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4화 (4/131)

4. 살아가지 않고 살아가리니

타탁! 타탁!

지하실을 밝히고 있는 횃불이 노란 불똥을 튕겼다.

허공에 일렁이는 불꽃을 보며 노인이 입귀를 길게 늘였다.

“우선,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네놈을 고자로 만들어 주실 분이다. 좀 유식한 말로는 엄공이라고 하지. 그럼 엄공이란 무엇이냐? 너처럼 멀쩡한 사내놈을 고자로 만드는 아주 섬세하고도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지.”

작은 체구에 깡마른 몸집의 노인은 눈매가 매서웠다.

이 노인 역시 앞서 만났던 귀인과 마찬가지로 얼굴에 수염이 한 터럭도 나 있지 않았다. 다름 아닌, 환관이었기 때문이다.

엄공 채천수 역시 다른 내시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하물이 없는 사내의 겉모습은 사내라기 보단 여인에 가까웠다.

“한 마디로 말해 고자장인(鼓子匠人)이란 말씀입니까?”

채천수의 주름진 얼굴을 보며 라온이 물었다.

“고자장인? 그 무슨 저급하고 몰상식한 말이냐? 엄공이라는 고상한 명칭이 있으니, 그리 부르도록 해라. 자, 그럼 지금부터 네놈을 어찌 고자로 만들 것인지에 대해 자세히, 아주 소상하게 설명을 해 주마.”

“저기, 엄공 어르신, 잠깐만요!”

라온이 노인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채천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직 내 얘기가 안 끝났다. 할 말이 있으면 나중에 해라. 에……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맞아. 흐흐흐. 네놈을 고자로 만드는 방법에 대해 말하다 말았지. 고자를 만드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거시기를 싹뚝 잘라내는 거야. 예리한 칼로 거길 싹, 깨끗하게, 도려내는 것이지. 크크크.”

입이 말랐는지 채천수는 독한 화주로 입을 축였다.

“두 번째는 말이다, 네놈의 음낭을 이만한 망치로 힘껏 내려쳐서 깨트리는 거야. 여기서 중요한 건 조금의 여지도 둬서는 안 된다는 거야. 조금만 틈을 주면 고통이 더 심해지거든. 조준만 정확하면 한 번에 끝난다. 힘도 많이 안 들어. 계란 노른자를 눌러서 터트리듯, 가볍게 끝나는 일이지.”

채천수의 현실감 넘치는 묘사에 절로 그 광경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처치는 아무래도 두 번째 방법이 첫 번째보다는 훨씬 간단하긴 한데, 통증이 문제야. 너도 알다시피 그 부위가 좀 민감해야지. 당해본 녀석들의 말로는 차라리 거시기를 도려내는 게 훨씬 낫겠다고 하더군. 하지만 장점도 있다. 음낭만 깨트리는 거라 거시기는 멀쩡하게 간수할 수 있다는 점이지. 물론, 쓸 일은 없겠지만 말이야.”

채천수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말했다.

“으…….”

라온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노인의 말을 축약하자면, 사내를 고자로 만드는 것은 칼로 아랫도리를 싹 도려내거나, 망치로 음낭을 깨트린다는 건데…… 으, 상상하지 말자, 상상해선 안 돼.

“개인적으로는 첫 번째 방법을 추천한다. 쓰지도 못할 물건을 구차하게 달고 있을 바엔 깔끔하게 없애버리는 게 좋지 않겠느냐? 자, 이번엔 도구에 대한 설명이다.”

채천수가 작은 손도끼를 집어 들었다. 예리하게 날이 서 있는 그것을 라온의 귓불에 가져갔다.

“이것으로 말하자면, 네놈의 거시기를 단번에 잘라낼 수 있는 신통방통한 녀석이지. 그런데…… 섬세하지가 못해. 잘못하면 거시기뿐만이 아니라 그 주변까지 몽땅 잘라내 상처가 커지는 단점이 있단 말이지.”

채천수는 휘휘, 라온의 아랫도리를 향해 손 도끼질 하는 흉내를 냈다.

라온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그 모습에 씨익, 웃음을 짓던 노인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 손도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대신 초승달 모양의 날카로운 칼을 집어 들었다.

“이 녀석은 손도끼와 달리 섬세한 작업이 가능하지. 다만, 가끔 단 번에 일이 안 끝나는 경우가 있어서 톱 썰듯이 슥삭 슥삭 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 섬세한 것이 좋다면 이 녀석을 선택해라.”

