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만월(滿月)의 밤
라온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누각을 향해 다가갔다.
누각의 소녀는 라온이 다가오는 줄도 모른 채 슬픔에 빠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보십시오.”
어느덧 누각에 오른 라온이 소녀를 불렀다.
순간, 훌쩍거리는 소리가 뚝 멈췄다.
놀란 소녀는 동그란 눈을 한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
이윽고, 라온을 발견한 소녀의 입에서 놀란 비명이 새어나왔다.
얼굴의 반이 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커다란 소녀의 눈망울엔 금세 두려움이 들어찼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 한밤중에 낯선 사내와 만나 놀라지 않는 여인이 있다면 그건 분명…… 원혼이리라.
저리 놀라는 것을 보면 적어도 원혼은 아니겠지?
“놀라지 마세요.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라온은 소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해치지 않아요, 하는 듯 양 손을 들고는 천천히,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 덕분일까?
소녀의 눈에 서린 두려움의 빛이 조금은 희석되는 듯도 보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무엇을 보았는지 커다랗던 소녀의 눈이 배는 더 커졌다.
그 눈에 어린 것은 두려움을 넘어선 그 이상의 어떤 감정.
“왜? 왜 그러는 것입니까?”
라온은 서둘러 소녀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라온의 시야에 병연과 화초서생의 모습이 맺혔다.
언제나처럼 심드렁한 표정의 병연은 누각 저 끝에 서 있으니 저이를 보고 저리 놀라는 것은 아닌 듯했고……
라온은 누각 안쪽에 성큼 들어와 있는 영을 응시했다.
‘화초서생 때문이었군.’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한데 모으고 있는 영의 차고 시린 표정이 소녀를 두렵게 한 것이 틀림없었다.
“화초서생.”
라온은 옴쳐드는 목소리로 영을 불렀다.
“왜?”
소녀를 바라보던 영이 시선을 라온에게로 돌렸다.
“웃으십시오.”
“뭐?”
“이렇게, 웃으란 말입니다. 놀라지 않습니까?”
영의 표정을 흉내 내며 미간을 찡그리던 라온이 보고 배우란 듯이 화사하게 웃어보였다.
“무얼? 어찌해?”
영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그와 동시에 토끼 같은 눈으로 그들을 번갈아보던 소녀가 후다닥 몸을 돌려 달아났다.
“저기, 기다리세요,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라온이 황급히 소리쳤지만 소녀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화초서생 때문에 놀라 저러는 것이 아닙니까?”
밉지않게 영을 흘겨보던 라온이 소녀를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각을 막 벗어나려는 순간, 몸을 휘청거리고 말았다.
누각의 계단을 밟는다는 것이 허공을 허방 밟은 것이다.
“어어어!”
놀란 입에서 새된 비명이 새어나왔다.
작은 병아리처럼 파닥거리는 모양새가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고꾸라질 듯 아슬아슬했다.
이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치면 어디 하나 부러져도 단단히 부러지리라.
라온은 곧 다가올 고통의 순간을 예감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묵직한 이물감이 허리춤에서 느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땐, 검은 밤하늘을 고스란히 옮겨 담은 듯한 눈동자와 마주 할 수 있었다.
“김 형.”
“진짜 원혼이라도 되고 싶은 거야?”
병연의 말에 라온은 고개를 돌려 발아래를 응시했다.
미처 몰랐는데 누각의 아래쪽은 달빛이 융단처럼 깔려 있는 깊은 연못물이었다.
하마터면 자선당 연못물에 빠져죽은 다섯 번째 사람이 될 뻔했다.
“고맙습니다.”
방금 전까지 누각 끝에 서 있던 분이 어느 틈에 예까지 온 것일까?
어쨌든 덕분에 물에 빠질 위기를 모면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라온의 목덜미로 병연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성가신 녀석.”
투덜대면서도 병연은 라온을 누각 안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성가셔서 죄송합니다.”
병연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짐짝처럼 누각 안쪽으로 끌려가는 라온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이것밖엔 없었다.
***
소녀가 떠난 뒤.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누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금은 무겁게 느껴지는 침묵을 깬 것은 라온이었다.
“본의 아니게 울고 있던 여인을 쫓아낸 꼴이 되어버렸네요.”
머쓱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이던 라온이 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까 그 소녀, 아무래도 귀신은 아닌 듯하지요?”
팔짱을 끼고 앉은 영이 무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적어도 귀신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더구나.”
라온과 병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녀, 확실히 귀신은 아니었다.
