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입궐
“저곳이 이 궁궐의 가장 어른이신 대왕대비마마께서 거하시는 저승전(儲承殿)이오. 이쪽이 주상전하께서 거하시는 대전이고 중전마마께서 계시는 대조전(大造殿)은 저쪽에 있는 전각이라오.”
아름다운 단청이 그려진 처마와 웅장한 전각들, 새벽안개에 휩싸여 몽혼한 자태를 뽐내는 나무와 꽃들, 작은 풀 한포기마저도 특별한 이곳은 다름 아닌 임금님께서 살고 계시는 궁궐이었다.
“우와…….”
라온은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드디어 입궐이었다.
잠실에서 백일을 견디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라온은 잠실에서 나온 후에도 인덕원의 그 감나무 집에서 무려 한 달이나 더 지내야 했다.
그 한 달 동안 궁궐의 예법에 대해 배우고 익힌 다음에야 비로소 입궐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리 어려운 과정을 거쳐 겨우 발 디딜 수 있었던 궁궐이라 감개가 무량했다.
라온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궁의 모습은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그야말로 신천지, 별세계였다.
“그러다 벌레 들어가겠소.”
장 내관이 귀여운 아우를 대하듯 말했다.
올해 스물이 된 장 내관은 라온을 궁에 있는 내반원까지 안내하기 위해 나온 동궁전 소속의 내시라고 했다.
동글동글 귀여운 인상답게, 사람 좋은 장 내관은 내반원으로 가는 내내 궁궐 이곳저곳에 대한 세세한 설명을 라온에게 들려주었다.
어느 전각에 뉘가 계시는지, 이 궁의 가장 웃전이 뉘신지, 누구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뉘의 앞에서 고개를 들어야 하는지.
지금껏 들은 이야기를 축약하자면…….
궁에서는 언제나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항상 자세를 낮추고 시선은 아래로 향해야 한다.
라온이 고개를 들고 마주 볼 수 있는 이들은 어린 소환내시나 갓 입궁한 어린 궁녀, 그것도 아니면 궁의 잡일을 하는 노비들뿐이었다.
토씨 하나 놓치지 않으려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라온이 장 내관에게 물었다.
“헌데, 전각의 주인들께서는 다들 어디로 가신 것이옵니까?”
“그걸 어찌 아셨소?”
장 내관은 아직 말하지 않은 사실까지 알고 있는 라온을 기이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어깨를 으쓱한 라온이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저승전을 비롯하여 대전과 대조전의 상궁과 내관들이 최소한만 있더군요. 이는, 전각의 주인께서 아니 계시다는 말이 아닌지요?”
“아하, 그런 것이오? 홍 내관, 제법 예리하오.”
장 내관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홍 내관이 본대로 대비마마와 주상전하, 그리고 중전마마께서는 지금 궐에 아니 계시오. 환절기마다 주상전하의 지병이 발병하는지라, 근자에는 온양별궁으로 피접 나가 요양 중이시지요.”
“그렇사옵니까? 헌데 임금님께서 이리 궁을 비워도 되는 것이옵니까? 임금님께서 아니 계시면 나랏일을 누가 보시는 것이옵니까?”
“세자저하가 계신데 무슨 걱정이겠소.”
말을 하던 장 내관이 눈앞에 있는 거대한 전각을 가리켰다.
“저곳이 바로 세자저하께서 거하시는 동궁전이라오.”
“세자저하…….”
그저 입속으로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그 위압적인 존재감에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세자저하가 뉘시던가. 바로 이 나라, 조선의 국본이자 하늘의 별보다 더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이 아니시던가.
라온은 조금 떨리는 음성으로 장 내관에게 물었다.
“세자저하는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으로 말씀드리자면…….”
장 내관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콰당!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동궁전의 중문이 밖으로 활짝 열렸다.
이윽고 라온과 장 내관이 입은 관복보다 좀 더 색이 짙은 녹색 관복을 입은 사내가 문 밖으로 휙하고 내던져졌다.
“저분은 대비전의 섭리이신 성 내관이 아니신가.”
장 내관의 감탄사와 함께.
