있었군요.”
“네?”
“역시 원혼이 있었던 겁니다. 월희를 닮은 원혼이 있었던 거예요.”
“원혼?”
문득 뇌리 속으로 지금까지 장 내관의 행동이 떠올랐다.
라온이 궁에 들어온 이후로 장 내관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선당을 찾아왔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자선당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야 그 연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장 내관님, 그럼 지금까지 슬금슬금 저를 피하신 것이 자선당에 원혼이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옵니까?”
“역시 있었어요. 역시…….”
“장 내관님.”
"역시…… 역시 있었어요. 원혼이…… 있었어요.”
“장 내관님. 자선당엔 원혼 같은 건 없습니다.”
“방금 전 말하지 않았소? 간밤에 의녀 월희를 닮은 원혼이 자선당 누각에서 울고 있었다고.”
장 내관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장 내관님. 월희 의녀님을 닮은 원혼이 아니라, 월희 의녀님이 울고 계셨다니까요.”
라온이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어느새 장 내관은 하얗게 사색이 된 채 저 멀리로 도망가 버렸다.
궁궐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특히 장 내관의 머릿속에는 자선당에서 나온 사람들은 죄다 원혼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있는 듯했다.
‘이러다 살아 있는 나마저도 원혼 취급하는 것은 아닐지.’
속으로 짧게 혀를 차던 라온은 의녀 월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간밤에 울었던 탓일까?
의녀 월희의 동그란 얼굴은 해쓱하니 핏기가 없어 보였다. 또래보다 작고 여린 몸집 때문인지 들고 있는 약초 소쿠리도 영 버거워보인다.
좀 도와줘야 하는 건 아닐까, 위태위태한 모습에 라온이 월희를 향해 한 발짝 뗄 때였다.
“여기 있었군.”
거한의 사내가 라온을 앞질러 내의원으로 들어갔다.
워낙 장대한 사내의 등장이라 일순, 내의원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사내에게로 집중되었다.
푸른 무관복을 입은 사내는 곧장 내의원 마당을 가로질러 월희에게로 다가갔다.
"예서 뭐하는 것인가?”
사내의 쩌렁한 목소리가 월희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
놀란 월희가 들고 있던 약초 소쿠리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겁을 먹었는지 커다란 두 눈에 금세 눈물막이 서렸다.
그런 사정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사내는 험상궂은 얼굴을 월희의 작은 얼굴 가까이로 가져갔다.
“사시초(巳時草:아침9시)까지 돈화문 앞으로 나오란 연통 못 받았는가?”
“……그것이……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사내를 피해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던 월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잔뜩 웅크린 어깨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겁박 받고 있는 것이 분명한 모습.
그러나 사내의 험악한 인상과 거대한 체구 때문인지.
내의원에 있는 그 누구도 감히 두 사람 가까이로 다가가지 못한 채 먼발치에서 지켜볼 뿐이었다.
그렇게 방관만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내의 행동은 더욱 과감해졌다.
주위를 슥 둘러보던 사내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월희의 팔을 왁살스레 잡아당겼다.
“아얏!”
월희의 입에서 기어이 작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저 사람이!”
라온은 저도 모르게 불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월희가 달밤에 처연히 울었던 이유, 혹시 저 사내 때문이 아닐까?
험악한 사내에게 겁박당한 궁녀, 의지 할 데라고는 아무 곳도 없는 겁 많은 여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홀로 우는 것이 전부일 테니까.
라온의 고운 미간이 왈칵 일그러졌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월희에게서 사내를 떼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두 사람을 향해 다가가던 라온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뭐야? 저 사내?”
사내가 잔뜩 상을 찡그리고 있는 월희의 손에 뭔가를 쥐어주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는 도망치듯 내의원 마당을 벗어나는 사내의 얼굴.
그 험악한 얼굴에 언뜻 떠오른 것은 분명 홍조였다.
일순, 라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잠시 사내와 월희를 번갈아보던 라온은 뭔가 짐작이 간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뭐야? 그런 거였어?”
어찌 된 상황인지 대충 어림짐작이 되었다.
“하여간, 사내들이란…….”
낮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라온이 월희에게로 다가가려 할 때였다.
“어이, 거기 너!”
날카로운 목소리가 라온의 등을 후비며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던 라온은 저도 모르게 흡, 하고 숨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