“저와 비슷한 또래거나 아니면 조금은 어려 보이는 여인이었습니다. 그 어린 여인이 어찌 그리 슬피 울었을까요?”
“무언가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었겠지.”
야심한 시각, 아직 어린 소녀가 소복을 입고 고요한 누각에 엎드려 곡을 하고 있었다. 필시 평범한 사연은 아니리라.
“혹시,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한 것은 아닐까요?”
“괴롭힘?”
“왜 그런 것 있지 않습니까? 궁에 들어올 때 선배에게 선물을 준비하지 않았다거나, 아니면 신참례 준비에 돈을 적게 내겠다고 한 죄로 괴롭힘을 당할 수도 있질 않겠습니까?”
제 경우를 곱씹어보며 라온이 의견을 내놓았다.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던 영이 곁눈질로 라온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그런 이유로 괴롭힘이라도 당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지 않을까 추측해보는 것이지요.”
라온이 딱 잡아떼자 그녀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며 영이 말했다.
“선조 왕 시절부터 과한 신참례를 금지한다는 명이 내려오고 있다. 행여 부당한 이유로 신래(新來)를 괴롭히는 것이 발각되는 날엔 장 열 대를 친다는 지엄한 국법이 있으니. 감히 그런 간 큰 짓을 할 자가 있겠느냐?”
“…….”
성 내관을 떠올리며 라온은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그리 간 큰 짓을 하는 자가 있습니다. 세상은 화초서생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험하고, 제멋대로랍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까요?”
라온은 이번엔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누각의 난간엔 마치 지금의 상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한 표정의 병연이 기둥에 등을 기댄 채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김 형, 김 형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
병연은 대답 대신 고개를 슥 돌려 버렸다.
모르겠다는 뜻인지, 관심이 없다는 뜻인지.
도통 종잡을 수가 없다.
그때, 영의 음성이 고요한 침묵을 두드렸다.
“그 아이의 입성, 하얀 소복차림이었다.”
“침의(寢衣)아니었습니까?”
“얼핏 침의로 보이긴 했지만 분명 소복이었다.”
“눈도 밝습니다.”
“달밤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소복을 입은 채 울고 있는 이유라면 단 하나밖에 없을 듯싶구나.”
“뭐, 짚이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라온이 눈을 반짝이며 영을 올려다보았다.
영은 무감한 시선으로 라온과 마주했다.
일순, 라온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하고 말았다.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영의 얼굴.
그 얼굴에 담긴 텅 빈 공허가 보는 이의 가슴을 시리게 찔러왔다.
‘이러니 그 소녀가 달아나지.’
문득, 라온은 화초서생의 등 뒤로 시선을 돌렸다.
이내 그녀의 커다란 두 눈에 구름 한 점 없는 검은 밤하늘이 담겼다.
구름도, 별도 없는 캄캄한 밤하늘엔 얼음 칼로 오려낸 듯한 선명한 만월이 걸려 있었다.
저 시리도록 차가운 달빛이 화초서생의 서늘한 눈빛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름 한 조각이라도 있었다면, 달이 저리 외롭고 시리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텐데.’
“정히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보아라.”
영의 목소리에 라온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네?”
“그리 궁금하면 직접 알아보면 될 것이 아니더냐?”
라온은 눈을 깜빡거렸다.
답을 물어보니, 직접 알아보란다.
잔뜩 기대하고 있던 라온의 표정이 푸스스 풀어졌다.
화초서생에게 뭔가를 기대한 내가 바보지.
하지만 라온은 입을 삐죽이는 대신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그렇게 하면 되겠어요.”
의외의 반응에 영의 얼어붙은 얼굴 위로 한 줄기 균열이 일어났다.
그가 감정이라 부를 수 있는 작은 편린을 띄우며 반문한다.
“뭐라?”
“이리 짐작만 할 것이 아니라 어찌하여 그리 울었는지 직접 만나 물어봐야겠습니다.”
“그 아이가 뉘인 줄은 아느냐?”
“당연히 모릅니다.”
너무도 당당한 대답에 영이 어이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
“헌데, 어찌 알고 물어봐?”
“이제부터 찾아봐야지요. 뉘인지.”
“한양에서 김 서방 찾는 일보다 어려울 것이다.”
“설마,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아까 본 그 아이를 궁녀라고 가정한다면, 궁궐에 있는 궁녀부터 일일이 찾아봐야 할 터인데. 궁궐에 있는 궁녀의 수를 어림잡아 500에서 600명 정도라고 치면. 한 군데 모아두고 얼굴을 확인하지 않는 이상, 찾기 힘들 것이다. 어디 그뿐이면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다고 하겠지. 허나, 아까 보았던 그 아이가 궁녀라는 확신도 없으니…….”