“아쿠쿠쿠.”
성 내관의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성 내관의 뒤로 붉은 철릭과 붉은 무관모를 쓴 사내가 다가왔다. 사내는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는 성 내관의 머리맡으로 다가갔다.
“소인, 억울하옵니다. 정녕, 이것은 오해이시옵니다.”
서둘러 무릎을 꿇고 앉은 성 내관이 동궁전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읍소하였다.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눈물마저 글썽거리는 모습이 참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물끄러미 성 내관을 내려다보던 사내는 무감한 어투로 한 마디 할 뿐이다.
“다시 한 번 그리 하였다간, 용서치 않을 것이라 말씀하시었소.”
차가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내는 안으로 사라졌다.
사내가 사라지기 무섭게 동궁전의 내관들과 상궁들이 성 내관에게로 몰려들었다.
“괜찮사옵니까?”
“이런, 옷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걱정하는 말과 함께 내관들은 성 내관을 부축하여 어딘가로 사라졌다.
도깨비장난인 듯, 한바탕 소란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끝이 났다.
잠시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보았소이까?”
적막을 깨며 장 내관이 말했다.
내내 동궁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라온이 고개를 돌렸다.
“네?”
“세자저하는 바로 저런 분이시지요.”
“저분이…… 세자저하이십니까? 생각보다 귀골장대하신 분이시군요.”
붉은 철릭의 사내를 떠올리며 라온이 말했다.
“아니, 아니. 그분은 세자익위사의 우익위(右翊衛)시오.”
“아하, 그렇군요. 그런데 뵙지도 못한 세자저하를 어찌 저런 분이라고 하시는지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하질 않소이까. 좀 전의 일로도 알 수 있듯, 세자저하께서는 조금의 실수도 용납지 않으시는 분이라오.”
“그리 깐깐하신 분이십니까?”
“완벽하다 못해 매사에 철두철미하신 분이시지요. 자신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조금의 실수를 허락하지 않는 분이시오.”
“실수라면…… 어떤 실수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왕실 최고의 내관이라 불리었던 채 태감이란 분이 계셨소. 여섯 살에 궁에 들어와 일평생을 궁의 붙박이가 되어 살아오신 분이시지요. 그런 분께서도 걸음걸이가 바르지 못하다고 하여 동궁전에서 내침을 당하셨지요. 아무리 궁궐에서 잔뼈가 굵어졌다고 해도 세자저하의 눈에 걸리면 어김없이 허점을 드러내고야 말지요.”
고작 걸음걸이 때문에 내쳐지다니.
“무서운 분이시군요, 세자저하께선.”
“옳게 보았소. 저하께선 언제나 매의 눈으로 아랫것들을 지켜보시니. 세자저하 앞에서는 숨소리마저도 궁의 법도에 맞춰 내쉬어야 한다는 말이 있지요.”
“…….”
등골이 서늘해졌다.
라온의 머릿속에는 날카로운 눈매에 완고한 표정을 지닌 사내가 하루 종일 내관들의 뒤를 쫓으며 허점을 찾는 모습이 그려졌다.
“세자저하께서 그리도 엄중하시니, 어지간한 내관들은 일 년도 버티지 못하겠군요.”
“후후후. 그렇소. 대부분 일 년은 고사하고 한 달도 채 버티지 못하였지요.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라오. 이 동궁전에서 무려 5년 이상을 버틴 내관이 있답니다.”
“그분이 대체 뉘시옵니까?”
궁의 법도에 맞지 않으면 사소한 걸음걸이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세자저하의 곁에서 무려 5년간을 버티다니.
가히 완벽 무결한 사람이란 소리가 아닌가?
그 대단한 사람이 누구인지 호기심이 생겼다.
라온은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장 내관을 응시했다.
그 시선을 즐기는 듯 지켜보던 장 내관이 한껏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그건 바로…….”
“…….”
“나요!”
“정말이십니까?”
“이 입은 단 한 번도 거짓을 입에 올린 적이 없다오.”
“장 내관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라온은 놀랍다 못해 경이로운 시선으로 장 내관을 우러러보았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장 내관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니.
