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7화 (7/131)

7. 자선당의 괴인 (下)

“그 말이 사실이옵니까? 정말로 보았답니까?”

“제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분명 보았다고 했어요. 그뿐인 줄 아십니까? 심지어 말까지 했답니다.”

동궁전의 중희당 한쪽 귀퉁이.

바람이 잘 통하는 처마 아래에 한 무리의 궁녀와 내시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이 이곳에 모이는 것도 오늘로 벌써 사흘째였다.

사흘이나 빠지지 않고 이렇게 모이는 이유는 버려진 전각, 자선당 때문이었다.

귀신 나오는 전각으로 알려진 자선당에 새로운 신입 환관이 든 이후로 그들은 이곳에 모여 장 내관이 물고 온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이상하옵니다. 자선당에서 죽은 것은 궁녀들이 아니옵니까? 헌데, 어찌하여 홍 내관은 사내귀신을 본 것이옵니까?”

“이 물색없는 사람을 보았나. 자선당에서 죽은 것이 어찌 궁녀들뿐이겠는가? 내 듣자하니 궁녀와 사랑에 빠졌던 병사가 그 연못물로 뛰어들어 죽었다고 한다네.”

“그런 일이 있었사옵니까?”

“에그, 무서워라.”

“그런데 장 내관, 홍 내관이 자선당에 든 지 얼마나 되었는가?”

대전 김 내관의 물음에 장 내관이 서둘러 대답했다.

“오늘로 벌써 사흘이옵니다.”

“사흘째라…….”

잠시 혼잣말을 읊조리던 김 내관이 소맷자락 안에서 엽전 열 냥을 내밀었다.

“허면, 나는 앞으로 사흘 더 버틴다에 걸겠네.”

김 내관의 말에 옆에 서 있던 궁녀 향심이 고개를 저었다.

“사흘씩이나 더 버티겠사옵니까? 귀신을 보고, 이야기까지 나눴다면……. 이미 북망산 자락에 발을 디뎠다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오늘 하루 더 버틴다에 이 산호 노리개를 걸겠사옵니다.”

“그래도 사흘이나 버틴 강단 있는 자입니다. 나는 닷새 더.”

“저는 나흘이옵니다.”

라온을 두고 궁녀들과 환관들 사이에 내기 판이 벌어졌다.

지금껏 귀신 나오는 자선당에 들어 이틀을 넘긴 이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궁에 들어온 신입이 벌써 사흘이나 버티니. 호기심이 동한 사람들은 급기야 내기까지 걸었다.

“그나저나 정말 걱정이오.”

내기에 걸린 돈과 패물을 한곳에 쓸어 담으며 장 내관이 말을 이었다.

“홍 내관의 상태가 범상치가 않았소이다. 아까 살짝 자선당을 들여다봤더니 멍한 표정으로 천장에 대고 혼잣말을 하고 있질 않겠소이까. 조만간 무슨 사달이 나질 않을까 걱정이오.”

“중궁전의 한 상궁님께서 말씀하셨는데요, 귀신에 홀리며 그리 된다고 하옵니다.”

“젊은 사람이 정녕 안 됐소이다.”

“그러게 어쩌자고 성 내관의 미움을 사게 되었는지.”

“쯧쯧.”

“그런데 향금이 너, 세자저하 낮 것 준비해야 할 시간 아니니?”

“에구머니나. 깜빡 잊고 있었네.”

이야기에 열을 올리던 궁녀 향금이 후다닥 수라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숙의마마께서 시키신 일이 있었는데, 깜빡하였네요.”

“나도 이만.”

그렇게 환관들과 궁녀들이 사라지고 얼마 뒤.

중희당 처마 아래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궁녀들과 환관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듯, 저 멀리 자선당을 바라보는 그림자의 얼굴에 실금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

“저는 말입니다, 내관이라고 하면 응당 높디높으신 분의 곁자리를 지키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텅 빈 방 안에 홀로 앉아 있던 라온은 천장을 올려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아무도 없는 전각이나 지키는 일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

“물론 불만은 없습니다. 사실, 그간 제가 제법 곤하게 살아왔거든요. 철이 들고 나서 이렇게 편하게 쉬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김 형, 왜 그런 말이 있지요? 놀아본 사람이 논다고. 하하, 제가 딱 그 짝이지 뭡니까? 뭘 알아야 놀아도 놀 것이 아닙니까?”

“…….”

“그런데 김 형, 어째서 다들 저를 피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까 잠시 자선당 밖으로 나가 다른 전각을 둘러보는 도중에 다른 전각의 환관들을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사람다운 사람을 만났던 터라. 아, 그렇다고 김 형이 사람답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어쨌든, 반가운 마음에 아는 척을 했지요. 그런데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저를 피하지 뭡니까. 다들 왜 그러는 걸까요?”