“그렇습니까? 고작 여인 하나 찾는 것이 그리 힘든 일입니까?”
“힘들다. 그러니 그만 두어라. 어차피 네 일도 아니지 않느냐?”
“제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라온은 아주 먼 과거의 기억을 떠올랐다.
지금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 문득 새벽에 잠이 깼던 적이 있었다.
희붐한 새벽빛이 스며들던 그 시각.
세상이 모두 잠들어 있던 그 새벽에 오직 한 사람, 어머니만이 깨어 있었다. 처음부터 주무시지 않으셨던 것인지, 아니면 새벽에 깨신 것인지 알 길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가 울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어머니는 울고 계셨다. 어린 자식들에게 들킬까 숨을 죽인 채 나직하게 흐느끼고 있었다.
푸른 새벽이 어머니의 작은 어깨를 감싸 안았다. 동그란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뒷모습을 보며 어린 라온의 눈가도 촉촉하게 젖었다.
무슨 이유로 우는 것인지 차마 물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했던 어머니의 서러운 눈물.
그것을 본 이후부터였다.
라온은 여인의 눈물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했다.
여인의 눈물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 저 누각에서 울던 소녀에게도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사람이든…… 귀신이든…… 여인이 우는 것이 싫습니다. 그네들이 우는 모습을 보면 여기가 아픕니다.”
라온은 왼쪽 가슴을 손바닥으로 짓눌렀다.
“아까 울던 그 소녀, 꼭 찾을 겁니다. 찾아서 그 눈물, 멈추게 하렵니다.”
“…….”
“화초서생 말씀대로 찾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누군가……분명 아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라온이 중얼거렸다.
잠시 누각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정적의 중심에 있던 라온이 머쓱한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이곳,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라온의 목소리에 두 사내의 시선이 일제히 누각 밖으로 향했다.
유백색의 달빛을 한껏 머금은 연못가엔 지천으로 큰별꽃이 피어 있었다.
한낮엔 그저 필요 없는 잡초나 다름없는 꽃이었건만.
달밤에 피어 있는 작은 꽃은 흡사 수천 개의 하늘별이 땅으로 내려앉은 듯 몽혼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이리 황폐해지기 전에는 궁궐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정원이었다고 하더구나.”
“그런 곳입니까?”
달밤이 그려내는 아름다운 풍광에 넋을 잃고 있던 라온은 말간 눈으로 영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버려져 있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무슨 소리더냐?”
“그렇지 않았더라면 제가 이런 호사를 어찌 누렸겠습니까.”
“호사?”
“네. 호사지요. 호사도 이런 호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머리 위엔 아름다운 달빛이 교교히 흐르고, 땅 위엔 별빛 같은 꽃이 만개하니. 여기가 하늘세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좌우엔 고운 벗들이 있으니. 제 평생 이보다 더 호사스러운 적은 없었습니다.”
“벗이라? 너와 내가 어느새 벗이 되었느냐?”
영은 자신을 가리켜 감히 벗이라 칭하는 라온을 깊은 눈으로 응시했다.
“우리 할아버지 말씀이…….”
라온이 습관처럼 검지를 세웠다.
“만나서 마음이 즐겁고, 헤어진 후에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런 이를 바로 ‘벗’이라고 부른다하셨지요.”
“나를 만나 즐거우냐?”
“솔직히 말을 할까요? 아니면, 듣기 좋은 꽃노래를 들려 드릴까요?”
“솔직한 것이 듣기에도 좋은 법이지.”
“처음 만났을 땐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함께 있다 보니 조금은 즐거운 것도 같습니다.”
속내를 무람없이 드러내는 라온의 대답에 영은 실금 같은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그 마음일랑은 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녀석을 만나는 것이 즐거운 것인지 아직 모르겠으나, 지켜보는 재미는 분명 있었다.
저 작은 몸을 분주히 놀리는 것도 재미있었고, 문득문득 저 조막막한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있을까 궁금도 하였다.
벗이라……? 벗이란 말이지.
이리 재미있는 녀석이라면, 환관인들 어떠하랴. 기꺼운 마음으로 벗이 될 수도 있음이었다.
“이리 좋은 밤에 이것이 빠질 수야 없지.”
라온을 돌아보던 영이 불현듯 소맷자락에서 작은 호리병 하나를 꺼내놓았다.
“무엇입니까?”
호리병을 받은 라온이 병마개를 열었다.