채천수가 톱질하듯 단도를 움직였다.

라온의 낯빛이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버렸다.

“걱정하지 마라.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조선에 몇 없는 최고의 엄공이란 말이지. 흐흐흐. 왕궁을 활보하는 환관 나부랭이들 중에 엄공 채천수를 모를 놈이 없을 만큼 소문이 자자한 몸이란 말이다. 사내놈들 고자 만드는 기술로 따지자면 이 조선, 아니, 저 청국에서도 내 솜씨를 따라올 자가 없단 말씀이다. 내 손으로 만든 고자가 무려, 열, 스물, 서른…….”

열 손가락을 몇 번이나 접었다 펼치던 엄공 채천수는 숫자 세기를 포기했다.

“하여간, 이 어르신의 손에 고자가 된 놈들이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다는 말씀이다. 더 대단한 게 뭔 줄 아느냐? 내가 거세한 놈들 중에 살아남은 놈들이 무려 절반이나 된단 말씀이지.”

채천수의 의기양양한 말에 라온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채천수의 말에 라온은 충격을 받았다.

“설마, 나머지 절반은……?”

“당연히 죽었지.”

“절반이나 죽었단 말입니까?”

“무려 절반이나 살아남은 것이지. 이 몸은 열에 아홉을 죽이는 다른 엄공과는 격이 다른 사람이다.”

“결론은 죽을 수 있는 확률이 절반이나 된다는 말씀이군요.”

“핵심이 그게 아니잖아. 절반이나 살아남았다는 게 중요한 거야. 무려 절반이나……!”

말을 하던 채천수가 라온을 향해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슬쩍 먼 허공으로 시선을 돌리는 라온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노인은 다시 자화자찬을 이어갔다.

“하여간에 그 비결이 뭔지 알아?”

채천수가 손에 들고 있던 단도를 라온에게 자랑하듯 흔들어보였다.

“바로 이 녀석 덕분이지.”

“…….”

“이걸로 말하자면 단박에 네놈의 아랫도리를 싹 거세할 수 있으면서도 상처는 크게 남기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는 물건이지. 작은 차이가 명품(名品)을 만든다는 말, 알지? 이게 그런 작은 차이로 만들어진 명품 중에 명품이란 말씀이다. 크흐흐흐흐.”

채천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물건인 듯 단도를 바라보며 웃었다.

“자, 도구는 선택하였느냐? 그럼, 이제 앞으로 네가 받게 될 시술에 대해 설명하겠다.”

채천수가 잔뜩 들뜬 표정으로 닫혀 있던 밀실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방 안에는 한 개의 침상이 놓여 있었고, 방의 한쪽 귀퉁이에는 물을 흘러버릴 수 있는 정사각형의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정사각형의 공간 한가운데는 옥돌로 만들어진 의자가 위험한 기운을 풍기며 놓여 있었다.

“이 안으로 들어가는 즉시 나는 너를 옥돌로 만든 저 의자에 앉힐 것이다.”

“그렇게 세세히 설명 안 하셔도…….”

“그런 다음 뜨거운 물에 고춧가루를 타서 네놈의 아랫도리를 씻어 낼 게야. 너무 걱정은 마라. 시술을 하기 전에 네게 아편을 먹여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고, 연고를 발라 조금은 고통을 덜어줄 작정이니까. 그러고 나서…….”

잔뜩 경직되어 있던 라온이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할 말이 있습니다.”

채천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쯤 되면 열에 아홉은 잠깐만이라는 말을 하기 마련이지. 왜? 이제와 그만 두겠다고? 아서라. 들어오는 것은 네 마음대로지만, 나가는 건 아니란다.”

“꼭 들으셔야 할 이야기입니다. 제 이야기를 들으신다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채천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이야기인데 그러느냐?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거든…….”

“아까 분명 말씀하시길, 제가 고자가 되겠다고 자청하여 들어온 놈이라 하시질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헌데…… 저는 그런 자청을 한 적이 없습니다만.”

“뭐?”

“고자가 되겠다고 자청한 적이 없다고요.”

싹뚝 잘라내고 싶어도, 잘라 낼 그 무엇이 없습니다.

내시가 되고 싶어도 절대 될 수가 없는 몸이란 말입니다.

