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동쪽누각의 잡스러운 것
어쩌면 이건 만월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푸른 달밤이 그린 전생의 편린일지도…….
뭐,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다. 문제는 어째서 다른 누구도 아닌 저 사내의 얼굴이 보이느냐 하는 것이다.
“요즘 통 잠을 못 잤더니 헛것이 다 보이는구나.”
결국 눈앞에 보이는 영의 존재를 환상으로 치부한 라온은 손등으로 눈가를 쓱쓱 문지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채 한 발짝도 떼기 전에 영에게 뒷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너 왜 여기에 있는 거냐?”
라온과 눈높이를 맞춘 영이 미간을 한데 모았다.
내 사람이 되어라 할 때는 싫다며 기세 좋게 도망까지 친 놈이 어쩌자고 이곳에 있는 것일까?
이 녀석을 찾기 위해 사람까지 풀었건만. 끝내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런 녀석을 엉뚱한 곳에서 만나니, 놀람과 황당함이 교차했다.
놀라기는 라온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화초서생이십니까?”
환상이라고 여겼던 얼굴이 불쑥 다가오자 라온은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문득 화초서생의 몸에서 나는 향내가 그녀의 코끝을 간질였다.
치자꽃 향기인가?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나리꽃인가? 그것도 아니면 사향노루의 향이려나?
화초서생의 몸에서는 만개한 봄 들판의 향기가 가득했다.
어쨌든 이리 향기가 선명한 걸 보니 귀신도 아니고, 환상은 더더욱 아니구나.
“날 계속 그 이상한 호칭으로 부르는구나.”
영이 라온의 까만 눈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헌데,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화초서생께서 왜 여기에 있는 것입니까?”
동그랗게 떠졌던 라온의 눈이 가늘게 여며졌다.
“설마, 절 쫓아오신 겁니까?”
라온은 그가 사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날 나를 바라보던 눈빛이 범상치 않더니, 이곳까지 쫓아온 거야?’
영이 라온의 머리에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헛소리 그만하고. 대답부터 해라. 네가 어찌 이곳에 있는 것이냐?”
“저야 일 때문에 있는 것이지요.”
“일?”
영이 라온을 위아래로 쭉 훑었다.
이내 그의 눈에 라온이 입고 있는 초록색 당의가 들어왔다.
내시들이 입는 관복이 틀림없었다.
영의 입가에 긴 미소가 맺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놓쳐 버린 줄 알았던 사냥감을 다시 만난 기분이다.
“지난번에는 양반 행세더니, 이번엔 내시 행세냐? 그 녀석 재주도 좋구나.”
운종가를 횡행하던 녀석이 어떻게 환관이 되었을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불쑥 불쑥 튀어나오니.
참으로 기막힌 녀석이다.
“궁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보이십니까? 가짜 행세를 할 만큼?”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감히 가짜양반 행세한 놈이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유구무언(有口無言)해도 모자를 판에 어디다 감히 버럭대는 것이냐!”
“…….”
듣고 보니 틀린 말도 아닌지라.
라온은 이내 입술을 한일(一)자로 굳게 다물었다.
“행세가 아니면 정녕 내시가 되었느냐?”
“유구무언이옵니다.”
“어쭈!”
영은 잡아먹을 듯 사나운 눈씨로 라온을 겁박했다.
‘말하지 말라면서요.’
억울한 마음에 고함이라도 치고 싶어 같이 노려보고 있자니 영의 무감한 얼굴이 라온의 코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순간, 라온은 꿀꺽 침을 삼키고 말았다.
뭐야? 뭐가 이렇게 예뻐? 사내 주제에 여인보다 더 예쁘면 어쩌자는 거야?
괜스레 황망해진 라온은 먼 허공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머리를 돌렸다.
"돈에 속고, 사소한 문서에 속다보니 이리 되었습니다. 더는 묻지 말아주십시오. 그나저나 화초서생께서는 여기서 뭐하고 계십니까? 설마, 저를 찾기 위해 여기까지 쫓아오신 것입니까?”