역시, 사람은 겉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다시금 깨달았다.
더불어 철두철미하기 이를 데 없는 세자저하의 곁에서 무려 5년 이상을 버틸 수 있었던 장 내관의 비결이 무엇인지도 궁금해졌다.
“그 비결이 궁금하시오?”
"네. 궁금합니다. 비결이 무엇입니까?”
꼴깍.
라온은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장 내관이 엄청난 비밀을 말해준다는 듯, 라온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그건 바로…… 눈에 띄지 않는 것이오.”
“네?”
“저하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오. 눈에 띄지 않으면 그분의 눈에 거슬리는 일도 없을 것이니. 저하의 눈에 띌 만한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오.”
장 내관이 눈빛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
아, 제발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하지 마십시오.
그런 소심한 처세술,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잔뜩 기대했던 라온은 먼 허공으로 시선을 돌리며 장 내관을 외면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장 내관은 지금껏 자신이 어찌 동궁전에서 버텨 낼 수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세자저하 기침하시는 인시에는 침전 근처로는 얼씬도 해서는 안 되오.”
경청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일까?
“묘시에는 서연을 하시니, 서연하시는 중희당 근처만 아니 가면 될 것이고, 사시에는 어김없이 후원으로 산보를 나가시니, 이때에는 후원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이보시오, 홍 내관. 듣고 있는 것이오?”
“…….”
“이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니…… 뭐하는 것이오? 깊이 새겨 두질 않고요, 이보시오. 이보시오, 홍 내관…….”
***
장 내관의 소심한 처세술은 내반원에 다다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여기가 내반원이오. 안에 기다리고 있는 분이 계실게요. 그 분께서 앞으로 홍 내관이 근무할 전각을 정해주실 것이오.”
“이리 헤어지게 되니 아쉽습니다.”
“정히 그리 아쉽다면…….”
말을 끊지 못하는 장 내관을 뒤로 하고 라온은 부리나케 내반원 현판이 붙은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설마 따라 오지는 않겠지?
저리 말 많은 사내는 처음이었다. 사내의 수다가 웬만한 여인을 능가했다. 라온은 설레설레 체머리를 흔들었다.
그때였다.
“늦었구나.”
내반원 안쪽에서 가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반원 집무실의 거대한 탁자 앞엔 서른 중반쯤의 사내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라온은 서둘러 그 앞으로 다가갔다.
“홍가 라온이옵니다. 이번에 새로이 궁에 들어왔사옵니다.”
라온은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부터 올렸다.
“쯧. 궁에 언제 들어왔는데 이제야 내반원에 얼굴을 비추는 것이냐?”
“곧장 달려오는 길이옵니다.”
“어디라고 감히 말대꾸냐?”
벼락같은 호통에 라온은 입을 닫았다.
몇 마디 짧은 대화만으로도 라온은 상대가 권위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챘던 까닭이다.
그렇다고 상대의 기세에 주눅이 든 것은 절대 아니었다.
되레 라온은 속으로 상대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라온에게 호통을 치고 있는 인물.
다름 아닌 대비전의 섭리, 성 내관이었다.
오는 길에 라온은 성 내관이 동궁전에서 내쳐지는 모습을 보았다.
참람한 모습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하던 자.
세자저하 앞에서는 고양이에게 걸린 쥐처럼 비굴하게 굴더니, 이곳에서는 마치 자신이 왕인 양 행세하고 있었다.
“뭐냐?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느냐?”
뚫어져라 쳐다보는 라온에게 성 내관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아니옵니다.”
“헌데, 감히 어디라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쳐다보는 것이냐?”
“송구하옵니다.”
라온은 서둘러 고개를 조아렸다.
이런 자들은 열이면 열, 똑같았다.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했다. 이럴 땐 피하는 것이 상책이리라.
“어디서 저리 어리바리한 것이……쯧.”
못마땅한 듯 서류를 들척이던 성 내관이 힐끗 라온을 건너다보았다.
“헌데…….”
“네.”
“아무것도 없는 것이냐?”
“무슨 말씀이오신지?”