라온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꿀꺽 삼켰다.

“무엇이? 고자 되겠다고 자청한 적 없어?”

라온의 말에 채천수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없습니다.”

“허허, 그럴 리가 없는데. 이상타. 정말 이상해.”

채천수는 고개를 휘휘 젓더니 지하실 계단을 밟고 위로 올라갔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홍가(洪家) 라온, 너 아니냐?”

확인하듯 물으며 채천수는 문서 한 장을 라온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며칠 전, 사백 냥을 받는 대신 귀인에게 수인해 줬던 ‘아주 사소한 문서’였다.

“여기 수인한 자, 너 아니야?”

“제가 맞습니다만.”

그게 무어 잘못된 것입니까?

대체 무슨 문서이기에 저러는 것일까?

라온은 문서를 제대로 살피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헌데…… 문서의 첫줄에 수인 할 때는 못 보았던 글씨가 보인다.

라온의 미간이 내천자(川)로 한데 모아졌다.

“혼서(婚書)?”

“그래. 혼서. 환관이 되기 위해 거세를 하는 사내놈들에게 받는 맹약서다. 이 맹약서에 따르면 시술을 하는 과정에서 죽어도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을 것이며, 거세를 한 다음에는 틀림없이 궁의 환관이 되겠노라는 맹세가 담겨 있지.”

“그, 그게 그런 뜻입니까?”

“그렇데두.”

“그, 그럼, 여기에 수인하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어찌 되긴 뭐가 어찌 돼? 아까 내가 말한 방법대로 네놈의 아랫도리를 싹뚝 잘라내는 것 외엔 다른 수가 없지.”

"이런……!”

라온의 두 눈에 불꽃이 화르륵 일었다.

‘아주 사소한 문서’라고 누차 강조하던 귀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 양반아! 이게 어떻게 사소한 문서야!

불끈 주먹을 쥔 라온의 얼굴 위로 초승달 모양의 단도가 바싹 다가왔다. 뒤이어 채천수가 뭔가 재미난 장난감을 발견한 듯 빙글거리며 속삭였다.

“자, 이제 준비되었느냐?”

***

“휴우.”

심한 기갈을 느낀 채천수는 마른입을 쩝쩝 다시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 일인지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벌떡 일어나 손만 뻗으면 될 곳에 마실 물이 있었건만, 그마저도 귀찮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게으른 황소처럼 눈만 끔뻑대던 채천수는 몽롱한 머리로 생각했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머리가 바스러지는 것처럼 아픈 걸 보니, 술을 먹은 모양이다. 그것도 죽을 만큼 먹은 것이 분명했다.

한참이 흐른 후에야 채천수는 간신히 간밤의 상황을 떠올렸다.

라온이라는 이상한 녀석이 지하실로 왔었지. 녀석 앞에서 새로 제작한 단도를 휘두르며 조선 최고의 엄공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하얗게 질린 녀석은 뭔가 잘못되었다며 손사래를 흔들었고, 그리고…….

아! 그렇군. 녀석이 술 한 잔 달라고 했었지. 너무 긴장이 되어 견딜 수 없다고 말이야.

녀석의 청에 못 이겨 몇 순배 술잔이 돌았던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다음은 어찌 되었더라?

……기억이 도통 새카만 밤중이다.

오랜 세월 술을 물 삼아 살아왔지만 이리 기억이 오리무중인 일은 처음인지라, 채천수는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물 한 사발을 마시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데 이놈은 또 어디로 간 거야?

라온이라고 했던가? 여자 꽤나 홀리게 생긴 곱상하게 생긴 녀석. 그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나가지는 않았을 테고…….”

지하실 밖에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빠져나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어디에 있다는 이야기인데, 도무지 녀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밀실에 눈이 닿았다.

나간 것도 아니고, 이곳에도 없다면 갈 곳은 저곳 하나뿐이다.

시술을 끝낸 예비 내시의 치유를 위해 만들어진 잠실(蠶室).

채천수가 굳게 닫혀 있는 잠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입구에 있는 양초에 불을 댕겨 안을 살피니, 침상에 누워 있는 라온의 모습이 보였다.

라온은 약에 취한 듯, 곤히 잠들어 있었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시술을 한 모양인데…….’

기억이 없는 걸 보니, 만취한 상태로 일을 저지른 모양이다.