“내가 그리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느냐?”
“그리 바빠 보이지도 않습니다.”
"죄를 짓고 도망까지 친 놈이 말이 많구나.”
“도망친 적 없습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질 않았느냐?”
“사정이 있어 잠시 집을 떠난 것뿐입니다. 그나저나, 정말로 화초서생께선 어찌 여기에 계시는 것입니까? 여기가 어딘 줄은 알고 계십니까? 잡초 밭이 무성하여 잘 모르시나 본데, 여기 알고 보면 궁입니다. 궁.”
“알고 있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거 아닙니까? 혹시 자주 다니시는 기생집 이름과 착각하신 것은 아닙니까? 여긴 진짜 궁궐이란 말입니다. 상감마마께서 살고 계시는 궁궐요.”
“안다 하질 않았느냐.”
“그럼 여기가 자선당이라는 것도 아십니까?”
“당연히 알고 있지.”
영의 너무도 태연한 반응에 라온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화초서생, 그저 어느 귀한 양반 댁 자제인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하긴, 되짚어 생각해보니 그는 처음부터 조금은 특별한 사내였다.
몸에 걸치는 세세한 것 하나부터 시작해서 생긴 이목구비까지 범상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어디 그뿐일까?
하는 양을 보아하니, 자선당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것이 하루 이틀 궁에서 살아온 사람의 품새가 아니었다.
영을 향한 라온의 눈빛이 단박에 달라졌다.
혹시…….
눈매를 가늘게 뜨고 뚫어져라 영을 응시하던 라온이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혹시…… 환관이십니까?”
환관이라면 말이 되었다.
거세당한 사내 중에는 저리 아름다운 사내가 종종 있다는 소릴 들은 적이 있다. 이제야 저리 훤하게 생긴 사내가 여인이 아닌 사내를 연모하는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라온은 애잔한 눈빛으로 영을 응시했다.
비록 몸으로 직접 당하진 않았지만, 엄공 노인의 생생한 묘사 덕분에 거세당한 사내의 아픔일랑은 남들보다 더 많이, 더 절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 라온을 빤히 쳐다보던 영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놈 눈에는 내가 그리 보인단 말이지?”
“아닙니까?”
“아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너 보기엔 내가 무어로 보이느냐?”
사나운 물음에 라온은 제법 눈매를 매섭고 하고 다시 한 번 영의 모습을 더듬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내시로 보입니다만.”
“아니다. 적어도 그보다는 훨씬 대단한 사람이지.”
“그럼 무엇입니까? 설마 왕족이라도 된다고 말씀하고 싶으신 것은 아니시죠?”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라온이 손사래를 쳤다.
문득 라온을 바라보는 영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가 고개를 내려 라온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물었다.
“넌, 내가 무섭지 않느냐?”
영의 검은 눈에 푸른 기운이 스며들었다. 파랗게 날이 선 칼날처럼 차고 싸늘한 기운이었다.
“무섭긴요,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영의 차가운 시선과 마주하는 순간, 더럭 겁도 났다.
그러나 라온은 내색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선 항상 말씀하셨다.
사내는 동물과 같은 성정을 지닌 자들이라. 상대가 겁을 먹는다 생각하면 더더욱 얕잡아 본다고.
게다가 살벌한 눈빛을 가진 사내라면, 라온은 이미 넘치도록 경험했다. 운종가엔 눈앞의 사내보다 더 거친 사내들을 차고 넘쳤다.
‘어림없습니다. 제가 그런 겁박에 무서워할 줄 알았습니까?’
라온은 영을 향한 두 눈에 잔뜩 힘을 주었다.
“너, 이름이 무엇이냐?”
내 흥미로운 눈길로 라온을 응시하던 영이 물었다.
“남의 이름을 묻기 전에 자기 이름부터 말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당찬 되물음에 영은 잠시 당황했다.
“내 이름?”
“그래요. 화초서생의 이름이요.”
“이름이라…….”
누구도 감히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없었다.