"설마, 궁에 들어오면서 빈손으로 온 것이냐?”
“무에, 준비할 것이 있었사옵니까?”
라온이 어리둥절하여 묻자 성 내관이 은근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정녕, 다른 이에게 들은 것이 없단 말이냐?”
“네?”
“입궐 첫날, 윗사람에게 드릴…… 뭐, 그렇고 그런 이야기 들어본 적 없어?”
“혹시 뇌물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라온이 정곡을 찌르자 성 내관이 쾅 거칠게 탁자를 내리쳤다.
“뇌물이라니! 어디라고 감히 뇌물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게야? 그저 선배에게 후배가 전하는 작은 마음의 선물이라고나 할까.”
“그렇군요.”
그런 걸 뇌물이라고 부르는 줄 압니다.
차마 속엣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있자니 성 내관이 혀를 쯧쯧 찼다.
“이런 어리석은 자를 보았나. 척하면 착하고 알아들어야지. 아니, 그 영감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놈을 천거한 것인지. 아무래도 노망이 난 게로군. 쯧.”
성 내관은 이제는 궁에서 나간 전(前) 판내시부사 박두용과 상선 한상직을 떠올렸다.
망할 영감들, 궁에 있을 때도 툭하면 예상 밖의 엉뚱한 짓으로 사람 기함하게 만들더니, 궁을 떠날 때까지도 그 나쁜 버릇을 못 고친 모양이다.
못마땅한 시선으로 라온을 노려보던 성 내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앞에 놓인 작은 서책을 집어 들었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허면, 신참례에는 얼마나 쓸 요량이더냐?”
“아, 신참례 말씀이옵니까?”
“그래. 신참례. 그것은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네. 교육을 받는 동안에 몇 번 들어 알고 있사옵니다. 궁에 새로이 들어간 신참이 선임들에게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의미로 한 끼 대접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니옵니까?”
“그래. 잘 알고 있구나. 하여, 어찌 준비를 할 것이냐?”
“신참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성심을 다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렇지.”
“하여, 궁으로 들어오기 전에 떡 서 말과 술 세 단지를 준비했사옵니다.”
“떡 서 말? 술 세 단지?”
어이가 없는지 성 내관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혼자 배를 잡고 웃어젖히던 성 내관이 일순, 웃음을 뚝 그치고 눈을 위로 치켜떴다.
“지금 나와 장난을 치자는 것이냐?”
“…….?"
떡 서 말과 술 세 단지가 라온이 지금 준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였다. 아니, 분수에 넘치는 성의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양에 차지 않았는지 성 내관은 손에 들고 있던 서책을 거칠게 넘기며 말했다.
“한 달 전에 들어왔던 신참이 둘이 있었는데, 한 사람당 오십 냥 정도를 써서 신참례를 준비하였지. 어떠하냐? 너도 그 정도 쓰는 것이 적당할 것 같은데.”
“송구하오나, 소인은 지금 당장 그 큰돈을 마련할 수가 없사옵니다.”
“걱정마라. 내 미리 돈을 융통해 줄 수 있음이야. 차일 월봉을 받을 때마다 조금씩 차감할 것이니…….”
“그럴 수는 없사옵니다!”
이미 3년 치의 월봉을 미리 끌어다 쓴 터라 신참례에 쓸 돈 같은 게 있을 턱이 없었다. 라온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땅치 않았던 성 내관의 눈빛이 더욱 싸늘하게 식었다.
“네 뜻이 정히 그렇다면 강요할 수는 없지.”
성 내관은 사납게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문서 한 장을 꺼냈다.
그곳에는 홍라온이라는 이름 석 자와 동궁전을 의미하는 동(東)이라는 글자가 나란히 쓰여 있었다.
라온이 앞으로 일할 전각이 동궁전이라는 의미의 문서였다.
성 내관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궁을 떠나기 직전, 두 늙은 능구렁이들이 손을 쓴 모양인데. 너 같은 놈이 언감생심 동궁전이라니. 어림없지.
한 달 전, 궁을 나간 능구렁이들의 뒷배만 믿고 저리 뻣뻣한 모양인데, 이제 궁의 실세는 다름 아닌, 성 내관 자신이었다.