채천수는 스스로를 향해 혀를 끌끌 찼다.

맨정신으로 시술을 해도 살아날까 말까한 어려운 시술이었다. 그런 시술을 만취한 상태로 했다니.

열의 아홉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괜히 아까운 녀석 하나 잡은 건 아닌지 모르겠군.”

채천수는 라온이 덮고 있는 이불의 끄트머리를 잡쥐었다.

시술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채 이불을 젖히기도 전. 가느다란 흰 손이 검버섯 핀 채천수의 손을 막아냈다.

“무슨…… 짓입니까?”

“깼느냐?”

"무슨 짓을 하느냐 물었습니다만.”

늘어져 누워 있는 와중에도 묻는 투가 당돌하기 그지없다.

“흠흠. 내 하나 확인할 것이 있어 그런다.”

“확인이요?”

기운 없는 목소리와 함께 라온이 감고 있던 눈을 힘겹게 치떴다.

생기의 한 귀퉁이가 잘려나간 탓일까.

소년의 눈빛은 전보다 더 깊어졌다. 그 깊은 눈매를 마주하자 무언가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채천수를 짓눌렀다.

그러나 죄책감은 죄책감이고 확인할 것은 확인해야지.

입매를 다부지게 끌어당긴 채천수가 막고 있는 라온의 손을 밀어냈다.

“무슨 짓입니까?”

“내 확인할 것이 있어 그러느니.”

“확인이라뇨? 설마 시술을 잘못하신 것입니까?”

“술 탓인지, 기억이 거세당한 것마냥 싹뚝 잘려버렸다. 다른 것은 모두 기억이 나는데…… 네놈을 거세한 기억만 사라졌단 말이지.”

“……스스로를 의심하시는 것입니까?”

“뭐라?”

“어르신의 기억 속에 없다 하여 스스로 행한 시술을 의심하시는 것이냐 물었습니다.”

이 녀석이!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에 채천수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그런 것 알 리 없다는 듯 라온이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말을 덧붙였다.

“조선 최고의 엄공이라고 하신 말씀은 모두 거짓이었군요.”

“뭐야? 이놈이! 감히 누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냐?”

“거짓말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스스로가 행한 시술을 믿지 못하여 시술한 자리를 다시 보시겠다고 이리 잠실에까지 들어오셨으니. 제 말이 틀렸습니까?”

“흠흠…….”

입이 열 개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어찌 제게 이러십니까?”

당돌히 노인을 몰아붙이던 라온이 돌연 눈가를 붉혔다. 뭔가 격정이 치받치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찌하여 제게 다시 수치를 주시려 하시는 것입니까?”

“수치?”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저는 사내도 무엇도 아닌 몸이 되었습니다. 이런 몸뚱이를 다시 누군가에게 보여야 하는 것이 수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채천수가 숙연해졌다.

그 마음, 알고도 남음이다.

그 역시 거세당한 사내라. 중요한 일부를 잃어버린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수치심과 이유모를 서러움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네놈에게 수치를 주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다만?”

“술을 많이 먹어서인지, 네놈의 아랫도리를 도려낸 기억이 없어서…….”

“그것을 도려내지 않았다면 이 흥건한 핏물은 어찌 설명하시렵니까?”

라온이 제 이불을 확 젖혔다.

채천수가 촛불을 라온의 아랫도리로 내렸다.

아이의 말대로 검붉은 핏물로 흥건하게 젖은 아랫도리가 눈에 들어왔다. 젖은 양으로 봐서는 제법 많은 피를 흘린 듯했고, 이리 많은 피를 흘렸다는 것은 시술을 한 것이 틀림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도 정히 확인을 하셔야 한다면…….”

라온이 주섬주섬 허리춤을 끄르기 시작했다.

“되었다.”

“하지만…….”

“내가 손을 댄 것이 틀림없다면, 더는 볼 필요도 없지.”

시술을 한 것이 틀림없다면 더 이상 확인할 것은 없었다.

엄공 채천수의 손을 거쳐 간 녀석치고 온전히 사내 노릇하는 자는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다.

겸연쩍은 얼굴로 몸을 돌리는 그의 뒤통수에 라온의 목소리가 꽂혔다.

“이젠 9할이겠지요?”

“뭐가?”

문을 향해 걷던 채천수가 돌아보았다.