어린 시절, 웃전들께서 몇 번 부르시긴 하였으나, 세자책봉을 받은 이후로는 그저 이 나라의 세자이자 국본으로 불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배자, 세상 사람들의 복종을 받는 절대적인 군주를 일컫는 말이었다. 뱃속에서부터 잉태되어진 운명은 보이지 않는 갑옷처럼 그를 휘감았다. 언제나 ‘세자저하’로 불렸기에 자신에게도 이름이 있다는 사실마저도 망각하고 말았다.
일순, 영의 아름다운 미간이 가볍게 찡그러졌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불린 것이 너무 오래되었다.
그 찡그림을 거부의 뜻으로 지레짐작한 라온이 불퉁히 소리쳤다.
“말하기 싫은 것입니까? 그럼 저도 말하지 않을 겁니다.”
라온은 영에게 등을 보였다.
그때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영.”
영이 라온의 얼굴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영이라고 한다. 이영”
“저는 라온이라고 합니다. 홍라온! 언제나 즐겁게 살라고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지요.”
하늘 꽃처럼 해사한 웃음이 라온의 얼굴에 피어올랐다.
저가 얼마나 어여쁘게 웃는지 미처 깨닫지 못한 모습이라.
결국, 영은 먼데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
한바탕 설전(舌戰)을 치른 후, 라온과 영은 잡초 밭가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라온은 힐끔 영을 보며 생각했다.
‘이래선 곤란해.’
화초서생, 이런 저런 말로 핑계를 대고 있지만, 아무래도 자신을 쫓아온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곳에서 공교롭게 딱 마주칠 리 없다.
‘처음 봤을 때부터 날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더라니.’
헤어질 때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 사람이 되어라.’
물론, 싫지는 않았다. 여인이 봐도 반할 만큼 화초서생은 아름다운 사내였다.
하지만 그에겐 심각한 결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사내를 연모하는 사내라는 점이다.
‘화초서생이 날 따라다니는 것은 내가 사내인 줄 알고 있기 때문이야.’
만약, 자신이 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었다.
이는 필시 라온에겐 커다란 약점이었다.
자신이 여인이라는 사실을 들키게 되는 날엔 감당하지 못할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리라. 단순히 자신의 목 하나 달아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가족은 물론이고, 본의 아니게 속이게 된 엄공까지 줄줄이 줄초상을 면하지 못하게 되리라.
‘그럴 순 없지.’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화초서생과의 관계, 이쯤에서 확실하게 끝을 맺어야 뒤탈이 없으리라.
뭔가 좋은 핑계가 없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라온의 눈에 마침 풀숲을 휘적휘적 걸어오고 있는 병연의 모습이 보였다.
‘김 형이 어떻게 여길 왔을까?’
궁금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게으름의 대명사라 불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병연이 지금 이 자리에, 라온이 딱 필요한 시기에 나타났다는 점이다.
화초서생을 떨쳐낼 기가 막힌 방도가 떠올랐다.
속으로 지화자를 외치던 라온은 애써 심각한 표정을 연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심상치 않습니다.”
“뭐가?”
라온이 영을 올려보며 대답했다.
“우리 두 사람, 자꾸만 마주치는 걸 보니, 인연도 보통 인연이 아닌 모양입니다.”
“인연? 악연이 아니고?”
“악연도 인연이지요.”
라온이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우린 전생에 부부였는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그 무슨 헛소리냐?”
이 녀석이 또 무슨 소릴 하려고 이러는 것일까.
영은 기대 반, 호기심 반의 표정으로 라온을 응시했다.
“헛소리가 아닙니다. 처음 본 순간, 딱 하고 느낌이 왔습니다. 이 사람, 낯설지 않다.”
“난 낯설었다.”
영의 단호한 부정에 라온이 체머리를 흔들었다.
"애써 부정하지 마십시오.분명 느낌이 있으셨을 겁니다."
아무렴요. 오죽 했으면 예까지 쫓아오셨겠습니까?