라온은 대들보 위에 있는 병연을 향해 말을 하긴 했지만 딱히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라온이 이곳, 자선당으로 들어온 지도 오늘로 사흘 째였다.

첫 날은 너무 피곤해 그냥 잠이 들었고, 둘째 날은 전각청소로 하루를 보냈다.

그마저도 반은 무너지고 타버린 전각을 청소하는 것인지라 하루면 족했다.

하여, 사흘째가 되는 오늘 아침부터는 딱히 할 일이 없는지라, 대들보 위에 누워 있는 병연을 향해 혼잣말에 가까운 넋두리를 늘어놓는 중이었다.

예상대로 병연은 단 한 마디의 대꾸조차도 없었다.

뭐, 상관없었다. 아니, 이렇게 곁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이 되었다.

“제가 말씀드렸던가요? 김 형이 계셔서 다행입니다.”

꿈틀.

찰나, 석상처럼 굳어 있던 병연의 등이 움찔했지만 아래에 있는 라온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김 형이 없었으면, 이곳 생활이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라온의 진심이었다.

병연이 사내라는 사실이, 그것도 꽤 잘생긴 사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이 적막한 곳에 저 사람마저 없었다면 라온은 외로움에 치를 떨며 두 손 두 발 들고 나갔을지도 모른다.

하긴, 여기서 나간다고 해도 성 내관이 원하는 거창한 신참례는 할 수 없으니, 다시 어딘가로 내침을 당했을지도 모르지.

씁쓸한 미소를 짓던 라온은 서둘러 즐거운 화제로 말머리를 돌렸다.

“우리 단희 말입니다, 많이 좋아졌겠지요?”

원래 이리 수다스럽지 않았는데. 아무 할 일이 없으니 수다만 느는구나.

“신의께서 그 아이를 돌보고 있으니, 어쩌면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궁을 나갈 때쯤엔 저보다 더 건강해진 모습이겠지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침울하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제 꿈은 말입니다, 우리 단희 시집갈 때, 여느 양반 댁 규수 못지않게 고운 옷일랑, 패물들일랑, 죄다 해 주는 겁니다. 눈부시게 어여쁜 꽃가마에 우리 단희 곱게 태워, 남들 부럽지 않게 시집보낼 겁니다.”

그러자면 이리 버려진 전각에 처박혀 있어서는 안 되는데. 아무 하는 일도 없이 하루하루 보내서는 안 되는데.

상념에 빠진 라온은 열린 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 귀퉁이로 붉은 노을이 물들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하는 일 없이 보내는 하루가 어찌 이리 짧은 것인지.

게다가…….

라온은 염치도 없이 꼬르륵, 소리를 내는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하는 일도 없는데 뱃속에서는 어찌 이리 꼬박꼬박 끼니 밥을 달라 보채는 것인지.

라온은 주섬주섬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어딜 가느냐?”

대들보 위에서 모처럼 병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냉큼 자리에 도로 주저앉은 라온이 반갑게 대답했다.

“뭐든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할 필요 없어. 아무것도 하지 마.”

“김 형께서 가져다주시는 공밥 먹는 것도 이제 더는 염치가 없어 못 먹겠습니다.”

“염치없으면 눈치로 먹던가.”

“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라온이 버릇처럼 검지를 펼치며 말을 이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하셨습니다.”

“어린아이에게 그런 말이나 하다니. 네 할아버지, 꽤나 쩨쩨하셨군.”

“노동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가르치신 겁니다. 일종의 조기교육이라고 할 수 있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온은 방을 나갔다.

잠시 후, 라온은 작은 소반을 들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소반 위에는 고소한 향기가 솔솔 풍기는 닭죽 그릇이 놓여 있었다.

지난 사흘간, 라온은 병연이 뭘 먹는 걸 도통 본 적이 없었다. 고개를 치켜들자 돌아누운 병연의 너른 등짝이 눈에 들어왔다.

“김 형, 어제 먹다 남은 닭고기로 죽 좀 끓여봤습니다.”

“너나 먹어.”

“저는 진즉에 먹었습니다.”

“성가시다.”

“그리 안 먹다가 어지럼증이라도 생기면 어찌하려 그러십니까?”

“…….”

“그러다 대들보 위에서 떨어지면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우스운 꼴입니까? 그걸 가리켜 개죽음이라고 하지요. 귀신도 비웃을 개죽음.”

“어째 그리 죽길 바라는 거 같구나.”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그러니 김 형, 내려와 한 술 뜨십시오. 제가 이런 자랑 안 하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제가 끓인 닭죽은, 죽은 사람도 벌떡 일어날 만큼 맛있습니다.”