“어르신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거세하여 살 확률은 절반. 죽거나 혹은 살거나. 그나마 어르신 손에 시술을 받아 절반의 확률을 얻을 수 있다질 않았습니까.”

“그리 말하긴 했지. 허나 네놈은…….”

“네. 이미 나이가 있어 살아남을 확률이 훨씬 더 적다 하셨지요.”

“…….”

“그런데 어르신 덕에 그 확률이 더 줄어들었습니다. 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길, 시술이 끝나면 저는 꼼짝없이 이 잠실 안에서 백일 낮 백일 밤을 보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행여 바람이라도 잠실 안으로 새어 들어온다면, 하여 고뿔이라도 걸리기라도 한다면, 혹여 상처가 덧나기라도 한다면, 덧난 상처에 염증이라도 생긴다면, 저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고 하셨지요. 제가 죽을 가능성은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

“제가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은 무려 8할. 죽을 수도 있을까 묻는 제게 살 수도 있느냐 물어야 옳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어르신과 함께 들어온 찬바람에 제가 눈을 떴으니. 이제 죽을 확률은 9할 이상으로 늘어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채천수를 바라보는 라온의 눈에 처연함이 어룽 비쳤다.

차라리 원망이라도 하면 처지에 어울리지 않는 눈빛이라며 괘씸히 여기겠건만. 처연함이라니.

늙은이의 못난 의심으로 어린 아이를 괴롭힌 것만 같았다. 게다가 시술이 끝난 잠실에는 누구도 들여서는 안 된다는 금기사항을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어겼으니.

그렇다고 차마 미안하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녀석 성깔하고는. 알았다. 알았어.”

죄책감과 미안함에 채천수는 시술에 대한 의구심을 저 멀리로 치워버렸다.

***

쾅!

밀실의 문이 닫혔다. 낯설지 않은 어둠과 침묵이 방을 가득 채웠다.

라온은 눈을 깜빡거리며 어둠을 응시했다.

참으로 간사한 것이 사람의 몸이라. 아주 잠깐, 노인이 들고 있던 촛불의 밝음에 익숙해진 시야가 다시 어둠과 친해지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깜빡, 깜빡.

그렇게 한참이나 어둔 실내를 바라보던 라온은 부스스 자리를 떨치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덮고 있던 이불을 옆으로 밀쳐냈다.

어둠 속에서도 아랫도리에 묻어 있는 검붉은 핏물은 선명했다.

움찔, 몸을 움직이자 아릿한 고통이 느껴진다.

왈칵 미간을 찡그리던 라온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무언가를 찾는 듯한 시선.

그러나 어둠으로 채워진 방에는 라온이 찾는 그것은 없었다.

낮게 한숨을 내쉬던 라온은 천천히 저고리 고름을 풀었다.

솜을 누벼 만든 허름한 겉저고리를 벗자 명주 속저고리가 드러났다.

속저고리라니.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궁핍한 사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사치스러운 차림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곳에는 그것을 의아하게 여길 시선은 없었다.

라온은 좀 더 분주히 손을 놀렸다.

명주 속저고리를 벗자 어깨가 드러났다. 선이 둥근 작은 어깨를 와스스 떠는 와중에도 라온은 손짓을 멈추지 않았다.

서둘러 가슴 어림을 매만지는 손끝에 작은 매듭이 쥐어졌다.

특별한 무언가를 봉인한 작은 나비매듭.

경계하듯 어둠 속을 휘 에둘러 둘러보던 라온은 그 작은 매듭의 끝을 잡아 당겼다.

고요한 어둠 사이로 툭툭, 무명천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수줍게 형체를 드러낸 두 개의 가슴.

그것은 분명…… 여인의 가슴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봉긋하게 솟은 둔덕만은 눈이 시리도록 하얬다.

라온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어둠 속에 처연히 드러난 하얀 몸.

작고 여린 그것은 분명 열일곱 어린 사내가 아니라, 여물기 시작한 여인의 몸이었다.

어찌보면 봄꽃처럼 수줍고, 또 어찌보면 여름꽃처럼 화사해 차라리 아련한 열일곱의 여인.

그것이 라온의 진짜 모습이었다.

하지만…….

눈이 아리도록 하얀 젖무덤을 바라보던 라온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살아가지 않고 살아가리니.”