성 내관은 사납게 입아귀를 비틀며 ‘동’이란 글자 옆에 세 글자를 덧붙였다.
자선당(資善堂).
“옜다. 나가면 네가 갈 곳을 안내할 자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성 내관은 귀찮은 파리 쫓듯 라온을 내반원에서 쫓아냈다.
떠밀리듯 집무실을 나온 라온은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처음부터 미운 털 단단히 박힌 모양이군.’
***
“어느 전각으로 배치가 되시었소?”
라온이 내반원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장 내관이 달려왔다.
“아직 안 가셨습니까?”
혹시 근무지까지 안내하는 사람이 장 내관님은 아니겠지요?
“홍 내관을 안내하라는 명을 받았지요.”
"그렇습니까?”
장 내관의 수다에 시달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장 내관은 아이처럼 해사하게 웃으며 라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느 전각으로 배치되었는지 한번 봅시다. 성 내관께서 내리신 문서, 어디에 있소?”
“아참. 이리로 가면 된다고 하시던데요.”
라온은 잔뜩 기대하며 장 내관에게 문서를 내밀었다.
앞으로 일하게 될 곳은 어디일까?
궁에 들어온 이후 보았던 수많은 전각들을 떠올렸다. 그 아름답고 휘황찬란했던 전각들 중 한 곳이 앞으로 자신의 보금자리가 되리라.
“어디, 얼마나 좋은 곳으로 가시게 되었나 한번 봅시다.”
장 내관이 느긋한 표정으로 문서를 펼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허억!”
장 내관의 안색이 하얗게 변색 되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런, 어쩌다…….”
라온과 문서를 번갈아 보던 장 내관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어디, 안 좋은 곳입니까?”
라온을 바라보는 장 내관의 얼굴에 측은함이 가득 서렸다.
라온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리 안 좋은 곳입니까?”
“어쩌다……쯧쯧.”
장 내관은 대답 대신 혀만 쯧쯧 차며 걸음을 옮겼다.
어서 따라오라는 그의 손짓에 따라 라온도 발걸음을 뗐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수십 채의 전각을 돌고 돌아 두 사람은 자선당(資善堂)이라는 현판이 붙은 작은 솟을대문 앞에 섰다.
“여긴 어딥니까?”
라온의 물음에 장 내관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앞으로 홍 내관이 일할 곳이지요.”
“그렇습니까?”
여기가 내가 일할 곳이란 말이지?
나무문을 바라보는 라온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여긴 무척이나 조용한 것 같습니다. 마치, 아무도 안 사는 곳 같습니다.”
“이제부터 한 사람 살게 되었군요.”
“네?”
“아이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
갑자기 장 내관이 꽁지에 불붙은 노루마냥 부산을 떨었다.
라온은 허둥대는 장 내관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응시했다.
대체 왜 저러는 것일까? 혹시 이곳에 왕세자 저하보다 더 철두철미한 분이 계시는 것일까?
뭐, 그런들 어떠하랴? 이렇게 하루하루 지내다보면 차근차근 월봉이 쌓일 테고, 그렇게 3년만 지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그때 수다쟁이 장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소.”
“왜요? 잠깐 들어갔다 가시지요?”
라온의 말에 장 내관이 미친 듯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아니요. 아닙니다. 되었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아니오, 아니오. 나는 간이 작아 이런 귀신 들린 곳에는 차마…… 아차!”
장 내관이 제 입을 손으로 막았다.
“여기…… 귀신 들린 곳입니까?”
“아니오, 아니오. 그럴 리가 있겠소? 물론, 아주 오래 전 세종대왕 시절, 빈궁마마를 모시던 궁녀 둘이 자선당 연못물에 빠져 죽긴 했지만. 설마 귀신같은 것이 나올 리가 있겠소이까? 물론, 자선당에서 귀신을 보았다는 이가 몇 명 있긴 하지만…… 아차!”
“…….”
뒤늦게 입 막지 마세요. 다 들었습니다.
“그럼 무운을 빌겠소.”