라온은 고소한 냄새 솔솔 풍기는 닭죽으로 병연을 유혹해 보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라온은 입을 삐죽거리며 소반을 한쪽 옆으로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자선당에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하릴 없이 방바닥만 긁던 라온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 노는 거 정말 힘들다. 청소라도 할까?”

“하지 마.”

다른 말에는 미동도 하지 않던 병연이 그 작은 목소리에 즉각 반응을 보였다.

전각 청소를 하겠다며 라온이 자선당 이곳저곳을 발칵 뒤집어놨던 사실이 떠올랐던 것이다.

치를 떠는 병연의 단호한 도리질에 라온은 의기소침해져 고개를 푹 숙였다.

그 풀 죽은 모습을 보다 못한 병연이 지나가듯 한 마디 했다.

“정히 그렇다면 잡초라도 뽑던가.”

“아, 잡초. 잡초 말입니까?”

라온은 잡초가 무성한 자선당 앞마당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게요. 어째 저걸 뽑을 생각을 안 했을까요? 김 형,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금방 말끔히 뽑아내겠습니다.”

뭔가 할 일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라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라온은 환해진 얼굴로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안으로 돌아와 대들보를 올려다보았다.

“김 형.”

“…….”

“혹시 낫 있으십니까?”

“…….”

“그럼 호미라도?”

“…….”

“그렇죠? 김 형께서 그런 걸 갖고 있을 리 없으시겠죠.”

맨손으로 저 많은 잡초를 뽑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전각 어딘가에 쓸 만한 게 있을지도 몰라. 찾아봐야겠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방을 나서자니, 등 뒤에서 병연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동쪽 누각 근처로는 가지 마라.”

“왜요?”

“잡스런 것이 나와.”

“잡스러운 것이라면?”

물어보았지만 돌아누운 그에게선 더 이상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망연히 대들보를 올려보던 라온은 전각 밖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동쪽 누각의 잡스러운 것?

대체 그게 뭐야?

***

탁.

라온이 문을 닫고 나가자 실내는 적막에 휩싸였다.

오랜 벗처럼 익숙한 침묵 속에서 병연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열린 동창 너머를 응시했다.

자선당 앞마당, 무성한 잡초 밭 사이를 바쁘게 움직이는 작은 인영이 그의 눈에 맺혔다.

“성가신 놈.”

입버릇처럼 작게 중얼거리던 병연은 이번에는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 한쪽, 고소한 향내를 풍기는 죽 그릇이 보였다.

잠시 죽 그릇과 라온을 번갈아보던 그가 돌연 훌쩍 대들보 아래로 뛰어내렸다.

라온이 보았다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빠르고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 소반 앞으로 다가간 병연은 아직 식지 않은 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성가셔.”

불만이라는 듯 작게 투덜대면서도 병연은 소반 앞에 앉았다.

이윽고 그는 간지런하게 놓인 숟가락을 들어 죽을 퍼 먹기 시작했다. 금세 입 안으로 고소한 향기가 가득 들어찼다.

알맞게 퍼진 닭죽이 혀끝에서 얼음처럼 녹아 내렸다.

“그래도 죽은 사람이 벌떡 일어날 만한 맛은 아니야.”

라온이 했던 말을 떠올리던 병연은 조금은 박한 평가를 내렸다.

그러면서도 숟가락을 연신 입 안으로 가져가는 것은 잊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 한 그릇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마지막 한 숟갈을 입 안에 넣은 병연은 혀끝에 맺힌 고소한 맛을 오래도록 음미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뱃속이 따뜻한 온기로 채워진 탓일까?

느른한 포만감이 병연을 덮쳐왔다.

그는 평소 라온이 제 자리라 주장하는 곳에 팔베개를 하고 드러누웠다.

배부르고 등 따시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이런 기분도, 그리 나쁘지는 않군.’

포만감에 흠뻑 빠진 병연은 여름벌레 소리를 자장가삼아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눈을 뜬 그는 어두워진 실내를 휘 에두르며 버릇처럼 누군가를 찾았다. 무의식적으로 라온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다 한 순간, 픽 웃고 말았다.

겨우 사흘이다. 녀석과 함께 한 시간이라고 해봤자 고작 사흘에 불과했다. 그 짧은 시간에 설마 정(情)이라도 든 것일까?

습관처럼 라온을 찾는 자신의 모습이 조금은 우습게 느껴졌다.

“정이라니. 다 부질없는 짓이지.”

낮게 혼잣말을 읊조리던 병연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평소처럼 대들보 위로 몸을 날렸다. 아니, 그리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멀리서 인정(人定:통행금지)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병연은 저도 모르게 어둠이 내려앉은 잡초 밭을 돌아보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 한참 동안이나 잡초 밭을 응시하던 그의 입에서 결국 불퉁한 한 마디가 흘러나오고야 말았다.