라온은 바닥에 흘러내린 가슴 싸개의 절반을 싹뚝 잘라냈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핏물이 흥건한 허벅지를 칭칭 동여맸다.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스스로 허벅지에 상처를 냈던 것이다.

처음, 자신이 환관이 되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황당해서 말도 안 나왔다.

귀인을 찾아가 따질까 생각도 하였다.

그러나 이내 단념했다.

귀인이 융통해준 돈은 무려 사백 냥이었다.

단희의 목숨을 구할 귀한 돈이었다. 다시 구하기 힘든 큰돈이었다.

하여, 엄공 채천수를 속이기로 결심하였다.

두려웠다. 혹여 발각이 된다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하지만 어머니와 단희.

라온에겐 아직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라온은 어떻게든 환관이 될 방도를 찾아야 했다.

다행히 엄공은 술을 지독하게 좋아하는 술고래였다. 두려움을 핑계 삼아 엄공에게 술 한 잔을 청했다. 이야기를 이어가며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세 잔이 되고…….

결국, 엄공은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인사불성이 된 채천수를 한쪽에 눕혀두고 라온은 허벅지를 베어 피를 냈다. 그런 다음 잠실로 들어와 누워 자는 척했다. 술에서 깬 채천수가 시술을 끝낸 것이라 착각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허벅지의 상처가 제법 깊었다. 하반신이 피로 흥건하게 젖었다.

덕분에 채천수는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다.

그러나 환희의 기쁨도 잠시, 현기증이 몰려왔다.

상처가 너무 깊었던 모양이다. 하반신을 적신 피가 어느새 침상마저 붉게 물들였다.

라온은 잘라낸 가슴싸개로 허벅지의 상처를 지혈했다.

울컥울컥 솟던 핏물이 조금씩 진정이 되었다.

휴, 한숨을 토해낸 라온은 침상 한끝에 허물처럼 싸여 있는 가슴 싸개를 잡쥐었다.

버려진 실타래처럼 길게 늘어진 천 쪼가리가 어쩐지 서글펐다.

이 천 조각 안에 봉인되어야 할 젖가슴은 더더욱 가여웠다.

언제부터 남장을 하며 살아왔는지 정확한 기억이 없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기억이 생각나는 그 어느 순간부터 이미 그녀는 남장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께선 그리 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고 하셨다. 무슨 연유인지 물어보았지만 단 한 번도 소상히 말씀해 주지 않으셨다.

그저 어미의 소원이니 그리 살아달라고만 하였다. 하여, 사내처럼 자라왔다.

어머니와 단희를 지키는 울타리가 되어 살았다.

언젠가는 여인의 모습으로 되돌아 갈 것을 기대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되돌아가기엔 너무 먼 길을 온 것 같다.

어쩌면 영원히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슬픈 예감…….

그렇다 하더라도 울지는 말아야지. 운다 하여 달라질 것 없으니, 웃으며 가야지. 씩씩하게 살아내야지.

라온은 가슴싸개로 봉긋한 가슴을 다시 납작하게 짓눌렀다.

향긋한 여인의 향내를 지워버리기라도 하듯, 솟구치는 계집의 본성일랑은 철저히 숨기기라도 하려는 듯, 라온은 힘껏 가슴싸개의 끝을 잡아당겼다.

방금 전 보였던 해사한 여인의 모습은 거짓말이라도 되는 듯, 순식간에 여인의 향내와 표정을 말끔하게 도려낸 그녀는 다시 궁핍한 열일곱 살, 어린 사내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살아가지 않고…… 살아가리니.”

문득 물기로 흐려진 눈가를 손등으로 쓱쓱 문질러 닦은 라온은 주문(呪文)처럼 작은 입소리를 읊조렸다. 그리고는 시무룩해진 입술을 끌어당겨 애써 웃었다.

즐겁게 살라는 이름답게 즐겁게 살아야지.

그런데 어찌 이리 서글픈 것인지 모르겠다.

어찌하여 마음 한 자락이 아릿한 것인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백일 낮, 백일 밤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두운 잠실 속에서, 날짜 세기를 포기할 때쯤…….

너무도 더딘 시간의 흐름에 지쳐 무감각해질 때쯤…….

삐이이걱.

내내 닫혀 있던 밀실의 문이 드디어 열렸다.

밖으로 나온 라온의 머리 위로 황금빛 태양이 쏟아져 내렸다.

계절은 어느덧 여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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