이내, 콕 쏘는 알큰한 향내가 코를 찔러왔다.
낯설지 않은 향기에 라온이 알은체를 한다.
“벽향주(碧香酒)로군요.”
“벽향주를 아는 것을 보니 너도 제법 주당인 게로구나.”
영의 지레짐작에 라온이 낮게 웃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좋아하신 술이라 들었습니다. 아버지 기일이면 어머니가 빼놓지 않고 빚으셨거든요.”
“아버지께서 술을 즐길 줄 아는 분이셨구나. 아름다운 달밤에 좋은 벗과 함께하기엔 벽향주만큼 좋은 것도 없지.”
영의 소맷자락에서 이번엔 목각으로 만든 술잔이 나왔다.
이내 또르르, 술잔에 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잔 하자꾸나.”
라온의 턱밑으로 술이 가득 담긴 술잔이 다가왔다.
“하지만…….”
라온은 술잔과 영을 번갈아보며 멈칫댔다.
만월의 달밤, 좋은 벗과 어울려 아름다운 풍광을 안주 삼아 걸치는 술 한 잔이라.
나쁘지 않았다.
다만…… 라온이 단 한 번도 술을 마셔본 적이 없었던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술은 쓰고 독한 것이다, 라는 고정관념이 뇌리에 박혀 있었던 터라.
눈앞에서 찰랑대는 술잔을 보며 라온은 긴장했다.
저도 모르게 등을 꼿꼿이 세우고 입안에 고인 단침을 꼴깍 삼켰다.
좀처럼 손을 뻗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영이 눈매를 가늘게 떴다.
“너……혹시 술, 처음 먹어보는 것이냐?”
“하하, 설마요.”
“헌데 어찌 그리 긴장하는 것이야?”
“긴장은 무슨! 좋아서 그럽니다. 너무 좋아서.”
“하긴. 지금은 비록 내시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너도 엄연한 사내였을 터. 사내로 태어나 지금껏 술 한 번 마셔보지 않았다면. 그게 어디 사내였겠느냐.”
“하하하, 그렇지요. 어디 그것이 사내였겠습니까.”
라온은 과장되게 웃으며 낚아채듯 술잔을 잡쥐었다.
‘이대로 계속 머뭇댔다가 무슨 의심을 살지도 몰라. 그래, 마셔보자. 이깟 술, 한번 마셔보지 뭐.’
결심한 라온은 단숨에 술잔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이내 알싸한 벽향주의 화기가 입 안 가득 퍼지고, 찌르르한 감각이 목울대를 적셨다.
그런데…….
“달다?”
생각보다 술맛이 달았다.
혀끝에 맺힌 알큰한 향내도 생각보다 거북하지 않았다.
술이란 쓰고 독한 것이라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아버지가 타고난 주당이라고 하시더니, 내가 그 피를 이어받았나보군.’
자신감을 얻은 라온은 술잔을 쥔 손을 쭉 뻗었다.
"한 잔 더 주십시오!”
***
“헤에.”
라온의 입매가 가로로 길게 늘어졌다.
호기롭게 ‘한 잔 더!’를 외친 것이 채 일다경도 되지 않았다.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이기엔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알싸한 화주의 기운이 라온을 잠식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자그마한 얼굴에 금세 홍조가 피어올랐다.
이 느른한 열감이 기분 좋았다.
물고기가 된 듯 허공을 유영하는 듯한 부유감도, 손끝을 간질이는 듯한 짜르르한 느낌도, 너무나 좋았다.
술을 마시면 이런 기분이 되는구나. 이리 기분이 좋아지는구나.
라온은 연신 웃음을 흘렸다.
“취했느냐?”
영의 물음에 눈이 반쯤 감긴 라온이 중얼거렸다.
“
안 취했습니다. 취하긴 누가 취했다고…… 그러십니까?”
말과는 달리 대답하는 목소리에 졸음과 취기가 열매처럼 매달려 있었다.
술기운에 전신이 느른하게 늘어졌다.
행여 여인인 것이 들통 날까 싶어 밤이면 밤마다 날카롭게 세우고 있던 긴장감도 맥없이 허물어져 버렸다.
졸음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아, 안 되는데. 자면 안 되는데.’
라온은 잠을 쫓기 위해 눈을 한껏 부릅떴다.
그러나 그것도 찰나의 순간뿐.
아무리 애를 써도 이미 침범한 수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안 되는데. 여기서 자면 절대 안 되는데…….’
한순간, 의식의 끈을 놓아버린 라온은 까무룩 잠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