하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리던 장 내관은 슬금슬금 뒷걸음질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휘이이잉.
홀로 남은 라온의 발치로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중문 안쪽을 들여다보며 라온은 애써 씩씩한 웃음을 지었다.
“뭐, 별일 있겠어?”
***
“아…….”
굳게 닫혀 있던 솟을 대문을 열고 자선당 안으로 들어선 라온은 작게 탄성을 흘렸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단단한 고치, 지상으로 내려온 선인들의 세상.
매미날개처럼 부드러운 금수항라로 된 옷을 입은 아름다운 미인들이 지천에 깔려 있는 곳. 향긋한 술과 맛스런 음식이 가득한 연회가 매일같이 열리고, 일 년 내내 풍악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
사시사철 아름답고 풍요로운 천상의 세계……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한치 앞을 가늠할 수없는 무성한 잡초 밭,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한 허름한 전각이 있는 이곳이 정녕 궁궐 안에 있는 전각이 맞는 것일까?
라온은 제 눈을 의심했다.
그러다 이내 자신을 바라보던 성 내관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기억하고는 피식, 쓰게 웃고 말았다.
역시, 그랬군.
궁에 들어오면서 감히 빈손으로 들어온 괘씸죄, 고분고분 신참례에 쓰일 돈을 융통하지 않은 불손한 죄에 걸려 이곳으로 내쳐진 것을 라온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방도야, 찾고자 한다면 아예 없지는 않겠지.
아마도 성 내관이 원하는 뇌물과 거하게 신참례를 치르면 당장이라도 나갈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럴 돈도 없거니와, 그러고 싶은 마음도 않았다.
조금…… 아니, 사실은 아주 많이 방치되어 있긴 하지만 이곳도 치우면 나름 사람 살 만한 곳이 되리라.
어떻게든 사람 살 만한 곳으로 만들고야 말리라.
“사방에 쳐져 있는 거미줄이야 거둬내면 그만이고. 발을 디딜 때마다 뽀얗게 일어나는 먼지에 기침이 멎지 않지만, 그것 때문에 죽진 않겠……콜록콜록. 아, 죽겠다. 우선 청소부터 하자. 콜록콜록.”
서둘러 소매를 걷어붙인 라온은 청소부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정리를 끝낸 전각은 여전히 낡고, 허름하고, 으스스했지만, 그래도 지내기 불편하지 않을 만큼 말끔해졌다.
“아, 이제야 끝났다.”
라온은 깨끗해진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궁궐이라는 곳은 넓어도 너무 넓었다.
이른 아침에 궁에 들어와 내반원을 들러 이곳 자선당까지 들어오는 데 하루 종일이 걸렸다.
어느새 열린 문틈으로 붉은 저녁노을이 스며들었다.
장 내관이 궁궐 구경을 핑계 삼아, 궁의 전각이란 전각을 모두 끌고 다녔다는 사실은 새카맣게 모른 채, 라온은 무식할 정도로 넓은 궁궐의 크기를 탓했다.
“아이고, 다리야.”
라온은 알이 박힌 다리를 주물렀다.
그러다 문득, 뭔가가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휙,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도 없다.
넓은 자선당 안에는 자신 이외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기분 탓인가?
일순, 장 내관의 목소리가 뇌리에 떠올랐다.
‘아주 오래 전 세종대왕 시절, 빈궁마마를 모시던 궁녀 둘이 자선당 연못에 빠져 죽긴 했지만 설마 귀신같은 것이 나올 리가 있겠소이까? 물론, 자선당에서 귀신을 보았다는 이가 몇 명 있긴 하지만…….’
에이, 설마…….
그러나 다시 느껴지는 시선.
휙,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아무도 없다.
그제야 긴장을 풀며 라온은 풀썩 드러누웠다.
“괜찮아. 기분 탓이야. 귀신같은 게 있을 리 없잖아. 요즘 같은 세상에 귀신이 어디에……."
말을 하던 라온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천장을 보고 있는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졌다.
이윽고 겨우겨우 벌어진 입에서 외마디가 터져 나왔다.
“있다, 귀신!”
대들보 위에서 한 사내가 라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