라온은 감정을 더더욱 고조시키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처음엔 긴가민가하였지요. 하지만 오늘 이곳에서 다시 만나는 순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연이 범상치 않은 것임을.”
“범상치 않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불구대천의 원수였을지도 모르고.”
“부부였을 거라니까요.”
“누구 마음대로?”
이 녀석, 은근슬쩍 내 옆자리를 자리를 꿰차려 한다.
어디라고 감히! 아니지. 녀석은 아직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그럼, 대체 왜 이런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늘어놓는 걸까?
곧 그 이유가 밝혀졌다.
“하늘이 뜻이라는 게 원래 그렇습니다. 원하든 원치 않던 연을 제 마음대로 이어놓았다가 갈라놓지요.”
탄식을 흘리던 라온이 돌연 영의 손을 잡았다.
반사적으로 손을 쳐내려던 영은 라온의 두 눈을 보고 우뚝 굳어졌다.
라온의 커다란 두 눈에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 우리의 인연은 안타깝게도 여기까지인 듯싶습니다.”
“어째서?”
“아쉽게도…… 저는 이미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뭐라?”
영은 버릇처럼 미간을 한데로 모았다.
묘하게 신경이 거슬린다.
물론, 저 녀석이 자신의 옆자리를 꿰찬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전생의 부부였다니. 코웃음이 절로 쳐졌다.
하지만 정작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다는 라온의 말을 듣는 순간, 영은 기분이 묘해졌다.
일종의 패배감이랄까?
“누구냐?”
감히 왕세자인 나를 버리고 선택한 사람이?
그의 의구심에 답이라도 하듯 라온이 어딘가로 쪼르르 달려갔다.
잠시 후, 검은 흑의의 사내를 앞장세운 그녀가 의기양양해진 표정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분입니다.”
“……!”
“이분과 저, 우리 두 사람, 이미 동숙(同宿)하는 사이입니다. 그러니 더는 제게 화초서생의 사람이 되라는 말씀은 마십시오.”
거짓말은 아니었다.
병연과는 분명 한 방에서 지내니, 동숙하는 사이가 분명했다.
물론, 라온이 말하는 동숙과 화초서생이 받아들이는 동숙에는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어떠하랴? 모로 가도 한양만 가면 그만이랬다고.
이리하여 화초서생의 마음만 접을 수 있다면 아무 상관없었다.
이것으로 더는 자신의 사람이 되라는 말은 하지 않겠지. 이미 다른 이와 동숙까지 한다는데 더는…….
“그것이 무에 어때서?”
예상과는 다른 영의 반응에 라온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네가 저자와 동숙하는 것과 나의 사람이 되는 것이 무슨 상관이라고 그러는 것이냐?”
라온과 병연을 번갈아보며 영이 물었다.
“상관없습니까?”
“상관없다.”
“혹시 동숙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 아니십니까? 김 형과 저, 함께 자는 사이라니까요. 화초서생께선 상관없을지 몰라도 저는 상관있습니다. 아니, 우리 김 형도 상관있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김 형?”
라온은 영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연신 병연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옆구리를 찔렀다.
“김 형?”
“네. 이분이 바로 ‘저의 김 형’입니다.”
“너의 김 형?”
“네. 이미 그렇게 되었습니다.”
뭔가 마뜩치 않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영이 불현듯 병연을 향해 턱짓하며 물었다.
“언제 돌아온 것이냐?”
“며칠 되었사옵니다.”
“왔으면 곧장 내게로 왔어야지?”
“이리 찾아오시지 않으셨사옵니까?”
“방자한 놈.”
말은 그리했지만 병연을 바라보는 영의 눈빛은 그리 사납지 않았다.
“두 분이…… 아는 사이십니까?”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눈치를 살피던 라온이 병연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저분께서 김 형에게도 자신의 사람이 되라 말씀하셨습니까?”
라온의 물음에 병연은 침묵했다.
그것은 분명 긍정을 뜻하는 침묵이었다.
영을 바라보는 라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 사람, 완전 상습범이구만. 제법 반듯하게 생긴 사내들은 죄다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다니.