“성가신 놈.”

***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낫과 호미를 찾지 못한 라온은 맨손으로 잡초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은 좋았다.

열심히 하면 잡초로 무성했던 자선당의 앞마당이 금방 말끔히 정리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라온의 착각에 불과했다.

버려져 황폐해지긴 했지만 본디 자선당은 경복궁에 있던 동궁전이었다.

동궁전이 어떤 곳이던가. 왕세자의 거처가 아니던가. 한 나라의 국본이신 왕세자의 거처답게 자선당의 크기는 라온의 상상을 훌쩍 넘어섰다.

잡초 밭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라온은 깨달았다. 자선당이 얼마나 넓은지.

저 사래 긴 잡초 밭은 절대 맨손으로 정리할 수준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뒤늦게야 자각했다.

“장 내관님한테 낫 좀 구해달라고 부탁해야겠다.”

라온은 매일같이 자선당을 찾아오는 장 내관을 떠올리며 푸르게 풀물이 든 손을 탁탁 털었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야?

붉은 노을이 내려앉는 시간에 풀을 뽑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머리 위로 하얀 보름달이 떠 있었다.

“시간가는 줄도 몰랐네.”

라온은 제 가슴께만큼 웃자란 잡초들을 둘러보며 처소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그렇게 수풀 사이로 얼마나 걸었을까?

“흐윽, 흑흑, 흐윽…….”

어디선가 들려오는 낮은 귀곡성이 라온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뭐지?

라온은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다시 한 번 소리를 듣기 위해 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나 환청이라도 들은 것일까?

울음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스스스슥, 스스슷.

이번에는 아까 들었던 귀곡성과는 또 다른 소리가 라온의 귓속을 날카롭게 후벼팠다.

어찌 들으면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들으면 뭔가가 잡초 밭을 스쳐가는 듯한 소리.

라온은 숨을 멈춘 채 그 소리에 집중했다.

스스슷, 스스스슥.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비단 스치는 듯한 소리는 점점 라온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혹시 김 형이 나를 찾아 나온 것일지도 몰라.’

라온은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돌아섰다.

“김 형, 거기 김 형이십니까?”

잡초 밭 한가운데 서 있던 라온은 둥글게 원을 돌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일순, 소리가 우뚝 멈췄다.

"김 형? 김 형 맞습니까?”

그럴 리 없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라온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루 종일 대들보에 드러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는 병연이었다. 라온만 보면 귀찮다, 성가시다, 버릇처럼 말하는 그가 뭐가 아쉬워 자신을 찾아 나서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 큰 소리 내는 이유는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서늘한 기운을 떨쳐내기 위해서였다.

아무도 없는 텅 빈 허공을 향해 목청을 돋우는 와중에도 라온의 머릿속에는 온갖 목소리가 떠올랐다.

‘자선당에서 죽은 궁녀, 사실은 둘이 아니라 넷입니다.’

장 내관의 으스스한 고백이 바로 귓전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동쪽 누각이 있는 곳으론 절대 가지 마라, 잡스러운 것이 나와.’

무심했던 병연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순간, 라온은 자신이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는 낡은 건물을 쳐다보았다.

환한 만월의 보름달 아래, 희미하게 형체를 드러내는 그것.

그것은 분명 누각이었다.

설마 저 낡은 누각이 김 형이 말씀하시던 동쪽의 그 누각은 아니겠지?

라온은 서둘러 자선당을 찾아 눈동자를 굴렸다.

이윽고 찾은 자선당의 지붕을 기준으로 동서남북을 가늠하던 그녀는 일순, 하얗게 바랜 얼굴로 누각을 응시했다.

동쪽이다, 동쪽!

스스슥, 스스스슥.

다가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정말로 이곳에 귀신이라도 있는 거야?

그럼 이 소리는 그 잡스러운 것이 내는 소리?

라온은 마치 목덜미를 옥죄듯 다가오는 소리의 정체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다 한 순간, 우뚝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옭아매듯 덮어왔던 것이다.

발치로 길게 깔리는 그림자를 한참 내려다보던 라온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내, 만월의 달빛을 등에 진 검은 형체가 그녀의 커다란 동공에 맺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라온의 입에서 예상 밖의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어?”

교교한 달빛 아래로 드러난 유백색의 얼굴.

전혀 뜻밖에 장소에서 만나는 전혀 뜻밖에 사람.

말간 눈으로 유백색의 얼굴을 올려보던 라온은 낯설지 않은 이름 하나를 입에 올렸다.

“화초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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