혹여 김 형이 대들보 위에 올라가는 이유가 화초서생을 피하기 위한 것 아니야? 그럼 동쪽 누각에는 오지 말라는 것도 모두 화초서생 때문인가?
라온은 조심스럽게 병연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김 형, 혹시 이것입니까?”
“뭐가?”
“저보고 조심하라고 하신 것 말입니다. 동쪽 누각의 잡스런 것, 혹여 화초서생을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라온이 영을 가리키며 순진한 눈망울로 물었다.
순간, 두 사내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누가 동쪽 누각의 잡스런 것이야?”
“화초서생?”
잠시 침묵이 흐르고.
영을 힐끗 쳐다보던 병연의 입에서 옴쳐드는 기이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큭.”
그와 함께 영에게서는 ‘으득’ 하고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화나셨습니까?”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이더냐?”
“그래서 못 들으시게 작은 목소리로 말한 거 아닙니까?”
귀도 밝으시지. 그리 작게 속삭였건만, 어찌 그걸 듣고 기분 나빠 하시는지.
“정녕 네가 죽고 싶은 게로구나.”
영은 성난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며 라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때였다.
“흐윽……흑흑흑, 흐윽.”
어디선가 들려오는 낮은 흐느낌소리에 세 사람은 일순, 굳어버리고 말았다.
“들으셨습니까?”
영을 피해 달아나던 그 모습 그대로 굳어버린 라온이 물었다.
“들었다.”
라온을 향해 달려들던 모습으로 굳어 있던 영이 대답했다.
“저쪽인 거 같은데.”
그 곁에서 심드렁하게 앉았던 병연이 누각을 가리켰다.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낡은 누각으로 집중되었다.
“흐흐흑, 흐흑, 흑흑흑.”
그 시선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일까?
다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들리십니까?”
재차 확인하는 라온의 물음에 영이 재차 대답했다.
“들린다.”
“울음소리가 확실하지요?”
“확실하구나.”
영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기 라온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몇 발짝 떼지 못하고 영에게 뒷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아얏! 뭐하는 짓입니까?”
“그러는 너야말로 뭐하는 것이냐? 지금 어딜 가려는 것이야?”
라온이 풀숲 너머를 손짓했다.
귀곡성이 들려온 바로 그곳이었다.
“거길 왜 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라온이 눈을 반짝이며 반문했다.
“뭐가?”
“무슨 연유로 저리 슬피 우는지. 정녕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
잠시 후.
무성한 잡초 밭 사이로 세 사람의 얼굴이 빠금히 드러났다.
세 사람은 숨을 죽인 채 누각 안쪽을 훔쳐보고 있었다.
만월의 달빛이 스며드는 누각 한쪽엔 하얀 소복 차림의 소녀가 앉아 있다.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소녀는 연신 소맷자락으로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아내고 있었다.
수풀 사이에 숨어 그 광경을 지켜보던 라온이 영을 돌아보며 작게 속삭였다.
“어찌 보이십니까? 사람일까요? 아니면 귀신일까요?”
“글쎄. 귀신같아 보이진 않지만, 멀쩡한 사람이 이 야심한 시각에 이런 곳에서 울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니…….”
다른 곳도 아닌 이곳 자선당에서.
“그런데 왜 저리 울고 있는 것일까요?”
“난들 알겠느냐.”
내내 침묵하던 병연도 한 마디 끼어들었다.
“그보다 우린 왜 이러고 있는 것이냐?”
물음에 답하는 대신, 라온은 불현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영이 덩달아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또 어딜 가려고?”
“여인이 울고 있습니다.”
“헌데?”
“더 이상 무슨 이유가 필요합니까? 여인이 울고 있는데.”
라온은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헤치고 누각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저 녀석 대체 뭐야?”
마땅치 않다는 듯 불퉁하게 중얼거리면서도 영은 라온의 뒤를 따랐다.
“……성가신 놈.”
내내 심드렁한 얼굴로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를 지키고 있던 병연 역시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